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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일자 오피니언면에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가 쓴 시론 '민족주의의 재인식'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2006년 봄, 민족이라는 화두(話頭)가 다시 뜨겁게 달구어졌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출간이 새로운 시각의 돌파구였다면, 독도를 둘러싼 갈등은 민족 문제가 안고 있는 해묵은 면모를 드러냈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재인식’을 읽은 독자들의 69%가 그 책을 시대에 맞는 새로운 역사적 평가로 인정했다. 이것은 국민 다수가 이제껏 배워온 민족주의 역사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독도 문제는 민족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행사하는 막강한 대중 동원력을 다시금 확인해 주었다.
국민묶는힘 막강하지만 ‘민족’도 하나의 이념일뿐
우리는 교육이나 개천절 같은 기념일을 통해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해 부단히 훈련받고 자란다. 우리 교육에서 민족은 원초적 개념으로, 민족주의는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 본능적으로 갖게 되는 충동으로 둔갑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민족은 한 인간이 태어나 접하게 되는 범위를 한참 넘어선 거대 개념이다. 그래서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을 ‘상상된 공동체’라고 표현했다. 민족주의도 내 가족과 고향에 대한 자연스런 애정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기에, 본질적으로 외부로부터 주입되고 습득되어야 하는 이념일 뿐이다.
민족 개념의 역사가 짧다는 사실은 긴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해, 조선시대처럼 인구의 상당수가 노비인 사회에 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양반과 상민, 노비는 서로를 ‘우리’라는 연대의식 속에서 인식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은 갑오개혁 후 봉건적 신분질서가 무너진 후에나 명목적으로 나타났고, 실제로는 아마도 3·1운동을 계기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민족주의 사학은 이런 사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민족주의가 맹위를 떨쳐온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식민지 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분단이다. 첫 번째는 이제 대체로 극복된 것 같다. 일본은 여전히 꼭 막힌 답답한 이웃이지만, 우리 젊은이들은 일본에 꿀릴 것이 없다고 느끼며 그들에 대한 적대감도 그리 크지 않다. 문제는 아직도 한을 풀지 못한 구세대와 정치권이 그 정서를 끄집어내 악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원인인 분단은 민족통일을 지고(至高)의 목표로 바라보는 국민정서가 퍼져 있는 한, 풀기가 어려운 문제다. 도대체 인권과 자유 같은 인류보편적 가치들이 민족보다 낮게 평가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일단 민족통일이 중요하니까 다른 것은 덮어두자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허구적 이념에 매몰되어 진실된 가치를 외면하는 비극적 현실일 뿐이다.
인권·자유문제 덮을만큼 배타적 가치일 수는 없어
민족주의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세계가 여전히 국민국가 체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 말은 맞지만 그 세력은 많이 쇠퇴했고 쇠퇴하고 있다. 민족이 정체성의 범주로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도 인정된다. 그러나 그것이 배타적일 필요는 없다. “정체성은 모자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한번에 하나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다양한 정체성 가운데서 민족 정체성은 유일하지도, 압도적이지도 않다. 국가는 시민들에게 하나의 정체성만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다양한 정체성을 법적·제도적으로 보호하는 기능을 떠맡아야 한다.
민족이 보유하고 있는 문화가 본질적이며 원형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시대착오적이다. 민족도, 문화도 항상 변화하며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사회에 이미 뚜렷한 존재로 부각된 ‘외국 출신 한국인’들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동화(同化)시키려고만 할 게 아니라 그들의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여 새로운 국민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에도 마음을 열어야 한다.
21세기 우리의 전략은 다양성과 포용이어야 한다. 지켜내야 할 인간의 가치까지 부정하는 배타적 민족주의보다는 ‘서로 다른 우리’를 포용하고 사랑하는 애국주의가 올바른 길일 것이다. 우리는 이제 ‘피로 뭉친 민족’보다는 ‘평등한 시민들의 공동체’로서의 민족을 키워가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더 많이 태어날 ‘하인스 워드들’은 한국인임을 진정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