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회 이승만 포럼 학술회의 발표문(2019.6.18)
  • 이승만의 『청일전기』 번역ㆍ간행과 자주독립론1)

    오 영 섭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연구교수)



                           목 차

              Ⅰ. 머리말
              Ⅱ. 『청일전기』의 번역ㆍ간행 경위
              Ⅲ. 『청일전기』의 체재와 내용
              Ⅳ. 『청일전기』의 번역 목적과 인민계몽 방안
              Ⅴ. 맺음말
     



    Ⅰ. 머리말

      동서양의 이름난 인물들의 사례에서 흔히 보듯이 중년 이전에 이승만(1875-1965)은 몇 차례 인생의 고비와 전기를 맞았다. 중년 이전 이승만의 인생행로를 결정지은 중요 사건들을 꼽아보면, 첫째, 청일전쟁 발발 후 과거공부를 접고 배재학당에 들어가 영어와 신학문을 배우며 서양인들과 교제한 경험이다. 둘째, 독립협회의 반외세ㆍ반체제 운동에 가담하여 청년명사로 이름을 날린 일이다. 셋째, 한성감옥서에서 활발한 문필활동을 통해 독립사상과 기독교 민족주의를 정립한 일이다. 넷째, 고종의 밀사로 도미하여 미국의 대통령과 국무장관을 상대로 국권수호 외교활동을 벌이고 미국 동부의 명문 대학에서 근대학문을 이수한 경험이다. 다섯째, 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의 학생부 학감을 지내며 국내 청소년들의 역할모델로 부상함과 동시에 국내 기독교세력과 인연을 맺은 일이다. 여섯째, 1912년 세계감리교대표회의 참석차 도미했다가 이듬해 평생 자신의 독립운동 근거지가 되어준 하와이에 둥지를 틀었던 일이다. 이승만은 이러한 인생의 고비와 전기를 적절히 활용ㆍ극복해 나가면서 40대 이전에 이미 한국독립운동계의 지도급 인사로 부상하고 있었다.
      중년기 이전 이승만의 인생 역정에서 가장 인상 깊고 의미 있는 시기는 단연 한성감옥서에서의 수감생활(1899.1-1904.8)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자신이 간략한 영문 자서전에서 ‘福堂監獄(Bok Dang prison)’이라고 표현한 한성감옥서에서 이승만은 ① 영어공부에 매달렸고, ② 개화자강 및 기독교 관계 서적들을 섭렵했으며, ③ 기독교로 개종하고 서양선교사들과 친분을 쌓았고, ④ 『제국신문』ㆍ『신학월보』 등에 수시로 논설을 기고하여 언론계몽활동을 펼쳤고, ⑤ 감옥서장과 서양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옥중에 학당과 도서관을 설치하여 평민 죄수를 상대로 계몽운동을 벌였고, ⑥ 투옥 중인 국사범(정치범)들을 상대로 기독교 전도활동을 펼쳤으며, ⑦ 민지 발달과 독립의식 고취에 기여하고자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였고, ⑧ 달빛이 교교한 야밤이면 한시를 지어 옥중의 답답함을 토로하였고, ⑨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독교로 국민통합을 이룩하고 국가의 문명부강과 자주독립을 달성하자고 하는 기독교민족주의를 정립하였다2) 이처럼 다채로운 감옥활동을 통하여 20대 후반의 이승만은 어느새 민족의 앞날을 걸머질 어엿한 민족운동가로 성장하고 나가고 있었다. 
      옥중에서 이승만은 인민들의 계몽과 학습 및 소일을 위해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고 번역하였다. 저서로는 F항의 중반까지만 마친 미완성의 한영사전인 The English-Korean Dictionary (『신영한사전』), 개화독립사상과 건국사상의 출발점인 主著 『독립정신』, 한시 모음집 『替役集』 등이 있다. 그리고 편찬서로는 한중 역대 명시구 모음집인 『摘珠採璧』, 초보자용 산수교과서인 『算術』 등이 있다. 이밖에도 번역서로는 청일전쟁 전후의 동아시아 국제관계사를 순한글로 번역한 『청일전기』, 한역 기독교 교리서 『主僕談道』를 번역한 『主僕問答』, 스윈턴(William Swinton)의 Outline of the World's History 의 내용을 순한문으로 발췌ㆍ번역한 『萬國史略』 등이 있다.3) 이중에서 저서인 『신영한사전』ㆍ『독립정신』과 번역서인 『청일전기』ㆍ『주복문답』ㆍ『만국사략』은 학설사적 내지 계몽적 가치가 높다. 
      5년 7개월간의 긴 투옥기간 중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이 할애된 번역활동은 이승만의 옥중 문필활동사에서 일정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승만이 당시 사회를 풍미한 수많은 개화자강서 및 신학서 가운데 위의 3권을 번역대상으로 골랐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그중에서 『중동전기』는 그 자신이 근대 한국의 운명을 결판지은 대사건이라고 판단한 청일전쟁 전후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사를 다룬 것이요, 『주복문답』은 한국 민족에게 근대화와 독립화의 원천이라고 판단한 기독교를 다룬 것이요, 『만국사략』은 전통학문을 벗어나 신학문을 수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기초적인 수준의 세계사를 다룬 것이다. 이를 보면 이승만은 한국의 쇠망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 동양과 세계의 변화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기독교 교리의 학습을 통한 의식개혁을 이룸으로써 문명부강하고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만드는데 도움을 주고자 이 책들을 번역대상으로 선정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번역서들이 다룬 주제나 사건 중에서 이승만의 사상전환과 외교독립론 정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뿐더러 시기상 그와 가장 먼저 인연을 맺은 것은 청일전쟁이다. 다시 말해 이승만이 위정척사계 보수유림에서 문명개화론을 수용한 청년명사로 거듭 태어나는데 직결된 사건은 청국과 일본 사이에 한국과 중국 동북지역을 무대로 벌인 청일전쟁이었다.4) 그렇게 때문에 이승만은 Outline of the World's History 을 순한문으로 번역하다가 이내 중단하고 청일전쟁이 조선의 독립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판단 하에 청일전쟁을 다룬 책을 우선적으로 번역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옥중에서 초기에 번역한 다른 책들의 원고는 분실한 상태에서도 청일전쟁의 원고만은 온전히 보관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청일전기』(원제:쳥일젼긔)5)에 대해서는 그간 전문적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독립정신』을 제외한 이승만의 다른 저서들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것처럼, 『청일전기』도 학자들의 관심권 밖에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청일전기』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주장에는 다소 부정확한 표현들과 소소한 오류들이 엿보인다.6) 이로 인해 『청일전기』가 알렌과 蔡爾康이 편집ㆍ저술한 『中東戰紀本末』과 이 책의 내용을 국한문으로 발췌ㆍ번역한 玄采의 『中東戰記』를 어느 정도나 참고한 책인가? 『청일전기』는 과연 이승만이 혼자서 번역한 것인가? 번역본 『청일전기』의 정확도나 학문적 가치는 어느 정도인가? 이승만이 『청일전기』의 여러 곳에서 자기주장을 피력해 놓았다는 말은 타당한 것인가? 『청일전기』의 궁극적 편찬의도는 무엇인가? 이승만의 지적 성장사와 대한제국기 사상사에서 『청일전기』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여러 의문점들이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의문점들을 염두에 두면서 논의를 전개하려 한다.  



  • ▲ 한성감옥 종신죄수 차림의 20대청년 이승만.ⓒ자료사진
    ▲ 한성감옥 종신죄수 차림의 20대청년 이승만.ⓒ자료사진
    Ⅱ. 『청일전기』의 번역ㆍ간행 경위

      이승만은 한국 근현대의 중요 인물들 중 문필활동을 가장 활발히 벌인 인물이다. 그가 남긴 중요 저서만 하더라도 『독립정신』,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미국의 영향 하에 성립된 중립론』), 『한국교회핍박』, Japan Inside Out (『일본내막기』) 등 4에 달한다. 이외에도 『청일전기』를 비롯한 몇 권의 번역서, 2권의 한시집과 자잘한 계몽용 도서들,7) 한말부터 해방 전까지 신문ㆍ잡지에 기고한 수 백 편의 논설, 『建國과 理想』ㆍ『李大統領訓話錄』ㆍ『大統領李承晩博士談話集』 등 대통령 재임 전과 재임 직접 작성한 담화ㆍ연설문, 한말부터 하야 전까지 국내외 요인ㆍ지인ㆍ친구 및 각국 정부와 국제회의에 보낸 수천 점의 公私 서한, 독립운동기와 건국활동기에 작성한 영문 연설문 등이 있다. 이는 이승만의 독립활동과 정치활동이 끊임없는 문서생산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다루는 『청일전기』의 번역과 간행 문제는 이승만의 평생에 걸친 문필활동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점하고 있을 뿐이다.   
      1898년 12월 25일 조선의 자주독립과 문명개화를 부르짖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고종과 그 측근들에 의해 강제 해체된 후 이승만은 박영효 지지세력과 연대하여 고종폐위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그는 친러수구세력의 탄압에 밀려 1899년 1월 9일 체포ㆍ투옥되었다. 곧이어 1월 30일 崔廷植ㆍ徐相大 등과 함께 全德基 목사와 周時經이 넣어준 권총을 가지고 탈옥을 감행하였다가 실패하여 재수감되고 말았다. 그는 경무청 감방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2월 1일 한성감옥서로 이감되어 10kg 정도 무게의 나무칼을 목에 차고 손발은 수갑과 족쇄에 묶인 상태에서 초초하게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이어 7월 11일 홍종우 주재 하의 평리원 재판에서 “從犯에 대한 형률”을 적용받아 곤장 1백대, 종신형의 선고를 받았다. 이날부터 이승만은 목과 팔다리를 묶었던 사슬을 벗고 석방을 기약할 수 없는 무기한 감옥생활에 들어갔다.8)
      한성감옥에 수감되기 직전부터 1900년 5월 2일(음4/4) 『청일전기』 번역에 착수할 때까지 이승만은 외부세력의 특별지원을 받았다. 우선, 미국공사 알렌(Horace N. Allen)은 미국 의료선교사 셔만(Harry C. Sherman)의 권고에 따라 1899년 1월 17일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이승만의 석방을 공식 요청한 적이 있었다. 대한제국황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알렌공사와 미국 선교사들의 비호와 지원은 옥중의 종신범 이승만에게 일정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다음, 이승만의 부인 음죽 박씨는 덕수궁 앞에서 “남편 대신 자신을 가둬달라”는 복합상소를 올렸는데, 이것도 이승만에 대한 동정 여론의 진작에 일정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9) 이런 지원활동이 주효한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승만은 1899년 12월 13일과 22일에 김창수(김구) 등 21명과 함께 연이어 감1등의 특사조치를 받아 형기가 10년으로 단축되었다.10)  
      이승만의 옥중생활은 1900년 2월 14일 金英善이 신임 감옥서장에 임명되면서부터 크게 변하였다. 전 통정대부, 3품 주임관 김영선 서장은 부임하자마자 “도적을 기르는 곳이다”는 악명을 듣고 있던 한성감옥의 옥정 전반에 대한 개선작업에 착수하였다. 이것은 갑오개혁의 일부 성과를 계승한 대한제국의 근대화정책과 “옥정을 개선하고 장기수를 석방하라”는 외국공사들의 요구가 맞물려 나타난 결과였다. 김영선은 죄수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보살펴 주는 한편, 휘하의 관원들과 하인들로 하여금 죄수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도록 하였다.11) 또한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죄수들에 대한 급식 여건을 개선하고, 가혹한 학대를 금지하고, 옥리들의 불법행위를 단속하고, 조명시설을 확충하였다. 이중 조명시설의 확충은 이승만의 번역활동과 직결된 것이었다. 

           감옥서의 죄수들에게 주는 밥은 半租半米요 국은 국물만 주고, 또 죄수를 학대함이 극심하고, 또 밤이면 불을 보지 못함에 비록 죄는 짓고 갇혔으나 더욱 견딜 수 없다고 呼冤이 낭자하였다. 그러다가 지금 김영선씨가 서장으로 들어온 후에 獄政을 밝히 살펴서 음식을 먹도록 하여 주고 죄수가 잘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전과 같이 형벌을 쓰지 않고 押牢들을 단속하여 불법행위를 금지하였다. 또 이전에는 長明燈을 규모 없이 세워서 죄수간에 불이 비추지 아니하던 것을 지금은 일제히 죄수간 창문 앞마다 세워서 죄수들이 광명을 보게 하였다. 이로 인해 김서장을 위하여 頌聲이 喧藉하더라.12)

      김영선은 옥정 전반을 개선하면서 이승만에게 특별대우를 베풀어 주었다. 당시 이승만은 고종 측근 한규설에게 누차 편지를 보내 자신이 한성감옥으로 이감되어 고생이 막심하다고 하소연하며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궁내부 특진관을 지내고 있던 한규설은 “신임 감옥서장 김영선은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며 공사석에서 그를 만날 때마다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는 곡진한 답변을 이승만에게 보내왔다.13) 그런데 한규설이 국사범 이승만에게 각별한 호의를 베푼 것은, 그가 독립협회운동에 가담한 인사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과 미국 선교사들이 嚴妃에게 이승만에 대한 선처를 부탁했을 것이라는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또한 엄비가 이승만이 논설을 기고하던 『제국신문』의 애독자였고, 이승만의 장모 이씨가 1879년에 엄비의 침모로 입궁하여 활동한 사실 등이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14) 하여튼 엄비의 심복으로 알려진 감옥서장 김영선과 간수장 이중진의 도움으로 이승만은 옥중에서 본격적으로 문필작업에 착수할 기회를 얻었다. 
      감옥서장 김영선은 이승만에게 지필묵 사용을 허가하고, 옥중에서 독서와 신문논설의 집필 및 저술 활동을 허가하였다. 이승만은 김영선이 자신의 문필활동을 허가한 것에 대해 “죽는 날까지 잊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감동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김영선은 이승만의 書役(집필작업)에 대해 일종의 보상금까지 지급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이승만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서역을 시작한 이후로 무릇 교육 등에 관계된 책 몇 질을 그동안 이미 번역을 완료하여 바야흐로 간행을 논의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각하께서 또한 수고에 보답하는 뜻에서 돈까지 주시어 부모를 봉양하는데 보태게 해주셨으니 이는 혜택을 보여주심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목이 많아서 남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도 각하께서 유독 지론을 고집하시어 계속 돌보아 주셨습니다. 실로 입이 백 개라도 감사함을 다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15)

      이승만은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번역활동을 도와주고 경제적 후원을 베풀어 준 김영선에게 깊은 감사를 표함과 동시에 옥중학당의 개설을 허가해 달라는 건의서를 올렸다. 그는 “학교를 세워 학문을 권장하는 훌륭한 뜻을 본받으십시오. 특별히 한 칸의 방을 허락하시어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을 골라서 한 곳에 모아 수업을 받게 하고, 아울러 등에 불을 켜는 것을 윤허해 주십시오. 필요한 火具는 모두 자력으로 준비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로써 한국 초유의 옥중학교와 옥중도서관이 설립되는 계기를 맞았다.16) 이에 대해 이승만이 관계하고 있던 『제국신문』은 감옥서장 김영선과 간수장 이중진ㆍ박진영의 도움과 이승만ㆍ양기탁 등의 교육으로 감옥서에 학당이 설치되어 잘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특필하기도 하였다.17)   
      감옥생활에서 여유를 찾아갈 무렵에 부임한 김영선 서장의 지원 하에 이승만은 번역작업에 돌입하였다. 그가 번역에 착수한 동기는 청국 상해에서 활동 중인 미국선교사 알렌과 청국 선비 蔡爾康이 다량의 책을 저술ㆍ번역ㆍ출판하여 청국인들을 계몽시킨 것을 매우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알렌과 채이강이 각국의 신문과 전보를 모아 『중동전기[본말]』이라는 책을 만들어 청국인을 위해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이런 사업을 하는 사람이 없어 인민이 세계형편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을 항상 한탄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옥중에서 한가한 시기를 만났으니 평생에 원하던 번역을 해보겠다”는 각오로 번역작업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김영선은 “동포들을 위하여 사업을 도모할진대 힘대로 찬조하기를 진실로 원하는 바다”며 적극 찬조의사를 나타냈다.18) 
      옥중에서 이승만은 최초의 번역사업으로서 영문 『만국사기』를 한문으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놓고 각축하는 국제정세 하에서 청일전쟁 관련 국제관계사를 국문으로 번역하여 국민들에게 대한제국의 독립문제를 환기시키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라고 판단하여 『만국사기』의 번역을 중단하고 『청일전기』의 번역에 몰입하였다. 그러나 번역대본으로 삼은 한문본 『중동전기본말』이 너무 호번하여 다 번역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중에서 중요한 것만을 뽑아 번역하려 하였으나 이것조차도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柳瑾과 玄采 두 사람이 『중동전기본말』을 초역하여 국한문 2권으로 번역ㆍ출판한 것을 보고 이것을 대본으로 삼아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여 작업을 마쳤다.19) 그리하여 1900년 5월 2일(음4.4)에 시작한 작업이 만 3달 만인 7월 31일(음7.6)에 끝났다.
      이승만은 『청일전기』를 번역할 때에 혼자 번역한 것이 아니라 ‘몇몇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번역작업 중에 적당한 집필 종이가 없어서 영어신문지에 번역문을 기록해두었다. 또 밤이면 초를 구해다가 석유통에 넣어서 간수들이 촛불을 보지 못하게 장치를 하고서 등서하였다. 작업 도중에 심한 고열로 고통을 겪었고, 이따금 이러저런 사건을 겪기도 했으며, 서양선교사들의 갑작스런 부탁으로 『주복문답』으로 보이는 기독교 서책을 도중에 갑자기 번역하느라 『청일전기』 번역작업이 뒤로 미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침침한 옥중에서 춥고 더운 것을 잊어버리고 심력을 허비하여” 번역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김영선의 후의와 “옆에서 書役하기에 조력한 힘이 적지 않은 몇몇 친구”의 도움 덕분이었다.20) 이 점에서 『청일전기』 번역작업은 이승만의 단독작업이라기보다는 한성감옥에 갇혀있던 문필에 능한 죄수들, 아마 국사범들의 공동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청일전기』를 번역할 때 이승만을 도운 ‘몇몇 친구’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다. 이들은 1900년 5월 번역사업 개시 이전에 한성감옥에 들어와 있던 인사들로서, 1898년 11월 이규완ㆍ황철ㆍ강성형 등을 중심으로 시도된 황제폐위 및 박영효 추대운동(일명 무술년정변) 가담자들이거나, 1899년 6월 고영근ㆍ임병길 등이 주도한 조병식ㆍ신기선 등 수구파 고관암살 미수사건 관련자들로 보인다. 다만 전자의 사건에 관련되었다가 체포ㆍ투옥된 鄭淳萬(1876-1911)이 이승만의 옥중 동지로서 번역사업에 가담하여 끝날 때까지 상당한 역할을 했던 사실은 확인되고 있다. 이승만에 의하면, 그는 “우리의 동지로 감옥서에 갇혀 있을 때에 틈틈이 서역을 힘써 도와 작업을 마친 것이다”고 하였다.21)
      영자신문지에 쓰인 『청일전기』 번역원고는 현채가 출판에 부치기 위해 가져갔다가 다시 좋은 종이에 옮겨 정서하여 놓았다. 이승만이 작성한 『청일전기』 출판견적서에 의하면, “한글역 中東戰記 인쇄비. 大鑄字 有線畫, 매질 2권, 5백질 388원, 1천질 491원 50전, 2천질 740원. 소주자 무선획, 5백질 236원, 1천질 312원, 2천질 5백원. 총합은 화폐의 값으로 정함”22)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청일전기』를 큰 활자와 작은 활자로 2본을 인쇄하되, 가능하면 각기 2천부까지 인쇄하여 널리 배포할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황에 따라 대소 활자로 각기 2천부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많은 책을 인쇄하여 판매하려 했던 것은, 이승만이 이 책의 판매대금으로 옥중 학당 운영과 도서관 설치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23)      
      『청일전기』는 이승만의 의도와 달리 번역 직후에 출판되지 못하고 1917년에 가서야 하와이에서 출판되었다. 번역 직후에 이승만은 “화로같은 감옥에 수감된 몸으로 더위를 무릅쓰고 땀을 뿌리면서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힘써 다행히 붓을 마쳤다”며 큰 기대를 갖고 동지와 군자들에게 편집ㆍ출판비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24) 『청일전기』가 고종정부가 꺼려하는 감옥안의 국사범들이 번역한 책이라는 사실, 현채의 『중동전기』가 이미 출판되어 널리 판매되고 있던 사실 때문에 출판비 마련이 여의치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이 미국에 있는 동안 『청일전기』 번역원고는 현채가 보관하고 있었다. 처음에 현채는 출판할 목적으로 『청일전기』 번역문을 좋은 종이에 등서하여 놓았으나 출판에 부치지는 못하였다. 을사늑약 이전에 이승만이 고종의 밀사로서 미국으로 건너가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에게 한국의 독립 보존을 요청한 외교청원활동을 벌이며 항일활동을 전개한 사실 때문에, 그리고 1907년 7월 고종퇴위 후부터 경술국치 직후까지 일제가 한국민의 반일의식과 독립사상을 부추기는 도서의 발간이나 판매를 금압하고 기왕에 민간에 나돌던 역사서나 계몽서까지 압수하여 불태우는 혹독한 사상탄압정책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청일전기』 출판은 더욱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1910년 10월 이승만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였다. 이떼 현채는 이승만에게 『청일전기』 원고를 내주며 해외에서 출판할 것을 부탁하였다.25) 이승만은 1913년 2월 하와이에 정착한 다음 번역원고를 하와이로 가져와서 여러 번 출판에 붙이고자 하였으나 그때마다 비용문제로 여의치 못하였다. 그러다가 1917년 3월에 『독립정신』 재판본을 발행하고 곧이어 8월에 “번역 원본의 본문을 대강 줄인” 다음, 자신이 관할하는 태평양잡지사에서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26) 
      『청일전기』가 출판된 1917년은 이승만이 심혈을 쏟아 발간하던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태평양잡지』가 재정곤란 문제로 휴간하고 있던 때이며,27) 무장투쟁론을 지지하는 박용만세력과 하와이 한인사회의 패권을 놓고 적대적인 경쟁을 벌이던 때였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이승만은 자신의 독립활동을 하와이 한인사회에 홍보하고 적대세력에 대해 사상적 우월성을 확보하고 자신의 지도자로서의 정치사회적 위상을 굳건히 하는 한편, 하와이 한인사회에 독립사상을 효과적으로 고취ㆍ선전하기 위해 『청일전기』의 출판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 ▲ 한성감옥 종신죄수 차림의 20대청년 이승만.ⓒ자료사진
    Ⅲ. 『청일전기』의 체재와 내용
     
      한성감옥에서 이승만은 다방면의 서책들을 독파해 나가는 가운데 특별히 역사ㆍ기독교 관계 서적과 신문ㆍ잡지 등을 탐독하였다. 이때 그가 읽은 것으로 확인되는 사서들은 『泰西新史攬要』28)ㆍ『萬國略史』29)ㆍ『萬國史略』30)ㆍ『朝鮮史記:顔處士國』31)ㆍ『중동전기』ㆍ『중동전기본말』 등이다. 이 책들은 영문원서 혹은 영문판을 한역한 한문본이거나 영문ㆍ일문ㆍ한문 등에 관한 책을 한문으로 중역한 것들이다. 이승만은 이 사서들 중에서 『중동전기본말』과 『중동전기』를 적절히 참고하여 순한글로 『청일전기』를 번역하였고, 아울러 『만국사략』도 번역하였다. 이를 보면 이승만은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기 이전에 동ㆍ서양 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청일전기』는 『중동전기본말』ㆍ『중동전기』와 구체적으로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먼저 『중동전기본말』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알렌(Young J. Allen, 林樂知, 1836-1907)32)과 청국의 독서인으로 문장에 능했던 채이강(1852-?)33)이 공동으로 번역ㆍ편집ㆍ저술하여 1897년에 상해 광학회에서 출판한 책이다. 이 책은 전편 8권, 속편 4권, 3편 4권, 부록(『文學興國策』) 2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분량이다. 이중 전편 8권이 청일전쟁 시기를, 속편 이하는 청일전쟁 이후 시기를 다루고 있다. 한국에서는 전편 8권과 속편 4권, 도합 12권이 유행하였다.34) 이 책은 청일전쟁 이후 중한 양국인의 현실인식의 변화, 국제정세관 정립, 변법개혁운동의 착수, 그리고 개화자강론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음, 『중동전기』(상하 2책, 황성신문사, 1899)는 개화기 한국의 사학자 현채(1856-1925)가 『중동전기본말』의 내용 가운데 한국에 직접 관계되는 부분을 골라 번역하여 국한문으로 출판한 책이다.35) 현채는 청일전쟁이 한국문제에서 비롯되었으며 전쟁의 원인과 전개과정 및 결과를 비롯한 동양 3국의 국제관계를 깊이 연구하여 한국의 ‘自修自强’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중동전기』를 편찬ㆍ번역하였다. 『중동전기』의 상권에는 『중동전기본말』 전편 제1-6권이, 하권에는 『중동전기본말』 전편 제7-8권과 속편 제1-3권의 내용이 초역되어 있다. 이 책은 한성감옥의 죄수들이 많이 읽었고, 이승만이 이를 참고하여 순한글본 『청일전기』를 펴냈을 정도로 대한제국기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은 『청일전기』 번역작업이 끝난 지 2주일 후인 1900년 8월 20일에 지은 서문에서 『청일전기』 번역대본의 문제를 밝혀놓았다. 그에 의하면, “(『청일전기』를 번역할 때에) 『중동전기본말』을 참고하다가 본문이 너무 잡다하여 모두 번역하기 곤란하였다. 그 때문에 『중동전기본말』의 내용 중에서 중요한 것만을 골라 번역하려 하였으나 그것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라서 결국 이를 중단하였다. 그 대신 『중동전기본말』을 초역하여 국한문으로 펴낸 『중동전기』가 원문에 상당히 충실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순한글로 변역했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청일전기』는 『중동전기본말』을 약간만 참고하고 거의 대부분 『중동전기』를 그대로 번역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세 책의 서술양태를 직접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36)

                
  • ▲ 한성감옥 종신죄수 차림의 20대청년 이승만.ⓒ자료사진
     <표 1> 『중동전기본말』ㆍ『중동전기』ㆍ『청일전기』의 내용 비교

      <표 1>에서 사료A는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거 주일청국공사 汪鳳藻에게 보낸 조회문이다. 그 내용은 일본 외무대신과 주일청국공사가 회동하여 조선문제를 의논한 결과, 양국군의 활동으로 동학농민군이 진압되었으니, 이제 조선을 대신하여 내정을 다스리되, 양국에서 대신을 파견하여 조선의 폐단을 구제하게 하고, 재정관리ㆍ관료선발 및 내란 진압용 군대의 선발과 훈련 등의 문제를 해결하여 조선을 진흥케 해야 하니, 이러한 사실을 귀하가 청국정부에 보고하여 처리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표 1>의 사료A에서 『중동전기』는 『중동전기본말』의 기사 중에서 중국식 한문의 번삽한 구절을 생략하면서도 비교적 직역에 가깝게 번역하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청일전기』는 『중동전기본말』의 내용을 그대로 번역하면서 유려하고도 간명한 스타일의 순한글로 번역하려 애썼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이승만의 특유한 문체인 마침표 없는 지루한 장문으로 번역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이러한 점들이 이승만이 『청일전기』를 번역할 때에 『중동전기본말』을 참고했다고 말한 대목일 것이다.  
      그러나 『중동전기본말』을 그대로 순한글로 번역한 것은 『청일전기』 앞부분 「전쟁 시작 전에 양국간에 내왕한 공문」(4.3쪽 분량) 일부분과 그 나머지 부분에서 「조선사신 민영환씨의 어록」처럼 이승만 특유의 쉼표 없는 문체로 번역된 것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들을 제외하면, 『청일전기』의 거의 대부분은 『중동전기』의 국한문 기사를 그대로 순한글 기사로 바꾸어 놓은 것에 다름 아니다. 또한 <표 1> 사료B의 기사들에도 『중동전기』가 『중동전기본말』의 기사들을 그대로 번역하거나 축약 번역한 것이며, 『청일전기』가 『중동전기』의 국한문을 그대로 순한글로 바꾼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면 『중동전기본말』을 초역한 『중동전기』와 『중동전기』를 그대로 번역한 『청일전기』는 체제와 구성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아래 <표 2>를 보면, 첫째, 『중동전기』는 각 권의 체제를 『중동전기본말』과 동일하게 잡은 반면, 『청일전기』에는 각 권의 구분이 없다. 이로 인해 『중동전기』의 목차는 일목요연한 반면, 『청일전기』의 목차는 체계성이 결여되어 있다. 둘째, 이승만의 논설 2편을 제외하면, 『청일전기』의 목차는 『중동전기』의 전체 항목에서 조선문제와 연관성이 적은 일부 항목들을 뺀 것임을 알 수 있다. 셋째, 각 권에 수록된 기사 제목에서 『중동전기』는 『중동전기본말』의 한자 제목을 그대로 따른 반면, 『청일전기』는 『중동전기』의 번역 제목을 참고하되 완전히 새로운 순한글 제목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는 『청일전기』가 『중동전기』보다 한글 독자를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넷째, 『청일전기』는 『중동전기본말』을 초역ㆍ출판한 『중동전기』의 기사를 다시 선별하여 순한글로 번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청일전기』의 번역이 거의 전적으로 『중동전기』에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섯째, 『청일전기』가 『중동전기』보다 분량이 많은 유일한 부분은 『중동전기』 권2의 청국황제 조칙 부분이다. 『중동전기』에는 황제 조칙이 16점 실려 있는 반면, 『청일전기』에는 황제와 황태후 조칙 21점이 실려 있다. 여섯째, 『청일전기』에는 이승만이 지은 「전쟁의 원인」ㆍ「권고하는 글」 등 2편의 논설과 일본천황의 선전조칙에 대한 비판적 논평 3행37)이 나온다. 이것은 이승만의 논설 두 편을 제외하면, 『청일전기』의 거의 대부분이 『중동전기』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을 살펴보면, 『청일전기』는 거의 대부분 국한문 『중동전기』를 순한글로 번역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승만이 자신의 친필로 작성한 ‘譯著名錄’에서 ‘중동전기 순한글역’이라고 적어놓았던 사실로도 임증된다. 『청일전기』 번역기간 3개월 동안에 이승만은 고열로 앓은 적이 있고, 잡다한 사건으로 고생했으며, 선교사들의 부탁으로 기독교 서책을 번역하였다. 이는 이승만이 『청일전기』 번역에 전적으로 매달리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일전기』 번역작업에는 정순만 등을 비롯한 옥중동지들이 중요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승만은 『청일전기』의 맨 앞부분을 번역하고 전체 번역원고를 감수하는 역할만을 맡았고, 『청일전기』가 완성된 후 2주일 동안에 「전쟁의 원인」ㆍ「권고하는 글」 등의 논설을 직접 집필하여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 ▲ 한성감옥 종신죄수 차림의 20대청년 이승만.ⓒ자료사진
    <표 2> 『중동전기』와 『청일전기』의 체재와 목차
      
      『청일전기』에는 1894년 6월 6일 청국 특명전권대신 왕봉조의 조회로부터 1899년 1월 20일 청국공사 서순보가 서울에 들어와 고종에게 바친 청국황제의 국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걸쳐 많은 내용이 담겨있다. 『청일전기』에 나오는 잡다한 사실들을 시간 순으로 갈래지어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이승만의 논설: 청일전쟁의 원인을 논급하고 한국민에게 혁신을 권고하는 논설 2편.
         2. 청일 양국군 철병문제와 속방문제: 1894년 6월 6일부터 7월 14일까지 청일전쟁 개시 전에 청일 양군 공동 철군문제와 조선에 대한 속방-자주국 문제를 주제로 청일 양국 간에 주고받은 조회문 9점.
         3. 청국황제와 황태후의 조칙: 1894년 8월 1일 청국황제의 선전포고 조칙부터 1895년 12월 3일 청국 이부시랑 왕흥란과 호부시랑 장린의 파직을 명하는 청국황제의 조칙까지 청일전쟁 관련 조칙 20점. 
         4. 청일전쟁 관련 및 동북아문제 관련 전보: 1894년 7월 1일 이홍장의 군대동원 요청 전보부터 1895년 11월 16일 영국인 ‘양위리’를 수군제독으로 삼는 문제를 다룬 전보까지 전보 285점. 1896년 2월 12일 청국 해군제독 丁汝昌 부인의 자결 전보부터 1897년 11월 7일 주한러시아공사의 한국 내정간섭에 대한 전보까지 21점.  
         5. 일본천황의 선전포고: 尹致昊가 번역한 일본천황의 선전포고 조칙.
         6. 청일전쟁 관련 논설: 알렌과 채이강이 각국 신문 보도와 외교문서를 토대로 공동 저술한 1) 청일전쟁 이전 조선의 상황, 2) 청일전쟁의 발발원인, 3) 발발과정과 전투상황, 4) 강화조약 체결과정, 5) 청일 양국과 구미 각국의 정부와 신문의 청일전쟁에 대한 여론과 대응, 6) 청일전쟁의 종결과 결과, 청국이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원인 등을 논한 12편의 청일전쟁 관련 소논설.      
         7. 馬關條約(下關條約)의 전말: 1) 1895년 3월 20일 李鴻章의 일본 파견경위와 청국대표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ㆍ무쓰 무네미쓰와의 마관조약 체결관련 문답기. 2) 1895년 3월 24일 이홍장이 동경에서 피격당한 사실과 청일 양국의 반응. 3) 1894년 3월 24일부터 4월 5일까지 이홍장이 일본대신들과 주고받은 조회 5점과 4월 6일 이토 히로부미의 답조회 1점. 4) 이홍장이 다시 고쳐 보낸 약조문과 1895년 4월 9일 이토 히로부미가 이홍장의 강화조약 체결 제안을 거부한 약조서 초본. 5) 1895년 4월 10일과 15일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가 강화조약 체결한 최종 회의 내용. 6) 마관조약 조약문 9개조와 첨부한 조목 2개조. 7) 마관조약 체결 전 청일전쟁 정지 조약과 마관조약 체결 후 일본의 봉천성 반환 조약. 8) 일본 천황의 전쟁 종료 조칙, 일본의 요동반도 반환 반포 조칙. 9) 1894년 8월 26일 일본과 조선의 청병 철퇴 약속. 
         8. 청일 제독들의 편지: 일본 해군사령관 伊東祐亨과 청국 해군제독 정여창이 주고받은 편지 4점.  
         9. 홍범 14조: 1895년 1월 7일 고종이 종묘에 고한 獨立誓告文과 洪範 14조.
         10. 청일전쟁의 원인 논설: 동양 3국의 전쟁 원인을 궁구한 논설. 
         11. 동아시아 국제관계론: 청일 양국 정치의 차이점, 아시아 형편을 통합한 의론, 청일전쟁 전후 러시아의 극동정책을 논급한 俄國論.  
         12. 미국 함장의 용맹성: 청일전쟁 당시 압록강전투에서 청국군함 진원함 함장 미국인 맥길분유융의 용맹성 칭송.
         13. 청일전쟁 이후 국제조약과 협정서: 1) 1896년 6월 3일 일본의 공격에 대한 공동방위를 밀약한 이홍장과 로바노프 사이에 체결된 淸露密約과 9월 청러특별조약. 2) 1896년 5월 14일 청국과 일본간 한국문제를 두고 서울에서 조인된 한성조약. 3) 1896년 6월 9일 러시아 수도에서 체결된 노바노프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간의 협정서.
         14. 민영환의 회견기: 1896년 여름 러시아특명전권공사 민영환이 영국신문과 회견한 내용.     
         15. 청국공사의 국서: 1899년 1월 20일 청국공사 서순보가 서울에 들어와 고종에게 바친 청국황제의 국서.
         16. 영국의 러시아대책: 러시아의 한국진출을 우려하는 영국 의회의 외교대책.

      이상의 내용을 보면, 『청일전기』는 기왕에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청일전쟁사를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1894-1897년간 동아시아 국제관계사를 전반적으로 다룬 책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여기에는 계몽논설, 조회문, 조칙, 전보, 청일전쟁 당시 및 그 이후 조약문과 협정서, 마관조약 체결관련 여러 사항들, 동양 3국에 관련된 국제정세 문제, 구미 열강의 외교대책, 청일 제독들의 편지, 고종의 서고문, 미국인 함장의 용맹기사, 민영환의 회견기 등등 실로 다양한 기사들이 실려 있다. 이중에서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청일간 전보문, 마관조약 체결관련 내용, 채이강과 알렌이 공동 집필한 청일전쟁 관련 논설이다. 
      그러면 『중동전기본말』ㆍ『중동전기』ㆍ『청일전기』는 한국의 독립문제, 내치문제, 근대화문제 등에 대해 어떻게 서술했는가? 다시 말해 알렌과 채이강이 함께 한문으로 번역ㆍ편집ㆍ저술한 『중동전기본말』, 다시 그 책의 내용을 선별하여 국한문으로 변역한 『중동전기』, 그리고 『중동전기』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초역한 이승만의 순한글 번역본 『청일전기』에서 그 문제들이 어떻게 다뤄졌는가? 이것은 『청일전기』 번역ㆍ출판의 궁극적 목적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문제로서 청일 사이에 주고받은 전보문과 각종 公私 문서 및 『중동전기본말』에 수록된 채이강의 한ㆍ중ㆍ일 국제문제에 대한 장문의 논설들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해 일본과 주고받은 조회문에서 청국지도부는 일관되게 한국을 자신들의 속방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중동전기본말』ㆍ『중동전기』에서 청국지도부는 청국을 上國으로, 조선을 藩屬ㆍ藩服ㆍ藩國ㆍ屬藩ㆍ屬邦으로 쓰고 있으며, 이승만은 『청일전기』에서 한글로 이를 모두 속방이라고 번역하였다. 이에 대해 채이강은 자신이 집필한 「朝警記」를 비롯한 여러 논설에서 청국지도부의 한국관과 동일한 입장을 드러냈다. 이처럼 청일전쟁 종결 이전 조선의 지위를 중국의 속방으로 간주한 것은 『중동전기본말』ㆍ『중동전기』ㆍ『청일전기』가 모두 동일하다. 다만 『중동전기』나 『청일전기』는 『중동전기본말』의 지나친 표현을 약간 축소 내지 완화시켰음이 확인된다.  
      
                   
  • ▲ 한성감옥 종신죄수 차림의 20대청년 이승만.ⓒ자료사진
    <표 3> 『중동전기본말』ㆍ『중동전기』ㆍ『청일전기』의 ‘속방’ 구절 비교
      
      『중동전기본말』 「朝警記」(1)의 앞머리에 나오는 <표 3>의 사료A는 동학농민군의 봉기과정을 기술한 것이다. 이 사료가 나오는 『중동전기본말』의 「조경기」 12개절은 원래 제1-5절을 채이강이 단독으로, 제7-12절을 임락지와 채이강이 공동으로 저술한 것이다. 그런데 『중동전기』는 『중동전기본말』에 나오는 각 절의 필자 이름을 그대로 기술한 반면, 『청일전기』는 채이강의 이름을 빼고 ‘미국인 림락지’가 저술했다고 하였다. 이는 청국과 조선의 관계를 上國과 屬國의 관계로 간주하는 청국인 채이강의 중국중심적 서술태도를 완화하려는 의도적인 편집으로 보인다.   
      <표 3>의 사료A는 『중동전기본말』에 자주 나오는 갑오경장 이전의 한국을 중국의 속국으로 간주하는 채이강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그 구절은 “조선은 箕子朝鮮의 옛 도읍지이다. 예전부터 조선은 중국에 번속이라고 칭했으며 우리 청나라가 동쪽에서 일어나자 조선왕이 또 먼저 충성을 바쳐 우리를 침범하지도 않고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은 지가 거의 3백년이나 되었다. 일본이 망령되이 조선을 넘보는 것은 실로 중국 신민들이 모두 분통해 하는 바이다. 조선이 나라를 세워 중국과 무역한 시작한 이래 중국이 보듬어 안아주고 도와주었으나 조선의 민기(民氣)가 점차 거칠어지고 방자해져 외환과 내란으로 시끄러워졌다”는 것이다. 채이강의 이러한 발언은 명백히 조선의 국체와 조선인의 자존심을 훼손하는 측면이 있었다. 
      위의 기사에 대해 『중동전기』는 『중동전기본말』의 장황한 내용을 줄이면서도 채이강의 기본의도를 그대로 살려놓았다. 『중동전기』는 『중동전기본말』의 원문 일부만을 직역하여 “조선이 청국에 稱藩한 지 3백년에 청국을 침략하거나 배반하지 않았다”라고 기술하였다. 이에 반해 『청일전기』는 조선인이 받아들이기 힘든 구절들을 삭제한 후, “청국과 교의가 친밀히 지낸지 오래이다”라고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이승만 등이 자국사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청일전기』를 번역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어 채이강은 청일전쟁 이전 청국의 속국이던 한국이 청일전쟁 후 일본의 도움으로 독립을 이루었다고 기술하였다. 이로써 『중동전기본말』의 청일전쟁 이후 기사에서 한국의 속방문제는 해소되었다.      
      다음, 갑오경장 이전 조선의 내치문제에 대해 중국지도부와 채이강은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이들은 조선지도부의 부패와 무능으로 인해 동학농민군이 봉기함으로써 청일전쟁이 일어났다고 보았다. 이것은 청일전쟁의 발생원인을 청일 양국의 한반도 쟁탈전에서 찾지 않고 조선의 내정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자신의 논설에서 한국이 세계대세를 밝게 알아 내정개혁을 이루었다면 청일전쟁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조선의 내정문란이 청일전쟁 발발의 원인이라는 청국인들의 주장에 동조한 것이다.  
      채이강은 “조선이 어둡고 무능하여 타국의 아래에 처하기를 달게 여기는 속국”으로 전락한 이유를 조선의 내치문제에서 찾았다. 그는 한국이 쇠망에 빠진 원인으로서 1) 환관과 척신이 정치를 좌우하고, 2) 재정이 군색하며 인민이 피폐하고, 3) 형벌이 잔혹하며, 4) 군법이 해이하며, 5) 근대적 실용교육의 부족 등을 들었다. 이러한 폐단에 대한 개선책으로서 그는 갑오경장 초두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올린 5개항 26개조의 「朝鮮內治革弊事宜」에서 5개항을 채택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1) 경성과 각도 각군에 쓸데없는 관직을 제거하고, 2) 국고의 세입재정을 별도로 정돈하고, 3) 법률을 합당하게 교정하고, 4) 군법을 제정하고 군사를 확충하여 내란을 진압하고, 5) 학교 章程을 긴절히 만들라는 것이었다. 채이강은 조선이 이러한 강령들을 이행한다면 ‘부강문명’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39) 
      셋째, 조선의 근대화문제에 대해, 채이강은 조선이 세계대세와 외교정책에 밝은 개화파 관료들을 다수 보유하여 문명부강을 이룩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다고 보았다. 그는 “재상 朴定陽은 전 미국공사요, 내부대신 朴泳孝는 일본에서 10년을 체류하였고, 법부대신 徐光範과 외부협판 徐載弼은 미국에 10년 있었고, 학부대신 李完用은 미국공사를 지냈으며, 농상공부협판 李采淵은 주미공사관 참서관을 지냈고, 농상공부대신 金嘉鎭은 일본공사로 있었으며, 학부협판 尹致昊는 일ㆍ미ㆍ청 각국에 10여년 유람했다”며 조선 대관들의 외국경험을 중시하였다.  
      채이강은 “외국 경험이 있는 조선 대관들 가운데 서재필과 윤치호 두 사람은 서양의 교화와 법률에 통달하였다. 따라서 조선 대군주는 이들 대관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궐문 밖에 나가지 않아도 천하대세와 외교정형을 밝게 통촉하여 서로 도와 행하여 갈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들이 있으니 외국에 유람하며 공부하던 자들이 점점 모여들고 있다. 일본은 경장하던 처음에 타국에 가서 고문관과 교사를 고빙해다가 그 백성을 교육시킨 지 10년만에 비로소 인재를 거두었는데 조선은 이런 신하들이 있으니 일본보다 낫다”고 하였다.40) 
      채이강은 조선이 갑오경장으로 개혁정치를 실행하고 있는 것을 높이 평가한 다음, 고종 측근의 민영환이 영국 신문기자와 가진 대담을 수록하였다. 여기에서 민영환은 조선이 문명부강을 이룩하기 위해 극복해야만 하는 문제점을 열거하였다. 즉, 그는 조선은 물리학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서양인들은 무위도식하는 이가 없고, 노소를 막론하고 남에게 의지하는 의타심이 없으며, 부유한 사람일지라도 부지런히 노동을 하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어 서양인은 천민이라도 국가를 사랑하고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며, 모든 인민이 문자를 해득하고 기초 수학을 읽혔음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민영환의 발언은 달리 말해서 채이강이 청국과 조선의 인민들에게 교육진흥, 의식개혁, 노동의욕의 고취, 국가사상과 충군의식의 진작 등을 통하여 문명개화를 이룩할 것을 촉구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41)



  • ▲ 미국서 박사학위취즉후 귀국한 이승만이 YMCA 강당에서 청년들을 교육하는 ㅗㅁ습.ⓒ자료사진
    ▲ 미국서 박사학위취즉후 귀국한 이승만이 YMCA 강당에서 청년들을 교육하는 ㅗㅁ습.ⓒ자료사진
    Ⅳ. 『청일전기』의 번역 목적과 인민계몽 방안   
     
      청일전쟁 당시 집권층을 비롯한 대다수 조선인들은 그 전쟁의 궁극적 승리자가 청국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시대 동양의 정치적ㆍ사상적 중심지인 청국의 패배는 중국중심적 세계관에 젖어 있던 조선사상계에 심대한 변동을 일으켰다. 청일전쟁에 이어 갑오개혁의 성과를 일부 흡수한 대한제국이 출범한 후, 독립협회의 자유민권운동, 고종의 稱帝建元 조치, 광무정권의 舊本新參의 개혁조치, 『公法會通』ㆍ『태서신사람요』ㆍ『自西徂東』 등 만국공법서와 개화자강서의 유행 등 여러 요인이 조선사상계의 지형변화를 촉진하였다.42) 이로써 한국의 전통유림들은 완고한 전통주의자에서 동도서기론자 내지 서구론자로 옮아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변화는 청년 이승만에게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은 청일전쟁 이전만 해도 서울 장안에 사는 젊은 청년으로서는 이례적이라고 할만큼 보수 성향을 보였다. 신문물을 받아들이라는 주변의 권고를 한마디로 일축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는 “서당을 떠나 새 것을 배우러 간 친구들을 반역자로 취급하고 있던 나에게 친구들이 때때로 놀러 와서 전보ㆍ철도ㆍ비행기 등등 서양에서 발명된 기괴한 것들에 대해 배우라고 역설했지만 그들이 천지를 개벽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어머니의 종교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하였다.43) 그가 공리적ㆍ사변적 성리철학에서 벗어나 과거 급제에 필요한 실용유학에 매달렸다고 하더라도 이 시기 이승만의 사상정향은 상당히 시대에 뒤떨어진 측면이 있었다. 
      청일전쟁은 청년 이승만의 생활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1893-1894년의 겨울 내내 도동서당 근처의 남관왕묘(南廟)에서 『시전』을 반복해서 읽으며 과거공부를 하고 있었다.44)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조선왕조가 부과하는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로 진입함으로써 입신양명을 달성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후폭풍인 갑오경장의 개혁조치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말았다. 이에 이승만은 “이 조치는 전국 방방곡곡에 묻혀있던 야망적인 청년들의 가장 고귀한 꿈을 산산이 부수는 조치였다. 그런데 개화파정권은 여러 가지 학교를 세우고 관비로 운영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외국어를 배우고 서양문명을 배우도록 온갖 장려를 하고 설득을 하였다”고 하여 개화파의 개혁정치를 긍정적으로 평하면서도 자신의 꿈을 무산시킨 과거제도 폐지를 대단히 아쉬워하였다.45)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결판난 다음에 이승만은 “세계대세가 변했으니 『시전』 공부를 그만두고 신지식을 배우라”는 친우 신긍우의 권유에 따라 배재학당에 들어갔다.46) 이후 이승만이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배우고 서양의 정치사상을 깨우쳐 독립협회운동과 만민공동회 및 고종폐위운동에 가담했다가 한성감옥에 투옥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나중에 이승만이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은 우리나라로 하여금 동양의 구세계는 현대문명의 광범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라고 술회한 것처럼, 청일전쟁은 그의 인생행로를 결정지은 대사건이었다. 바로 이러한 지적 체험이야말로 이승만으로 하여금 『청일전기』를 순한글로 번역하게 만든 기본 동력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이승만은 자신에게 쿠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을 안겨준 청일전쟁을 어떻게 인식했는가? 이승만이 『청일전기』를 번역ㆍ간행한 근본동기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문건은 『청일전기』 서문이다. 그가 남긴 서문은 2점인데, 하나는 번역 직후에 지은 것이며, 다른 하나는 출판할 때 지은 것이다. 전자가 대한제국기에 지은 것이라며, 후자는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해외에 망명하여 지은 것이다. 이러한 시간상ㆍ역사상의 변화는 이승만의 청일전쟁 인식변화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17년의 격차를 두고 쓰여진 이승만의 『청일전기』 서문들에는 청일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알아야만 국가 발전에 유익하고 국가 독립의 기초를 세울 수 있다는 공통된 논리가 들어 있었다. 
      이승만은 대한제국기에 지은 『청일전기』 서문에서 다른 나라 사람은 모두 청일전쟁의 원인, 경과, 결과, 전쟁 발발 의도, 전쟁의 형세 등을 소상히 알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충의심을 양성하고 외침을 막아낼 수 있는 정신적 힘을 배양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청일전기라 함은 청국과 일본이 전쟁한 사적이라 함이니, 곧 갑오년 난리 사실인데 갑오년 전쟁인즉 세상에 굉장한 일이라. 남의 나라 사람들은 이 일에 상관이 없는데도 대소관민과 남녀노소에 모르는 자가 없어 당초에 어찌하여 싸움이 되었으며, 누가 이롭고 누가 해로웠으며, 어느 나라는 의향이 어떠하고, 어느 나라의 형세가 어떠한 것을 소상히 알고 앉았으매, 자연 의견이 생기며 충의가 밝아져서 설령 내 나라에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막을 일과 어떤 것은 이롭고 어떤 것은 해로울 일을 미리 짐작이 있는 고로 나라에 털끝만치라도 손해되는 일은 기어이 막고 유조한 일은 열심히 되게 하나니 이것이 곧 지금 세상에 나라 권세를 강하게 하는 도리이다.47)        

      이를테면 이승만은 청일전쟁의 경험을 통하여 국가발전과 사회발전에 유익한 경험을 축적ㆍ활용하자는 논리를 피력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는 “이 전쟁이 어찌하여 생겨났는데, 어느 나라 뜻은 어떠하며, 어느 나라 행사와 거동은 어떠하고, 내 나라 형세는 어떠하며, 남이 우리를 어찌 생각하겠으며, 우리는 지금 어찌 하여야 나라가 위태롭지 않고 백성이 편안할 도리를 생각하여 보아, 그 중에 좋은 일은 실상을 배우고 악한 풍속은 뿌리를 除하고 남이 칭찬하는 일은 우리도 행하기를 힘쓰고 남의 恥笑 받는 일은 열심히 버려서 세상에 문명하다는 사람들과 비교하여 보기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48) 이런 의도에서 이승만은 한국민이 누구나 청일전쟁의 사적을 쉽게 접하고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평생 원하던 번역”을 시작할 때에 청일전기를 본역하였던 것이다. 
      이승만은 1917년 『청일전기』를 출판할 때에 청일전쟁에 대해 소상히 알아야만 한다는 이전의 일반적인 주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청일전쟁을 한국 멸망의 원인과 직결시키고 있었다. 즉, 그는 “조선역사에서 제일 큰 난리는 임진왜란이며 한인들이 가장 분통하게 여기는 전쟁도 임진왜란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일본이 수천 년 동안 조그마한 섬 안에 갇혀 지내면서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야심을 대대로 길러 임진년에 한번 시험하다가 실패한 후 3백 년 동안을 다시 준비하여 청일전쟁(‘갑오전쟁’)에서 그 욕심을 채웠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청일전쟁이 임진왜란보다 더 큰 난리요, 한인에게 더욱 통분히 여길 바가 청일전쟁이다. 이 전쟁에 한국이 잔멸을 당하고 독립을 잃었다. 오늘날 한국이 당하고 있는 것은 바로 청일전쟁 때문이다”고 하였다.49) 
      이승만은 한국이 독립을 잃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근본 원인을 청일전쟁이 제공했다고 판단하였다. 즉, 그는 “오늘날 한국인이 유구국이나 대만인처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상태에서 생활하는 것을 달게 여긴다면 갑오전쟁의 사적을 알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태평양이 마르고 히말라야산맥이 평지가 될지라도 대조선의 독립을 우리 손으로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한국인들은 청일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알아야만 한다”고 하였다.50) 따라서 이승만은 한국인들은 청일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하고 조사하여 다시는 그러한 비극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청국이 진작 개명하여 자기나라를 먼저 튼튼히 하고 대한을 또한 개명시켰으면 일본이 釁端을 엿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거늘 종시 옛 법만 지키다가 필경 조선을 잃어버리고 세계에 큰 욕을 보았다 하여 절절 통분히 여기는 지라. 우리는 생각건대 만일 대한이 세계 형편을 먼저 깨달았더라면 이런 일(청일전쟁)이 당초에 생기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노라. 대개 이 싸움으로 인연하여 대한독립이 세계에 드러났은즉 이 싸움이 아니 된 것보다 낫다고 할 듯하나 실상을 생각하면 독립을 이렇게 廣布한 것이 진실로 일본의 영광이오 대한의 수치라. 사람이 오직 변변치 못하여야 제 권리를 제 손으로 찾지 못하고 이웃 친구가 대신 찾아주기에 이른다. 
           남의 나라 사람들은 기왕 잃었던 독립 권리도 몇 만 명 목숨을 바쳐가며 찾아 보호하거늘 우리나라에서는 떳떳한 境界를 가지고도 당초에 몰라서 말 한마디 못하다가 일본이 일어나 대신 싸워주고 세상에 생색내며 자랑하매 남이 다 의리싸움이라고 칭찬하니 진실로 우리의 분하고 원통한 일이라. 대한 신민들이 이것을 분히 여겨 내 나라 독립을 우리 손으로 빛 내여 보기를 일심할진대 이 수치를 한 번 씻어 볼 날이 있을 터인데 이것을 분히 여길 줄 알자면 먼저 그 속을 알아야 될 터이니 아무쪼록 이런 책을 많이 보아 외국의 형편과 내 나라 사정을 자세히 공부하는 것이 급선무라.51) 
       
      위의 인용문에서 이승만은 한국이 세계 대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무지몽매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청일전쟁을 초래하여 나라의 독립을 잃고 말았다고 한탄하였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찾아주는 부끄러운 일을 다시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인민 모두가 국제관계사를 다룬 책들을 널리 읽어서 외국형편과 본국사정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청일전기』를 번역한 후 각계에 출판비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지은 「新譯戰記附錄」에서 이승만은 국가 독립의 기반 요건인 개명진보의 방법을 4가지로 들었다. 그것들은 첫째, 학교를 세워 학문을 일으키고, 둘째, 민회를 열어 토론을 하고, 셋째, 널리 신문사를 설치하며, 넷째, 도서관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 4가지 중에서 이승만은 지금 가장 긴요한 일은 도서관을 세우는 것이라고 하였다.52) 이를 보면 이승만은 도서관을 세워서 거기에 세계대세와 한국문제를 다룬 『청일전기』와 같은 책들을 많이 비치하여 누구나 쉽게 읽도록 함으로써 국민의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인민의 민지개량과 문명개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아래의 인용문에 여실히 나와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 한국인으로서 時務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은 쓸쓸하게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간혹 있다고 하더라도 한문에 능통하여 스스로 선비라고 자처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한문에 능통한 사람이 모두 몇 명이나 되겠는가? 통틀어 말하더라도 많아야 10분의 2-3에 지나지 않으며, 저들 10분의 7-8은 모두 돼지 豕자와 돼지 亥자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비록 학문을 연구하고 싶어도 현존하는 서적은 古史와 遺著를 제외하면, 모두 淸)들이 번역하고 저술한 한문 서적 몇 帙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아! 서민들이 어떻게 유럽이나 아시아가 어디에 있으며, 영국이나 미국이 어떠한 나라이며, 天文ㆍ地誌ㆍ算術ㆍ格致(물리학) 등이 무슨 학문이며, 政敎ㆍ法律ㆍ外交ㆍ內治ㆍ通商ㆍ惠空(공업) 및 公法ㆍ約章이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알 수 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보면, 나라가 累卵의 위기에 놓여있고 백성이 塗炭에 빠져있는 것이 어찌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직 바라는 바는 뜻있는 君子들이 이러한 사정을 통찰하여 정부에서 행하고 행하지 않고를 불문하고, 법규를 만들고 資力을 합하여 國文 도서관을 만들고, 널리 서양의 經ㆍ史ㆍ子ㆍ集과 각종의 新學 서적을 구하고 번역ㆍ저술하여 국내에 보급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어두운 방을 밝혀주고 저기 미로와도 같은 나루에 뗏목을 놓는다면, 한편으로는 나라를 걱정하고 사회에 충성하는 지극한 뜻이 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을 은혜롭게 하고 나를 이롭게 하는 훌륭한 일이 될 것이다. 어찌 마음을 가다듬고 힘써 행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 책을 번역한 것은 진실로 이 뜻 때문이다.53)

      평생 동안 이승만은 국가의 부강은 교육이 아니면 이룰 수 없다는 교육입국론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교육입국론을 실현시키려면 근대교육을 담당할 교육기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족한 국고를 믿고 학교를 세우려 한다면 영국과 미국같이 부유한 나라들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재정이 궁핍한 한국같은 작은 나라에서는 무조건 학교를 짓기보다는 백성과 관청이 유기적으로 협동한 이후에야 성과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백성으로 하여금 학문을 힘쓰게 하려면 신문이 아니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54)
      이처럼 도서관과 신문을 민지개량과 국가발전의 기본요소라고 파악한 이승만은 청년기부터 장년기까지 도서관에 비치할 만한 책을 부지런히 저술ㆍ번역하고, 쉬지 않고 신문과 잡지에 계몽 논설을 기고하였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노년기 전까지 유능한 문필가에 필적할 정도로 많은 문적을 생산하였다. 한성감옥에서 『청일전기』를 비롯해 여러 권의 책을 한문이나 국한문이 아니라 순한글로 번역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 5천년만에 처음 자유민주공화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 사진은 1948년 8월15일 건국선포식.ⓒ자료사진
    ▲ 5천년만에 처음 자유민주공화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 사진은 1948년 8월15일 건국선포식.ⓒ자료사진
    Ⅳ. 맺음말

      이승만은 한국이 중국중심의 유교적인 전근대사회에서 미국중심의 기독교적인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문명의 전환기에 청년기를 보냈다. 이시기 한국인들의 중국중심적 세계관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은 단연 청일전쟁이었다. 이승만이 과거급제를 위한 전통유학 공부를 단념하고 신학문을 공부하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청일전쟁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인생행로에 변화를 가져다준 청일전쟁을 근대한국의 운명을 판가름한 중대 사건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승만의 『청일전기』 번역작업은 대한제국기 계몽지식인들의 근대문명 따라잡기의 일환이었다. 대한제국기에는 청나라에서 도입된 한역 개화자강서와 기독교 관련서적이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한국인들의 사상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서적들은 한국에서 원문 그대로 重刊되거나 혹은 국한문 내지 순한글로 번역되어 지식인과 학동들에게 널리 읽혔다. 이들의 신학문 서적 발간 및 번역 활동은 일제의 침략에 밀려 국권을 잃어가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중단 없이 지속되었다. 따라서 이승만의 『청일전기』 번역사업도 문명 전환기에 한국인들이 벌인 근대문명 수용운동의 일부분이었다. 
      『청일전기』에는 다양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계몽논설, 조회문, 조칙, 전보, 각종 조약문과 협정서, 국서, 회담록, 회견기, 신문기사, 서한문, 외교대책, 서고문 등등 그야말로 많은 기사들이 실려 있다. 시기적으로는 청일전쟁 직전의 청일간 철병논쟁부터 1898년 1월 고종에게 보내는 청국황제의 국서 내용까지이다. 그러므로 『청일전기』는 기왕에 학자들이 주장해 왔듯이 ‘청일전쟁사’라기보다는 ‘청일전쟁 전후 동아시아 국제관계사’를 다룬 책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또한 『청일전기』는 『중동전기본말』과 『중동전기』의 내용을 참고하여 번역한 책이며, 『청일전기』에는 이승만의 논설 2편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순전한 번역서나 창작서가 아니라 편역서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청일전기』는 이승만의 독자적인 작품이 아니라 한성감옥에 갇혀 있던 개혁성향 정치범들의 공동 작품이다. 이승만은 『청일전기』 번역에 착수한지 만 3개월 동안 심혈을 기울여 번역작업을 벌였으나, 신병ㆍ신학서 번역ㆍ기타 사무 등 여러 문제로 인해 번역작업에 전력을 쏟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이승만은 옥중에 있는 인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정순만을 비롯한 ‘몇몇 옥중 동지’들이 이승만의 번역사업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이승만 자신도 토로했듯이 그들의 역할은 실제로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청일전기』는 한성감옥에서 불철주야 대한의 독립과 발전, 인민의 개명과 진보를 갈망하던 국사범들의 공동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청일전기』는 독창적 저술이 아니라 편역서라는 한계가 있으며, 번역 원고 완성 후부터 출판 이후까지 국내외 한국인들에게 상당히 제한적인 영향을 미친 책이라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문명개화와 독립자주를 달성하려 했던 청년 이승만의 염원이 담긴 최초의 책이다. 이승만은 한국이 청일전쟁으로 인해 잔멸을 당하고 청일전쟁으로 인해 독립을 상실하고 말았음을 한탄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이래 수 백 년 동안 전열을 재정비한 일본이 청일전쟁을 기화로 한국의 독립권을 침해하여 들어왔음을 경계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한국인들이 청일전쟁의 발생원인, 전개과정, 결과 등을 모두 소상히 알아야만 한국이 독립을 유지하는 기초를 닦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청일전기』는 이승만에게 한국문제를 둘러싼 동아시아 열강의 국제관계사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깊이 해준 책이다. 즉, 『청일전기』를 번역ㆍ편찬하면서 이승만은 청일전쟁 발발 전부터 1899년 무렵까지 청일 간의 교섭ㆍ대립, 청일전쟁의 진행과 강화, 청일 양국의 국가이익 확보경쟁, 러시아ㆍ미국ㆍ영국ㆍ독일의 동아시아정책, 한국의 독립과 자주 문제 등을 더 자세히 파악하게 되었다. 이는 이승만이 몇 년 후 옥중에서 자신의 주저인 『독립정신』을 저술하면서 청일전쟁, 러일전쟁 전후 동아시아와 서양 열강의 한국문제를 둘러싼 국제관계사를 구체적으로 논급할 때에 소중한 자신이 되었다. 따라서 『청일전기』의 번역ㆍ편집 경험을 통해 이승만은 그 자신이 평생 국제관계에 정통한 인사로 부상할 수 있는 지적 기반을 축적하는 성과를 얻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국가를 부강케 하려면 교육진흥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교육입국론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교육진흥의 방안으로서 당장 막대한 자본과 고급 인력이 필요한 학교를 건립하기보다는 도서관을 각지에 많이 만들어 거기에 개화자강서를 비롯한 신학문서를 많이 비치하여 학동들과 인민들로 하여금 민지를 증진하고 시대의 대세를 깨닫고 국가독립과 국가흥왕의 방안을 강구하게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의도에서 그는 도서관에 비치하여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청일전기』를 한문이나 국한문이 아니라 순한글로 번역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청일전기』를 널리 배포하여 민지개발―국가발전―국가독립의 기초로 삼으려는 것은, 이승만이 국가 최고지도자로서 의회나 정당을 거치지 않고 담화나 연설을 통해 국민을 직접 계몽ㆍ통치하려는 국민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있던 인물이라는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는 문제라고 판단된다.
  • ▲ 중국지배 500년 노예근성을 과화시켜 완전독립국을 세우자는 이승만의 욕중저서 [독립정신] 미주판 표지. ⓒ자료사진
    ▲ 중국지배 500년 노예근성을 과화시켜 완전독립국을 세우자는 이승만의 욕중저서 [독립정신] 미주판 표지. ⓒ자료사진
    각주:
    1) 이 발표문은 필자의 「이승만의 『청일전기』 번역ㆍ간행과 자주독립론」(『한국사학사학보』 22, 2010)의 내용을 대폭 수정 보완
     것이다.
    2) 이승만의 옥중활동에 대해서는,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연세대 출판부, 2002, 제3장 참조.
    3) 이승만, 「譯著名錄」, 『獄中雜記』. 이외에도 문양목의 『독립정신』(1910) 영문 서평에 의하면, 이승만이 옥중에서 만국공법 책을 번역했다고 하는데, 이 번역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아마 이승만이 원본으로 삼은 공법서는 한성감옥의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던 분량의 『萬國公法要略』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여러 공법서를 약술한 영국의 공법학자 로렌스(T. G. Laurence, 勞麟賜)의 A Handbook of International Law 를 알렌(Young J Allen) 선교사가 번역하여 1903년에 상해 광학회에서 출판한 것이다. 오영섭, 「개항 후 만국공법 인식의 추이」, 『동방학지』 124. 2004, 456-457쪽.
    4) 오영섭, 「이승만 대통령의 문인적 면모」,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연세대 출판부, 2006, 444-448쪽.
    5) 이 책은 1917년 하와이 태평양잡지사에서 출판되었으며, 『우남이승만문서:동문편』 2(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1998)에 영인 수록되었다.   
    6) 이제까지 이승만의 『청일전기』 번역문제를 가장 자세히 논급한 연구로는 고정휴, 「개화기 이승만의 사상형성과 활동」, 『역사학보』 109, 1986, 제3장 제2절;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1부 2권, 나남, 2008, 123-125쪽. 
    7) 여기에는 Tales told in Korea (『한국 전래 동화집』) 등이 포함된다.  
    8)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14-19쪽.
    9)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20-21쪽.
    10) 『고종시대사』 4, 국사편찬위원회, 1970, 1038-1039, 1044쪽.
    11) 이승만, 『옥중잡기』, 「寄本署長書」.
    12) 『제국신문』, 1900년 4월 2일. 
    13) 유영익ㆍ송병기ㆍ이명래ㆍ오영섭 편, 『이승만 東文 서한집』, 연세대 출판부, 2008, 356-363쪽.
    14)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75-76쪽.
    15) 『옥중잡기』, 「寄本署長書」.
    16) 『옥중잡기』, 「寄本署長書」. 
    17) 『제국신문』, 1903년 1월 10일, 「희한한 일」,
    18) 이승만 편역, 『청일전기』, 「서문」(1900.음7.20), 하와이: 태평양잡지사, 1917.
    19) 『청일전기』, 「권고하는 글」, 151쪽.
    20) 위와 같음.
    21) 『청일전기』, 「서문」(1917.8.6). 정순만은 1898년 12월 이승만ㆍ박용만ㆍ전덕기 등과 함께 박영효세력의 후원을 받아 상동청년회 이름으로 고종폐위활동을 벌였다가 체포ㆍ투옥되었다. 신세라, 「정순만의 생애와 민족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25, 2003, 1234-1235쪽;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13-14쪽. 
    22), 『옥중잡기』, 「諺譯 中東戰記 印刷費」. 
    23) 『옥중잡기』, 「寄本署長書」.  惟願閣下 憐此情況 兼效設塾勸學之美意 另許一間 擇有留心文學者 團聚受業 幷允點燈 則所需火具 均可自備 晝宵勸勉 得求切磋之益 兼成消受之方 且譯書作工 賴允費用 他日言謝 皆爲閣下所賜矣.
    24) 『옥중잡기』, 「新譯戰記附錄」.
    25) 이승만, 「제2차 서문」(1917.3.1), 『독립정신』, 서울: 태평양출판사, 1954, 236-237쪽.
    26) 『청일전기』, 「서문」(1917.8.6). 
    27) 오영섭, 「이승만의 하와이에서의 언론활동」,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학술회의 발표논문, 2007.11, 33-40쪽. 
    28) 『泰西新史攬要』(상하 2책, 1897)는 Robert Mackenzie의 Nineteenth Century : A History, London: Henry S. King & Co., 1877를 상해 광학회에서 한역하여 출판한 『泰西近百年來大史記』(1895.5)를 중간한 것이며, 『태서신사』는 『泰西新史攬要』의 한글 번역본이다. 이 책들은 대한제국기에 베스트셀러로서 한국인의 근대화의식 고취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29) Peter Parleyd, Universal History, Massachusetts: The Heirs of S.G. Goodrich, 1877.  
    30) William Swinton, Outline of the World's History, New York and Chicago: Ivison, Blakeman & Company, 1874.
    31) William Elliot Griffis, Corea: The Hermit Nation, New York: Charles Scriner's Sons, 1882.
    32) 알렌은 1860년에 중국으로 건너와 선교사 겸 번역관으로 활동하였다. 1868년에 중국어 신문인 『敎會新聞』(1875년에 『萬國公報』로 개칭)을 창간하여 편집자로서 사거할 때까지 주관하였다. 『萬國公報』는 청국의 정치개혁을 권장하는 기사를 자주 게재하여 강유위ㆍ양계초 등의 변법파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윤치호도 수학한 상해 中西學院(The Anglo-Chinese College)의 원장을 지냈으며, 1887년 계몽운동단체인 廣學會를 설립하여 『萬國公報』를 기관지로 삼고 수많은 한역 개화자강서와 기독교서를 출판하였다. 「近世中國關係西洋人名錄」, 『東洋史學硏究』 3. 1969.3, 76쪽. 
    33) 채이강은 중국 嘉定府 南翔縣 출신의 士人으로 향시에 번번이 떨어진 낙방거사였다. 20세 이후 언론계에 투신하여 광학회의 총간사인 리차드(Timothy Richard, 李提馬太)의 서기를 지내며 광학회 간행물의 번역․편집작업과 『만국공보』의 편찬을 도왔다. 나중에 알렌과 함께 『중동전기본말』을 공동으로 번역․편집․저술하였다. 馬軍, 「蔡爾康與萬國公報」, 『近代中國基督敎史東硏究集刊』, 1999, 5-17쪽.  
    34) 김병철,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 을유문화사, 1975, 191-192쪽.
    35) 현채의 저술ㆍ출판활동을 다룬 연구자들의 논문에는 『중동전기』에 대한 언급이 빠져있다. 현채의 저술활동에 대해서는, 노수자, 「白堂玄采硏究」, 『이대사원』 8, 81-98쪽; 박성수, 「현채의 생애와 저술활동」, 『萬國史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5-15쪽.
    36) 지명ㆍ국명ㆍ인명ㆍ숫자 등에서 『중동전기』는 『중동전기본말』과 일치하여 정확도가 높은 반면, 『청일전기』에는 이따금 오류가 엿보인다. 이는 『청일전기』 번역원고 자체의 문제 때문인지, 하와이 태평양잡지사에서 출판할 때에 생긴 출판상 오류 때문인지 잘 알 수 없다. 
    37) 이 3행은 “기자왈 이 글을 보면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족히 속일만 한지라.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싸운다 하는 것이 실상은 세상도 속이는 말 뿐이더라” 이다. 『청일전기』, 「일황의 선전조칙」, 44쪽.  
    38) 『중동전기』보다 전보가 3점 적은 것은 번역상 오류로 보인다. 빠진 3점은 1-2줄 정도의 짧은 전보이며 그 내용도 국제관계에서 문제될 것이 없는 것들이다.
    39) 『청일전기』, 「한청일 3국의 전쟁근원을 궁구한 의론」, 122-126쪽.
    40) 『청일전기』, 「조선란리사적(12)」, 79-80쪽.
    41) 『청일전기』, 「죠선사신 민영환씨의 어록」, 148-149쪽.
    42) 대한제국기 자강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상해 광학회의 출판물들에 대해서는 임락지 편역, 『文學興國策』, 「府廣學會書目」 참조. 또 당시 청국에서 수입된 신문명서에 대한 개략적 설명은 김병철, 『한국근대 서양문학 이입사연구』, 을유문화사, 1980 참조.
    43) 이승만 저, 이정식 역주, 「청년이승만자서전」, 『뭉치면 살고』, 조선일보사, 1995, 85쪽.
    44) 「배재학당 창립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1955.6.8),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 6, 공보처, 1956, 257쪽.
    45) 이승만 저, 이정식 역주, 「청년이승만자서전」, 85쪽.
    46) 「배재학당 창립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1955.6.8), 257쪽.
    47) 이승만, 『청일전기』, 「서문」(1900.음7.20),
    48) 이승만, 『청일전기』, 「서문」(1900.음7.20),
    49) 이승만, 『청일전기』 서문(1917.8.6).
    50) 이승만, 『청일전기』 서문(1917.8.6). 
    51) 이승만, 『청일전기』, 「서문」(1917.8.6), 5-6쪽. 
    52) 『옥중잡기』, 「新譯戰記附錄」(1900.8.5). 
    53) 『옥중잡기』, 「新譯戰記附錄」(1900.8.5).
    54) 『옥중잡기』, 「請設大報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