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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이 임박하자 땅 더 빼앗기 전쟁이 절정을 이룬다. 이승만대통령은 '한치 땅이라도 포기하지 말라'고 정일권 장군에게 명령, 지휘하였다.ⓒ조선DB
숨죽인 세계가 주목했던 이승만과 로버트슨의 경무대회담이 고비를 넘자 판문점의 휴전 협상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소(小)휴전회담‘으로 불리던 이승만의 휴전협상이 돌파구를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잠잠하던 전선에선 중공군이 물밀 듯이 쇄도하였다. 휴전이 임박하자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마오쩌둥의 막바지 발악, 공산군은 중부전선 ’철의 삼각지대‘ 돌출부에 집중 공세를 가한다. 38선 이북으로 깊숙히 올라간 그 지역은 이승만대통령이 일찍이 ”화천발전소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려 우리 국군이 필사적으로 확보한 지역이다.
유엔군도 4만5천 대군을 동원, 지난 2년래 최대의 반격전을 벌이는데 그 중심은 역시 한국군이다. 16일 전선을 돌아본 손원일 국방장관이 말했다. ”이번에 내습한 적군은 국군의 10배도 넘는다.“ 중공군은 이승만과 로버트슨의 한미공동성명이 나오자 13일 저녁 6시 6개사단을 동원하여 정일권 장군의 제100부대를 비롯한 궁형(弓形)진지의 국군을 향해 ‘자살적 공격’을 가하며 인해전술로 남은 병력을 쏟아부는 것이었다.
★”촌토(寸土)의 땅도 포기치 말라“ 이승만, 정일권을 독려
이승만 대통령은 대군을 지휘하는 정일권 중장에게 독전(督戰)명령을 내린다. “한 치의 쓸모없는 땅일망정 포기치 말라. 부대를 방문코자 하였으나 테일러 장군의 충고로 기다리기로 하였다. 온갖 노력을 다하여 진지를 지키라. 이 시련의 시기에 나는 오로지 귀하의 용감한 장병에게 의지하고 무한한 신뢰를 갖는다. 나의 소원이 귀하와 장병들의 소원인줄 안다.”([조선일보] 1953.7.18.)
국군은 금성강(金城江) 일대에서 고지마다 필사적인 공방전을 벌여 마침내 중공군을 물리친다. 약 30마일 전선에서 3㎞를 더 북진하는데 성공하였다.
도쿄의 극동공군사령부는 오끼나와 기지에서 출발한 B-29 24대가 19일에만 한국의 중-동부전선 일대의 중공군 진지에 970톤의 폭탄세례를 퍼부었다고 발표했다. 1년전 8월 이래 최대의 공습, 휴전직전까지 쏟아 부은 폭탄 량만 5만 톤이 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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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남일, 미국의 ‘양보안’ 폭로...‘패전’을 ‘승전’으로 날조
로버트슨이 한국을 떠난 지 일주일 되는 19일, 판문점에 ‘폭탄’이 터진 듯 대소동이 일어난다. 공산측 대표 북한 남일이 유엔측의 기밀문서 내용을 폭로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유엔측 협상대표 해리슨(William K. Harrison, Jr.) 장군이 16일 제출한 “미국의 양보안‘인데, 공산측은 종래 비밀리에 취급하던 관례를 깨고 일방적으로 전세계를 향해 보란 듯이 공개하였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1)유엔은 한국측이 휴전조항을 준수하겠다는 보장을 받았다. 2)휴전준수에는 시간적 제한이 없다. 3)만일 한국군이 휴전협정을 위반하고 군사적 행동을 일으킬 경우 유엔군은 중립을 지키고 어떤 지원도 하지 않겠다는 3개항이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승만 대통령과 로버트슨이 합의한 것과 전면 배치되는 것이다. 이승만이 로버트슨에게 써준 문장은 ”한국은 휴전에 반대한다. 다만 미국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한줄 뿐이다. 그리고 이 휴전준수는 정치회담 기간 ’90일동안만‘이란 조건부였다.
이 조건을 미국은 깡그리 무시하고 뒷부분만 채용, 한국이 휴전협정 자체를 ’무기한 준수‘하겠다는 보장을 해준 것으로 조작한 왜곡문서를 공산 측에게 건네주었다는 사실이 남일의 폭로를 통하여 백일하에 드러나고 만 것이었다.
세계적 빅뉴스였다. 지난 한달간 경무대의 이승만 입술에서 ’휴전동의‘란 말이 나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렸던 중공과 북한은 해리스의 비밀문서를 받자 뛸 듯이 환호, 선전물로 내놓았다.
미국, 소련 등 세계 언론들이 대서특필 경쟁을 벌인다. 미국 아이젠하워는 눈 딱 감고 이승만 대통령을 패싱, 마치 한국이 휴전을 ’전면 수락‘한 것처럼 기정사실화 시켰다.
남일은 왜 그런 폭로극을 벌였을까?
자신들의 참담한 ’패전‘을 미국과 한국이 굴복한 ’공산당 승리’로 바꿔치기 위해서였다. 즉 미국과 한국이 “휴전을 애걸”해서 ‘항복;’을 받아낸 것처럼, “우리도 마지못해 정전에 응했다”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휴전판을 180도 뒤집어 버렸던 것이다.
2년전 개성에서 휴전협상을 시작했을 때 ‘중립지역 통과용 백기’를 달고 들어가는 미군차량을 ‘항복하러 왔다’고 선전했던 것과 똑 같은 수법, 공산당식 세계여론조작 선전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때부터 북한이 휴전일을 ‘승전의 날’로 잔치를 벌이고 있는 연유이다.
이승만의 요구를 철저히 무시하고 휴전에 목매달았던 아이젠하워가 이승만이 반공포로 석방 카드로 휴전을 애걸하는 공산측을 궁지에 몰았던 판세를 ‘터무니없는 양보’로써 한순간에 역전시켜 버리고 말았다.
폭로와 선전에 성공한 공산대표 남일은 “포로석방으로 불만이 많지만 유엔측과 협정조인 준비나 서두르자”며 대표단끼리의 본회의에 종지부를 찍었다. 연락장교들의 실무회의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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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정치회담 실패면 자유행동“...로버트슨 회보를 기대
조선일보 최병우 기자는 「유엔 측이 적측에게 내준 이와 같은 보장은 과연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대통령특사 로버트슨씨 사이에서 토의된 서울회담의 양해사항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아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으며, 정부가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주목 된다」고 이승만의 반응을 기다리는 기사를 보냈다.
독주하는 미국의 배신에 분통 터지고 어처구니 없어진 이승만 대통령은 쏟아지는 내외기자들의 질문서에 답변한다.
*문=공산측이 공표한 한국의 휴전준수 보장-휴전선 철군 보장 등은 사실인가?
◉어떤 통신보도를 볼 것 같으면 한국은 휴전에 대한 모든 조건을 완전히 포기하고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휴전을 준수할 것이라고 보도한 것이 있다. 로버트슨씨와 우리 사이에 동의된 바에 의하면 우리는 ’휴전엔 조인치 않을 것이며 양국 간에 합의된 것을 정식으로 확보 받는다는 조건하에서 우리는 휴전을 방해치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던 것이다.
우리로서는 지금 그로부터 무슨 말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는 터이다. 우리는 우리들이 미국과 기꺼이 협력하여 나가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의 할 바를 하였으며 휴전 조인 전에 중공군을 한국으로부터 내보내자는 우리들의 결의를 ’연기‘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건부 동의였다. 만약에 유엔이 우리의 생존을 고려하여주지 않는 다면 우리는 우리들 사이에 합의된 바가 이미 우리를 제약한다고는 볼 수 없다.
*문=휴전협정 조인 후에 한국의 당면 문제는?
◉주요문제는 우리 국토에서 중공침략자들을 철퇴시켜 버리는 것이다. 백만이나 되는 외국군대가 한국에 남아있는 한, 진정한 평화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유엔이 정치회담에서 90일 내에 이들 침략자들에게 철퇴하라고 설복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들의 행동을 보류하기로 합의를 보았었다. 상기 기간이 지나도 유엔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우리자신의 행동노선을 취할 자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에 관련하여 나는 우리가 미국에 요청하기를 우리들의 공동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과더불어 군사행동을 공동으로 재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이 일방적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데 있어 정신적 물질적 원조를 줄 것을 약속하여 달라고 하였음을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조선일보] 1953.7.24.)
◆”미국은 신의 지켜라. 나에게 한 약속을 판문점에서 깨다니...“
미국무장관 덜레스는 이승만의 기자회견에 대하여 워싱턴서 21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미국민들에게 한국휴전의 가능성에 대하여 ”과도한 낙관적 태도나 혹은 비관적 태도를 가지지 않도록“ 경고하면서 덜레스는 ”한국휴전이 조인되기 전에 해결되어야할 문제가 몇 가지 남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24일 공보처를 통해 한국의 태도를 재천명하는 상세한 담화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미국은 한국과의 약속점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다
우리는 덜레스 국무장관이 밝힌 정중하고도 우의에 가득 찬 언명을 환영하고 감사하는 바이다. 나는 그의 언명으로 말미암아 내가 나 자신의 견해를 공적으로 설명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특히 기쁘게 생각한다.
로버트슨씨와의 회담에 있어선 한미양국 간에 서로 약속한 바도 있고 또 서로 양보한 바도 있다. 한국 측이 양보한 바는 잘 알려졌으며 완전히 합의된 것이었다.
그러나 정전(停戰=Cease Fire)을 방해치 않겠다는 우리들의 약속의 기초가 되었던 미국 측의 양보점은 아직 공적으로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공동안전보장 조약체결 제안에 관하여서는 우리가 초안을 제출한 바 있으나 아직 그에 대한
이렇다 할 상세한 반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동 조약은 미국상원의 차기회기에 인준을 받도록 하겠다는 보장을 받고 우리는 그에 응한 것이었으나 우리는 물론 동 조약의 구체적 조건이 무엇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깊은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공산측에만 명확히 약속
로버트슨씨와 우리 사이에 도달된 기본적 정책합의점의 실행을 불가능하게 될 약속을 해리슨 장군이 공산측에 하였다고 공산측이 주장하였으며, 아직껏 그러한 주장이 부정되지 않고 있음에 비추어 우리는 당혹하고 우려한다. 나는 로버트슨씨가 현재 자기가 한 약속을 모두 지키기 위하여 성심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준 개념적인 막연한 보장과 공산측에게 준 명료하고도 확정적인 보장이 서로 상위한 경우에는 어찌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반공포로 한국외 중립국 이송 불가
인도나 기타 어느 나라의 군대가 포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남한에 상륙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리슨 장군은 그런 군대가 남한에 상륙할 것이며 그들은 유엔군의 경찰보호를 받을 것이라는데 동의하였다고 공산측은 판문점에서 주장하고 있다. 나는 오직 한국인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만을 말할 수 있다.
나는 로버트슨씨와 합의에 도달하는데 있어 송환불원 한국인 포로는 남한에서 석방될 것이며 공산측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는 중국인포로는 그들이 선택하는 목적지로 보내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판문점으로부터의 보도는 이와 같이는 할 수 없다는 말이 직접 전해지고 있으며 누구도 이러한 보도를 아직 반박하지 않고 있다. 도리어 이들 포로들은 몇몇 소위 ’중립‘국으로 보내져 거기서 계속 공산주의자들의 협박을 받게 될 것 같아 보인다.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된다.
◉정치회담의 기한부(deadline) 불명확
또한 내가 아는 바로선 정치회담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이 증명 될 때, 미국은 한국과 더불어 이와같은 회담에 시간적 제한을 가해야하며, 그 후로는 우리 우리국토로부터 침략자를 구축하려는 우리들의 노력을 재가할 완전한 자유을 가지게 되기로 되어있다.
그러나 판문점에선 정전엔 시간적 제한이 없으며 정치회담이 실패케 되더라도 한국은 자기자신의 방법을 취할 분명한 주권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유엔에 의해서 제한하게 될 것이라는데 동의하였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미 석방된 한국인포로가 체포 내지 재수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우리들이 다 아는 바이요, 또한 우리들의 결의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문점에선 석방된 포로들을 위험에 빠트리게 될 공산측의 요구 즉 재수용문제를 정치회담에서 취급하자는 요구를 거절하였다는 징조기 없다.
◉경제원조와 정치문제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로버트슨씨가 여기 왔을 때 나는 우리 손으로 침략자들을 직접 처치하려는 계획을 연기할 것을 마지못하여 동의하는 주요기초조건으로서 (정치회담이 실패하는 경우) 미국은 우리와 같이 싸움을 다시 공동으로 시작하거나 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현재 제의되고 있는 경제원조 이외에 다른 물적 심적으로 우리들의 노력을 지원하여 줄 것을 나에게 보장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가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확신하나, 이제 정전이 박도한 이때 나는 이 문제에 관하여 그후 아무 말도 들은바가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경제원조문제와 군사 및 정치적문제는 별개로서 분리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파괴된 국토를 부흥하기 위하여 우리를 도우려는 미국의 관대한 마음을 깊이 감사하고 있다. 나는 미국이 우리에게 주는 원조에 어떠한 부수적 조건을 결부시킬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몇몇 국가는 영국의 원조를 받은 후 도리어 여러 가지 방면으로 공산주의 국가와 더욱 손잡고 나아가기 위하여 그 원조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은바 있다.
그러나 한국이 그런 짓을 하리라고 생각할 사람은 하나도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신의에 입각한 회답을 기다린다
나는 한국 통일을 위하여 미국 및 유엔과 적극 협조하기를 가장 성의있게 노력하고 있다.
그러기위하여 나는 이 나라의 생존을 위하여 필수라고 판단 내린 바에 어그러지는 중대한 양보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대신 미국이 나에게 양보하고 약속하여 준 것들이 판문점에서 (미-공산측의) 합의로 인하여 무효로 돌아가는 것 같이 보이는 이때, 나는 가만히 입을 닫고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과 공산측에 완전히 상반되는 보장이 동시에 주어질 것 같으면 그 중 하나는 헛것이 아닐 수 없다. 피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일방적인 정책을 취하지 않겠다는 것이 나의 강력한 희망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와같이 신의를 가지고 또한 깊은 우의의 정신 속에서 도달한 합의점과 상호이해점이 공산측의 요구 때문에 희생되지 않았다는 말이 (미국서) 오기를 아직도 희망적으로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일민주의(一民主義) 독립국가로서 생존하여 나가기 위하여 싸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재차 천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목적에 배치되는 여하한 일도 우리에게는 하나의 타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극적이며 최종적인 패망을 의미하는 것이다.([조선일보] 1953.7.26.)***
***필자가 이승만의 성명서나 담화문을 되도록 길게 인용하는 것은 .독자들에겐 지루하겠지만 까닭이 있다. 한국통일이냐, 분단고착이냐, 한민족의 운명이 좌우되는 결정적 시기에 과연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며 투쟁했던가. 그 특유의 국제적 전략전술과 현란한 외교술, 너무나 인간적이고 가슴 저리는 국제정치적 레토릭(Rhetoric)을 읽어봄으로써 그 진면목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을 도와주는 미국과 유엔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기막힌 딜레마를 풀어야하는 갈림길, 당시 강대국의 패권주의 현장감과 국내적 위기의 절박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수단은 이승만의 말과 글이 최상의 역사자료이다.
평생 ’말과 글‘로서만 독립운동을 벌이고 건국에 성공한 이승만의 ’말과 글‘이야말로 살아있는 대한민국 건국사의 핵심유물 아닌가. 그동안 국내학계의 소위 ’연구‘들은 이승만의 언행을 왜곡, 조작, 묵살하며 편파적 고정관념에 맞춰가는 일방적 결과론이 대부분이었다. 반세기 넘는 집단 가스라이팅 중독이 참 오래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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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썰렁한 판문점 회담장서 휴전협정문에 조인하는 양측 실무대표들. 왼쪽이 유엔측 해리스 장군, 오른쪽이 공산측 남일.
◆”기이한 전쟁, 기이한 휴전“...2차대전보다 큰 세계대전
마침내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판문점 휴전회담장에서는 유엔측 대표 해리슨장군과 공산측 대표 북한 남일이 협상 2년 17일 만에 협정문에 서명하였다.
조선일보는 이날 조인식을 ‘기이한 전쟁, 기이한 휴전’이란 제목으로 보도한다.
[판문점 조인식장에서 최병우 특파원발] 백주몽(白晝夢:한낮의 꿈)과 같은 11분간의 휴전협정 조인식은 모든 것이 너무나 우리에게는 비극적이며 상징적이었다. 학교강당보다 넓은 조인식장에 할당된 한국인 기자석은 둘 뿐이었다. 유엔측 기자단만 약 100여명이 되고 참전하지 않은 일본기자석도 10명을 넘는데, 게다가 휴전회담에 한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한국의 운명은 또 한번 한국인의 참여없이 결정되는 것이다.
27일 상오10시 정각 동편입구로부터 유엔측 수석대표 해리스 장군등 4명이 입장하고 거의 동시에 서편입구로부터 공산측 남일 이하가 들어와 착석하였다. 악수도 없고 목례도 없었다. ‘기이한 전쟁’의 종막다운 ‘기이한 장면’이었다. ([조선일보] 1953.7.29)
대한민국이 원하지 않는 일방적 휴전, 무방비의 한국을 기습 남침했던 공산군이 세계의 응징 앞에 애원하여 맺은 휴전, 미국 대통령이 대선공약을 지키려 앞장 서 밀어붙인 휴전, 전투기간보다 협상기간이 더 길었던 전쟁의 싸움터는 조그만 한반도내였으나 그 규모와 피해와 전쟁경비가 제2차 세계대전과 맞먹고 동서 양진영의 대부분 국가들이 직간접으로 참여한 세계최다 국가들의 편싸움 이념전쟁이 드디어 막을 내린다. 인명 피해만 400만명이 넘는다.
▶6.25전쟁 피해 상황◀
한국군: 전사 13만8천여명, 부상 45만여명, 실종자 포함 총 60만9천여명
미군: 전사 3만6516명, 부상 10만3248명, 실종자 8177명
(유엔군: 미군포함 전사 5만8천여명, 부상 15만여명, 실종-포로등 합계 48만여명)
북한군: 사상자 52만여명, 실종-포로 등 총 80만여명
중공군: 사망자 13만6천여명 부상 20만8천여명, 실종-포로 포함 총 97만3천
대한민국 민간인: 사망 24만5천여명, 피학살 13만여명, 부상23만, 피납 8만5천여명, 행방불명 30만 3천여명. 합계 100만여명.스탈린이 만든 ‘인형 앞잡이’ 김일성이 마오쩌둥의 지원을 받아 기습 남침한 ‘6.25동란’이 3년2개월의 포성을 멈춘 것은 협정조인 12시간후, 이날 밤 10시 마침내 한반도 포성은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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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산의 전진사령부에서 휴전협정문에 서명하는 클라크 장군(왼쪽에서 두번째).
★클라크 ”전쟁보다 힘들었던 전쟁 이승만과의 협상“
정전협정문은 영어, 중국어, 한글로 각각 작성되어 유엔측이 9통, 공산측이 9통씩 나누어 가졌다. 판문점 인근 문산의 유엔군 전진기지에서 해리슨이 가져온 협정문서 18통에 ‘무거운 마음’(heavy hearted)으로 최종 서명한 클라크 사령관은 짧막한 성명을 읽었다.
“이 시간 내 마음은 기뻐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기도할 시간입니다. 이 정전이 인류의 이익이 되도록 힘껏 노력함으로써 성공하기를 기원합시다. 여기서 희망을 찾는다면 끊임없는 경계와 노력이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I cannot find it in me to exult in this hour. Rather it is a time for prayer, that we may succeed in our difficult endeavor to turn this armistice to the advantage of mankind. If we extract hope from this occasion, it must be diluted with recognition
that our salvation requires unrelaxing vigilance and effort. (클라크 회고록 [From Danube to Yaloo]에서)
클라크는 아이크 대통령의 일방적 정책에 따라 휴전협상을 마무리했지만 “내 생애 중에 공산주의와의 전쟁이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탄식하였다. 그는 “미국 사령관중 승리를 얻지 못한 채 정전협정에 서명한 최초의 사령관이 되었다”고 자탄하면서 한마디를 덧붙인다.
“공산군과의 전투나 협상보다 정녕 힘들었던 전쟁은 이승만대통령과의 협상이었다.”
★아이크, 한국에 우선 2억달러 제공...한국민에 ’휴전선물‘ 식량 1만톤
워싱턴 백악관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대선공약 실현 성공’을 국민에게 자찬하는 성명을 준비하였으나, 다음순간 발표를 취소하고 말았다. 맥아더와 마찬가지로 ‘전쟁 목표는 승리’임을 잘 아는 장군출신인지라 무리한 양보들을 공산 측에 던진 끝에 이뤄진 ‘항복 같은 휴전’을 축하할 기분이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대신에 휴전조인 한시간 뒤 라디오와 TV를 통하여 간단한 경고 연설을 한다.
”우리는 단지 하나의 전쟁터에서 휴전을 성립시킨 것이지 세계전체를 통한 평화를 획득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남북한의 통일 등 남은 문제들을 토의할 정치회담이 앞에 놓여있다고 하였다. 그리고나서 아이크는 한국의 재건비로 우선 2억 달라를 제공해야한다며 국회에 원조교서를 제출하였다.
이날 밤 클라크 장군은 뜻밖의 임무를 수행한다. “한국인에 대하여 1만톤의 식량을 즉시 전달하라는 대통령의 명령을 받았다”며 “이 식량은 원조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다. 미국민들이 한국민들에게 느끼는 동정의 표시오, 공산침략군에 맞선 한국인의 용감한 투쟁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강조하였다. 이 식량은 현금으로 800만 달러가 넘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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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협정문 첨부자료 지도. 한글로 번역한 휴전선과 38선 비교 상황을 보면, 대한민국은 서쪽 황해도 옹진반도 등 2,400㎢ 넓이를 북쪽에 내주었고, 북한지역이던 경기-강원 일부 5,900㎢를 남쪽에 편입시켰다. 이 결과 남한이 3.500㎢ 더 넓어진 셈이다. 전체 면적은 북한이 25,000㎢나 더 넓다.(나무위키 지도 캡처)
★김일성, 판문점 방문 거부...“가짜 김일성 들통날까봐”
김일성은 끝내 판문점에 나타나지 않았고, 남일이 서명한 협정문을 평양으로 가져다 서명해야 했다. 이에 조선일보는 “북한반역집단 군사령관 김일성이 공개석상에 나타남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가 사기한(가짜)임이 판명될까 전전긍긍하고 있으며 그가 평양을 떠나면 내부 소요사태가 일어날까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하였다.
“왜냐하면 본래의 김일성은 김석원 장군 및 중국 장개석 등과 한때 일본 육군사관학교 학생이었고 그 김일성은 오래전 사망하였으며 현재 장개석은 대만에 있고 김석원 장군은 한국군에 있기 때문에 지금 김일성은 국제무대에 나설 수가 없다. 그는 유명한 항일투사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도용하고 있는 일개 공산군 청년이므로 정체를 숨기려 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평양의 승리 축하=김일성 일당은 평양에서 ‘정전 협정 축하행사’를 열었다.
소위 조선최고인민회의(국회)가 주최한 자리에서 김일성은 중공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를 비롯한 고위급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이어서 거나한 술파티를 벌였다.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며 연회장을 돌아다닌 김일성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기쁨”을 만끽하였다.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의 회고록에 보면 이날 양측 지휘관들은 모두 걸음을 걷지 못할 정도로 만취하였으며 자신도 얼마나 마셨던지 뻗어버리고 말았다고 써놓았다.
며칠 후 중공군은 중공군사령부가 위치한 평안남도 회창(檜倉)에서 별도의 ‘승전 축하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정전’이 왜 ‘승리’인가. 위에서 보았듯이 휴전이 승리여야만 했던 그들이다. 지구상에서 완전소멸 될 뻔한 북한은 휴전으로 살아남아 재생하였고, 중국과 군사-경제 동맹을 맺었으며, 세계 최강국 미국을 상대로 휴전을 협상하고 서명하는 ‘대등한 지위’를 획득하게 되있던 것이다.
★최대의 승리자 마오, 얻을 것보다 더 많이 얻었다
마오쩌둥 역시 중국대륙 장악 후 1년도 안돼 참전한 한국전쟁에서 패배직전의 위기를 견디던중 뜻밖에도 ‘미국의 호의‘에 힘입어 곤경을 면했다. 더구나 승전국으로서 ‘유엔 가입’을 제시하며 영국 등 국가들로부터 국제적 공인을 받을 수 있었으며, 소련의 군사-경제 원조를 확보하여 국가재건의 기초를 다졌다. 또한 넘쳐나는 장제스의 국민당군대를 인해전술로 ‘대량 소비’함으로써 내란후의 경제적 난제를 푸는 동시에, 스탈린이 죽음으로써 북한 정권과 북한 땅을 소련으로부터 중국으로 빼앗아오는데도 성공을 거두는 행운을 잡았다. 마오쩌둥이 참전결정 때 말한 바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 없으면 이빨이 춥다) 걱정은커녕 이제 아시아 공산권의 맹주의 자리에 올라 극동의 패권을 노려보게 되지 않았는가.
이처럼 미국은 3년전 국공합작 실패로 중국대륙을 공산당 마오에게 넘겨주더니, 중국공산당을 말살할 절호의 기회를 뿌리치고 대한민국 북방에 ‘침략의 대제국’을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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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문점에서 오전10시 휴젼협정이 조인되자, 11시 성명을 발표한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반대 이유를 다시한번 천명하고 북한 동포에게 이렇게 외치겠다며 말한다.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통일은 결국 성취되고야 말것입니다." (동아일보1953.7.29일자) ⓒ동아DB
◆이승만 “북한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판문점 휴전협정 서명이 끝난 이날 오후1시,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에서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한다.
“나는 정전이라는 것이 결코 싸움을 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하며 공산측이 전쟁과 파괴적 행동을 준비하여 더욱 공격하게 될 서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정전의 조인을 반대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정전이 조인되었음에 나는 정전의 결과에 대한 나의 판단과 예측이 옳지 않은 것으로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해방과 통일문제를 평화리에 해결하기 위아여 일정 기간 정치회담을 개최한다 하니 그 동안 우리는 정전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와 미국 사이에 도달된 합의는 양국의 공동이익이 관련되어있는 지역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양국의 협조를 보장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재건과 부흥은 즉시 그리고 효과적으로 진전될 것이다.
공산측은 북한을 위하여 이만한 일을 할 것인가? 공산 압제 하에서 계속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우리 북한 동포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 체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한국 민족의 기본목표, 북쪽 우리의 강토와 동포를 다시 찾고 구해내자는 목표는 계속 남아있으며 결국 성취되고야 말 것입니다. 유엔은 이 목표를 위하여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왜 우리들이 이와 같이 북진통일정책을 변경하여 정전을 방해치 않기로 하였는가하는 상세한 설명은 차후 발표될 것입니다.“ ([동아일보] 1953. 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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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협정문에 서명한 양측 군사령관들의 사인들. 오른쪽부터 클라크 유엔총사령관, 중공군 팽더화이. 북한군사령관 김일성의 필체. 아래는 실무대표 왼쪽 남일, 오른쪽 해리슨 서명.
★이승만 ”국민은 더 인내하라...인명피해부터 줄여야”
휴전을 매듭지은 클라크 사령관이 테일러 8군사령관을 대동하고 경무대를 방문, 경과보고와 휴전 준수를 다시금 당부하였다. 아픔을 참고 쓰라린 미소로 이들을 보낸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에게 보내는 장문의 성명을 또 발표하였다.
“국민은 더 인내하라” 이대통령은 27일 전 국민에게 보내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는데
남북통일을 실현하지 못한 채 휴전이 되었으나 이는 유엔과 미국의 협동아래 특히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의 노력으로 한국통일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였으므로 앞으로 열리는 “정치회담의 결과를 3개월동안만 기다려보자는 것”이니 남북 동포들은 너무 조급히 생각 말고 좀 더 참고 기다려보자는 것이라고 당부하였다.
“소위 휴전에 대해서 우리가 처음부터 의도한 목적은 지금에도 조금도 변동된 것이 없으며 오직 시간만을 몇 달 동안 물리기로 한 것이니, 이는 유엔과 미국의 협동을 지켜보며 몇 달 기한을 물려서 그동안에 정치회담으로 적군을 물려 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험해서 3개월 이내로 성공이 되면 좋을 것이오, 그 기간에 성공이 못되는 때에는 유엔과 미국의 합작으로 우리와 같이 통일을 도모하자는 그 결의에 대하여 허락된 것이니 우리는 그 휴전조약에 서명하거나 협동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 기한 내에는 장해를 주지 않겠다는 전제하에서 휴전조약이 성립되는 것이니 우리 남북 동포들은 아무리 조급하고 견디기 어려운 형편이라도 믿고 기다리기 바라는 바이다.
첫째, 잠시라도 휴전이 성립되어서 양편에서 많은 인명을 상하게 되는 것을 피하게 되는 것이니, 우리 국군으로는 장병들을 교체시킬 여유도 없이 밤낮으로 적군의 수없는 공격을 대항해서 강철이 아닌 육신으로 싸워왔다. 아무리 강한 군인이라도 잠시 정지하게 된 것은 심히 다행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그 결과로 우리가 많은 담보를 얻은 것이 있으니...(중략)... 미국과 방위조약이 내년 미국국회에서 통과된다는 것을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상이 미국 국회의 모모 지도자들과 협의해서 완전한 담보를 받아놓은 바 되었으니, 지금부터는 공산군의 침략만이 아니라 어떤 강국의 침략이라도 우리가 외로이 방비할 우려가 없어졌다.
둘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미국회에 특별히 요청해서 타스카 사절단의 주선으로 오는 3년 안에 10억불을 원조하자는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내년 예산에 편입될 것인데, 그 전에 급히 재건사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2억불을 미리 지불하게 하라는 요청에 상원에서도 이번 폐회 전에 통과되리라는 메시지가 왔으므로 우선 우리는 6개월 이내로 2억불을 가지고 공장설립과 모든 재건을 위하여 부지런히 일해야 될 것이다.
다만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은 이북 우리 동포인데 양해하고 얼마동안만 참아나가야 할 형편인 것이다....(후략)“
★이승만 ”2-3개월만 고생하라“ 미석방 반공포로들을 위로
북한 동포를 해방시키지 못한 고통을 삭이며 이승만은 아직도 석방 못한 반공포로들에게도 위로의 말을 전한다. 28일 다음과 같은 연설문을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에게 주어 충남 논산과 부산 거제리 소재 포로수용소에 가서 ”나대신 읽어주게“ 당부하였다.
“8천여명의 우리 반공포로들을 다 함께 해방시키지 못해서 지금까지 억류 중에 있게된 것은 본래 우리의 의도가 아니요, 다만 그때에 당국들이 목전의 장해로 인연해서 미처 실시치 못한 것으로 깊이 유감으로 아는 바이다. 그 후로 형편이 변해서 지금은 조건을 밟지 아니하고는 행하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내가 우리 애국하는 포로들에게 이글로써 권면하노니,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대략 2~3개월 가량만 고생하면 결국은 다 바로 조처될 것을 내가 믿는 바이니, 소위 휴전조약에 합의된 바에 의해서 우리 포로와 중국인 반공포로들을 중립지대로 한정시킨 한강 이북과 개성이남지역으로 다 옮겨서 유엔대표단과 대한민국 대표단 시찰하에서
위협이나 강제를 엄금하고 일일이 문단해서 이북으로 가겠다는 사림이나 중국으로 가겠다는 사람은 그대로 해주고 이남이나 대만으로 가겠다는 사람들은 다 그뜻대로 해서 우리 반공포로는 해방하여 평민으로 다 자유롭게 될 것이다. 이것은 유엔군 사령관이 담보한 것이니 조금도 의려(의심이나 염려)말고 고생만 좀 하면 순리로 조처될 것이다. 부디 안심해서 인내하기를 부탁하는 바이다.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중장을 내가 친히 파견해서 공개로 낭독케 하는 것이니 부디 이 말대로 준행해서 보조를 밟아 해결되도록 힘쓰기 바라는 바이다.
이승만의 ’민족애‘를 누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으랴. 북한 동포를 해방 통일시키지 못한 고통과 한 맺힌 절규, 미처 석방시키지 못한 반공포로들을 배려하는 마음은 너무나 애절하고 자상한 부모의 사랑 같은 말 들로 조목조목 알려주고 안심시키고 위로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포로수용소에 가지 못하자 원용덕을 시켜 낭독하게 지시한 그 심사를 읽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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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선 '돌아오지 않는 다리' 옆에 군사분계선 영문 표지가 서있다.
◆휴전협정 제4조: 3개월내 정치회의 소집...'이승만 달래기'
전문(前文) 및 본문 제5조 63항, 부록 제11조 제26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휴전협정문 표지에는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라고 명시되었다.
◉협정문 내용=1)전문에는 정전조건 및 규정 준수 등, 2)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제1조 1~11항), 3)정화(停火) 및 정전의 구체적 조치(제2조 12~50항), 3)전쟁포로에 관한 조치(제3조 51항~59항), 4)쌍방 관계정부들에 대한 건의(제4조 60항), 5)부칙(제5조 61~63항), 6)부록에는 중립국 송환위원회 직권의 범위에 관한 규정이 나와 있다.
◉군사분계선=1953년 6월 8일 현재로, 한국군과 외국군(미군, UN군) 및 공산군의 군사분계선 배치상황도 등이 첨부되어 있다.
이승만의 집요한 휴전만대와 ’북진통일‘ 요구에 미국은 ’평화적 통일‘ 방안을 내세워 달래 왔다. 휴전만 수락하면 관계국들이 정치회담을 열어 이승만의 목표를 달성해주겠다는 것, 그것을 막판에 와서 휴전협정에 끼워넣었다. 읽어보자.
제4조 쌍방 관계정부들이 협정효력 발생후 3개월내 ’정치회의‘ 소집
60.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쌍방 군사령관은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삼개월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이에 건의한다.
조항에는 ’통일‘이란 단어조차 안 보인다. 그저 3개월내 정치회의를 소집하도록 각자 정부에 ’건의‘한다는 말이 전부다.
이승만은 그 정치회의(=정치회담)의 무용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 없이는 북진통일도 국가재건도 불가능한 현실임에야, 언제까지나 미국과 싸워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무력한 약소국가의 설움! 울며 겨자먹기로 일단 시급한 한미동맹을 맺어놓고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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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중 휴전때까지 한국군이 장악했던 북한 서해안 섬들. 북한해군은 유명무실, 한국해군과 해병대가 점령한채 북한상륙을 기다리다가 휴전협정에 따라 그냥 내주고 철수해야만 했다. ⓒBEMIL군사세계
★쓰라린 철수...북한 섬들을 눈물로 다 내주다
휴전협정에 따라 휴전선(休戰線 Armistice Line)이 설치되고, 그것은 군사분계선(Military Demarcation Line)을 기준으로 남북 각2km씩, 4km 폭의 ’비무장지대‘로 설정되었다. 경기도 파주시 임진강 하구에서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대강리 동해안에 이르는 휴전선은 총길이 238㎞(약 6백리, 148마일), 직선의 38선 대신 남북 간에 꾸불꾸불 새로운 ’임시 국경선‘이 생겨난 꼴이었다.
한국군은 너무나 억울하다.
이승만이 그토록 원했던 개성도 내주어야했고 수도권 방어요충 서쪽의 황해도 옹진반도 역시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보니, 서울은 북한의 공격선에 더 가까워지고 말았다. 다만 중동부의 38선 이북 땅을 차지하여 전체적으로 남한 국토가 6.25전보다 약간 넓어진 점에서 위로를 찾아야 할까.
무엇보다 억울한 철수는 북한의 수많은 섬들을 그냥 내줄 수밖에 없던 일이다.
처음부터 6.25전쟁 내내 제해권을 장악한 미국함대 덕분에 북한 동서해의 섬들은 한국군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다 잃어버렸다. 평양 서쪽 진남포 앞바다, 황해도 연안, 함경도 나남, 청진, 원산 앞바다 등 상륙할 날만 기다리며 섬들을 지키던 한국 해병대들은 눈물을 머금고 철수 함정에 올라야 했다.
미국이 이승만대통령의 요구에 따랐다면 남북통일을 완성할 수 있었던 전쟁의 포기! 과연 휴전협정 제4조는 얼마만큼이나 그 통일에 가까이 갈수 었었던가?
<계속>
◆필자 인보길(印輔吉)=현 뉴데일리 회장, 전 조선일보 이사 편집국장, 논설위원, 디지털 조선일보 대표 역임. 2010년부터 '이승만 포럼' 운영 대표. 2023년부터 이승만 기념관 건립위원. *저서: [이승만 현대사-위대한 3년], [이승만 다시보기] 외. YouTube '인보길의 우남이야기' 뉴데일리TV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