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서울시장 후보군, 세운4구역 재개발 잇단 비판"세계유산 훼손 우려" 공세에 오세훈 "정치 프레임" 반박내년 지방선거 앞두고 '개발 vs 보존' 대립 구도 짙어져
  • ▲ 유네스코 세계유산 '종묘' 정전 ⓒ국가유산청
    ▲ 유네스코 세계유산 '종묘' 정전 ⓒ국가유산청
    종묘 앞 초고층 건축 논란이 내년 지방선거 서울시장 후보군 간 정치 공방으로 확산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추진 중인 세운4구역 재개발을 놓고 여권의 잠룡들이 잇따라 비판에 나서며 조기 선거 이슈로 부상하는 모양새다.
  • ▲ 10일 정원오 성동구청장이 SNS에 올린 글 일부
    ▲ 10일 정원오 성동구청장이 SNS에 올린 글 일부
    10일 정원오 성동구청장은 SNS를 통해 "오세훈 시장이 추진 중인 세운4구역 재개발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의 경관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며 "서울시는 지금이라도 유네스코가 권고한 세계유산영향평가 절차를 정식으로 밟아야 한다"고 밝혔다.

    정 구청장은 "1995년 서울시는 유네스코에 '종묘 인근에 고층 건물을 짓지 않겠다'고 공식 약속했다"며 "20년 넘게 지켜온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단순히 시장의 판단 하나로 깨뜨릴 수는 없다"고 비판했다.

    이날 오전 김민석 국무총리도 SNS를 통해 "서울시의 초고층 계획은 근시안적 단견이 될 수 있다"며 "세계문화유산 지정이 해지될 정도로 위협적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 무리하게 한강버스를 밀어붙이다 시민 부담을 초래한 서울시로서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고도 꼬집었다.

    지난 7일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도 "오세훈 시장의 오발탄, 종묘 앞 142m 빌딩 건축 시도를 당장 멈추라"며 "서울의 역사와 품격을 훼손하는 행위로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의 SNS 글을 올려 오 시장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박 의원은 "보존이 곧 경쟁력인 지역을 개발로 밀어붙이는 것은 '가짜 개발'"이라며 "세운4구역은 원점에서 재검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 오세훈 서울시장이 7일 종로구 세운상가 옥상정원을 방문해 브리핑 후 세운4구역 현장을 내려다보고 있다.ⓒ서울시
    ▲ 오세훈 서울시장이 7일 종로구 세운상가 옥상정원을 방문해 브리핑 후 세운4구역 현장을 내려다보고 있다.ⓒ서울시
    이에 대해 오 시장은 "세운상가 일대는 60년 가까이 판잣집 지붕으로 덮인 도시의 흉물"이라며 "이번 사업은 종묘를 가로막는 개발이 아니라 오히려 생태·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복원 사업"이라고 반박했다. 또 "정치 프레임으로 서울시를 매도하지 말고 국무총리와 공개적으로 토론하자"며 맞불을 놓았다.

    세운4구역 재개발을 놓고 현직 오세훈 서울시장과 여권의 서울시장 후보군이 맞서는 대립 구도를 보이면서 정책 논란이 정치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한 도시계획학 교수는 "세운상가 일대 재정비는 서울시가 수년간 준비해온 도시재생 과제지만 타이밍상 총선·지방선거 국면과 맞물리며 '개발 vs 보존'이라는 단순 구도로 소모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다른 도시정책 전문가는 "도심 재개발의 방향성은 충분히 논의될 수 있는 사안이지만 정책이 정치적 대립 구도로 소비되면 행정 신뢰가 손상되고 협의 창구가 막힐 수 있다"며 "총리와 서울시장이 직접 공개토론을 하겠다는 수준까지 간 건 이미 정치화의 단계에 들어섰다는 신호"라고 말했다.

    앞서 서울시는 지난달 30일 세운4구역의 최고 높이 제한을 종로변 98.7m, 청계천변 141.9m로 완화하는 재정비촉진계획 결정을 고시했다. 이에 따라 종묘로부터 약 180m 떨어진 지역에도 140m급 건축물이 들어설 수 있게 됐다.

    이 같은 결정의 배경에는 지난 6일 대법원 판결이 있다. 대법원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서울시의회를 상대로 낸 '서울시 문화재보호조례 개정 무효 확인' 소송에서 서울시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서울시가 종묘 경계 100m 밖 건축 규제 조항을 삭제한 것은 위법이 아니다"라고 판단했으며 이 판결로 서울시는 세운4구역 재개발을 추진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확보했다.

    하지만 서울시의 고시가 나온 직후 문화재 당국과 정치권에서 일제히 반발이 이어지며 갈등이 재점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