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 응 표 (뉴욕에서)

    몇 년 전 ‘탈북민이 본 6.25전쟁의 실체’ 세미나에서 어느 탈북자가 이런 말을 해 우리의 관심을 끈 일이 있다.

    “북한 주민들이 6.25전쟁의 진실만 알아도 북한전체는 붕괴될 것”이라며 “북한에 들어가는 모든 정보수단에 6.25의 진실을 담아서 보내야한다.” 가슴을 때리는 말이다.

    탈북자의 이 말은 ‘6.25전쟁에 대한 바른 인식은 북한체제의 붕괴뿐 아니라, 국가안보의식의 전환은 물론 6.25에 대한 虛像(허상)으로 가득 차 있는 중, 고등학생들의 의식(어찌 중, 고등학생들뿐이겠는가)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다시 말해 6.25전쟁에 대한 진실만 바로 가르치면 역사교육이 바로 선다는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탈북자의 말은 곧 6.25전쟁의 진실을 바로 가르치면(바로 알리면) ‘대한민국이 바로 보인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 같다.

    수백만의 死傷者(사상자), 수십만의 전쟁미망인, 약 20만의 전쟁고아, 천만 이상의 이산가족을 내며 全(전)국토를 잿더미로 만든 6.25전쟁, 69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겐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맥아더 장군은 6.25전쟁으로 초토화된 한국을 보고 이런 전망을 내놓은 일이 있다. “백년쯤 지나야 이 나라 경제가 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두 걸출한 지도자를 잘 만난 덕에 오늘의 한국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고, 한국인의 삶의 질이 어떻게 달라졌으며, 국제적 위상은 또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국민의 양심으로 뒤돌아 볼 때, 우리가 정말 이렇게 막살아도 되는 가, 라는 自責(자책)을 안 할 수가 없다.

    6.25전쟁은, 1950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몇 년 뒤,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세계최고의 전략가들에게 저주받은 전쟁을 치르기에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최악의 장소를 물색해 보라고 한다면 만장일치로 한국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말한 그대로 20세기의 가장 처참한 전쟁 중 하나였다.

    월남 작가 바오 닌은 그의 소설 ‘전쟁의 슬픔’에서 “손실된 것, 잃은 것은 보상할 수 있고, 상처는 아물고 고통은 누그러든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슬픔은 나날이 깊어지고, 절대로 나아지지 않는다.”며 전쟁의 아픔을 호소했다. 바로 우리의 처지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6.25의 傷痕(상흔)을 그대로 안은 채 흘러온 69년, 아직도 6.25의 실상이 아닌 허상으로 꾸며진 역사교육이 교육현장을 지배하고 있는 슬픈 현실은 또 하나의 씻을 수 없는 민족적 비극이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장폴 사르트르는 “사람의 그림자가 드믄 굶주린 파리에는 전쟁은 끝났지만 평화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람의 그림자가 넘쳐흐르고 풍요가 넘쳐 다이어트를 고민하는 살찐 돼지가 되어버린 대한민국에도 아직 평화는 시작되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여기에는 물론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를 말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애치슨의 표현대로 세기적 비극인 저주받은 전쟁(6.25)을 치르고도 생각 없이 막 살아가는 우리의 책임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크 클라크 장군은 회고록 ‘다뉴브 강에서 압록강까지’에서 “역사는 한번 잘못 저지른 실수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법이 없다. 인과의 열매는 결국 씨앗을 뿌린 자가 거둬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다.”고 했다.

    그렇다. 북한이 6.25전쟁의 씨를 뿌린 제1범죄자라면, 역사교육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한 우리는 제2의 범죄자, 그 죄과가 이렇게 가혹할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우리의 경우는 잘못 저지른 실수가 아니라 北을 향한 계획된 범죄라는데 문제가 있다. 이 역사적 사실을 의식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명운이 갈린다.

    6.25전쟁이 아무리 국제냉전을 종식시킨 세계사적 의미를 지녔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6.25전쟁은 민족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영원히 아물지 않는 아픔을 안겨준 한편의 슬픈 드라마다. 그러면서도 영원히 기억해야할 민족의 敍事詩(서사시)다.

    그런데 오늘날 그런 고차원적 情緖(정서)는 간데 없고 그저 즐겁고 편하게 살자는 생물학적 욕망에만 취해 양심의 가책 없이 막가파식 삶을 사는 우리에게 하늘인들 도울 마음이 생기겠는가?

    ‘민족의 서사시를 기억 못 하는 민족은 언젠가는 반드시 망한다’는 역사의 교훈이 어쩐지 마음에 걸린다.

    6.25전쟁 69주년을 맞아 함석헌 선생(좌경화 인물로 보는 분들도 있지만)의 ‘국민각성의 글’을 다시 생각해 본다.

    함석헌 선생은 1958년 思想界(사상계) 8월호에 사회적 부조리와 정치적 부조리에 분노할 줄 모르는 국민을 향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며 죽어있는 국민의 정신을 향해 ‘깨어나라’고 했다.

    모든 역사적 현실은 자신이 택한 것이라며 우리의 근본결점 중에서 가장 심한 결점은 ‘생각의 가난’이라고 했다. 생각 없는 국민(생각하지 않는 국민)을 이렇게 힐책한 선생은 ‘국민이 깨어있어야 나라가 산다’고 했다.

    선생이 ‘精神(정신)’이라는 시대적 가치를 부르짖으며 ‘국민아, 깨어나라’고 절규하던 1950년대는 6.25전쟁으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최악의 빈곤과 갈등을 겪던 혼돈의 시대였다.

    하지만 국민소득 3만 불 시대에서 자유와 富(부)를 만끽하며 세계가 부러워하는 삶을 누리면서도 정신은 완전히 썩어 있는 오늘에 비해, 그래도 정신은 순수했고, 진실이 무엇이며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아는 양심의 시대였다.

    살아있는 정신, 정신의 위대함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바로 레이건 대통령이다. “나는 결코 위대한 사람이 아니고 단지 위대한 생각에 충실한 사람이다.” 레이건의 말이다.

    그렇다. 그 ‘위대한 생각’에 충실한 결과가 세계 공산주의의 종말을 가져오지 않았는가. 그에 따라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끈질기게 이어오던 자본주의(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싸움에서 드디어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며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리고 큰 시련은 큰 교훈을 가져다준다고 했는데, 우리와는 상관없는 옛 말일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20세기 戰史(전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중 하나인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도 懲毖(징비=어제의 잘못 또는 오류를 깨닫고 미래에 대비하다)하지 못하는 민족, 역사의 법정에서 어떤 가혹한 심판이 내려질지, 두려움 속에 조국의 내일을 그려본다.

    ‘지옥에 이르는 길은 善意(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서양속담이 있다. 우리는 지금 지옥의 문턱에 서 있으면서도 천국에 살고 있다는 錯視現狀(착시현상)에 빠져 있다.

    다시 말해 저들의 화려한 마차가 지옥행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 속에서 포커놀이를 즐기는 사이 마차는 이미 평양에 도착하고 있다는 말이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저들의 굿판에 놀아나는 사이 ‘청와대가 주석궁’으로 바뀌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 6.25 69주년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역사적 교훈이 무엇인가를 국민의 양심으로 되새겨 보아야 한다.

    “슈거 대디(sugar daddy-원조교제 아저씨)중국은 김정일에게 주는 용돈을 끊어라”며 중국의 파렴치한 행태를 비판한 윌리엄 페섹(Pesek)은 “중국은 이제 김정일의 도발 감싸기를 중단하고 당근 대신 채찍을 들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앞선 경제력에 걸맞은 외교적 노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중국은 과연 글로벌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될 것인가”라는 힐책 성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윌리엄 페섹의 칼럼요지는 몸집에 걸 맞는 책임과 의무감, 다시 말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높은 도덕적 의무감이 없으면 글로벌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식으로는 仁義(인의)와 도덕성과 책임의식의 뒷받침 없이는 결코 세계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뜻이고, 우리식으로는 ‘되놈’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고는 문명국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같은 논리로 6.25 이후 69년이 지나오는 동안 그처럼 비참했던 잿더미를 딛고 세계경제대국으로 우뚝 선 대한민국의 오늘의 실태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중국을 파렴치한 ‘원조교제 아저씨’에 비유하며 도덕적 양심이 없다고 경고한 페섹, 6.25후 천신만고 끝에 잿더미에서 경제대국을 이룬 대한민국이 온통 대북 퍼주기와 평양행 길 닦기, 그리고 동물적 삶에 미쳐 돌아가는 현상을 보고 어떤 경고성 메시지를 던질 것인가를 신중히 고민해야 한다.

    6.25 이후 최악의 국가안보위기 상황인데도 정치권은 금배지 싸움에 나라기둥 썩는 줄 모르고, 붉은 완장 패거리는 경제 죽이지 못해 안달이고, 역사 죽이기와 미래 죽이기에 목숨을 건 상태에서, 온통 붉은 벽에 갇혀있으면서도 태평성세를 누리는 생각 없는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것일까?

    “국가의 힘은 국방력과 경제력 등 물리적 요소에 원칙, 신뢰, 정당성, 그리고 도덕적 요소를 갖추는 데서 나온다”는 ‘콜로서스’의 저자 니알 퍼거슨의 말대로라면, 우리의 현실은 절망적이다. 우리국민 정신생활 어디에서 그런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나.

    어디 니알 퍼커슨 뿐인가. “민주주의는 국민도덕이 붕괴한 뒤에는 성립할 수 없다”고 경고한 안드레 모로아의 말을 떠올려 봐도 분에 넘치는 자유와 풍요와 방탕 속에 썩어있는 국민의 양심으로는 희망을 다시 불러올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 것이 생각난다. “현실이 슬픈 그림으로 다가올 때면, 그 현실을 보지 말고 멋진 미래를 꿈꾸라. 그리고 그 꿈이 이루질 때까지 앞만 보고 달려가라.” 그러면서 “인생 최대의 난관 뒤에는 인생 최대의 성공이 숨어 있다.”

    이제 6.25 69주년을 맞으면서 국가를 위해 우리가 지켜야할 절대가치, 국가안보와 애국심을 생각해 본다. ‘정치는 국가에 대한 사랑’이라고 한 도스토엪스키의 말을 되새기며 선배들이 이루고 지켜온 대한민국의 절대가치를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내일의 멋진 그림을 그려보자.

    선배들이 흘린 피와 눈물과 땀이 자유와 평화, 그리고 풍요와 축복의 비가 되어 우리를 적시고 있다고 생각의 전환을 꾀해보자. 어제의 슬픈 그림은 반드시 미래의 멋진 그림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신념을 가져보자. 그러면 반드시 우리정신은 살아날 것이다.

    그러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 거짓말 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세상’은 ‘진실이 거짓을 이기는 희망의 세계로 바뀌지 않겠는가. (2019. 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