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5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양상훈 정치부장이 쓴 칼럼 '요슈카 피셔가 버린 운동화'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최근 은퇴한 독일의 유명 정치인 요슈카 피셔를 보면 우리 여권(與圈) 정치인들이 생각난다.

    피셔는 유럽의 ‘386’이라 할 ‘68 세대’다. 70년대 초 독일의 좌파 운동권들은 재개발로 비어 있는 집에 들어가 사는 ‘빈집 점거운동’을 시작했다. 쫓아내려는 경찰과 충돌이 벌어지자, 피셔는 전투부대를 만들어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시켰다. 우리 운동권에서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운동권 여러 명이 지금 여권 정치인이 돼 있다.

    피셔의 전투부대는 경찰에 무차별 화염병 세례를 퍼부었다. 피셔는 그 때문에 구속도 됐다. 우리 화염병 세대도 현재 여권 곳곳에 포진해 있다. 피셔는 경찰을 게슈타포라고 부르면서 거리에 쓰러진 경찰관에게 발길질을 했다. 이 폭력은 그의 어두운 과거다. 알려진 대로 유시민 장관도 비슷한 과거를 갖고 있다.

    피셔는 언론을 중시하고 잘 이용하면서도 곧잘 “보수 극렬 언론”이란 표현을 쓰면서 언론을 비난했다. 현 여권 핵심들의 행태와 흡사한 면이 있다. 그는 공백기에 조그만 사업을 했지만 적자만 봤다. 노무현 대통령의 장수천 사업을 떠올리게 만드는 일이다.

    68세대 피셔는 1968년 학생운동 이후 15년 만에 녹색당 의원으로 독일 연방 의회에 진출했다. 그때 피셔가 35세였다. 우리나라 여권 386들의 국회 진출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당시 녹색당 의원들은 의회 첫 등원에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나타나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그 20년 후 우리 국회에서 유 장관이 똑같은 행동을 했다.

    피셔는 남을 야유하고 조롱하는 명수였다. 그는 의회 연단에서 보수 정객을 향해 “미쳤다”고 했다. 분노한 다른 의원들이 항의하자 “입고 계신 정장에 어울리는 행동을 해 달라”고 했다. “허락하신다면”이라고 요청한 다음, 의장을 “개자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리 여권 주요 인사들의 폭언과 조롱·조소도 내부에서조차 문제가 됐다. 피셔가 의회 연설에서 “이제는 지배층도 좀 고생을 해야 할 때”라고 한 것은 마치 우리 여권 최고위층이 방금 한 말 같다.

    피셔는 상당 기간 당 내 왕따였다. 녹색당이 극단적인 노선 투쟁으로 양분되고, 피셔가 그중 소수파였다는 사실도 우리나라 여권의 지금 사정과 흡사하다. 피셔가 갑작스러운 독일 통일은 위험하다고 말하면서 동독이 붕괴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도 우리 여권에서 북한과 관련해 자주 들리는 얘기와 같다. 녹색당이 사민당과 적·녹(赤·綠)연정으로 정권을 잡았을 때, 피셔가 동료에게 “꿈인지 생시인지 꼬집어 보자”고 한 것까지 우리 2002년 대선 직후 노 당선자와 문희상 비서실장 내정자가 나눴던 얘기와 똑같다. 대학을 다니지 않은 피셔가 학구열과 토론으로 이를 극복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독일 기자가 쓴 ‘신화를 쓰는 마라토너, 요슈카 피셔’를 읽으면, 한때의 피셔는 왠지 노 대통령과 유 장관을 합쳐놓은 것 같은 인물로 느껴진다. 그 ‘끼’는 정말 닮았다.

    하지만 피셔는 여러 사건을 겪으며 바뀌었다. 구속됐다 증거부족으로 풀려나면서 법을 인정하게 됐고, 결국 폭력을 버렸다. 독일 한 주(州)의 환경부장관을 맡았다가 헤매면서 국정에 겸손해졌다. 다음에 같은 자리에 다시 올랐을 때 그는 성공했다. 나중에 피셔는 ‘준비 없는 집권’에 대한 질문을 받고 “높은 다이빙대에서 물 없는 수영장으로 곤두박질하는 건데, 그런 정치 실험은 장의사에서 끝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바뀐 피셔는 그후 7년간 독일 외상(外相)을 맡아 활약하면서 독일군의 해외 파병을 결정했다. 소속 녹색당의 반대를 무릅쓴 결단이었다. 이제 그는 독일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정치인 중 한 사람이다.

    피셔가 주 환경장관 취임 선서 때 신었던 운동화는 지금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피셔는 그 후 한 번도 운동화를 신지 않았다. 요즘 변신 중이라는 유시민 장관도 피셔가 버린 운동화를 한번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