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 우선시하는 좌파적 발상의 한계 뚜렷… 변화 이끌어내는 건 언제나 '자유'
  • ▲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인 최초의 양의사가 된 ‘박서양'. ⓒ뉴시스
    ▲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인 최초의 양의사가 된 ‘박서양'. ⓒ뉴시스
    한반도 내 최초의 서양 의학교, 제중원의 1회 졸업생 박서양은 이렇게 절규했다.

    "누가 좀 말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만큼만 맞고, 꼭 언제까지만 당하고 나면 그 어떤 괴롭힘이나 방해도 더 이상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약속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무얼 어떻게 하면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고 누군가 말해 준다면 얼마나, 정말 얼마나 좋을까."

    ‘자유’가 뭔지 몰랐던 노비들

    박서양은 백정의 아들이었다. 그는 세브란스 간호원 양성소 교수가 되고도,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학생들에게 무시 받았다.

    사실 박서양이 성인이 되어 의사로 활동하던 때는 이미 갑오개혁(1894)으로 신분제가 폐지된 이후였다. 정책이 바뀐, 즉 '위로부터의 개혁'이 이뤄진 때였다. 그러나 정책만 변했지, 백성들의 처지는 전혀 변하지 않았고 생활도 그대로였다. 그럼 '아래부터의 혁명'이라 불리는 동학혁명은 성공했을까? 동학 교도들은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다. 그 때, 본인들을 왕과 양반들의 '갓난아기'라고 표현했다. 위로 하나 아래로 하나 마찬가지였다.

    신분 타파를 위해 여러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 왜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을까? 그들이 신분 타파를 외칠 때, 그 속에 '등'에 대한 갈망은 있었지만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동학 교도들은, 포교의 자유를 얻으려 해놓고도 본인들을 '왕과 양반에 묶여있는 노예'라 표현했다.

    허나, 이 모든 게 백성들의 탓은 아니었다. 신분 타파에 대하여, 백성들에게 형식적인 조치는 있었지만 실질적인 조치가 없었다.
  • ▲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의 저서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의 저서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세종 때 조선 백성 40%가 노비" ⓒ뉴데일리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 양반들만 알았던 한글

    백성들은 글을 몰랐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노비를 40%까지 늘리고 기생제도를 확립했다. 한글이 만들어진지 500년 후인 조선 후기에도, 양반을 제외한 다수 백성들에게 한글은 전해지지 않았다. 양반들은 문자를 독점했다. 이런 조선 후기의 모습을 지켜보던 해외 선교사들은 직접 한글을 공부했고 한글로 쓰인 성경을 보급했다.

    성경이 퍼지면서 한글이 퍼졌다. 한글로 쓰인 작품이 등장한다. 백성들은 이제 글을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능력이 생겼다. 그럼으로써 백성들은, 양반들의 지배로부터 한 걸음 벗어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언어란, 양반만을 위한 것이 아닌 백성을 위한 것이 됐다.

    제헌헌법 제86조... 백성들에게 일할 땅, 그리고 자유를 주다 

    또한, 백성들은 일할 땅이 없었다. 땅 역시 양반 지주들이 모두 가지고 있던 터라, 백성들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양반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양반들은 이를 이용해 소작농 백성들을 부려먹었다. 다수의 백성들에게는 땅, 그리고 자유가 필요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위해, 대한민국이 건국되자마자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제헌헌법 제86조에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를 명시했다. 법치주의의 시작이요, 백성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발판이었다. 이는 현행 헌법 제121조에 여전히 남아있다.

    ‘평등’을 ‘자유’보다 우선시하는 '좌파' 국민들에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자유와 평등. 이 두 가지를 두고 순서를 매긴다. ‘자유가 평등보다 우선한다’고 하는 진영을 우파라 하고, ‘평등이 자유보다 우선한다’고 하는 진영을 좌파라 한다. 그래서 우파는 사회주의를 인정하지 않고, 좌파는 인정한다.

    자유와 평등, 둘 다 중요하지만 순서를 똑바로 매겨야 한다.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을 보자. 노예 상태로 있던 조선의 노비들에게 자유가 주어졌고, 억압 받던 조선의 여성들에게 해방이 주어졌다. 신분 타파와 남녀평등을 지향하는 대한민국이 건국됐다.

    우리에게 평등은 너무나도 중요한 가치지만, 자유보다 우선시되어 있는 평등은 거짓 평등을 만들어낸다. 우리에게 필요한 평등은, 자유를 먼저 둔 기회의 평등이지, 평등을 먼저 둔 결과의 평등이 아니다.

    평등을 자유보다 우선시하니,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남과 비교한 자신을 바라보며 박탈감 혹은 헛된 우월감을 느끼지 않던가?

    평등을 자유보다 우선시하니, 급격한 최저시급 인상, 부자 증세, 기업에 대한 규제 등 사회주의 경제정책들만 나오지 않던가? 결국 일자리 문제는 더 위기 상황이 되지 않던가?

    북한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인데도, 평등을 자유보다 우선시하니 ‘북한 정권에다 돈을 줘야 한다’는,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북한에 줘야 할 것은 쌀이 아닌 자유다. 북한 정권에 쌀을 줘봐야, 북한 주민들에게는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자유가 없다.

    평등을 자유보다 우선시하는 순간, 악랄한 불평등을 만들어낸다.

    <필자 소개>

    황선우(1995년생)
    세종대학교 수학과 재학
    세종대학교 트루스포럼 대표
    청년한국 아카데미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