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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6월 26일 이승만대통령이 경무대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보낸 특사 로버트슨 미국무차관보(오른쪽)를 맞아 첫 악수를 나누고 있다.ⓒ대통령기록관
”나의 일생은 고독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지난해 7월 부산 정치파동이 끝났을 때 이승만이 회고한 말이다.
24세 청년시절 한성감옥에서 6년간, 미국 유학에서 5년간, 하와이에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미국 전역에서 사사건건 사면초가 혼자만의 투쟁 30여년, 공산당은 물론 독립운동가들의 파벌 싸움과 중상모략과 배신, 특히 해방후 3년간 이념의 냉전화에 대한 이해는커녕 세계정세를 모르는 자칭 지사들의 수구적 권력 쟁탈전이 가장 고통스러운 고독이었다.
스탈린과 싸우고 미국과 싸우고 김구-김일성에 시달리고 한민당 등 국내파들의 텃세에 넌더리가 나는 이승만은 지치고 지쳐 다 놓아버리고 싶었지만 절대로 놓아버릴 수 없는 대한민국 자유의 길...만78세 노인은 자신이 세우고 자신이 지켜내야 할 국가운명의 갈림길에 다시 혼자 앞장서 나아간다. 세계최강 미국과의 단독투쟁이다.
◆ 이승만의 ‘1인 세계대전’...좌우세계가 손 놓고 기다린다
반공포로 석방 사태로 판문점 휴전협상은 문을 닫았다. 협상문제들은 경무대의 테이블로 옮겨졌는가. 아니다. 이승만에게 휴전은 한반도 통일을 완성시키고 총을 놓는 날이 휴전이다. 동시에 다시는 침략 받지 않을 안전장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이 휴전보다 우선순위였다.
미국은 그러나 이승만의 ‘휴전동의’를 받아내는 것만이 목표였다. 참전국들도 공산권도 마찬가지다. 전세계는 그리하여 조그만 약소국 대통령 이승만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이 집중되었다.
그뿐인가, 마지막 땅빼앗기 공방전을 벌이는 참호속의 양측 병사들도 ‘휴전‘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이승만은 너무나 외롭고 고통스러운 ’1인 세계대전‘을 이겨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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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대통령과 로버트슨 미국대통령 특사가 단독 협상을 벌인 대통령관저 경무대. 2주일간 전세계의 눈이 이곳에 집중되었다.(1995년 김영삼 정부가 과거 '일본총독관저'였다는 이유로 철거. 일본총독은 불과 8년 거주했지만 1948년 건국부터 1991년 청와대 신축이전까지 43년간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5명의 대통령이 대한민국 독립과 호국과 근대화의 기적을 이룬 현대사의 유적이었다.)
★경무대의 1:1 협상...2-3일이면 끝날 줄 알았지만...
아이젠하워가 이승만에게 보내는 선물을 들고 온 로버트슨 특사는 26일 아침 9시10분 경무대 앞에서 차를 내린다. 빠바방~~군악대가 팡파레를 울리며 연주를 시작하였다. 소나무가 우거진 아름다운 대통령관저 뜰에는 3군의장대가 도열하고 현관엔 한국정부 국무위원들과 3군 수뇌 장성들이 나와 미국대통령 특사 일행을 영접하였다. 로버트슨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의장대 사열을 받아야했고 “기다리고 있었다”며 반기는 이승만 대통령의 손을 잡았다. 한미 양국의 휴전협상 담판은 화려하고 거창하게 시작되었다. 노련한 이승만은 이렇게 아이젠하워의 특사를 대통령급 특별대접으로 협상의 첫 카드를 던진 것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일행은 기념촬영을 하고 처음으로 회담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한국측은 백두진 국무총리, 변영태 외무장관, 신태영 국방장관이 배석하였고, 미국측에선 로버트슨 옆에 브리그스 주한대사와 양(Yang) 국무부 동북아과장이 자리 잡았다.
이날 첫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 NBC방송 존 리치 기자가 토의내용까지 모두 녹음했다.
이승만이 입을 열었다.
“로버트슨씨, 나와 국민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특별사절이자 덜레스 국무장관의 대표로서 내한한 귀하를 환영할 수 있게 되어 행복하게 생각한다. 귀하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에 한국에 왔다. 나는 귀하의 방한 중 우리가 어느 정도의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로버트슨도 맞장구 쳤다. “뜨겁게 환영해 주시고 각하와 대화할 영광을 가질 수 있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나는 미국에 있는 귀하의 친구 두 분,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의 문안과 메시지를 가져 왔다. 우리 양국 간의 모든 문제가 순조롭게 풀리기를 기대한다”
로버트슨이 덜레스 장관의 친서를 이승만에게 전달하였다.
그 내용은 국내에선 공개되지 않았고 미국 언론들이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아이젠하워 미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이 닉슨 미부통령을 이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하여 파견할 것을 제안하고, 회담장소로 일본 혹은 오키나와가 선택될 것”이며, 이런 조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조속한 휴전성립을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직접교섭을 행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 한다.“
낮12시 15분까지 2시간 30분이나 이어진 첫날 회담에서 이승만은 주로 로버트슨의 말을 듣는 시간을 가지면서 다시 한번 한미방위조약의 ‘즉각적인(immediate)’ 체결과 경제원조, 그리고 한국육군 20개 사단의 증강 등을 환기시켰다.
이에 대해 로버트슨은 지난 6월6일자 아이젠하워의 ‘협박친서’ 내용을 되풀이 설명하며, 휴전협정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태도가 ‘즉각적인 변화’를 보여야한다는 점을 단도직입적으로 주장하였다. 즉, 휴전에 대한 이승만의 동의를 받는 것, 이것이 ‘특사로서의 단 하나의 임무’였다.
이대통령은 회담 후 기자들에게 “로버트슨씨가 좋은 생각을 가져와서 많이 양해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로버트슨도 “매우 우호적인 회담이었다. 우리는 서로 오해를 없애는데 진전을 보았고 또 만날 것이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로버트슨 특사의 침통한 표정과 외교소식통이 전하는 ‘낙관 불허론’으로 미루어 회담진행은 “결코 순조롭지 못하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라고 조선일보(1953.6.28)는 보도하였다.
로버트슨은 기자들의 질문에 “2~3일 체류할 예정”이라고 답하였다. 그 예정이 2주일을 넘길 줄을 그는 그때 몰랐던 것이다.
★팽팽한 협상 일지★
◉6월27일=이틀째 2차 회담에는 도쿄에서 클라크 장군이 날아와 합석한 것이 주목되었다.
로버트슨은 한국이 휴전협정을 지지하고 준수한다면, 동시에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무기한 유엔군에 맡길 것에 동의한다면, 한미방위조약을 미-필리핀 조약과 유사한 수준으로 체결하는 문제를 즉시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 아이젠하워 입장을 전달하였다고 한다.
이에 이승만은 유엔군이 한국의 북진통일에 협력할 때에만 작전지휘권을 계속 위임할 것이며 방위조약은 무슨 일이 있어도 휴전 조인 이전에 체결되어야 한다고 재삼 강조하였다.
회담후 관저를 나온 로버트슨과 클라크는 대기중인 내외기자단이 차를 정지시키려는데 응하지 않고 그대로 질주하여버렸다. ([조선일보] 1953.6.29)
◉6월28일=제3차회담에서 나온 로버트슨 특사는 ”상호간 합의에 도달하여 우리 양국간에 개재하고 있는 오해를 일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을 나는 가지고 있다“라고 낙관적인 견해를 표명하였다. 일요일에도 4차회담을 열었으나 논쟁은 계속되었고, 로버트슨은 3-4일이면 끝날 줄 알았던 회담이 장기화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출국 스케줄을 바꿔야 했다.
◉6월29일=클라크와 로버트슨에게 이승만은 “한국전쟁은 내전이 아니며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생존투쟁”이라 규정하고 군사적 승리만이 전세계 공산 야욕을 단념시킬수 있을뿐더러, 싸워서 이겨야만 한국이 ‘제2의 중국’처럼 공산화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역설하였다. 로버트슨은 “미국은 군사적 방법으로 한국 통일을 실현시킨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면서 방위조약을 맺는다 하더라도 한국이 북한을 공격할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백히 잘라 말했다.
회담이 평행선을 달리자 클라크와 브리그스 대사는 이승만 대신 양유찬 주미대사에게 “휴전을 반대하면 미국은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중단한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침을 재차 전달하였다. 초지일관 고집을 꺾지 않는 이승만의 의지를 꺾으려는 협박은 강도를 높였다.
▶한국, 서울회담에서 미국에 5개조건 제시설
정치회의에서 한국측에 거부권 부여, 군사동맹체결, 경제원조 제공 등 요구
[서울29일발INS=합동] 신빙할만한 소식통이 29일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대통령은 한국이 휴전을 수락하는 대가로서 미국의 항구적인 군사동맹 및 경제원조를 요구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보도는 이대통령 및 아이젠하워 대통령 특사간의 비밀회담이 제4일로 들어가는 이날 서울에 유포되고 있다. 그런데 이 대통령 및 로버트슨 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이 거의
합의되었다는 보도는 28일밤 권위소식통에 의하여 강력하게 부인된바 있다. 그러나 이 회의가 비밀에 붙여지고있는 관계로 현재까지 동회담에서 어떤 진척이 행하여졌는지에 관하여서는 전혀 알길이 없다. 이 비밀회담으로부터 누설되어 나오는 보도에 의하면 이대통령은 휴전을 성립시키려는 미국측의 갈망을 이용하여 이 회담을 장래에 있어서의 전반적 한미관계에 관한 회담으로 확장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한편, 이대통령은 지난 25일 국민들에게 휴전협정 초안에 한국정부로서 수락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하였었다.
첫째로 중공군의 철수를 규정하지 못하였다는 점. 둘째 휴전중 반공포로를 관리케하기 위하여 인도의 군대를 한국 땅에 불러들이는 조항이다.
이대통령은 인도군대의 입국을 반대하는 것만은 계속 강력하게 추진할 것 같다.
서울에 있는 아시아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대통령과 로버트슨씨의 회담은 결국 휴전에 관한 한국정부의 5개요구조건으로 낙착되었다고 한다. 그 중 2개 조건은 휴전과 그후 개최될 정치회담에 관한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휴전중 인도군대 및 소수의 공산측 관리의 한국본토 입국을 금지할 것. 이것은 2만7천명의 반공포로의 석방을 인정하고 현재 유엔 수중에 남아있는 나머지 8천5백명의 북한출신반공포로들을 석방함으로써 행하여질 수 있을 것이다.
2) 휴전후 개최될 정치회담에서 한국 측에게 전적인 거부권이 부여될 것. 특히 이승만대통령은 미국에 대하여 이 정치회담에서 한국정부와의 사전 협의 없이는 아무런 결정도 취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여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다.
이 요구가 관철된다면 한국 측은 지배적인 발언권을 보유하게 될 것이며 이대통령으로서는 이 발언권을 통하여 한국통일과 중공군의 철퇴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슨씨는 29일에 이르러서도 그의 사명이 어느 때 끝날는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형편이다. 미국대사관 측에서 발표하는 것은 이 회담이 ”계속되고 있다“는 말 뿐이다. ([조선일보]195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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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와 휴전 동의를 요구한 클라크 유엔군총사령관(오른쪽)
▶클라크, ”휴전협정 초안대로 조인“ 제의...한국-공산 양측에 협박
유엔군총사령관 클라크 장군은 29일 저녁 20일자 공산측 서한에 대한 회답을 보냈다.
클라크로부터 적측 김일성 팽덕회 두 사령관에게 보내는 답신은 하오5시부터 13분간 열린 판문점 연락장교회의에서 전달되었다. 동 서한에서 클라크 장군은 지금까지 협상하여온 휴전협정 초안을 변경함이 없이 현상대로 조인할 것을 제의하였으며 본회의의 재개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이미 한국측에 의하여 석방된 반공한인포로에 관해서는 공산측이 기정사실로써 인정할 것을 시사하였다. 또한 한국군은 한국과의 협정에 의하여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하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그로 하여금 휴전조항을 준수하도록 가능한 모든 노력을 하겠으나 대한민국은 독립된 주권국가이므로 유엔군으로서는 그에 대하여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유엔군으로서는 휴전에 관하여 한국측의 협조를 얻기 위하여 금후로도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과 휴전조항 준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군사적인 보장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포로경비를 위하여 상륙할 인도군에 대하여 한국측이 무력행사도 불사한다는 점에 유엔군이 이를 막아주겠다는 언약으로 해석된다.
클라크 장군의 서한이 로버트슨 특사의 서울회담이 진행 중에 공산측에 송부되고 또 그 내용이 즉시 공개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것은 양날의 검(劍)과 같이 공산측에 대하여 포로석방의 기성사실을 승인하라고 요구하는 반면, 한국측에 대해서는 지금에 와서 휴전협정의 개정 등을 주장하지 말고 기왕에 합의를 본 협정안을 기성사실로서 인정하라는 것을 요구함이다.([조선일보] 1953.7.1)
▶공산측에 보낸 클라크 장군의 서한이 29일 공개되던 순간에는 이승만 대통령은 외무장관 변영태씨와 긴밀회담을 하고 있다. 회담이 끝난 후 변영태씨는 모든 질문에 대답을 거절하고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정부 고위층 측근들은 여러 가지를 언명하였는데 모두 분노에 찬 어조였다. 그 중 한명은 ”유엔은 한국정부의 협조 없이는 휴전을 성립시킬 수 없을 것임을 곧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조선일보] 1953.7.2)
◉6.30=로버트슨 5차회담 “의견차이점 크다”...비관론 확산
로버트슨 특사는 30일에도 경무대로 이대통령을 방문하고 약 50분간에 걸쳐 비밀회담을 하였다. 이로써 서울회담은 제5회를 끝마치고 7월1일에 속개하기로 되었다.
남북통일을 가져올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 없이 현상대로 휴정하는 것을 항거하고 있는 한국의 입장과 이미 4년째에 들어간 한국전쟁으로부터 손을 떼려고 하는 참전 유엔 각국의 정책 사이를 조정하고 한국정부가 납득할 수 있는 휴전 대가를 ‘흥정’하기 위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특파된 로버트슨씨는 자신이 받아온 훈령과 이대통령의 요구가 너무나 크게 서로 어긋나고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고 전해졌으며, 일부에서는 벌써 로버트슨 특사는 소기의 사명을 달성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귀국하게 될 것이 아닌가하는 비관론조차 떠돌고 있다.
대통령 관저에서 나온 로버트슨 특사는 기자에 대하여 ”교섭에 있어서는 의견차이를 없애야할 몇가지 점이 있다. 그러지 않고서는 회담의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대통령과 나는 쌍방이 주장하는 원칙을 희생함이 없이 양국정부가 수락할 수 있는 해결책을 안출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고 언명하였다. 기자가 그런 해결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자 ”그런 질문을 하지 말기 바란다. 물론 나로서는 그것을 희망한다“고 대답하였다. 미국과 유엔의 정책에 극력 반대하여온 한국정부의 태도가 조석 간에 돌변할 리 만무하므로 서울회담의 전도는 결코 낙관할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조선일보]1953.7.2)
▶새로운 쟁점 <이승만, 정치회담 시한부 요구...미국은 반대>
[서울30일발UP=동양] 한국소식통이 30일 전하는바에 의하면, 로버트슨씨는 휴전후 소집될 정치회담에 시간적 제한을 가하는 문제에 대해서 찬동의사를 표명하지 않고 있다한다. 그런데 이대통령과 미국관리 사이의 회담에 참석한바 있는 한국 관리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한미회담에서 발생한 사태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이대통령은 한국이 휴전을 수락하는 조건으로서 대통령이 이미 제기한 2개 제안중 양자택일을 끝끝내 주장하였다. 그 하나는 한미간의 상호방위동맹과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 철퇴와. 다른 하나는 한미간의 방위동맹과 아울러 정치회담에 90일이라는 시간적 제한을 가하라는 요청이다.
2. 로버트슨씨의 미국사절 일동은 정치회담에 시간적 제한을 가하는데 대해서 원칙적으로는 합의한다고 말한바 있으나 그들은 분명히 그러할 의향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대통령은 정치회담의 결렬을 예단하고 있으나 미국측으로서는 정치회담이 결렬되는 경우 전투를 재개하도록 제약을 받게 됨을 원치 않고 있다.
3. 미국대표단은 이대통령에 대해서 다소의 압력을 가하고 있음은 사실이나 이대통령은 그 자신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의 타협의향을 표명한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근본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로버트슨 보고서...이승만의 '동지'로 변하다
◉7월1일=로버트슨은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이런 보고서를 보낸다.
“이승만은 빈틈없고 책략이 풍부한(shrewd, resourceful) 인물인데다 ”자기 나라를 국가적 자살행위(national suicide)로 몰고 갈 능력이 충분하고 매우 감정적이며 비논리적인 광신자(fanatic)“라 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철저한 반공주의와 불굴의 정신은 지원받아야만 한다“는 동질감도 밝혔다. 따라서 협박과 회유의 양동작전을 구사하여 이승만의 협력을 얻어내는 것이 여러모로 이익이며 그 가능성은 상존한다고 보고하였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1)이승만 대통령은 상황 판단이 빠르고 지략이 풍부하지만 자기 나라를 자살로 몰고 갈 수 있는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비논리적인 광신자이다.
2)그는 휴전협정안에 대하여 공산주의자들이 무력으로 달성하려다가 실패한 것을 협상으로 쟁취하려는 능숙한 계책이라는 깊은 확신을 갖고 있다.
3) 그는 미국과 동맹국들의 계속적인 논란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고 세계 각국에서 비판을 받는 것을 잘 알고 있다.
4) 그의 협력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는 것이 그가 평생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시켜야 한다.
5) 그의 협력은 아직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를 도와줌으로써 이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6) 이승만은 그의 나라를 미국 등 여타 국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산주의와 싸울 결의를 지니도록 각성시켜 놓았다. 이와 같은 정신과 용기는 보존되어야지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
과연 로버트슨 답다.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Ever-Ready Plan'을 중지시켰던 열흘 전과 마찬가지로 그는 냉철한 합리주의자였다. 협상 첫날부터 며칠간 이승만이란 인간을 상대해 본 결론, 대한민국과 이승만은 세계가 보호해줘야 할 가치가 충분함을 금방 절감한 것이었다.
맥아더처럼 로버트슨도 이승만에 반해버렸다. 이것이 이승만이다.
기독교적 신념과 고도의 지성과 변화무쌍한 전략전술 앞에서 미국대통령 대리자 로버트슨이 이승만의 동지로 변한 셈이다. 설득하러 왔다가 설득 당한 미국정부 대표는 이승만이 요구하는 한미동맹의 당위성을 깨닫고 자신의 상관 덜레스와 아이젠하워를 설득하기 위해 '이승만 평가' 보고서를 써야 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로버트슨 만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지금 로버트슨과 함께 휴전 강행을 책임진 클라크 장군은 또 어떠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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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가 경무대 비밀협상의 전모를 입수래 그 진행 과정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아래 '국군 사실상 단독전투'기사가 당시 미국의 휴전 집착을 보여준다.ⓒ조선DB
◆극비 한미회담의 경위 전모 판명 <조선일보 특종 보도>
오리무중에 잠겨있던 서울회담의 전모가 1일 비로소 판명되었다.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의 특사 로버트슨 국무차관보와 이대통령과의 회담은 6월16일이래 30일까지 연일 계속되어 이미 5회를 계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미간 관계당국은 일체 침묵을 지켜왔으므로 그 진전에 관하여 구구한 억측이 떠돌고 있었던 바, 진상과 너무나 괴리된 오보가 속출함을 우려한 나머지인지 로버트슨 특사와 함께 내한하여 회담에 참석해온 국무성 모 고급관리는 1일 서울에서 소수 미국기자들과 비공식회견을 하고 회담의 경위를 설명한바 있다한다. 이하는 본보가 탐문한 그 내용이다.([조선일보]1953.7.3)
26일의 제1차회담에서 로버트슨 특사는 덜레스 국무장관으로부터의 친서를 전달하고 그 취지를 구두로써 진술하였다한다. 그런데 그 골자인즉 6월6일자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의 요지를 되풀이하였을 따름이었고, 로버트슨 특사는 새로운 약속 내지 조건을 하나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하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 휴전협정 성립 ‘후’에 미국국회의 승인을 얻어 한미상호방위협정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확약하고, 2)미국국회가 승인하는 예산 범위 내에서 한국부흥을 위한 경제 원조를 증가할 것과 한국의 자위력 증강을 위한 군사원조를 촉진할 용의가 있다는 것, 3) 휴전 3개월 후에 개최될 정치회의에서 한국정부의 입장이 전적으로 반영될 것을 보장하고, 4) 미국은 유엔 각국과 더불어 금후도 계속하여 모든 평화적 수단으로써 한국 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 등을 언약하였다한다.
따라서 로버트슨 특사의 사명은 위와 같은 기본조건을 대가로 한국이 현상휴전에 동의하여 휴전협정을 준수하겠다는 다짐을 얻으러 온 것으로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서한으로 전한 것을 더 친밀히 구두로 설득하려고 하였음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
동 소식통은 한미방위조약의 한미양측 초안이 교환되었다는 일부 보도를 강력히 부정하고 미국 측으로서는 동 조약안을 제시한 일이 없다고 언명하였다.
그런데 공보처에 의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서한이 발표된 다음날 판문점에서 유엔측과 공산측 사이에 포로처리협정이 조인되고 이어 13일 이대통령은 스웨덴 기자 람본씨와의 회견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호의에는 감사하나 그러한 조건으로는 현상휴전을 승인할 수 없다는 태도를 명백히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8일에는 한국의 독자적 결정에 따라 반공포로의 석방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제1차 회담에서 로버트슨 특사로부터 미국측 입장의 천명을 들은 이대통령은 그 요지를 서면으로써 제출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로버트슨 특사는 클라크 장군도 참석한 다음날 27일의 제2차회담에서 각서형식으로 전일 말한 바를 제시하였다한다.
미국측 소식통에 의하면 이때 이대통령은 퍽 타협적인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런데서 낙관론이 나오지 않았는가 상상된다.
이와같이 낙관적 인상을 받은 관측통은 한미 간에 의견접근이 있었다하면 종래의 예로 보아 이대통령이 자기고집을 굴할 리 만무하니만큼, 이것은 필경 미국측이 한국측 주장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러한 낙관적 관측기사가 타전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인 즉, 한미양측의 입장은 어느 쪽이고 양보한 기색은 없었던 것이다.
이대통령은 로버트슨 특사의 각서에 대하여 서면으로써 회담할 것을 약속하고 제3차회담에서 미국의 각서에 대한 ‘논평’의 형식으로써 이를 수교하였다.
그 내용인즉, 휴전협정 ‘전’에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할 것과, 정치회담에 90일(일설에는 120일)의 기한을 부하여 그 동안에 한국통일의 방책을 강구케 할 것, 중공군의 철퇴 등을 포함한 것이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정부안은 한국통일의 방안으로서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을 통한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시사하였다 하는데 이것은 확실치 않다.
여하간 이러한 한국측 제안은 현 휴전협정안의 개정을 필요로 할뿐더러 미국이 영국등 유엔관계국 정부와 협의한 약속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었으므로 로버트슨 특사는 본래의 입장을 고지하였을 뿐, 이로써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이때부터 관측통사이에 비관론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제4차회담에는 클라크 장군도 참석하여 그날 저녁 공산측에 보낼 유엔측의 답신내용에 관해서도 이승만 대통령에 보고, 양해를 구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클라크 답신의 내용이 당일로 발표된 것은 유엔측이 한국의 동의를 기다릴 것 없이 현상휴전을 추진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1일에 예정되었던 제6차 회담은 개최되지 않았고, 한미 양측은 각각 금후 대책에 관하여 숙의한 것으로 추측되며, 한편 동경에서는 클라크 총사령관이 휘하 육해공군 수뇌부를 소집하여 긴급사태에 대비할 조치를 협의하였다고 전해졌다.
그런데 한국측이 제시한 요구조건에 대하여 덜레스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미국으로서는 그것을 수락하기 어렵다는 태도를 표명하였으며, 또한 휴전성립후 정치회의가 개최될 때까지의 과도기에 이승만대통령이 신임하는 미고위층 대표와 고위회담을 열 용의는 있으나 휴전 전에는 로버트슨 특사가 최종적인 사절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서울회담의 전도는 우여곡절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군, 사실상 단독 전투 중...미군은 손놓았다
[동경1일발UP=동양] 한국군 부대는 30일 155마일 전전선에 걸쳐 중공군과 [단독]으로 전투를 벌였는데 미군 및 기타 비한국군 부대의 주목할 만한 전투는 없었다.
◉7월2일=이승만은 휴전후 개최한다는 정치회담에서 통일을 실현시키겠다는 미국의 제안이 “실현성도 없고 어리석은 시간낭비”이며 한국을 어린애로 보고 달래려는 ‘당근’인줄 알면서도 이것을 역(逆)협상카드로 던졌다. “만약 정치회담이 실패할 경우 미국은 한국통일 때까지 전쟁을 계속해준다는 확실한 약속을 한다면, 미국을 방해하지는 않겠다.” 이런 약속도 없다면 한국국민을 설득할 방법은 없다는 다소 완화된 자세를 보여 준 것이었다. ([조선일보] 1953.7.4.일자)
◉7월3일=경무대 7차회담 이승만 폭발
[서울3일발AP=합동]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이 조인된 후 미국이 90일내에 열겠다는 정치회의가 한국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다면 미국은 한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다시 무기를 들것을 약속해야 한다는 그의 요구를 3일에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대통령은 또 그러한 약속을 미국이 문서화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만일 쌍방이 이 날 아무런 합의에도 도달하지 못하였다면 이것은 로버트슨씨가 한국지도자와 만나는 최후의 회의가 될지도 모른다.
로버트슨씨는 이대통령과의 1시간15분에 걸친 회의를 마치고 상오11시30분에 경무대를 나오면서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토의는 계속되고 있다. 나는 다시 이대통령을 만나게 될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신빙할만한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미상원이 인준한 후 조인하게 될 한미상호방위협정의 토의를 로버트슨씨가 제안하였으나 이승만대통령의 측근들은 동조약 초안이 만족할 만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이 제의를 거부하였다한다.
정치회의가 개최되어 90일이 지나면 미국은 퇴장하여 공격을 재개해야한다는 이대통령의 요구가 수정되든가, 또는 한국통일에 대한 어떤 결정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서울회담은 수일 내 끝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후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아무도 예언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선일보] 1953. 7.5)
▶로버트슨이 정치회의 실패 후에 전쟁을 재개하는 것은 미국의회의 새로운 승인이 필요한 선전포고라고 버티자 이승만의 인내심은 툭 끊어지고 말았다. 암덩어리처럼 평생 가슴에 박혀있는 역사의 상처가 피를 토하기 시작한다. 이승만은 로버트슨을 앉혀놓고 강대국의 ‘약소국 패싱’ 패권주의 횡포에 대한 긴 역사 강의을 시작하였다.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한국인은 1910년과 1945년 두 차례나 미국의 배신에 버림받았소. 조선왕국과 체결했던 ‘조미수호조약’을 헌신짝처럼 버린 미국이 해방 후 한반도를 두 동강내더니, 지금 와서 우리에게 일방적인 휴전을 강요하는 상황은 또 하나의 팔아넘기기(an another sellout) 아니오? 이 보시오, 미국은 그동안 한국을 일본에 넘기고 소련에 넘기고 이번엔 중공에 넘기려는 ‘세 번째 배신’이 되지 않겠소?”
◉7월4일=미국 독립기념일=로버트슨은 이승만에게 “결판을 내자”고 간청한다. “우리 두 나라가 함께 갈 것이냐? 각자 독자의 길을 갈 것이냐? 이것은 전적으로 귀하에게 달려있다.(It’s up to YOU!)”면서 미국이 제공하는 선물을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은 결코 위압(COERCION)이 아니오“라고 다그치는 얼굴은 최후통첩을 날리는 적장 같았다고 한다.
이승만이 맞받았다. “서울 지척에 100만 중공군이 진을 치고 있는데, 미국은 상원의 승인 없이는 전쟁을 못한다면서 선물은 무슨 선물이냐. 방위조약 체결도 립서비스(lip service)에 불과할 뿐이다. 상원이 조약을 비준하지 않을 경우 어쩔 셈인가? 문서로써 확실한 보장을 하라.” 설왕설래 끝에 이날 비로소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미국측 초안을 보기로 하고 경무대 8차 회담을 끝냈다.
로버트슨은 덜레스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이승만이 휴전동의를 못하는 이유는 분단의 영구화 우려 때문이라는 것. *장차 중공이나 소련만이 아니라 일본의 재침을 우려한다는 것. *이승만이 미국 정치사를 너무 잘 알아서 상원의 조약 비준에 대해 불신이 깊다는 것.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상원 지도자들의 비준보장 증거를 만들어 이승만에게 보여줘야 하겠다는 것 등이다.
▶미 고위당국자의 주말여행을 금지....한국에 신사태 발생 경계
[워싱턴4일발INS=합동] 미국의 군사외교 고위당국자들도 3일 이승만대통령이 한국통일을 위한 그 완강한 요구를 각색하기 위하여 새로운 돌발 조치를 취하지나 않을까 경계하고 있다. 미국방-국무 양성의 고위당국자들은 불안한 주말에 당면하여 휴가 여행에 나가지 말고 ‘대기’ 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그리고 통신망의 존속을 위한 특별조치가 취해졌다.
국방성 당국자들은 한국으로부터 전해진 바 심상치 않은 군사적 활동, 특이 부산지구의 군사적동태에 관한 보고를 검토하고있으며, 이승만대통령이 반공한인포로 석방의 후편을 연출하려고 계획 중이라는 정보를 검토 중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현재 캠프 데이비드에서 주말휴양을 하고 있는데 그는 한국사태 발전에 관한 모든 보고에 접하고 있는 것 같다.
한편 당지 외교계에서 새어나오는 보도에 의하면 재한 미군사령관들에 대하여서는 만약 이대통령이 군사적 급변을 획책할 때 대처할 조치에 관한 특별명령이 내려졌다한다. ([조선일보] 1953.7.6)
▶”한국문제 해결에 유일한 길--과거 현재의 역사적 인식”
[서울5일발AFP=합동] 대한민국 정부의 고위소식통은 4일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하는 전세계가 전화를 입은 이 한반도의 과거 및 현재의 진정한 문제를 인식하고 또한 이해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휴전은 가능하다고 언명하였다. 익명을 요구한 동고위소식통은 한국이 5천년 역사상에서 경험한 대부분 국난은 외국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야기되었다고 말하였다. 동 소식통은 몽고 중국 러시아 및 일본이 군사적으로 약하지만 전략적으로는 중요한 비옥한 한반도에 대하여 수차 침략과 침입을 감행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예거하였다.
◉7월5일=이승만, 휴전 좌절시킬 5개 방책
[동경5일발AP=합동]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휴전을 좌절시킬 수 있는 다섯 가지의
방책을 더 가지고 있다. 클라크 장군은 유엔총사령부에 대항하는 한국의 5개 조치중 어떤 것이 제출되어도 또는 전부 제출되어도 그에 대처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공산측은 유엔군사령부가 현재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였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조속한 휴전이 어떤 혼란을 야기하는지를 보려고
공산측이 지금 곧 휴전에 조인할 것을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공산측이 휴전에 조인할 것을 고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시사는 북평방송이 지난번 2만7천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계속적으로 공격을 가해왔으나 유엔군사령관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만일 휴전이 수일 내에 조인된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그것에 대항하여
다음과 같은 5개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1) 대한민국은 미군의 포화를 뚫고 들어가서 아직 포로수용소에 억류되어있는
8천5백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할 것이다.
2) 전선의 한국군 보병부대들은 휴전이 성립되면 모든 군대가 2마일 철수에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일선에서의 전반적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3) 그렇게 되면 철수규정을 준행한 유엔군부대들은 양면으로부터 게릴라의 공격을 받기 쉬운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다.
4) 부산 및 인천의 한국인 노동자들은 유엔군에 대한 보급물자의 양륙 및 적재를 거부할 것이다.
5) 한국내의 철도를 유엔군은 돌연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이다.([조선일보]1953.7.7)
◉7월6일=경무대 9차회담
로버트슨 미특사는 6일에도 상호11시 정각 경무대를 방문하여 이대통령과 약 1시간10분간
회담 하였다. 12시10분 회담을 마치고 나온 그는 대기하고 있던 내외기자들에게 ”회담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회담 분위기는 우호적이었다“고 말하였을 뿐, 다른 언급이 없었다.
경무대 정문을 출발한 로버트슨씨는 수천명의 남녀학생들이 비를 맞으며 ‘휴전반대’를 외치는 데모대 앞을 통과하여 미국영사관으로 향하였다. ([조선일보]1953.7.8)
▶이승만 대통령, 처음으로 회담에 언급
[서울6일발AP=합동] 이승만대통령은 5일 로버트슨씨와의 회담이 성공할지 모르겠다고 말하였다. 이대통령은 이날 정동예배당에서 주일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AP기자에게 즉석회견에서 “나는 오해들을 석명(釋明)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대통령은 회담이 성공할 것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모르겠어”라고 한마디만 답하였다. 이대통령이 10일간에 걸친 경무대 회담에 관하여 직접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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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슨 특사나 클라크 장군이 경무대를 방문하는 길목마다 국민들이 휴전반대를 외치여 시위를 벌였다. 사진은 여학생들의 데모. 영문구호 'Give Us Unification or Death'가 눈길을 끈다.
◆중공, 미국을 응원...이승만을 집중 매도
[동경6일발AP=합동] 북평(北平=북경)방송은 5일 휴전을 수락하도록 이승만 대통령에게 권유하고 있는 미국의 노력에 대하여 공공연한 동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즉 이 방송은 미국에 대하여서는 놀라울 만치 부드러운 어조였고 이승만대통령에게는 신랄한 것이었다.
당지 옵서버들은 이것이 공산군 측이 이대통령의 휴전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전협정에 조인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방송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이대통령은 지나친 행동을 하였으며 자기 정부를 위해 미국민들에게 계속 피를 흘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민들은 결코 이승만의 설복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서울에 파견된 미국 특파원들은 이승만이 휴전을 반대하더라도 미국은 휴전협정을 조인해야한다는 요구를 보도하고 있다“
북경방송은 놀라운 어조로 이대통령에 대하여 비난을 가하고 ”미국인민의 독립심과 민주정신“을 운위하였다. 종래 미국에 대하여 ”전쟁상인“ 또는 그 이상의 욕설을 퍼부어온 북경방송이 이렇게 미국을 칭찬한 것은 기이한 일이다.
서울의 고위소식통은 한국군이 휴전을 준수하리라는 보장이 없더라도 공산측은 휴전조인에 동의하리라는 의견을 표명하였다. 그들은 공산측이 전쟁을 연장시킴으로써 얻는 것보다 전쟁을 종식시킴으로써 얻는 것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였다. [조선일보]1953.7.8)
◉7월7일= 이승만은 로버트슨에게 3개항의 비망록을 보냈다.
미국 측이 내놓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초안을 보고 분통이 터진 이승만은 자신의 요구사항 3가지를 강조한다. 무엇보다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북대서양조약기구)의 군사동맹조약 제5항의 규정 <회원국 한나라가 공격받으면 모든 가입국들이 자동 개입 방어>를 반드시 넣어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1949년 NATO 출범시 이승만이 즉각 미국에 요청했던 조약이다. 트루먼은 그러나 들은 체도 않고 주한미군을 완전 철수해버려, 소련과 북한의 6.25침략을 불렀던 것이다. 3개항은 다음과 같다.
1) 미국측 초안에는 조약당사국 중 한쪽이 공격받을 경우, 다른 쪽이 ‘즉각적이고 자동적(instataneous and automatic)’으로 개입한다는 조항이 없다는 점. 2) 한국은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와 달리 ‘순식간에 치명타(a swift crippling blow)’를 당할 지정학적 위험성이 항상 존재하는 나라임을 명심하고 조항을 만들어야 할 것. 3) 최소한 ‘일본 내와 주변에(in and around Japan)’ 미군 주둔을 명문화한 미-일안보조약과 같은 조약이 될 것을 보장할 것.
◉7월8일= 이날 11차 회담에서 이승만은 “미국은 한국이 의지할 수 잇는 ‘유일한(the only) 우호국가’임을 솔직하게 고백한다”며 또다시 속내의 일단을 드러내 보였다.
로버트슨도 감동했던가, “요청하신대로 한국 내와 주변에(in and around Korea) 미군이 주둔하는 조항을 수용하겠습니다”고 ‘밤새 선물’을 꺼내놓는 것이었다. 그는 대신 “휴전후 한국 통일문제를 다룰 정치회담이 진행될 때까지는 시간제한 없이 한국군을 유엔군에서 철수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즉, 전시작전권을 회수하겠다는 이승만의 위협에 대한 간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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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팽팽한 국가대결 협상 중에도 담소를 나누는 이승만 대통령과 로버트슨 미국대통령 특사.
◆ 침묵회담 30분...낚시질 3시간...8순 이승만의 지구전
“잘 되면 사흘 정도...길어도 1주일 내로 끝난다” 로버트슨 자신이나 이승만 주변 참모들도 낙관적이었던 ‘경무대 휴전 협상’은 열흘이 지나서야 한미방위조약 문서화의 검토가 시작되는 단계에 왔다.
워낙 극비리에 대통령 관저에서 진행되는지라 언론은 날마다 코끼리만지기식 보도로 관측통들의 추측기사들만 남발한다. 어제는 ‘팽팽한 대립’ 오늘은 ‘의견 일치’ 내일은 ‘교착상태’식의 기사들이 회담의 극비성을 더욱 높여 전 세계가 갈팡질팡 경무대만 쏘아보는 나날이다.
회담 관계자들을 비롯, 도쿄에서 왕래하는 클라크도 지치고 워싱턴에서 회담을 조정하는 팀도 지치고 경무대 앞에 진을 친 취재진도 지쳐갔다.
당시 경향신문 이혜복 기자의 회고담이다.
「...1주일동안 로버트슨 국무차관보는 연일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방문, 끈질긴 설득작업을 펼쳤다. 그때 나도 경무대 맞은 편 신무문(神武門) 앞에서 보도진에 끼어 대기했다가 회담을 마치고 나오는 로버트슨 차관보와 노상 인터뷰를 날마다 되풀이해야 했다.
하루는 경무대를 나온 로버트슨이 "오늘은 할 얘기가 정말 없다"고 자리를 뜨려하자 "그게 무슨 뜻이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그러자 그는 "오늘은 이 대통령이 입을 곽 다물고 선채로 창밖을 내다보며 30분 동안 묵묵부답이라서 더 이상 말도 못 붙이고 서 있다가 되돌아 나오는 길"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런 기사를 썼으니 그날 기사 제목은 '침묵회담'으로 찍어 낼 수 밖에 없었다.
또 어느 날 외무장관 변영태는 “이대통령은 휴전후의 정치회담이 90일 이내에 한국 통일을 해결하지 못할 때에는 전투를 재개하겠다는 미국의 보장을 요구하는 원칙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고 알려주면서, 미국측은 수락할 수 없다고 버티지만 “우리들이 아직도 토의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회담이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으냐”고 웃기도 했다. 아무튼 경무대 소식통은 “로버트슨이 빈손으로 워싱턴에 돌아가진 않을 것“이란 말만 반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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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이승만의 휴전 준수 약속 받아오라“
공산측도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나 저제나 이승만의 입에서 ‘휴전 수락’이란 말이 나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리는 중공의 마오쩌둥은 이승만을 일방적으로 욕하고 미국과 이간질시키며 오히려 미국을 응원하기에 이르렀는데, 얼마나 초조했던지 클라크 장군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즉,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에 이승만이 협정파괴 활동을 못하도록 보장해달라는 요구였다.
▶클라크 서한에 공산측 답장◀
「공산측은 8일 유엔군총사령관에게 서한을 보내어 며칠 내로 휴전회담 본회의의 재개를 제의하였다. 그들은 또한 현재의 초안을 수정함이 없이 협정에 조인하자는 유엔 측의 요청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동의하였으나, 한국 측으로 말미암아 휴전조항의 실시가 불가능하게 되지 않도록 유엔 측으로서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겠다“는 보장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8일 정오 판문점에서 공산측 연락장교가 유엔측에 수교한 적측 김일성 팽더화이 두사령관 연서의 서한은 9일전 클라크 장군이 적측에 보낸 답신에 대한 회답인 것이다. (중략)
유엔측이 필요한 경우에는 ‘가능한한’ 군사적 방어조치를 취하겠다고 하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한국정부와 한국군이 휴전협정 및 그에 부수되는 제협정을 준수하도록 귀측은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여야한다. 오로지 그렇게 함으로써 휴전을 한국측의 파기로부터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공산 측이 클라크의 조속한 휴전조인 요청을 수락하고 이승만을 경계함으로써
경무대의 한-미 회담에 새로운 위기가 초래되었다고 워싱턴 당국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공산측의 압박으로 미국은 휴전성립을 위해 큰 결단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승만-로버트슨 회담도 판문점 휴전회담이 재개되기 전에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의연히 지금까지 기본적인 방침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모든 것은 오직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에 달려있다.([조선일보] 195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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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잉어낚시...하나님께 ‘길’을 묻다
8일에도 경무대 앞에서는 수천 명의 학생과 군중들이 “통일 없는 휴전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대통령 비서 한사람이 판문점에서 공산측이 배포한 ‘휴전회담 재개 수락’ 문서를 들고 황급히 경복궁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승만은 경회루 연못에 낚시 줄을 던져놓고 잠든 듯 기도하는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있다. 비서가 문서를 건네자 한번 훑어본 이대통령은 본체만체 연못의 물그림자만 들여다보더니 다시 눈을 감는다. 약 3시간이 지나자 이승만이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땀인 듯 눈물인 듯 젖어있는 것 같았다.
기자들이 비서에게 물었다. “많이 잡았나요?” 비서가 말했다. “잉어 몇 마리요”
이승만의 낚시질은 명상의 시간, 아니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이다. 그냥 기도가 아니다.
새벽부터 잠자기까지 기도로 계획하고 기도로 실행하는 이승만이 왜 경회루 연못에 앉아 3시간이나 기도를 했을까. 무슨 일 때문인가.
“통일 못하는 휴전”을 두고 밤낮으로 기도하는 이승만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 고뇌를 거듭하다가 하나님께 마지막 담판을 요구하였고 그 응답을 들어 결단을 내린 시간이었다. 무슨 결단? 다음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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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묘한 메모’...“휴전을 반대하나 미국을 방해하진 않겠다”
◉7월9일=어제 경회루 연못 속에서 무엇을 건졌던가, 잉어 몇 마리가 아닌 새 전략을 낚았던가. 잠못 이룬 이승만은 밤중에 혼자 타이프라이터로 작성한 비망록을 로버트슨에게 건넸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특사라지만 로버트슨의 말을 액면그대로 믿을 순 없는 이승만이다.
한미방위조약도 “아이크의 보증서가 필요하다”며 친서를 두 개나 받았던 이승만은 날마다 로버트슨과의 대화도 문서로 작성하여 증거물로 비치하고 꼼꼼하게 대화를 진행한다.
그런 이승만이 쓴 비망록을 읽어가는 로버트슨의 심장이 쿵쿵 뛴다.
“큰 장애물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눈을 들어 이승만을 쳐다보는 로버트슨은 흥분에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하였다.
고집쟁이 노대통령의 양보! 비망록은 ‘휴전조인 전에 중공군이 꼭 철수해야한다’는 조건을 드디어 ‘철회’한 것이었다.
이승만보다 8살 아래인 로버트슨은 원래 금융전문가로 트루먼정부에서 중국에 파견되어 국민당정부의 경제문제를 도왔던 터라 ‘덜레스 뺨치는 반공주의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무골의 장제스와 달리 부드럽기 짝이 없는 이승만이 양파처럼 무궁무진한 전술를 구사하는 지략가를 만나 진땀을 흘린 회담이 벌써 2주일째다.
한문제가 끝나는가 하면 문서화를 요구하며 또 새로운 조건을 꺼내드는 이승만의 협상술에 끌려들어 녹초가 될 지경인데 마침내 숨통이 뚫리는가 싶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미국 상원의 비준 말인데...” 미국 정치를 꿰고 있는 이승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7월말 회기 안엔 시간상 비준이 불가능하다는 아이젠하워의 말엔 동감한다고 했다.
“다음 회기 안엔 조약을 반드시 비준하겠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침에 동의지만, 정치회담 90일도 기간이 매우 짧아요. 우리의 통일노력에 유엔군이나 미군의 참여가 어렵다면 우리 국군 증강에 정신적-물리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문서약속을 그 기간에 지킬 수 있겠소? 분명한 보장을 미국대통령의 결재 문서로 경무대에 갖다 주기 바라오.“
그때 로버트슨은 다시금 깜짝 놀란다.
악수를 청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손에 메모지 한 장, 거기엔 이렇게 씌어있었다.
<한국은 휴전을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미국의 행동을 방해하진 않겠다>
같은 날 클라크 장군일행이 경무대를 방문하고 나왔다. 경복궁 주변부터 클라크가 지나가는 연도에는 이날도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한미방위조약 빨리 체결하라” 상이용사부대는 목발을 흔들며 소리소리 지르고 성조기를 흔들어 “미국 만세”도 불렀다.
언론에선 유엔사령부가 한국정부에 ’곧 휴전협정을 조인하겠다‘고 정식 통고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백악관이 이승만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는 설에 대하여 로버트슨이 “사실무근”이라 부정하였다는 기사도 나왔다.
◉7월10일=제12차 서울회담이 개최될 것으로 기대했던 10일에는 일반의 예상과 달리 로버트슨의 경무대 방문은 없었다. 내외 언론들은 이승만 대통령과 로버트슨 특사사이에 모종의 합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기사들을 보도하느라 분주하다.
◉7월11일=판문점에선 휴전본회의가 재개되어 양측은 비밀리에 회동한 뒤 30분만에 금방 끝냈다. 오후에도 회담장은 문을 잠근 채 회의를 거듭한다. ’조인 임박‘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당면 문제는 하나밖에 없다. 한국 측이 휴전협정을 위반하지 않겠다는 확고하고 구체적인 보장을 유엔 측에 써준다면 공산측은 협정에 조인하겠다는 것이다. 공산측 기자의 태도가 매우 낙관적이라는 것과 종래 보지못하던 새로운 중공 북한 기자들이 다수 나타났다는 것은 조인식의 날이 그다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조선일보] 1953.7.13)
이승만 대통령이 이미 “미국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메모를 전해준 것을 누가 알 수 있으랴.
비상한 관심이 집중된 경무대에선 이승만 대통령이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미대사관에 몰려든 기자들의 질문에 로버트슨 특사가 밝은 표정으로 말하였다.
“우리는 금명간 공동성명을 발표할 준비를 하고 있다.”
잇따라 로버트슨이 12일에 귀국한다는 소식도 흘러나왔다.
★이승만 ”최종 회담 아니다, 계속할 것“
이승만 대통령은 11일 ”한미회담이 우호적인 이해에 도달하였으나 확정적 합의에는 언제 도달할는지 알 수 없다“며 로버트슨과의 회담은 더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제반 현안에 대한 토의는 거의 끝났으나 최종결정은 미국정부가 내릴 것“이라고 말하였다. 최종적 해결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다면서 회견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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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공동성명 발표...한미방위조약 체결 합의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공동성명이 12일 아침10시 발표 되었다.
지난6월26일이래 2주간에 긍하여 계속되어온 이대통령과 로버트슨 미국무차관보와의 서울 회담은 11일 드디어 일단락을 지었는데 12일상오10시를 기하여 한미양국은 다음과 같은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조선일보]1953.7.14)
「지난2주일간 우리는 여러번 서로 만나서 솔직하고도 간곡한 의견교환을 하여 나아가는 사이에 현재 한미양국 간에 존재하고 있는 깊은 우의를 특히 강조하였으며 정전절차 포로교환 및 장차 개최될 정치회담 등에 관련해서 일어난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에 관하여 상호이해에 도달하는데 상당한 진전을 보았다.
그동안 회담을 통하여 우리는 3년전 공산침략이 시작된 이래 우리 양국간의 관계의 특징으로 되어왔던 밀접한 협조를 공동목표를 위하여 정전후에도 계속하여 더욱 강화하겠다는 우리의 결의를 공고히 하였다.
포로문제에 관해서는 우리는 여하한 포로도 강압을 받아서는 안되며 일정한 기한이 경과한 후에는 공산치하로의 송환을 불원하는 모든 포로들을 남한에서 석방하고 반공 중국인포로에 있어서는 그들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로 가게 해야 한다는 우리의 결의를 재강조하였다.
양국정부는 공동방위조약 체결에 관하여 상호 협조할 것을 동의하였으며 그동안 회담을 통하여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우리들 사이에 합의를 보고 있는 점이 많음이 밝혀졌다.
특히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조속한 시일 내에 우리들의 공동목표 즉 자유롭고 독립한 통일한국을 실현하기 위하여 같이 협력하여 나아가겠다는 우리들의 결의를 강조하고 싶다.
우리들은 그동안 회담을 순조로이 진행케 한 상호합치의 정신과 그 결과 생긴 광범한 합의에 뒤이어 서로 위해주는 마음과 서로 편의를 보아주는 정신이 계속되어 그 결과 안전하고도 영속적인 원동평화라는 우리들의 광대한 목표가 꼭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하며 마지않는 바이다」
한미 관계자들은 다음 세 가지를 경무대에서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설하였다.
(1) 미국은 정치회담기간을 90일로 하자는 이승만대통령의 요구를 수락하였고, 만일 정치회담이 실패할 경우 전투 재개문제는 한국과 미국이 그때 협의하여 결정하기로 할 것.
(2)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휴전 성립후 최단 시일내 체결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한다.
(3) 미국은 한국이 석방한 2만7천명 반공포로를 묵인하는 대신에 한국은 현재 억류중인 8천5백명의 반공포로는 석방하지 않고 휴전협정에 의하여 처리하는데 공동보조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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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슨 특사(오른쪽)이 워싱턴에 돌아와, 백악관 아이젠하워 대통령(왼쪽)에게 이승만대통령과의 협상결과를 보고 논의하고 있다.
★이승만 “통일 목표 불변...방법 변경은 모르나 목적 변경은 있을 수 없다”
[서울13일발 INS=합동] 13일 대한민국 공보처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다수의 신문기자들과 해외 친구들이 우리회담에서 나온 결론의 성질에 관한 각종질문을 나에게 보내고 있다. 우리는 현시점에서 발표할 수 있는 것들만 명백히 한 것이다. 앞으로 연구를 요하는 문제가 약간 있다. 최후적으로 결정될 때까지 우리는 공동성명에 만족해야 된다.
친구들은 내가 지금까지 전한국의 재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또 공산침략을 좌절시키기 위하여 지켜온 입장을 오늘날에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틀림없이 이해할 것이다. 방법의 변경은 있을지 모르나 목적의 변경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동아일보] 1953.7.15)
이승만 대통령은 또한 미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휴전을 수락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3개월간은 휴전에 방해를 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미국은 3개월 내로 한국을 통일하고 중공군을 철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로버트슨, 또 한번 충격=12일 여의도를 출발하여 부산에서 유엔군 묘지를 참배한 로버트슨은 수영비행장을 이륙하여 도쿄에 기착하였다. 이튿날 서울에서 날아온 뉴스를 보자 다시 한 번 망치를 맞은 듯 어안이 벙벙하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이 90일 동안만 휴전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데에 미국이 동의했다”고 공개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그 메모가 그런 뜻일 수도 있나? 메모엔 ’90일‘이 분명 없었는데...내가 또 당했구나!
기자들의 논평을 받자 로버트슨은 입을 다물었다. 신문은 “로버트슨씨가 당혹하더라”고 썼다.
벌개진 로버트슨은 부관에게 중얼거렸다. “또 미국을 곤경에 몰아넣는군...”
<계속>
◆필자 인보길(印輔吉)=현 뉴데일리 회장. 조선일보 이사 편집국장, 논설위원, 상무, 디지틀 조선일보 대표 역임. 2010년부터 '이승만 포럼' 운영 대표. 2023년부터 이승만기념관 건립위원. *저서; '이승만 다시 보기', '이승만 현대사-위대한 3년' 외. YUTUBE '인보길의 우남 이야기' 뉴데일리 TV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