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최정호 객원대기자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앞장을 서지는 못했으나 나도 나름대로 진보적인 입장을 지지하며 살아 왔다. 행동의 차원은 아니더라도 의식의 차원에서 또는 태도의 차원에서라도 진보의 편에 서려 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진보의 입장을 지지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좌절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첫 시련은 6·25전쟁이었다. 일제 35년의 침략 수탈 끝에 전후 세계의 빈곤과 혼란 속에 내던져진 해방 조국의 현실은 이 땅의 많은 젊은이에게 성급한 현실 부정의 파토스를 안겨 주었다. 눈에 뵈는 남쪽의 처참한 일상의 삶은 눈에 뵈지 않는 북녘을 동경하게 했고 미화시켰다. 인민군의 남침으로 북의 체제가 일상 현실로 남하해 오자 비인간적인 ‘사회주의 레알리즘’만 현전(現前)하고 ‘혁명의 로맨티시즘’은 무산해 버렸다. 전란 중에 읽은 앙드레 지드의 ‘소비에트 기행’이나 빅토르 크라브첸코의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 등은 그때까지 진보의 동의어로 여겼던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6·25전쟁 휴전 후 열흘도 되기 전에 자행된 남로당 간부에 대한 김일성의 스탈린식 피의 숙청은 북에 대한 모든 기대를 불식해 버렸다. 나는 그때부터 대한민국을 마음속에서 ‘내 나라’로 받아들였다. 

    무리한 3선 개헌 후 독재의 길을 걷던 이승만 대통령의 한국을 그렇다고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나는 1950년대의 이 대통령 통치에 언론인의 일상적인 실천을 통해 저항함으로써 내가 생각하는 당시의 진보적 입장을 챙겼다. 당시의 ‘진보’란 ‘자유’와 동의어였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자유주의가 양립할 수 있는 것일까. 양자는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난제(難題)에 시름하던 1960년대 초 독일에서 빌리 브란트의 독일사회민주당을 만난 것은 하나의 복음이었다.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를 통해서 완성되고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에 의해서만 실현된다는 서유럽의 사민주의, 스탈린의 베를린 봉쇄와 흐루시초프의 베를린 장벽에 맞서 자유세계의 최전선에서 소비에트 체제에 저항한 서독의 사민당, 평생을 ‘린크스 운트 프라이(좌익과 자유)!’를 모토로 살아온 빌리 브란트…. 요컨대 세상에는 소비에트 체제와 싸운 좌익, 공산주의와 싸운 진보 세력이 실재한다는 것을 목격한 것은 유럽생활의 소중한 체험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진보는 단순히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사회주의 운동에 멈추지 않는다. 늦어도 1970년대의 서유럽에서는 과학기술사회의 모순도 극복하려는 생태주의 운동이 새로운 진보로 대두했다. 지구사회의 극히 일부 선진국이 누리는 오늘의 복지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생태학적 자연환경의 파괴는 불가피하다. 이 때문에 지구와 인류의 생존은 치명적인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미래의 생명 생존을 위한 전략은 무엇인가. 결국 선진 사회의 자원소비 증가를 대담하게 억제하고 그를 위해 복지생활을 일부 단념하는 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자각에서 탄생한 새로운 진보정당이 독일 녹색당이다. 그들이 연방의회에 진출하자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넥타이 정장 대신 스웨터 바람으로 등원한 것은 의회 활동에서도 소비 절약의 대안적 삶을 연장 실천하려 한 것이었다. 

    평생을 진보의 입장을 지지하며 살아온 내가 우리나라의 진보엔 따라가지 못하는 까닭은 자명하다. 우리에겐 공산주의와 싸운 진보가 없기 때문이다. 남쪽의 독재, 느슨한 시한부 독재엔 저항해도 북쪽의 철통같은 세습 독재에 대해선 어떤 저항도 하지 않은 진보를 나는 따라갈 수가 없다. 

    한국의 환경운동을 추진하는 인사나 모임에 대해선 나는 언제나 경의를 표하고 마음속에서 지원하고 있다. 다만 겉으로 나서지 않는 까닭은 대안적 삶을 실천할 용기는 없이 입으로만 떠드는 위선자는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어느 진보 인사가 그 뒤에 보니 항상 넥타이 정장을 하고 나오면서도 하필 국회의원 선서를 할 때는 노타이 바람으로 등원해 말썽을 피우는 걸 봤다. 그러한 흉내 내기 식 짝퉁 진보, 짝퉁 용기엔 더더군다나 나는 따라갈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