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영역에 적용되는 법리를 정신적 자유인 ‘표현’에 적용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언론에 재갈을 물려 불리한 뉴스를 봉쇄하겠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 ▲ 김학성 강원대학교 로스쿨 명예교수·한국헌법학회 고문.
    ▲ 김학성 강원대학교 로스쿨 명예교수·한국헌법학회 고문.
    어떤 정치체제가 민주적인가 또는 전체(독재)적인가에 대한 판단은 표현의 자유의 ‘보장 여부와 정도’로 알 수 있다. 표현의 자유는 개인의 인격을 발현시켜주는 가장 유효하고도 적절한 수단이며, ‘자유민주체제’를 성립시키고 유지 시켜주는 불가결의 기본권이다. 의사의 자유로운 표명을 가능하게 하는 ‘열린 공간’이 확보되지 않고서는 민주정치를 기대할 수 없다.

    미국 수정헌법 제1조는 언론의 자유를 법률로 제한할 수 없는 기본권으로 강하게 보장하고 있다. 우리 헌법은 법률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언론의 자유의 ‘보장 정도’가 미국과 다르다. 우리 헌법은 명시적으로 ‘언론에 대한 검열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미국이 발전시킨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법리’를 수용하고 있다. ‘명백현존위험의 법리’란 ‘위험한 경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표현을 처벌해서는 안 되고 해악의 ‘명백 · 현존’을 요구함으로써 표현의 자유를 강하게 보호하는 법리를 말한다.  

    언론은 ‘시간과 싸우기’ 때문에 일정한 오보는 불가피하다. 물론 언론의 보도라도 개인의 인격이나 명예를 침해한 때에는 언론은 이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시간과 싸운다고 개인의 인격이나 명예 침해가 정당화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언론의 ‘작은 실수’나 ‘우발적 실수’가 있더라도 언론에 ‘숨 쉴 공간’을 허용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류의 것을 가짜뉴스로 치부하고 언론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하면 언론은 위축되며, 국민의 알 권리는 더불어 죽게 된다. 

    文정부, 언론 재갈 물려 불리한 뉴스 봉쇄하려 해

    ‘NY Times v. Sullivan’은 언론의 숨 쉴 공간을 인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몽고메리시 경찰국장 설리번이 1960년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가혹한 진압 방법’을 행사하였다고 보도한 신문사를 상대로 명예훼손을 다투었다. 신문은 ‘대학을 포위’하고 킹 목사를 ‘7번이나 체포’하였다고 했다. 하지만 병력은 ‘배치하였으나 포위’하지 않았고, 킹 목사는 ‘4회만 체포’되었다. 연방대법원은 보도 내용이 일부 사실과 다르지만, ‘사실의 오류’만으로 언론의 공직자 관련 기사에 대한 헌법보호가 박탈되지 않는다고 했다. 전통적인 명예훼손 이론을 헌법적 차원에서 재정립한 것으로 ‘언론의 자유 보장’ 역사의 기념비적 결정이다.  

    근자에 정부 여당은 언론에 징벌적 손해배상의 책임을 부과하겠다고 한다. 두말할 여지 없이 언론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이란 하도급 거래나 제조물책임과 같이 대기업이 우월적 지위를 악용하는 불공정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 14개의 법률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하고 있는데, 주로 국민의 생명과 신체에 피해를 주는 행위에 대한 ‘처벌 강화’에 적용하고 있다. 경제영역에 적용되는 법리를 정신적 자유인 ‘표현’에 적용하겠다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언론에 재갈을 물려 정부에 불리한 뉴스를 원천 봉쇄하겠다는 것으로밖에 달리 보이지 않는다. 헌법이 금지하는 검열에 대한, 우회적 검열이요 간접검열이다. 

    지금 이 나라의 표현의 자유는 바닥을 치고 있다. 우리는 외국 보도를 보고 국내 정세를 접한다. 얼마 전 북한의 순항미사일 발사도 탄도미사일 발사도 미국 언론의 보도로 알았다. 또 북한에 의해 사살된 해수부 공무원의 자녀가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하는 나라가 됐다.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 보유국의 모습이다. 대북 전단 발송을 금지하고 있는데 어려운 상황인 것은 이해하지만 전단 발송 자체를 불법으로 보고 처벌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의 본질에 대한 침해다. ‘5.18 왜곡금지법’, ‘4.3 왜곡금지법’ 역시 국가가 ‘왜곡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것으로 일종의 검열이다. 국민의 입까지 틀어막으려 한다. 

    국가가 가짜 뉴스 검열 권한 갖겠다는 것은 위험한 접근

    여당은 가짜뉴스를 방지하려는 것이라 하지만 국가가 ‘가짜’ 여부를 검열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겠다는 것으로 매우 위험한 접근이다. 세계적으로도 가짜뉴스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골칫거리다. 그러나 이럴수록 절제를 발휘해야 한다. 미국도 가짜뉴스가 난무하지만 인내하는 이유는 ‘거짓’이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진실’이 억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 정부는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는 기자 덕분에 책임감을 더 느꼈고 더 잘하자고 스스로를 다잡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결국 언론이 오바마를 더 나은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기자회견만이 국민과의 소통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문 대통령과 결이 다르다. ‘수시로, 직접, 국민 앞에서’ 보고하고 알리겠다는 약속은 선거용 멘트에 불과했다. 믿은 내가 바보였다. 

    여당은 징벌적 손해배상을 강행하려 한다. ‘입법독재’를 경험하다 보니, 한다면 하는 국면이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이다. 온 나라가 ‘민주당 나라’로 전락했다. 야당도 정부도 법원도 감사원도 검찰도 모두 없다. 대통령이 5년 차에 들어서니 대통령도 없어 보인다. 오로지 입법독재 뿐이다. 여차하면 법을 만들고, 고치고 자기 입맛대로 한다. 

    국민들은 지금 거여가 질식시킨 정치에 누군가가 숨 쉴 공간을 마련해 주길 기대하고 있다.‘코로나 전쟁’의 진정한 승리는 적은 환자 발생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집단면역을 신속히 끝내는 데 있듯이, 북한의 민주화 역시 ‘때려도, 욕해도, 무시해도’ 죽은 듯 지내야 오는 것이 아니라, 대북 전단을 통해 북한 내부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지만 정의는 늘 지각했다. 그래도 결국에는 온다. 깨어 있는 국민만이 정의의 지각을 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