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회 이승만포럼 학술회의 발표문(2019.6.18)
  • 이승만의 작시 활동과 한시세계 

    허 경 진 (연세대 객원교수)


    1. 머리말 : 전근대시대 세 가지의 문학 형태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타고난 시인이 아니라 정치인이었지만, 젊은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한시를 지었다. 이승만의 작시(作詩) 활동을 이해하려면 조선시대 사람들이 문학작품을 향유한 방법과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문학을 일상생활에서 즐겼는데, 일부 예외는 있지만 대개 신분이나 직업에 따라 세 가지 형태로 문학을 향유하였다. 

     1) 한문학(漢文學)

     하나는 한문학(漢文學)이다. 양반이라면 으례 한시를 지을 줄 알았으며, 편지도 한문을 쓰고, 일기도 한문으로 썼다. 의사 소통을 한문으로 한 것이다. 과거시험을 치르려면 진사나 생원을 거쳐야 하는데, 진사시 1차 과목이 한시(漢詩, 科詩)이다. 따라서 진사에 합격할 때까지는 시를 배우고 연습했으며, 합격한 뒤에도 필요에 따라 시를 지었다. 멀리 있는 친구에게 편지 삼아 시를 지어 보내기도 하였고, 슬프거나 흥에 겨우면 혼자서도 시를 지었다. 한시를 제대로 지으려면 오랜 시간에 걸쳐 공부해야 했으므로 서민들은 한시를 배우기가 힘들었고, 대부분은 양반들이 한시를 지었다. 종이, 붓, 먹, 벼루의 문방사우(文房四友)를 갖추고 자리에 앉아 있어야 시를 썼으므로, 경제적인 여유 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여유도 있어야만 한시를 지을 수 있었다.

     2) 국문문학(國文文學)
     
     하나는 국문문학(國文文學)이다. 국문은 쉬워서 누구나 짧은 시간에 배울 수 있었지만, 한문을 가르치는 서당처럼 따로 국문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은 없었다. 소리나는 대로 쓰면 뜻이 통했으므로 쓰기 쉽고 읽기도 쉬웠는데, 국문이 과거시험 과목은 아니었으므로 과거시험을 치지 않는 여인들이 주로 일상생활의 소통을 위하여 국문을 배우고 썼다. 따라서 국문(國文)이나 한글이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에는 언문(諺文)이나 암클이라고 불렸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양갓집 여인들이 국문으로 된 소설을 읽었으며, 가사를 짓거나 읊었다. 국문문학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여인들이 주로 즐겼으며, 국문소설 경우에는 세책방(貰冊房)에서 돈을 내고 빌려다 읽었으므로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 국문문학도 즐길 수 있었다. 

     3) 구비문학(口碑文學)
           
     하나는 구비문학(口碑文學), 또는 구연문학(口演文學)이다. 글자로 쓰여지지 않아 책의 형태가 아니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옛날이야기나 민요이다. 구비문학은 한자나 국문 같은 글자를 몰라도 될 뿐만 아니라, 한시나 국문소설같이 책이 없어도 즐길 수 있었으므로 사실상 온 국민이 즐길 수 있는 문학 형태였다. 서당에 가서 한자를 배우는 등의 별다른 교육이 필요없이, 동네 아저씨나 아주머니에게서 민요나 옛날이야기를 듣다보면 저절로 배워지기 때문이다. 양반 집안의 자제들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통해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신분에 따라 국문이나 한문으로 된 문학작품을 더 많이 즐겼다. 서민들은 나이가 든 뒤에도 구비문학의 현장에 남아, 농사를 짓거나 고기잡이를 할 때에도 민요, 즉 노동요(勞動謠)를 불렀다. 현재 전해지는 민요 가운데 상당수가 노동의 현장에서 불려지던 노동요이다. 한여름 일하다가 그늘에서 쉴 때나 한겨울 행랑방에서 노끈을 꼴 때에는 누군가가 옛날이야기를 풀어놓았다. 

     4) 이승만의 국문문학 향유와 작품

     이승만은 양반집 자제였으니 당연히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웠고, 과거시험 공부를 하느라고 한시(漢詩)도 배웠다. 그러나 국문소설도 많이 읽었으며, 옛날이야기도 많이 들어서 오랫 동안 기억하였고, 남에게 들려주기도 하였다.
     이승만이 읽었던 국문소설의 목록은 여러 종의 전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11세에 『통감절요(通鑑節要)』 15권을 독파하고, 이어서 19세에 『시전(詩傳)』 10권과 『서전(書傳)』2권을 암송하였고, 틈틈이 『삼국지(三國志)』․『수호전(水滸傳)』․『서상기(西廂記)』․『전등신화(剪燈新話)』 등 소설도 탐독하였다.1)
     
     이승만은 공부하던 젊은 시절에만 국문소설을 읽은 것이 아니라, 감옥 안에서도 『평산냉연(平山冷燕)』이라는 장편 국문소설을 열심히 읽었다. 『평산냉연』은 재자(才子)와 가인(佳人)들이 연애하여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다룬 소설로, 작품 제목은 주인공 평여형(平如衡), 산대(山黛), 냉강설(冷江雪), 연백함(燕白頷)의 성에서 따온 것이다. 일반적인 재자가인소설처럼 성격과 기능이 정형화되어 있지만, 여주인공이 시재가 뛰어나고 지혜롭고 총명하며 용기 있고 적극적·자주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남녀 간 사랑의 전개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으며, 만남, 헤어짐, 장애 극복, 과거 급제, 결혼으로 이어지는 서사구조를 가지는 전형적인 재자가인소설이다.
     이 소설은 조선에 17세기에 전해졌고, 18세기에는 광범위하게 독자층을 형성하여 인기를 얻었다. 이승만은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이 지은 한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을 정도로, 소설 속에 몰입하였다.
      이승만이 지은 국문시는 1898년 3월 협성회(協成會) 시절에 지은 「고목가(枯木歌)」가 유일하다. 그 전문을 현대 표기로 옮겨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1) 슬프다 저 나무 다 늙었네 
             병들고 썩어서 반만 섰네 
             심악한 비바람 이리저리 급히 쳐 
             몇 백년 큰 나무 오늘 위태
          (2) 원수의 땃작새  밑을 쪼네 
              미욱한 저 새야 쪼지 마라 
              쪼고 또 쪼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네 처자 네 몸은 어디 의지
          (3) 버티세 버티세 저 고목을 
              뿌리만 굳박여 반 근 되면 
              새 가지 새 잎이 다시 영화 봄 되면 
              강근이 자란 후 풍우 불외(風雨不畏)  
          (4) 쏘아라 저 포수 땃작새를 
              원수의 저 미물 나무를 쪼아 
              비바람을 도와 위망을 재촉하여 
              넘어지게 하니 어찌할꼬2) 

      이 노래에서 이승만은 대한제국을 늙고 병든 나무에, 친러수구파 관료들을 딱다구리에, 제정러시아의 위협을 비바람에, 독립협회나 협성회의 개화파 인사들을 포수에 비유하였다.3) 
      이승만은 「고목가」의 소재를 중국 고전시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집필한 것으로 여겨지는 『제국신문』의 논설 말미에 “고인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쪼고 쪼는 때짱새야 다 썩은 고목을 쪼고 쪼지 마라 일조에 풍우가 이르러 그 나무가 쓰러지면 너희가 어디서 깃들려고 하느뇨 하였으니, 짐승을 빗대어 한 말로 족히 사람을 가르치더라”라고 말하였다.4)
     이 시기에 이승만은 한국어와 국문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894년에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자 세상이 크게 바뀐 것을 깨닫고, 20세가 되던 1895년 4월에 서양 학문을 가르치는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입학 후 곧 발군(拔群)의 총명을 드러낸 이승만은 불과 6개월만에 배재학당 영어 조교사(tutor)로 발탁되었고, 동시에 제중원(濟衆院)에 근무하는 미국 장로교 의료선교사 화이팅(Georgiana E. Whiting)양과 재콥슨(Anna P. Jacobson)양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월봉 50$을 버는 행운을 얻었다.5) 종주국 청나라가 일본에게 패배한 것은 그에게 한문에서 벗어나 국문을 배우고 써야겠다는 깨달음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국문을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가 없었으므로, 그가 이 시기에 지녔던 국문에 대한 인식은 선교사들이 주도하여 간행한 찬송가나 한글 번역 성경의 수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6)   
     「고목가」는 도동서당에서 한시를 공부한 다음 배재학당에서 찬송가를 배운 이승만이 동양의 소재와 서양의 형식을 절충하고, 자신의 시작(詩作) 능력 및 국문전용 의지를 더하여 지은 시이다.
      ‘Song of an Old Tree’란 영문제목이 곁들여 있는 「고목가」는 대한제국기에 신문과 잡지에 유행한 많은 애국시와 독립가의 효시이다. 이 시는 최남선(崔南善)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라는 신체시보다 10년 앞서서 지어진 한국 최초의 신체시이다. 따라서 이승만의 빼어난 문학감각과 시국관과 개혁의식이 잘 반영된 「고목가」는 한국 근대시의 기점으로 간주되는 역사적 의의를 지닌 시라고 볼 수 있다.7)
     
     
  • ▲ 20대초반 이승만이 창간한 3개신문. 매일신문은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신문.ⓒ자료사진
    ▲ 20대초반 이승만이 창간한 3개신문. 매일신문은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신문.ⓒ자료사진
    5) 이승만이 전해준 옛날이야기

      이승만은 10대 후반 이근수의 도동서당에서 공부하는 동안, 영남조의 가사를 즐겨부르는 최응원에게서 노래부르기도 배웠다. 그는 두율(杜律)을 곡조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부르기에 매료되어 밤마다 최응원의 방에서 앳된 목청을 뽑아냈다8)고 한다. 한문학을 구연문학(口演文學)으로 끌여들였던 것이다. 
     이승만은 어렸을 때에 들었던 한국의 옛날이야기를 오랫 동안 기억하여, 미국 동화작가 베르타(Berta Metzger)에게 몇십 편을 들려주었다. 베르타는 그로부터 들은 한국의 옛날이야기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까지 합하여 38편을 동화체 문장으로 편집하고, 역시 한국인인 Arthur Y. Park에게 삽화를 받아서 Tales told in Korea를 출판하였다.
     베르타가 이승만에게서 들은 이야기만으로 한 권의 책을 편집하지 않은 이유는 옛날이야기는 구비문학이라는 특성상,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자신의 버전으로 들려주기 때문이다. 베르타는  Tales told in Korea의 서문에서 이야기꾼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저는 여태껏 한국에서 두 사람이 똑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만일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상상하는 것에 능숙하지 못하면 – 제가 이런 이야기꾼을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단조로운 방식으로 이야기를 반복할 뿐이겠죠. 만일 이야기꾼이 극적으로 구성하는 것을 타고났다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렇듯, 당신의 눈앞에서 마술사처럼 이야기를 다시 꾸며낼 거예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저는 몇몇의 이야기들을 들었어요. 저는 마치 요정이 사는 봉우리를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용들이 사는 연못을 내려다보기도 하는 것 같았어요. 몇몇의 이야기들은 유식한 학자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어요, 그 학자들은 그들이 데리고 있던 전문적인 이야기꾼들과 똑같이 감칠맛나게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이 땅의 학자들은 어린아이들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꾼들을 둘러앉아서 이야기를 들어요.9)

     18-19세기 서울에는 전문적인 이야기꾼인 강담사(講談師)가 길거리에서 이야기판을 벌이거나, 대가집을 찾아다니며 심심한 노인들을 상대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이승만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베르타도 서울에 와서 전문적인 이야기꾼(강담사)로부터 이야기를 듣거나 학자로부터 이야기를 들어 Tales told in Korea라는 동화책을 출판하였다. 
     베르타의 표현을 빌면, 이 서문에서 유식한 학자로 표현된 이승만도 베르타에게 전문적인 이야기꾼처럼 흥미롭게 옛이야기들을 들려주었을테고, 아마 이승만 자신도 어린 시절에는 “(이 땅의) 어린아이들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꾼들을 둘러앉아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청자(聽者)로 구비문학을 향유하다가, 나이가 들자 전문적인 이야기꾼처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게 된 것이다.        
     베르타는 이 책 속표지에 “Dedicated to DR. Syngman Rhee from the garden of whose memory came many of these stories”라는 헌사를 붙여 Frederick A. Stokes Company 출판사에서 1932년에 출판되었다.10)  
     이승만은 전근대 한국의 세 가지 문학 형태, 즉 한문학, 국문문학, 구비문학에 모두 조예가 깊은 문인이었다. 



  • ▲ 아버지 이경선 옹과 6대독자 이승만ⓒ자료사진
    ▲ 아버지 이경선 옹과 6대독자 이승만ⓒ자료사진
    2. 과거제도와 이승만의 한시 공부 

     이승만은 타고난 시인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많은 시를 짓게 된 까닭은 조선시대 문화사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관직과 학문, 농업 이외에 특별히 선택할 만한 직업이 없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 직업일 뿐만 아니라 신분이기도 했으므로, 선비가 관직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할 수는 없었다. 관원이 되건 학자가 되건 한문(漢文)을 배워야 했으며, 관직을 얻기 전의 젊은 양반 자제들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개 하루 종일 독서하고 글을 지었다. 문과의 시험과목은 생원 진사시 1차부터 문과 3차까지 모두 글쓰기 과목이었다.
     조선시대 문과 합격자들이 급제할 때까지 공부한 기간은 적어도 25년 내지 30년이 걸렸으니11), 대부분의 청년들은 이 동안 한문으로 된 책을 읽고 한문으로 글을 지었으며, 직업 지식인이라면 의례 한시를 배우고 지었다. 과거제도의 1차시험인 진사시가 한시(漢詩) 짓기였기 때문이다. 
     생원시와 진사시를 소과(小科)라고 했는데, 진사시를 감시초장(監試初場), 생원시를 감시종장(監試終場)이라고도 하였다. 진사시는 부(賦) 1편과 고시(古詩)·명(銘)·잠(箴) 가운데 1편을 시험하다가, 1746년(영조 22) 4월에 반포된 『속대전(續大典)』에서 진사시의 고시과목이 부(賦) 1편과 고시(古詩) 1편으로 축소되었다. 과시(科詩)는 대개 36구 안팎의 형식에 따라 지었다.
     이승만이 응시하던 19세기의 과시는 고시문(古詩文) 가운데 한 구절을 제목으로 삼고, 제목 가운데 한 글자를 운자(韻字)로 삼아, 제4연(鋪頭)에 그 글자를 압운자로 사용하면서, 7언 18운을 마지막 구절까지 같은 운자로 짓는 정식(程式)의 행시(行詩)였다. 2구씩 한 짝이 세 개가 모여 한 단락을 이루며, 모두 18개의 짝, 즉 여섯 개의 단락으로 구성되는 운문이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대개 5세에 서당에 입학하여 『천자문』을 배우면서 학업을 시작하였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천자문(千字文)』을 6세 때에 모두 암송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12)
     조선시대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배웠던 글은 『천자문(千字文)』이다. 제목 그대로 ‘천 글자로 된 글’이다. 그래서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하는 식으로 천 글자가 나열된 글 또는 책이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천자문은 한 권의 글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시이다.
     한시가 되려면 글자 수와 운(韻)을 맞춰야 한다. 오언절구에는 둘째 구와 넷째 구 끝자리에다 같은 운에 속하는 글자들을 써서 운을 맞췄고, 칠언절구에는 첫째, 둘째, 넷째 구의 끝자리에다 운을 맞춰 썼다. 『천자문』도 네 글자씩 구절을 나누고 운을 맞춰 지었다. 그렇게 천 글자가 모여 한 편의 시가 된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자연·인간·사회를 다 가르치려고 각 분야의 글자들을 뽑았기 때문에 시의 의미 전개가 몇 단락으로 나눠졌을 뿐이다. 이에 따라 운도 바꿔 썼다. 어려운 집 아이들은 『천자문』만 배우고도 다방면의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13)
     아이들이 천자문을 마치면 『추구(推句)』를 배웠는데, 이 책 역시 시 형태로 엮어졌다. 『천자문』과 달리 오언(五言)으로 되어 있으며, 두 구절 또는 네 구절로 된 대구(對句)들을 모았다. 누가 처음 엮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여러 형태의 필사본으로 전하는 것을 보면 필사하는 사람, 또는 서당 훈장의 취향에 따라 좋은 구절을을 뽑아 엮은 듯하다. 뽑아 엮었기에 책 이름을 ‘추천할 추(推)’가 아닌 ‘뽑을 추(抽)’를 써서 『추구(抽句)』라고도 한다.  

     月出天開眼  山高地擧頭
     달이 뜨는 건 하늘이 눈을 떠서고요
     산이 높은 건 땅이 머리를 들어서래요

     山影推不出  月光掃還生
    산 그림자는 밀어도 나가지 않고
     달빛은 쓸어도 다시 생기네요.

     無足蛇能走  有口鳥未言
     발이 없어도 뱀은 잘 달리는데
     입이 있어도 새는 말을 못하네요.

     달과 산, 하늘과 땅, 눈과 머리, 빛과 그림자, 발과 입, 뱀과 새는 아이들이 흔히 보는 것들이며, 『천자문』에 나오는 글자들이다. 비슷한 현상을 찾아내어 같은 어법으로 표현했는데, 주어와 술어가 모두 짝을 이뤄 한시의 틀에 맞췄다. 
      어린 이승만은 어머니에게 한시 짓기를 배웠다. 그가 6-7세 무렵에 지은 삼언시 

     바람은 손이 없어도 나무를 흔들고 
     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건너간다
     風無手 搖樹木 月無足 橫蒼空.

    는 구절은 추구(推句) 투의 구절이지만, 여러 종류의 추구를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바람(風)과 나무(木), 달(月)과 하늘(空)은 잘 드러맞는 글자들이고, 주어를 바람(風)과 달(月)로 맞춘 것도 자연스러운 솜씨이다. 게다가 추구는 모두 5언시인데 이승만은 삼언시로 지었으니 나름대로 창의력을 드러낸 것이다. 이후 이승만은 그 싯귀를 마음에 새기고 언제나 그런 시를 지으려고 애썼다고 한다.14) 
     한 인물의 인생관을 형성하는 10세부터 20세 무렵까지 이승만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봉사손 이근수(李根秀)가 가내에 세운 도동서당(桃洞書堂)에서 한학을 수련하였다. 항렬상 이승만의 조카뻘 되는 이근수는 1864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대사헌․사간원대사간․장예원경․시종원경 등 고위직을 지내고, 을사조약 후 조약의 무효화와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항일상소를 올렸던 인물이다.15) 이승만은 남산 서쪽 기슭의 우수현(雩守峴) 일대에 거주하는 일가들의 인도로 이근수의 서당에 다니며 그의 자손들과 함께 공부를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우남(雩南)이라는 호도 만들어졌다.  
      이승만은 적어도 3명의 선생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먼저, 수원유림 이승설(李承卨)에게서 경전(經傳)과 시부(詩賦)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승설은 포의의 선비에 불과했으나 나름대로 학식이 넉넉하고 성격이 너그러운 인물이었다. 다음, 부친의 친우인 청원 출신의 신면휴(申冕休)에게서 가르침을 배웠다. 신면휴는 이승만의 친우이자 그를 배재학당으로 인도한 신응우(申膺雨)․신긍우(申肯雨)․신흥우(申興雨) 3형제의 부친이었다.16) 이들 양인에게 이승만은 유학의 기초를 다지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1890년 이후부터 이승만을 가르친 김생원은 문장과 경사보다는 시와 풍류에 능한 인물이었다.17) 특히 김생원은 이승만에게 한시의 묘미를 전수한 한시 선생이었다. 이처럼 여러 선생들을 통하여 이승만은 유교지식인이 갖춰야할 지식과 소양을 닦아나갔다.   
      이승만은 부친의 소원대로 불철주야 과거 위주의 실용적인 유학공부에 매달렸다. 12세 쯤에 『통감절요(痛鑑節要)』 15권을 마친 후 『맹자(孟子)』․『논어(論語)』․『중용(中庸)』․『대학(大學)』 등 사서(四書)를 다시 반복해서 공부하였다. 이어 18세 이전 경까지 『시전(詩傳)』․『서전(書傳)』․『주역(周易)』 등 삼경(三經)을 모두 떼었다.18) 20세 전후에 과거에 급제한 준재들이 대체로 12-3세 경에 사서삼경을 모두 암송하고 20세 이전에 사서삼경의 오의를 터득하고 활용하는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승만의 유가경전 공부도 최상급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이외에도 이승만이 지은 시에는 『당음(唐音)』․『고문진보(古文眞寶)』 등의 문학서는 물론, 『사기(史記)』․『한서(漢書)』․『장자(莊子)』․『열자(列子)』 등 역사서와 제자백가서가 두루 인용되어있었다. 
     그는 6~7인의 동료들과 함께 전통적인 서당교육방식에 따라 한학을 연마하였다. 그리하여 봄과 여름에는 당․송(唐宋)의 시문을 읽고 시부와 과문(科文)을 작성하고, 가을과 겨울에는 경사(經史)와 고문(古文)을 독해하고 암송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19) 여름에 시부와 과문(科文)을 작성했다는 점은 통상적인 서당 공부의 방법이기도 했다.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1917-2000)의 예를 들면 아래와 같았다.

     한 글자도 막히지 않고 잘 외우며 잘 풀이하면, 음력 4월부터 7월까지는 한문으로 글짓기를 시켰다. 글짓기 공부는 다독(多讀)·다송(多誦)·다작(多作)의 삼다(三多)의 원칙을 세워 가르쳤다. 많이 읽고 많이 외우는 글공부는 박학(博學)과 강기(强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결국은 글짓기를 잘하는 것이 목표였다.20)  

     여름에는 서당이 더웠으므로 시원한 시냇가나 나무그늘로 가서 글짓기를 했다. 이승만은 과거의 1차 관문인 생원․진사시를 통과하기 위해 경서공부․서도수련․시부연습을 동시에 해나갔다. 이 세 방면 가운데서 이승만은 경서 분야에서는 별다른 흥취를 보이지 못했던 반면 서예와 시짓기 분야에서는 재능을 발휘하였다. 이렇게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낸 서예와 시짓기는 이승만의 평생취미가 되었다. 
      이승만은 시부 능력을 높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쏟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린 나이에 참신한 댓구를 지을 만큼 시짓기에 재능을 보였던 이승만은 한학 수학기간 동안 꾸준히 시공부를 하다가, 1890년부터 시에 능한 늙은 선비 김생원의 가르침 덕분에 시공부에 맛을 들이게 되었다. 이후 그는 4년 동안 김생원의 훈도하에 여름방학 철마다 두보(杜甫)․이백(李白)․왕유(王維) 등 당나라 유명 시인들의 우수시를 모아놓은 『당음』을 비롯하여 고금 시인들의 시를 공부하였다. 나아가 꽃철과 녹음철이 돌아오면 스승과 스승의 친구들을 모시고 승경처를 찾아가 시회를 갖기도 하였다. 그는 당시에 지은 즉흥 시구 중에서 “온갖 나무 복사꽃에 서너 가호 이웃집,” “술 즐겨 베푼 자리 붉어오른 얼굴엔 / 고운 정자 푸른 녹음 이웃하리” 등의 구절을 해방 후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21) 한편으로는 시를 지으면서, 한편으로는 1893~1894년 겨울 내내 도동서당 근처의 남묘(南廟: 남관왕묘)에서 『시전』 10권을 반복해서 외울 정도로 시 공부에 전념하였다.22) 
      이승만에게 시공부는 연이은 낙방의 시름을 덜어줄 묘약이자, 과거에 대한 대안책이기도 했다. 이승만의 부친 이경선(李敬善)은 재능있는 외아들 이승만을 관리로 만들어 집안을 부흥시키기를 염원하고 있었지만, 부패한 과거상, 한미한 신분 등으로 이승만은 과거시험에 합격할 수가 없었다. 이를 위해 시부(詩賦) 능력을 높이는 것이 그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과거공부를 하느라고 배웠던 한시 작법을 활용하여 그는 평생 많은 한시를 지었다.  
      
       
     
  • ▲ 종신죄수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50여권의 독서와 번역, 최초의 영한사전 편찬, 수백편의 신문 논설을 몰래 써셔 내보재 게재하고, 유명한 옥중저서 [독립정신]을 몰래 집필하였다.ⓒ자료사진
    ▲ 종신죄수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50여권의 독서와 번역, 최초의 영한사전 편찬, 수백편의 신문 논설을 몰래 써셔 내보재 게재하고, 유명한 옥중저서 [독립정신]을 몰래 집필하였다.ⓒ자료사진
     3. 문학의 공간과 한시

     이승만이 지은 한시는 크게 세 개의 공간에서 지어졌다. 첫째는 감옥, 둘째는 국권 찬탈 이후의 망명지, 셋째는 광복 이후의 조국이다. 이 세 개의 공간은 이승만의 정치와도 연관이 된다. 

    1) 징역의 공간 감옥23)
     
      이승만은 독립협회운동이 실패한 다음 1899년 1월 고종폐립음모(高宗廢立陰謀)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이때부터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서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는데, 문학과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것은 옥중서당의 개설과 운영, 『영한사전』의 집필, 『제국신문』 논설 집필, 한시 짓기 등이다. 이 가운데 죄수들이 잠들지 못하는 밤 시간의 지루함과 무료함을 달래준 것이 바로 한시 짓기였다. 
     그는 감옥이라는 단절된 공간을 문학 창작의 공간으로 넓히면서 상상력을 통하여 외부와 소통하고, 시간적으로는 고금과 소통하였다. 
     한시는 혼자 짓기도 하지만, 두 사람 이상이 함께 짓는 경우가 많다. 두 사람이 함께 앉아서 같은 운자로 주고받으며 짓는 경우에는 제목에 차운(次韻)이라는 글자가 들어가고, 멀리서 지어보낼 때에는 ‘기(奇)“자라든가 ’증(贈)‘자가 들어간다. 여러 명이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주기적으로 모여서 시를 짓는 경우도 많은데, 시사는 동인(同人) 성격이므로 정치색을 띠는 경우도 있다.  

    우연히 읊다 偶唫 
    서리 같은 기운에 칼날 싸늘해
    한번 죽기 어렵지 않지만 절개에 죽기 어렵네.
    이 세상 편안하게 살고자 하면
    장부의 의기를 그 누가 보랴.    
    秋霜志氣劍俱寒. 一死非難死節難. 
    如當此世安閒在, 丈夫義膽有誰看.

     이와 같은 시는 스스로 절개 지키기를 다짐하며 지은 것이다. 혼자 시를 짓다가 마음이 맞는 시인을 만나게 되어, 가슴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을 반갑게 만나다  喜逢詩人
    부평초같이 떠돌다 금란지계 맺으니 
    시 짓는 이 자리가 구면 같구려.
    소무가 북해에서 이능을 만난 듯24)정겹고
    왕휘지가 산음에서 대안도 찾아간 듯 흥겹네.25)
    백년의 이합집산을 칼 하나에 맡겼으니
    반세상 아양곡은26) 그대가 연주하게나.  
    깜박이는 등불 아래 한 그림자 더해
    가슴을 털어놓고 서로 반기네.  
    結隣萍水契蘭金. 詩席新緣似舊心. 
    情若逢陵時北海, 興如訪戴夜山陰.
    百年離合吾藏劍, 半世峨洋子解琴. 
    旅塌疎燈添一影, 忘形傾膽好相尋.

     그가 만난 시인이 누구였는지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맞는 시인들이 차츰 늘어났다.  이승만은 감옥 안에서 반정부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국사범들, 기타 이유로 투옥된 인사들과 함께 시를 짓기도 하였다. 『체역집(替役集)』에 수록된 시에 나타난 이승만의 시동인들은 전 시종 백허(白虛) 이유형(李裕馨)27)․내부협판 유성준28)․정위 임병길(林炳吉)29)․법무협판 이기동(李基東)․윤춘경(尹春景)․경무관보 김세진(金世鎭)30)․유진구(兪鎭九)31)․정백남(鄭白南) 등이었다. 이 가운데 이승만과 시로 대작할 만한 실력을 지닌 이는 이유형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시동인 가운데 이유형을 특별히 언급했는데,32) 시를 통해 심회를 나눈 가장 절친한 옥중친구가 이유형이었음을 의미한다.

    회포를 적다  述懷
    마음을 논하고 일을 논해도 마음 허전하기에
    무수한 사람마다 저 홀로 사는 것이라.
    배운 힘이 낮으니 얻기가 어려운 법
    그대에게 묻노니, 기러기 지나감을 또 어쩌겠나?
    論心論事知心虛. 無數人人獨自居. 
    學力淺卑難可得, 問君鴻度更何如.  (백허)

    백안으로 사람을 보아 우주가 텅 비었으니
    사람 없는 그 어느 곳에서 사람과 살까?
    사람 사귐에 내 맘 알아줌 적을까 한하지 말지니
    자기를 알고 남을 아는 것이 같지 아니함일러라.
    白眼看人宇宙虛. 無人何處與人居. 
      交人莫恨知心少, 知己知人更不如.

     이 시는 두 사람이 같은 제목으로 5수씩 잇달아 지었는데, 모두 이유형이 먼저 짓고 이승만이 허(虛)·거(居)·여(如)라는 운자를 맞춰서 따라 지었다. 〈감회가 있어 백허와 시를 주고받다 感懷 與白虛唱和〉와 같은 시는 이유형이 먼저 짓고 이승만이 차운(次韻)하여 짓는 형식으로 여섯 수씩 잇달아 지었다. 이승만이 이유형의 시까지 12수를 함께 실었으니, 공동 작품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가 아래와 같은 시에 이르러는 누가 먼저 짓고 다른 사람이 차운하여 짓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한 수를 함께 지었다. 누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지었는지 알 수 없게, 글자 그대로 공동 작품이 되었다. 

    시종 이유형(호 白虛)와 함께 짓다  與李侍從裕馨號白虛共賦
    한평생 품은 뜻을 세상에 펼치지 못해 
    비 뿌리고 바람 쳐 물결이 이네.
    새장 속의 학은 구름 만리 그리워하고
    숲속의 새는 삼경 달밤에 외로이 꿈꾸네.
    책보따리 벗 삼으니 짐이 무겁건만
    갑 속의 칼은 마음을 알아 목숨 가볍게 여기네.
    세상에 황금은 가는 곳마다 있으니
    가난하다고 나라 경영을33) 어찌 잘못하랴.    
    一生胸海不平鳴。雨打風飜浪易警。
    籠鶴遙懷雲萬里、林禽孤夢月三更。
    筴書爲伴行裝重、匣劒知心性命輕。
    世事黃金隨處有、貧寒那得誤經營。
      
    화운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아서    待和韻不到

    오늘 밤엔 장경성이 보이지 않고 
    오경 종소리에 달까지 지네.
    소단(騷壇)에선 날마다 귀신 울음 들리더니
    노곤한 봄이라 묵루병(墨壘兵)도 누워 늘어졌네.
    북쪽 기러기 울음 들리잖고 날만 가누나.
    내 비록 고단한 군사라 적수는 못 되지만
    오언성을34) 일찌감치 닫지는 말아 주소. 
    今宵欠看耀長庚. 殘月下窓五鼓鳴. 
    排日騷壇聞泣鬼, 困春墨壘臥休兵.
    南禽夢苦關重掩, 北鴈聲遲漏易傾. 
    縱我孤軍非敵手, 緣何早閉五言城.

     장경성(長庚星)은 태백성(太白星)이라고도 하는데, 초저녁에 서쪽 하늘에 보인다. 장경성도 보이지 않고 달도 졌는데 잠이 오지 않아 시를 지었지만, 상대방이 화운시를 보내주지 않자 서운해하는 구절에서 한시에 전념했던 시인 이승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벗이 부친 편지를 보고 感友人寄書   
    어젯밤 창틈으로 문성이 비추더니
    반가운35) 글 싣고 기러기 왔네.   
    고향 동산 찾아서 혼 떠나가자
    한바탕 비바람에 꿈이 깨었네.
    사람의 일이란 게 구름같이 정처 없으니
    흐르는 세월 아쉬워도 멈출 수 없네.
    그대와 놀던 곳 그릴 때마다
    도동 연소정이 마음에 자리잡네.     
    羈窓昨夜照文星. 書雁帶來舊眼靑. 
    古洞烟霞魂獨去, 一場風雨夢初醒.
    縱知人事雲無定, 只惜年光水不停. 
    每憶共君遊戱處, 係心桃渚鷰巢亭.

     도동서당에서 같이 배웠던 동문 친구가 편지를 보내주고 이승만이 답장으로 시를 지어 보내면서, 감옥 안에 갇혀 있던 공간이 외부로 확장되었다. 효자였던 이승만은 아버지가 보내준 편지를 받아보고 어버이를 위로하는 시를 지어 보냈다. “봄소식 머지 않다”는 구절을 통해서 어버이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표현이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이다. 

    어버이를 위로하며  慰親
    두어 장 편지 속에 봇이 두 자루
    읽기도 전에 눈물이 앞섭니다.
    술 바치고 싶지만 길이 없어 가르침 어겼으니
    장수하시길 비는 정성으로 시를 올립니다.
    옥에 갇혔어도 죄 가벼우니 하늘은 아십니다.
    임금 섬기는 의리 중하니 효도하니 어렵습니다.
    올해는 색동옷 입고 모시지 못하지만
    봄소식 머지 않으니 다행입니다.   
    數幅箋中筆二枝. 感恩有淚奉書時. 
    養情違訓供無酒, 獻壽乏誠頌以詩.
    繫獄罪輕天有鑑, 報君義重孝難思. 
    今年縱未斑衣侍, 惟幸陽春在不遲.

     조선시대 감옥은 죄수에게 형벌을 선고하기 전까지 심문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가둬두던 곳이었다. 유배라든가 태형의 선고가 내려지면 형벌이 집행되면서 감옥을 떠났다. 그러나 대한제국 시대의 감옥은 징역을 살던 곳이어서, 몇 년씩 징역을 사는 것 자체가 형벌이었다. 그가 징역을 사는 모습은 『체역집(替役集)』 마지막 장에 가서야 보인다.   

    푸른 옷을 입고 노역에 나가다 靑衣赴役 
    선비가 궁해지니 글 읽은 걸 후회해
    삼년 옥살이를 벼슬이 만들어냈네. 
    철사줄로 함께 묶이니 정은 더욱 두터워졌지만
    용수를 덮어쓰니 알던 얼굴도 모르겠구나.
    예부터 영웅도 옷에 이가 있다지만      
    지금은 고기 없이 밥 먹는 신세.
    때가 오면 모두 뜻대로 되리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초심을 지키리라.   
    士人窮途悔讀書. 三年絏縷做官餘. 
    鐵絲結伴新情密, 藁笠逢人舊面疎.
    從古英雄衣有虱, 而今客子食無魚. 
    時來神物終當合, 寧死壯心不負初. 

     이 시 뒷장에 ‘계묘년’이라 쓰여 있다. 계묘년은 1903년인데, 그가 이 시를 지은 것이 1903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노역하는 모습을 읊은 시를 『체역집(替役集)』 마지막 장에 편집한 것은 의미가 있다. 그는 시고(詩稿) 첫 장에 “一千九百年 / 庚子春 謄 / 替役集”이라고 써서, 감옥살이를 시작하면서  ‘체역집(替役集)’이라는 시집 제목을 정해 놓았다. 이승만이 감옥 안에서 지은 한시를 편집하고 제목을 ‘체역집(替役集)’이라고 붙인 까닭은 “신체적인 노역[役]을 정신적인 노역으로 바꾸겠다[替]”는 뜻이다. 이 시를 시집 마지막 장에 편집한 것은 정부가 내린 판결에 따라 감옥 안에서 노역하였지만,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까지 바뀌지는 않았다는 자부심을 보인 것이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초심을 지키리라”라는 비장한 다짐으로 이 시를 마무리한 것이 그러한 선언이다. 
       

  • ▲ 1920년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이승만, 중국인으로 변장, 시체운반 화물선 시체창고에 숨어 밀항하였다.ⓒ자료사진
    ▲ 1920년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이승만, 중국인으로 변장, 시체운반 화물선 시체창고에 숨어 밀항하였다.ⓒ자료사진
    2) 망명의 공간 중국과 미국, 유럽

     이승만의 자필 시고(詩稿) 『체역집』 뒤에는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 지은 시들이 실려 있다. 첫 번째 시는 하와이에서 화물선을 타고 상해로 떠나며 지었다. 그의 망명 공간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민국 이년 십일월 십육일에 임병직과 함께 화물선 West Hika에 몰래 들어가 철궤 속에서 밤을 지내며 배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이튿날 새벽에 나갔는데 뱃사람을 보았다. 청나라 사람 모양으로 가장하고 호놀루루 항에서 상해에 이르렀다. 民國二年(一九二○)十一月十六日, 與炳稷潛入運物船West Hika, 在鐵櫃, 經夜, 待船發, 明曉出見船人, 佯作淸人樣, 自湖港, 至上海.     
    민국 이년 동짓달 
    하와이에서 남 몰래 배를 탔네.
    겹겹 판자문 속에 난로가 따뜻하고
    사면이 철벽이라 칠흙같이 어두웠지.
    내일부터는 산천도 아득할 텐데
    이 밤 따라 세월이 지리하구나.
    태평양 위를 두둥실 떠 가니
    이 가운데 황천 있음을 그 누가 알랴.
     -이때 중국인의 시체가 든 관이 옆에 있었다.   
    民國二年至月天. 布哇遠客暗登船. 
    板門重鎖洪爐煖, 鐵壁四圍漆室玄.
    山川渺漠明朝後, 歲月支離此夜前. 
    太平洋上飄然去, 誰識此中有九泉. -時有華人尸體入棺在側.
           
     그는 자신이 황천에 있다고 표현하였다. 중국인 시체가 든 관 옆에 숨어 누웠으니 황천이라고 했지만, 독립운동을 하러 목숨 걸고 태평양 건너 적진에 뛰어드니 황천이라고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망명 공간에서 지은 시에 나오는 외국의 인명이나 지명을 다른 시인들처럼 가차문자(假借文字)를 사용하여 표기하지 않고 West Hika, Kawela Beech, John 등의 알파벳으로 직접 표기하였다. 괴거시험이라는 제도를 이미 벗어난 상태였기에 가능한 표기방법이었지만, 국내에 머물던 시인들과는 달리 망명 공간이었기에 더욱 자유롭게 표기했을 것이다.  
      독립운동기에 이승만은 미국과 하와이, 상해, 유럽과 일본, 러시아 등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는 주로 선편과 기차를 이용하여 돌아다녔는데, 비는 시간이 나면 자주 한시를 지었다.

    십이월 오일 황포강에 배를 대고 몰래 육지에 올라 맹연관에 잠시 머물다
     -장붕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가 오기를 기다리며  十二月五日, 船泊黃浦江, 潛上陸, 暫寓孟淵館. -投書張鵬, 待其來.    
    맹연관 나그네 잠 못 이루는데
    기다리는 벗은 안 오고 가랑비만 내리네.
    하루 종일 책 보노라니 눈이 어지러워
    등불 등지고 누워서 새 시를 짓네.
    孟淵館裏客眠遲. 待友不來細雨時. 
    盡日看書衰眼暈, 背燈偃臥試新詩.

     12월 5일 상해에 몰래 상륙한 그는 장붕(張鵬)에게 편지를 보내고 나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숙소에서 이 시를 지었다. 망명의 공간은 미국에서 중국으로 넓어졌지만 늘 쫓기는 몸이어서 마음 편할 틈이 없었다. “하루 종일 책 보노라니 눈이 어지러워 시를 짓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기다리는 벗은 오지 않고 잠도 오지 않아 긴장을 풀기 위해서 시를 지은 것이다. 
     망명 시기의 일기를 주로 편집한 『국역 이승만 일기』에는 한시가 1편만 실려 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한자문화권에서 벗어났기 때문인지 한시를 짓지 않다가, 이날 아침 오랜만에 지은 것이다. 

    Belle-vue Hotel 早起  벨뷰 호텔에서 일찍 일어나다     
    好鳥啼何早  아리따운 새 어찌 일찍부터 울어대나
    樓中遠客眠  누각 속엔 먼 나그네 잠들어 있는데. 
    津湖無限景  제네바호의 끝없는 경치 중에서
    最是曉山天  새벽의 산과 하늘 가장 좋구려. 
    -津湖指Geneva Lake  -진호(津湖)는 제네바 호수를 가리킴.36)   
       
     이승만은 1933년 국제연맹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가입을 신청하러 제네바까지 갔다가 거부되자 글리옹의 벨 뷰 호텔로 돌아와, 5월 20일 아침에 이 시를 지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모처럼 한자와 불어를 섞어 쓰며 시를 지었는데, 복잡한 국제정세는 한 글자도 보이지 않고, 나그네 잠을 깨운 새와 제네바호의 아름다운 경치만 노래하였다.     
     망명 시기에 지은 한시로는 태평양에서 지은 시가 있다.

    태평양 배 안에서  太平洋舟中作
    하늘과 물 사이에 이 한 몸 떠돌며 
    만릿길 태평양을 몇 번이나 오갔던가.
    어느 곳 가든지 마음에 드는 곳 없어
    꿈은 언제나 한양의 남산일세.  -1935년 늦가을.
    一身泛泛水天間. 萬里太平幾往還. 
    到處尋常形勝地, 夢魂長在漢南山. -乙亥暮秋

     태평양이라는 공간은 미국과 한국, 일본 사이에 있는 큰 바다이다. 그는 유학과 망명 길에 오르느라고 태평양을 오갔으며,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취임하느라고 다시 오갔다. 지구를 몇 바퀴 돌면서도 그가 늘 그리워하는 곳은 한양의 남산, 즉 어릴 적에 살고 서당에 다니던 남산자락이었다. 그는 온 세계를 떠돌면서도 우남(雩南)이라는 호를 통해 늘 한양의 남산과 이어졌다. 광복 후 시인 서정주가 그의 전기를 쓰려고 경무대를 드나들 때에 그가 이 시를 읊어주자, 서정주는 순간적으로 “내 가슴 속이 문득 북받쳐오르며, 저절로 두 눈에선 눈물방울이 맺혀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독립국가로 인정받기 위해 온세계를 돌아다니던 늙은 혁명가의 꿈을 공감했기 때문이다.         
     3) 돌아와 대통령으로 다스린 조국

     망명 공간에서 줄어들었던 한시가 조국에 돌아오자 다시 많이 지어지게 되었다. 조국에 돌아온 기쁨과 대통령으로서 겪어야 할 어려움을 모두 한시로 풀어낸 것이다.
     
       옛 집을 찾아  訪舊居 
    도원(桃園)37) 옛 친구들이 연기처럼 흩어져 
    풍진 세상 오십년을 바삐 달리다,
    흰 머리로 돌아오니 뽕나무밭이 바다로 변해38)    
    옛 사당39) 앞에서 봄 바람에 눈물 흘리네.-1946년 가을 귀국한 뒤에
    桃源故舊散如烟. 奔走風塵五十年. 
    白首歸來桑海變, 東風揮淚古祠前.-丙戌秋歸國後

     그가 오십년만에 흰머리로 찾아온 고향 동네 도동은 상전벽해처럼 바뀌어 인물들도 다 흩어지고, 양녕대군의 낡은 사당만 남아 있었다. 광복 조국에서 그의 공간은 돈암장, 마포장, 이화장을 거쳐 경무대로, 그리고 피난지를 거쳐 경무대로 바뀌어간다.
        
    미국 여행길에 짓다  在美旅行時卽事
    육만릿 길을 앉아 오가는데
    다만 마흔네 시간만 걸렸네. 
    일만 육천 척 하늘에 떠 보니
    위에는 구름도 없고 아래에 산도 없네.-1947년.
    六萬里行坐往還. 只要四十四時間. 
    浮空一萬六千尺, 上無雲霧下無山.-丁亥

     이승만은 다시 미국 여행길에 올랐는데, 광복된 조국의 대표적인 지도자였으므로 항공기를 타고 44시간만에 태평양을 건너갔다.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태평양은 그의 공간이 바다에서 공중으로 확대되었음을 뜻한다.   

    가을 달밤  秋夜
    내 소원은 삼천만과 함께
    나라 있는 국민이 되는 것일세.
    늘그막엔 시골로 돌아가
    한가한 사람으로 지내려네. -정해년(1947) 서울에서  
    願與三千萬, 俱爲有國民. 
    暮年江海上, 歸作一閑人. -丁亥於漢城   (1947년 仲秋 敦巖莊)

     이승만이 귀국하여 정권을 잡을 것처럼 보이자, 친일파 갑부 장진섭이 돈암장을 숙소로 빌려주었다. 이승만은 이곳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면서 미국을 오가며 정국을 구상하였다. 삼천만 동포와 함께 나라 있는 국민이 되면 시골로 돌아가서 살고 싶다는 것이 그가 바라던 공간이었다.  

    전쟁 중의 봄  戰時春 
    반도 산하에 진 치는 연기 자욱하고
    되놈의 깃발 미군 돛대가 봄 하늘을 가리웠는데,
    집 없이 떠 도는 이들 
    생쌀 씹고 다니네.40)
    무너진 거리엔 벽만 남아 있고  
    산 마을도 불에 타 새 밭을 일구네. 
    전쟁 그치지 않았건만 봄바람이 불어와
    피 흘려 싸우던 들에 새 잎 돋아 나오네.-신묘년(1951) 봄 부산에서.
    半島山河漲陣烟. 胡旗洋帆翳春天. 
    彷徨盡是無家客, 漂泊誰非辟穀仙.
    城市遺墟餘古壁, 山村燒地起新田. 
    東風不待干戈息, 細草遍生敗壘邊.-辛卯春, 於釜山.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했지만, 그가 돌아온 조국의 공간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 낙동강 이남으로 줄어들었다. 무너진 거리엔 벽만 남고 산 마을도 불에 타 버렸지만, 국민들은 새 밭을 일구고 새 잎이 돋아나왔다. 전쟁이 그치지 않은 공간에서 그는 희망을 본 것이다. 


     
  • ▲ 이승만을 아버지처럼 존경한 밴틀리트 사령관과 함께 6.25전선을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 이승만을 아버지처럼 존경한 밴틀리트 사령관과 함께 6.25전선을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4. 정치 외교적인 시
     
     문학의 효용성을 여러 가지로 들 수 있지만, 공자는 일찍이 사신의 응대를 예로 들었다. “시 삼백편을 외우고도 그에게 정사를 맡겼을 때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외국에 사신으로 내보내도 혼자 응대하지 못한다면, 그가 아무리 많이 읽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子曰 誦詩三百 授之以政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亦奚以爲]”고 한 〈자로(子路)〉편의 말대로, 시를 배우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신의 임무를 맡아 외국에 나갔을 때에 응대하기 위한 것이었다.41) 
     과거시험 과목에서 시(詩)를 제외하자는 의견이 자주 거론되었지만, 그때마다 사신 응대를 이유로 시험과목에 살아 남았다. 이승만도 젊은 시절에 과거시험 공부를 하기 위해 시를 배우고 지었다. 그가 한시를 정치 외교적인 목적으로 지은 것은 대통령이 된 뒤부터이다. 망명시기에도 외교적인 활동을 많이 하였지만, 외국인에게 시를 지어준 적은 없었다.
     1953년 해인사(海印寺)에 가서 지은 시에 “-癸巳菊秋, 與美大使뿌릭스內外, 불릿스大使, 테일러將軍, 及諸友, 登海印寺.”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미국 대사 부부와 장군 및 여러 친구들과 해인사에 들렸다는 뜻인데, 이 시를 그들에게 주었다는 말은 없으니 외교적인 목적으로 지은 것은 아니다. 

    밴프릿 장군을 위해
    한 몸이 흰 구름 위에 날았지요.
    모든 나라가 공산군 불길 속이었지요.
    백번 싸워 공을 이룬 곳이
    서쪽 유럽과 동쪽 아시아였지요. 
    一身白雲上, 萬國赤焰中. 
    百戰成功地, 歐西與亞東. 

    테오도어 프란시스 그린
    동아시아의 난리 속에서
    장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셨지요.
    민중을 극진하게 구제하며
    고생과 즐거움을 국민과 함께 하였지요.
    東亞風塵裏, 將軍駐我邦. 
    蒼生極濟意, 甘苦與民同. 

    해리 띄 펠트 제독
    제독께서 동아시아를 진정시키니 
    우방들이 모두 다 환영하네.
    새해를 축하하는 오늘
    개선가 부르며 태평을 칭송하네.
    元戎鎭東亞, 友國盡歡迎. 
    今日新年賀, 凱歌頌太平. 

     그가 지은 외교적인 시 가운데는 미군 장성들에게 지어준 시가 가장 많다. 한국전쟁 중이거나 그 이후에도 해마다 장성들이 교채되어 오갔으므로, 그는 자신이 지은 시를 붓으로 직접 써서 미군 장성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는 1947년 미국에 다녀오는 길에 중국에 가서 장제스(蔣介石) 총통을 만났다. 항주 서호에서 함께 놀며 시를 지었는데, 시의 내용에 외교적인 언사는 없지만 두 나라의 정상이 함께 만나서 한시를 지었다는 자체가 외교적인 행위였다. 

    서호에서 놀며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장총통(蔣總統)을 만나고, 항주 서호(西湖)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西湖遊 -自美歸國時, 過訪蔣總統, 因作杭州西湖之遊.  
    서호에 봄날 배를 띄우고                       
    주인과 즐겁게 놀이를 하네.
    아홉 구비 붉은 난간에 세 달이 비치니          
    내 몸이 신선세계에 있는 듯하네.  -정해년(1947) 봄
    西湖春日泛蘭舟. 幸賴主公作此遊. 
    九曲紅欄三印月, 居然身在小瀛洲. -丁亥春

     
  • ▲ 부인 프란체스카와 망중한을 즐기는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 부인 프란체스카와 망중한을 즐기는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5. 맺음말 
     
    젊은 시절에 한시를 배웠던 이승만은 노년기에도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시를 지었다. 그는 1950년대에 대통령으로 있을 때에 이따금 비서관들에게 “여보게, 요새 내가 잠이 잘 안오네” 하며 창경궁 장서각에 가서 당나라 시인들의 시집과 기타 한문 서적들을 빌려오도록 하였다. 당시 장서각의 한적 담당자는 대통령이 도서대출을 신청하면 반드시 대출일자와 대출인을 기록한 다음에 책을 내주었다고 한다.42) 한시 읊기와 짓기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생활의 일부분이었다.
    현재까지 200여 편 남아 있는 시들을 시기별로 구분해 보면, 갑오경장 이전 도동서당 시절, 한성감옥서에서의 수형생활 시절, 상해 임시정부와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시절, 건국기 및 대통령 재임 시절 등 4기에 걸쳐 지은 것들이다. 이중 제1기 도동서당 시절에 『시전』 공부에 매달리며 가장 많은 시를 지었을 것으로 보이나, 몇 편이 『체역집』에 수록된 듯하다. 과거시험 공부를 위해서열심이 연습했을 과시(科詩)가 한 편도 남아 있지 않는 점이 아쉽다. 
    이승만은 감옥에 도서실을 설치하고, 수감자들에게 책을 빌려주며 장부도 작성하였다. 본인이 읽은 책들은 「소람서록(所覽書錄)」이라는 제목으로 기록해 놓았는데, 운서(韻書)는 한 권도 없었다. 20대 젊은 시절에 그는 이미 운서(韻書)를 보지 않고도 평측(平仄)에 맞게 시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갑오개혁 이후에 과거제도가 폐지되었으므로, 많은 청년들이 한문공부를 중단하고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이승만도 머리를 깎고 영어를 비롯한 신학문에 전념하였지만, 한시 짓기는 계속하였다. 망명지 미국에서 영어로 생활하였지만, 영시를 짓지는 않았다. 한시가 그의 생활이었던 것이다.       
    4.19혁명 이후 하와이로 망명한 뒤에는 한시를 짓지 않았는데, 신호열 선생이 번역하여 1961년 4월 5일 동서출판사에서 간행한 국역 『체역집』 속표지 글씨는 본인이 직접 붓으로 썼다. 1961년 3월 1일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쓴 글씨이다. 자신의 정치적인 고향 하와이로 말년에 망명하여 삼일절을 보내는 감회가 이 글씨에 담겨져 있다. 이 글씨야말로 또 하나의 ‘체역(替役)’인 셈이다. 
  • ▲ 눈을 감는 순간까지 남북통일을 기도하며 하와이 병상에서 보낸 이승만 부부.ⓒ자료사진
    ▲ 눈을 감는 순간까지 남북통일을 기도하며 하와이 병상에서 보낸 이승만 부부.ⓒ자료사진

    각주

    1) 유영익 저,『젊은 날의 이승만』, 연세대학교출판부, 2002, 6쪽
    2) 『협성회보』, [내보], 1898년 3월 5일.
    3) 주진오, 「청년기 이승만의 언론․정치활동」, 『역사비평』 33, 1996, 166쪽.
    4) 『제국신문』, 「군명을 칭악함이 신하의 큰 죄」, 1902년 10월 8일.
    5) 유영익, 앞의 책, 6쪽.
    6) 40년만에 조국에 돌아온 이승만은 한글맞춤법이 익숙치 않았으므로, 1954년 3월 29일 특별담화를 통해 “3개월 이내에 현행 맞춤법을 버리고, 구한국 말엽의 성경 맞춤법에 돌아가라”고 했다. 이에 따라 새로 임명된 이선근 문교부 장관은 《한글 간소화안》을 비밀리에 만들어 6월 26일 발표해, 공적인 심의나 수정을 거치지 않고 7월 2일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학계와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1955년 9월 19일 “민중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자유에 부치고자 한다”고 발표함으로써 한글 간소화 파동은 끝을 맺었다. 
    7) 한국시인협회 회장 김종해는 “1898년 『협성회회보』에 ‘고목가’가 발표된 것으로 미루어 1898년부터를 한국 현대시의 기점으로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2004년 10월 24일.
    8) 서정주, 『우남이승만전』, 71-72쪽. 대통령 재임시에 이승만은 명창 朴貴姬와의 교분을 나누었고, 이런 인연으로 국악계에 많은 도움을 주도록 특별지시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9) 김성철, 「일제 강점기에 영역(英譯)된 한국 동화집  Tales told in Korea의 편찬 경위와 구성의 의미」, 고전과 해석』 19집, 2015, 263-264쪽 
    10) 베르타는 1931년 6월, 한국의 옛이야기들을 수집하러 서울에 와 있었다. 이승만이 1925년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해임된 뒤에 미국 각지를 여행하고 하와이에서 머물며 활동하던 시기에 베르타를 만나서 한국의 옛이야기들을 들려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의 속표지에 “Tales told in Korea By Berta Metzger, Author of Tales told in Hawaii”라고 소개되었는데, Tales told in Hawaii는 같은 출판사에서 1929년에 출판되었다. 베르타가 Tales told in Hawaii를 낸 뒤에 하와이에서 이승만을 만나 한국의 엣이야기를 듣고는 흥미를 느껴 서울까지 가서 다른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보완한 다음, 1932년에 Tales told in Korea를 출판한 듯하다. 김성철의 앞의 논문 265-269쪽 참조.  
    11) 김영모, 『조선지배층연구』, 일조각, 1986, 505쪽
    12) 이정식, 「청년 이승만 자서전」, 『뭉치면 살고…』, 67쪽.
    13) 허경진, 『옛 선비들이 어릴 적 지은 한시 이야기』, 알마, 2014, 17-18쪽
    14) 이정식, 「청년 이승만 자서전」, 67-68쪽.
    15) 『일성록』, 1905년 11월 1일. 
    16) 신면휴는 이승만의 옥중학당 개설을 기록한 글에서 “이승만군은 아동 시부터 나에게 배운 자이다”라고 회고했다. 전택부, 『인간 신흥우』 (대한기독교서회, 1971), [부록], 「옥중개학전말」, 19-20, 61, 401쪽.
    17) 서정주, 『우남이승만전』, 67, 82-83쪽.
    18) 서정주, 『우남이승만전』, 70, 87쪽. 서당 선배 신긍우 형제들의 권고로 『三國志』를 처음 접한 이승만은 이를 단숨에 읽어 치운 다음에 『水滸傳』․『西廂記』․『剪燈神話』 등 중국 고전소설을 연이어 독파하였다. 그는 부모들이 금하는 『서상기』를 청지기 최응원의 방에 가서 숨어서 읽었을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19) 이승만이 이근수를 위해 집필한 「합장묘지문」(1956); 고정휴, 「개화기 이승만의 사상형성과 활동」, 『역사학보』 109, 1986, 27쪽에서 재인용.
    20) 허경진, 『연민선생과 나』, 보고사, 2017, 99쪽
    21) 萬樹桃花屋數隣; 好酒登宴紅作友 名亭隔樹綠爲隣. 서정주, 『우남이승만전』, 82-87쪽.
    22) 『대통령 이승만박사 담화집』 2, 「배재학당 창립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1955.6.8), 257쪽. 
    23) 현재 남아 있는 이승만의 시 200여 수 가운데 75%가 한성감옥서에서 지어졌으며, 그 가운데 영물시(詠物詩)가 가장 많다. 영물시의 특성에 관해서는 오영섭 박사의 논문 「이승만의 한시세계」에 자세히 소개되었으므로, 오늘은 중복을 피하기 위해 설명하지 않는다. 
    24) 한나라 장군 이릉(李陵)은 흉노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20여년을 살다 죽었다. 소무(蘇武)는 흉노에게 잡혔으나 의지를 굽히지 않아, 북해(北海)에 양치기로 보내졌지만 굶으면서도 끝내 절개를 지켜 18년만에 돌아왔다. 원문의 봉릉(逢陵)은 소무가 이릉을 만나는 모습을 말한 것이다.
    25) 왕휘지가 산음에 살 때 한밤중에 눈이 크게 내리자, 갑자기 대안도(戴安道)가 보고 싶어졌다. 그때 대안도는 섬계에 살고 있었으므로, 밤에 작은 배를 타고 그를 찾아나섰다. 하루 밤이 지나서야 그의 집에 이르렀지만, 문 앞에 이르자 들어가지 않고 그냥 돌아왔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그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흥이 나서 찾아왔는데, 흥이 다했으니 돌아가는 것이다. 어찌 반드시 친구를 만나야만 하랴?”-『세설신어(世說新語)』  
    26)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는데, 높은 산에 뜻이 있으면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듣고서, “태산같이 높구나”라고 말하였다. 또 흐르는 물에 뜻이 있으면 종자기가 듣고서, “강물처럼 넓구나”라고 하였다. 백아가 생각한 것을 종자기가 반드시 알아맞혔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가 “지음(知音)이 없다”면서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 -『열자』「탕문편(湯問篇)」
      높은 산[峨]와 넓은 바다[洋]를 합하여, 「아양곡(峨洋曲)」이라 한 것이다. 
    27) 이유형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에 魯城 등지에서 유림을 규합하여 각목을 가지고 동학도를 방비할 때에 자신의 군사를 ‘君子軍’이라 칭한 것은 황탄한 행위였다는 이유로 투옥된 인물이다. 『[舊韓國]官報』, 1900년 9월 19일.
    28) 1902년 개혁당사건으로 투옥된 인물이다.
    29) 대신가에 폭탄을 투척하고 선혜청에 방화했다가 1899년 6월에 체포되어 1902년에 처형된 인물이다.
    30) 晉州府의 공금 횡령 사건으로 투옥된 인물이다.
    31) 친로파 金鴻陸을 칼로 찌른 사건으로 1898년 2월에 체포되어 3월에 종신징역형에 처해진 인물이다.
        『일성록』, 1898년 3월 19일; 『고종실록』, 1898년 4월 9일.
    32) 이승만은 “시인이며 학자인 이유형. 우리는 시를 짓기 시작했다”라고 적었다. 『뭉치면 살고…』, 「청년 이승만 자서전」, 80쪽.
    33) 영대(靈臺)에 큰 공사를 시작하여 / 땅을 재고 푯말을 세우니 / 뭇 백성들이 거들어 / 며칠도 되지 않아 다 이루었네 / 시작하며 서두르지 않았건만 / 뭇 백성들이 자식처럼 몰려왔네. (줄임) 經始靈臺, 經之營之. 庶民攻之, 不日成之. 經始勿亟, 庶民子來. 문왕(文王)은 백성들의 힘으로 대(臺)를 만들고 연못을 만들었지만, 백성들은 이것을 기쁘고 즐겁게 여겼습니다. 그 대를 일러 영대(靈臺)라 부르고, 그 못을 일러 영소(靈沼)라 불렀습니다. 백성들은 거기에 있는 사슴과 물고기 자라들을 문왕과 함께 즐겼습니다. 옛날의 현명한 임금들은 이렇듯 백성과 함께 즐겼으므로, 그런 것을 (자신도) 즐길 수 있었습니다.-『맹자』「양혜왕(梁惠王)상」
    경영(經營)은 위의 시 “땅을 재고 푯말을 세운다(經之營之)”에서 나온 말인데, 집을 짓는 것뿐만 아니라 나라를 다스린다는 데에까지 쓰였다. 
    34) 유장경이 오언시를 잘하여, 오언장성(五言長城)으로 자처하였다.     
    35) 진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었던 완적이 상을 당하였는데, 혜희(嵇喜)가 찾아와 문상하자 흰눈으로 쳐다보았다. 흰자위가 드러나도록 흘겨본 것이다. 백안시(白眼視)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의 아우인 혜강(嵇康)이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찾아오자 푸른 눈으로 맞아들였다. 백안시와는 반대로, 반갑게 맞는다는 뜻이다.   
    36) 류석춘·오영섭·데이빗 필즈·한지은 편역, 『국역 이승만 일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5, 192쪽.
    37) 이승만 박사가 살았던 남산 기슭에 복숭아밭이 있었으므로 복사골, 즉 도동(桃洞)이라 불렸다. 
    38) 마고(麻姑)가 말했다. “모신 이래로 동해가 뽕나무밭으로 바뀌는 것을 세 번이나 보았다.” - 갈홍 『신선전』 「마고」
    39) 양녕대군의 지덕사(至德祠)를 가리킨다. 양녕대군의 외손인 우의정 허목(許穆)이 1675년에 건의하여 남산 도저동 남묘(南廟) 건너편에 세웠는데. 지금의 서울지방병무청 자리이다. 1912년에 관악산 줄기 국사봉 밑에 있는 양녕대군의 묘소 앞으로 옮겼는데, 주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산65-42이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호이다.  
    40) “벽곡선(辟穀仙)”은 선술을 닦기 위해 생식(生食)하는 사람이니, 이 구절을 직역하면 “떠도는 이들 누군들 신선이 아니랴”라는 뜻이다. 
    41) 허경진, 「통신사와 접반사의 창수 양상」, 『조선통신사연구』 제2호, 2006, 2쪽.
    42) 1993년 2월 3일 이인수박사와 윤자경(尹字景)씨의 대담 녹취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