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 황제(왼쪽)와 황태자(순종). 러시아식 대원수 제복을 입었다.
    ▲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 황제(왼쪽)와 황태자(순종). 러시아식 대원수 제복을 입었다.
    ’친일파 청산‘ 문제는 해방순간부터 독립운동가들이 제기한 최대의 이슈 가운데 하나다.
    앞서 ’송진우 암살‘ 부분에서 언급했지만 그때 ’국일관 사건‘이 ’친일파‘에 대한 독립운동가들의 인식문제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요약하면, 1945년 11월 중국에서 귀국한 김구등 임정요인들을 국내파들이 종로 음식점 국일관에서 베푼 환영만찬장에서 ”국내파는 모두 친일파“라는 발언이 나와 한바탕 공방전을 벌였다. 즉, 해외파는 ”국내에서 잘먹고 잘살았던 사람들은 누가 뭐래도 일본총독부와 협력한 결과“였다는 주장이었고, 국내파는 ”해외에서 떠돈 사람들은 마음 편히 살았지만 국내에서 일본의 핍박과 싸우며 고생한 사람들이 진짜 독립운동을 했다“는 요지였다.

    이때, 이승만 박사가 피력한 견해는 차원이 달랐다.
    “우리끼리 친일파 싸움을 벌일 때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3천만 동포 전체를 ‘친일파’로 만든 것은 대한제국 황제들이다. 그들과 매국 대신들이 없어진 지금, 본의 아닌 피해자 우리는 부질없는 소모전을 접어두고 우선 독립 국가를 만들어 놓고서야 친일파를 가려내도 늦지 않다. 지금은 너나없이 모두 힘을 합칠 때이다.”
    다시 말하면 을사조약의 고종황제와 한일병탄의 순종황제 부자, 그리고 그 부하들이 친일파의 원흉이고 그들의 ‘매국’ 결정에 따라 동포들은 ‘일본국민’으로 살기위해 친일파가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국치의 날 8월29일 순종 황제가 발표한 성명(칙어)이 그 사실을 웅변해준다. 
    “나 스스로 결단을 내려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께 양여한다”고 선언하였다. 순종은 “대소 신민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는 당부까지 잊지 않았다. 소란 금지, 즉 항일투쟁이나 독립운동을 처음부터 봉쇄한 황제의 마지막 어명이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황제 손으로 일본에 내준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했던가. 그날부터 일본천황의 신민(臣民)이 되어 ‘살아남기 위해 또는 잘 살기 위해’ 피땀을 흘려야했지만,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된 황제부자와 일족들은 해방될 때까지 일본천황이 주는 돈으로 천황에 준하는 부귀와 호화를 누리며 ‘한국제일의 부자’로 살았다. 

    40년 세월이 지난 이제와서 독립도 하기 전에 친일파를 누가 어떻게 처벌할수 있으랴. 남한을 점령한 해방자 미국은 ‘친일’은 무관심한 채 ‘친일 딱지’가 붙은 관료들과 경찰 등을 미군정에 등용하였다. ‘유능한 조선인’은 일본이 훈련시킨 그들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3년이 지나 드디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의 말대로 비로소 ‘친일파 청산’을 미국이 아닌 우리 손으로 해야할 때가 온 것이었다. 
  • 일본 총독부 청사였던 중앙청 국회에서 반민특위가 '친일파 청산'의 첫 회의를 마치고 찍은 출범 기념사진(1984.10.23)
    ▲ 일본 총독부 청사였던 중앙청 국회에서 반민특위가 '친일파 청산'의 첫 회의를 마치고 찍은 출범 기념사진(1984.10.23)
    ◆반민특위의 공과(功過)...역사의 죄와 벌

    친일파 청산 작업은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선포식을 거행하기도 전인 8월 5일 시작된다. ‘무소속’ 의원들을 중심으로 제40차 국회본회의에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위원회 설치를 제안하고 금방 특별법기초위원회를 구성했다. ([국회속기록] 제1회 제40호, 1948.8.5.)
    ‘무소속’ 국회의원들이란, 김구의 총선거부로 한국독립당(한독당) 후보가 될 수 없던 사람들과 정체를 숨긴 좌익 세력이었다. 한독당 당선자들도 이미 김구의 남북협상에 동조하고 북한 공작원 성시백이나 남로당의 지원을 받은 사람들이 상당수였다는 주장이 있다. (박병엽, 앞의 책).

    “우리가 따로 특별위원회를 두자는 것은 두 가지 큰 목적에서다. 하나는 행정부에 맡겨도 실시하겠지만, 아직 기성국가가 아니고 우리가 민족이 뽑아준 최고권력기관인 국회의원이기 때문에 누구를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우리는 입법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그 실행에서도 우리손이 미쳐야 할 것임을 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3권분립의 민주주의체제를 기본부터 무시한 일종의 ‘혁명재판소 설치’와 같은 발상이었다는 지적을 받는다.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조선뉴스프레스, 2015)

    ★반민법 국회 통과...이승만 “개과천선에 선처 강조”

    특별법 기초위원회는 일사천리로 입법을 진행시켰다. 건국선포식 전야 8월14일 전문32조의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17일부터 심의를 시작했다. 이 법안을 기초한 무소속 김웅진(金雄鎭) 의원은 “일본의 공직자추방령, 북한 인민위원회가 만든 법, 중국 장제스의 전범 처벌법 등을 많이 참고했다”  설명했다.

    물론 친일파 청산은 일종의 혁명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일찍이 친일파 정리문제에 대하여 확고한 견해를 밝힌 적이 여러 번이다. 본회의 법안 심의가 한창인 9월 4일 이승만 대통령은 입법에 신중을 당부하는 담화를 냈다.

    ”...원래 법률을 먼저 정하고 그 법률을 위반한 자를 정죄하는 것이 통례이지만 과거에 지은 죄를 법주기 위한 입법은 통례가 아닌 비상조치로서 국민 대다수의 공감대를 얻어 특별법원 판결에 복종하도록 하는 것인 만치, 형식이라도 만들어 놓은 뒤에 처단해야 할 것이지 그러지 못하면 처벌의 경중을 막론하고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여 끝을 볼 날이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1948.9.4.일자)
    그러나 국회에서는 이미 입법한대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한 달 만에 절대다수로 가결시켰다. 
    정부는 회부된 법안을 검토하며 이인(李仁) 법무장관의 해석과 의견에 따라 ‘거부’하기로 의결, 이인 장관은 거부의견서를 작성한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서 급히 통과시켜야 할 법안들이 여럿이므로 9월22일 이 법을 공포하였다. 이튿날 신중한 담화를 발표한다. 

    ”왜적에 아부하여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감행한 자를 처치함은 민의가 지향할 바이며 우리가 다 이를 각오하는 바임으로 이번에 국회에서 의결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대하여 본 대통령은 이 법령을 공포함에 임하여 몇 가지 피력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이 법에는 작위를 받은 자의 자손에게 벌이 미쳐서 그 재산을 몰수한다는 규정이 있는바, 이것은 소상한 해석이 없으면, 중고(中古)시대 연좌율과 혼동될 염려가 있음으로 현대민주주의 법치국가로서 이런 법을 적용한다는 오해를 피해야 될 필요가 있을 것이며,
    또 고등관을 역임한 자를 관등으로 구별하여 벌칙을 정한 것은 일정한 차별 만들기에 필요한 것이지만, 법률은 문구보다 정신을 소중히 하는 것이니, 비록 등급으로는 처벌이 해당할지라도 정신적으로는 용서를 받을만한 경우도 있을 것을 참작하여야 한다. 일단 특별법원을 조직한 후 본법 해당자를 재판하는데 있어서는 이런 점에 특별 유의하여 억울한 일이 없도록 힘쓰기를 희망하며, 일반 동포도 이런 점을 주의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제6조에서 본법에 규정한 죄를 범한 자가 개전의 정상이 현저할 때에는 그 형을 경감 또는 면제할 수 있다고 한 것은 관엄(寬嚴)을 구비한 규정이니, 대개 법으로서 죄를 벌함은 범죄자에게 보복을 하는 것 보다는 범죄자를 선도하여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려는 데에 목적이 있는 까닭이다. 
    법률은 공평하고 엄정하기를 주안으로 삼은 것이니, 의혹이 있는 경우 후한 편으로 치우치는 것이 가혹한 편으로 치우치는 것보다 항상 가(可)할 것이다. 
    또 한가지 내가 자초로 주장하던 것은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함은 정부가 완전히 선 후에 하자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정부가 성립되었으나 정권이양이 아직도 진행 중에 있는 터이요, 또 유엔총회의 결과도 아직 완정되지 못한 터임으로 모든 사태가 정돈되지 못한 이 때에 이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는 내외정세를 참고해야 할 점이 허다한 것이니, 지혜로운 모든 지도자들은 재삼 생각할 필요가 있음을 이에 선명(宣明)하는 바이다.」 ([조선일보] 1948.9.24.일자)

    요컨대,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의 적용에 ‘관용’을 강조하면서 파리에 사절단을 파견한 유엔의 국가승인 미정상태 등 유동적인 남북한 정세를 참작하라는 요청과, 신생 행정부가 당면한 갖가지 문제의식을 드러낸 설득이다. 말할 것도 없이 새로운 국가건설(Nation-Building)에 필요한 인재들이 벌써부터 술렁술렁 일방적인 ‘친일파 그물‘에 갇혀 국정이 난관에 봉착하였기 때문이다.

    ★경찰들 줄줄이 옷 벗어...남로당서 포섭

    이미 해방직후 ‘친일’ 딱지가 붙어 해직된 경찰관들은 남로당의 공작에 걸려 공산주의로 돌아서고 미군정의 군에 입대하는 경우도 줄을 이었다. 앞서 지적한대로 미군정은 입대자 신분조사에 무관심하였기에 공산당은 퇴직 경찰관들을 닥치는 대로 포섭, 입대시켰다.
    ”한국 실정에 어두운 미군정이 우리의 자문을 무시하고 무분별하게 군대 내부에 공산분자들의 온상을 허용한 사실은 커다란 오점이다“ (윤치영 [동산 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이승만은 자문교수 올리버에게 쓴 편지에서 초조한 당시 심정을 토로하였다.
    ”...온 나라가 흥분의 도가니가 되고 있소. 경찰간부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치안유지를 위해 애써왔는데 이제 쫓겨난다고 말합니다. 요컨대 어떤 남자나 여자가 친일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게 현실이오. 김성수와 그 밖의 다른 모든 한민당 지도자들도 일본인들과 일해서 돈을 벌었다는 것이 사실이지 않소. 하지 장군의 송별회 때 김활란은 국회의원들에게 친일파 문제를 신중히 다루어 달라고 말했소.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는 것이오. 임영신도 자기 학교를 지키기 위해 한때 협력할 수 밖에 없었다고 김활란은 말해주었소“ (로버트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비봉출판사, 2013. R.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번역)
  • 반민특위 특별재판부가 '친일파' 피의자를 재판하는 모습.
    ▲ 반민특위 특별재판부가 '친일파' 피의자를 재판하는 모습.
    ★”해방후 행위도 예외 없다“ 출발부터 '위법' 선언

    국회는 그해 1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기관 조직법’과 ‘반민족행위 특별재판부 부속기관조직법’을 제정하고, 이승만 정부는 이를 공포하였다. 
    반민특위는 새해 1949년 1월5일 중앙청 제1회의실에 역사적인 ‘시무식’을 열었다.
    위원장 김상덕(金尙德, 경북 고령) 국회의원은 흥분한 목소리로 개식사를 하고, 부위원장 김상돈(金相敦,1901~1986, 무소속)은 ”민족정기를 바로 잡아 3천만의 박수를 받아내자“는 격려사를 하였다.
    반민특위 특별감찰부 차장이 된 실권자 노일환(盧鎰煥, 전북 순창) 국회의원은  거침없는 장담을 토로하였다. ”1차로 20명 정도 거물들을 조사할 것이다. 가장 미운 놈은 해방전 친일행위를 감행하고 해방 후에도 버젓이 나와 날뛴 놈들이다. 맨 먼저 그런 자만 열명쯤 단호히 처단해 버리면 기강을 바로 잡고 민심도 수습될 것“이라면서 ”그 개전의 정이란 것도 해방후의 개전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독립신문]1949.1.1.일자)
    이 말은 ‘해방 이전의 행위만 처벌한다’는 반민법의 규정에 위반되는 발언이었다.
    반민특위는 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특별감찰부로 구성되었다.
    과연 ‘혁명’이다. 대한민국의 행정부 사법부를 젖혀놓고 3권을 한 손에 쥐었다.

  • 이승만이 대표적 친일파로 지목한 송병준과 이완용(오른쪽). 이들을 처벌해야지 뒤늦게 국민들을 두번 죽이지 말라고 이승만은 당부하였다.
    ▲ 이승만이 대표적 친일파로 지목한 송병준과 이완용(오른쪽). 이들을 처벌해야지 뒤늦게 국민들을 두번 죽이지 말라고 이승만은 당부하였다.
    ★건국 공로자에 관용 요청...”3권분립 지켜라“

    반민특위가 출발부터 ‘반민행위처벌특별법’ 규정을 넘는 ‘무차별 처벌’ 발언과 함께 ”조사에서 재판-처벌까지 국회 독점주의“를 내세우며 질주하자, 나라는 일대 ‘혁명바람’에 휘말린다.
    이승만 대통령은 1월 7일 대법원장 김병로, 국무총리 이범석, 검찰총장 권승렬(權承烈)을 경무대(대통령집무실-관저)로 불러 대책을 논의하고 담화를 발표하였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싸워서 국권을 회복하였다면 이완용, 송병준 등 반역원괴(叛逆元傀)들을 다 처벌하고 공분을 씻어 민심을 안돈케 하였을 것인데, 그러지 못한 관계로, 또 국제정세로 인하여 지금까지 연기하였으나, 국권을 찾고 건국하는 오늘에 있어서는 형편도 많이 달라졌고
    부일협력자의 죄에 따라서 근본적 배경과 역사적 사실을 냉철하게 참고하지 않고는 공정히 처리하기 어려움이 오늘 우리의 실상이다....(중략)....이에 한가지 중대히 생각할 것은 오늘 건국 초창기를 맞아 앞으로 건설할 사업에 노력해야 할 것이요....(중략)....입법부에서나 사법부에서 왕사(往事:지난 일)에 대한 범죄자의 수효를 극히 감축하기에 힘쓸 것이요, 또 증거가 미분명한 경우에는 관대한 편이 가혹한 형벌보다 동족을 애호하는 도리가 될 것이다...“

    이승만은 그러면서 을사조약과 합병조약에 서명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을 하나도 처벌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라 재삼 상기하며, 군정 3년간 국가의 공효(功效)를 세운 자는 장차 속죄할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건국에 많은 공효를 세운 사람들이 있으니 이를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특별재판보다 ”사법부에 넘겨서 법에 따라 재판범절을 행하되,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진행할 것이니, 여기에 민주국의 3권분립이 조금도 혼돈되지 말도록“ 경고성 당부를 거듭하였다. 처벌 전에 대통령의 재가를 받으라고 촉구한 것이다. ([서울신문] 1949.1.11.일자)
  • 1930년대 조선인 기업의 상징 화신백화점(종로 네거리)건물, 5층에 1개층을 증축한 모습(일본이 찍은 '경성 명소' 시리즈 사진). 오른쪽 얼굴은 사장 박흥식.
    ▲ 1930년대 조선인 기업의 상징 화신백화점(종로 네거리)건물, 5층에 1개층을 증축한 모습(일본이 찍은 '경성 명소' 시리즈 사진). 오른쪽 얼굴은 사장 박흥식.
    ★‘반민족행위’ 검거 1호는 ‘조선 제1부자’ 박흥식

    반민특위는 1월8일부터 검거에 나섰다. 제일 먼저 지목된 박흥식은 그의 화신백화점 4층 사장실에서 연행된다. 당시 최신식 화신백화점은 지금 종각 네거리 삼성건물자리에 있었다. 중앙청(일본 총독부건물)에 위치한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에서 조사를 받기 시작한 박흥식은 기관총을 든 수십명의 무장 경찰이 앞뒤로 호송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
    10일엔 반민특위를 가장 반대한 대동(大東)신문사 사장 이종형(李鍾滎)이 연행되고, 매일신보사 사장을 지낸 최린(崔麟), 총독부 중추원 참의 방의석(方義錫)과 김태석(金泰錫), 남작 이종건(李鍾健)의 양자 이풍한(李豊漢), 중추원 참의 이승우(李升雨), 충남지사를 지낸 대동청년단 이성근(李聖根), 고종의 5촌조카이자 일본귀족원 의원이던 이기용(李琦鎔)이 구속되었다.
    그리고 박흥식과 쌍벽을 이루는 호남 부호이자 만주국 총영사를 지낸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金秊洙, 1896~1979. 인촌 김성수 동생), 일본 [아사히 신문] 서울지국 기자로 밀정행위를 했던 정국은(鄭國殷)도 잡혀갔다. 
    가장 주목되던 일제경찰 노덕술(盧德述)이 서울시경 총경 자리에서 연행되었고, 일제경찰 간부 이원보(李源甫)와 일본 헌병출신 종로경찰서장 유철(劉澈), 중추원 참의 조병상(曺秉相)도 검거되고, 달을 넘겨 2월7일엔 3.1독립선언서 작성 학자 최남선(崔南善,1890~1957)과 언론인 소설가 이광수(李光洙,1892~1950)가 끌려갔다. 반민특위는 이어서 지방거주 거물급들을 일제히 잡아들였다. (이강수 [반민특위연구] 나남출판사, 2003)

    ◉여기서 박흥식(朴興植, 1903~1994) 이야기를 더듬어보자. 그는 왜 ‘검거1호’가 되었을까.
    박흥식은 일본이 주겠다는 작위(爵位)도 중추원 참의도 거부하였고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 일제치하에서 오로지 기업가의 길만 걸어 ‘조선 제1의 부자’가 된 것이 죄였단 말인가. 
    「조선 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책임 경영하였다」 이것이 반민특위가 내민 첫째 죄목이다.

    평양과 진남포 사이 용강(龍岡)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박흥식의 삶은 한마디로 ‘천재 기업가의 신화’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눈부신 용의 승천 스토리를 간단히 정리한다.
    ▷14세=농사 거부, 쌀장사 시작. 큰 돈 벌어 소유 농지를 100정보로 확장. 인쇄업 진출 성공. 자본금 10만원 ‘선광인쇄주식회사’를 설립. 18세가 되다..
    ▷20세=창고-운송업-유통업 시작. 지물(紙物;종이) 판매업 진출. 서울에 ’선일지물‘ 설립. 3.1운동후 총독부의 문화정책에 따라 언론-문화계등 종이수요 급증. 조선일보-동아일보 신문용지 전담공급등 종이시장 석권. 부자라면 다들 가는 일본유학도 안가고 보통학교만 졸업한 젊은 아이디어맨의 치밀한 신용경영과 금강산 경품등 다양한 고객관리가 대박을 쳤다.
    ▷24세=일본 지물업계가 견제하자 스웨덴-캐나다로 진출 신식종이 수입, 일본에도 수출. 난관을 극복한 국제무역에 대성공. 글로벌 기업가로 변신 성공.
    ▷28세=종로네거리 화신(和信)상회를 자본금 100만원에 인수, 다음해 최신식 5층 화신백화점 신축, 동아백화점 인수합병. 고향 평양과 진남포에 분점 개설. 경성(京城=서울)을 장악한 일본 백화점 미쯔코시(三越;현 신세계), 조지야(丁子屋;미도파-현 롯데) 등과 본격적인 경쟁 압도.
    (후일담: 왜 ’화신‘을 샀느냐? ”거꾸로 읽으면 ’신화‘라서 꽂혔다“는 대답)
    ▶선구적 백화점 마케팅 전략◀ 현대식 첨단 마케팅을 박흥식이 먼저 시작하다. 전근대적 상거래 혁신, 철저한 가격정찰제 실시. 반품 허용, 전화 이용한 통신판매, 방문 판매, 상품권도 판매. 구입상품 배달. 고객들에게 상품목록 발송. 전등 1만개를 사용한 네온사인 전광판 광고. 신문과 라디오에 대대적 광고. 문화주택 1채를 내건 경품제 도입, 대형쇼윈도에 마네킹 전시. 
    ▷37세=일본 백화점과 대등한 ’조선의 백화점 왕‘이 되다. 특히 전국에 거미줄 친 450개 ’연쇄점 유통망‘ 방식은 당시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박흥식의 선구적 블루 오션 장악이다.
    ▷41세=태평양 전쟁 말기 1944년 일본은 소진되는 항공기 생산 확대를 위해 ’조선비행기공업회사‘ 창설을 박흥식에게 떠맡긴다. 유통전문가에게 제조공업은 처음, 그것도 방대한 방산업체 비행기 생산, 전투기는 아니고 목제경비행기 제조공단은 경기도 안양에 들어섰다. 총독부 1년 예산이 44억일 때 무려 2억을 쏟아부은 일본 공기업의 경영인 박흥식은 한국 청년들을 대규모로 고용, 1년을 뛰었지만 시제품 출고를 한달 앞두고 전쟁이 끝났다. 사업으로서 평생 처음 처절한 대실패를 떠안았다. 그뿐이랴, ’친일파‘ 딱지가 평생의 삶을 결박 짓는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천재 기업가의 운명은 다시는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 반민특위에 연행되는 '친일' 피의자들.
    ▲ 반민특위에 연행되는 '친일' 피의자들.
    ★반민특위 갈팡질팡...박흥식 무죄 석방...특경대 독무대

    박흥식의 성공 스토리를 소개했다고 해서 그를 변호할 의도는 추호도 없다.
    인간의 역사란 태어난 시대의 격랑에 쓸려가는 조각배, 태풍을 만나면 누구나 침몰하기 십상이다. 조선의 원시적인 기업계를 근대화시키며 승승장구하던 기업혁명가 박흥식인들 별수 있겠는가. 일본 천황을 찬양해야 기업도 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던 시대가 그렇게 끝날 줄을  누가 알았으랴. 한창 나이 45세 야망가, 그 나이 42년을 일본국민으로 대성한 그는 이제 ’민족의 죄인‘이 되어 반민특위 검찰이 ”비행기회사는 왜 맡았느냐“고 물었을 때 말했다. 
    ”내 사업이라면 결코 손댔을 리 없지 않겠소? 파산했지만 소득이라면 2천800명 우리 청년 사원들이 징집을 면제받아 살아남은 일이지요....이 방대한 시설이 대한민국의 경제건설에 도움이 되기만 바랄 뿐입니다.“

    박흥식은 20여일간 조사를 받고 특별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무죄‘를 선고받아 풀려났다. 다행히도 전쟁이 일찍 끝나 비행기 생산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일본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그의 삶은 어떤 길을 갔을까. 3천만 한국인들은? 이것이 식민지 인간의 운명이다.
    이와 같이 ’친일파 청산‘은 초장부터 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게다가 ”부자라서 봐주느냐? 불공평하다. 뇌물을 받은 게 아니냐?“ 여론의 의심까지 반민특위를 괴롭혔다. 

    ▶일제시대 ’경찰의 베테랑‘ 노덕술(盧德述,1899~1968)은 ’치안 기술자‘로 불렸다. 치안기술자란 ’대공수사전문가‘를 이르는 말인데, 노덕술은 당시 일본의 반공수사 최전선에서 잔뼈가 굵어지며 ’공산당 잡는 귀신‘이 되어있었다. 따라서 독립운동가를 자처한 한국인 공산주의자들도 많이 잡았으므로 해방후 남로당은 노덕술을 ’동족 잡아먹은 악덕경찰‘로 지목, 친일파 숙청의 상징물처럼 변했다. 
    그 노덕술을 연행한 반민특위가 노덕술에게 어마어마한 혐의를 제기함으로써 법무부 검찰도 함께 수사해야하는 판으로 커졌다. 그 혐의란 대규모 암살음모이다. 즉, 미군정 수도경찰청 사찰과장 노덕술, 수사과장 최난수, 부과장 홍택희, 중부경찰서장 박경림 등 4명이 반민법에 반감을 품고 반민특위 요인들과 국회의원들을 살해할 목적으로 테러리스트를 고용하여 거사자금과 권총등 무기를 제공했다는 혐의였다. 이이 대한 조사와 재판을 진행하였을 때 피고인들은 모든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였다. ([서울신문]1949.3.29.일자).
    이때, 반민특위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정부안에 있는 ’반민족행위자‘들을 공직에서 추방하라는 공문을 발송한 사실이 알려지자 공무원사회는 일손을 놓고 술렁거렸다. 
    정국은 여수-순천 군사반란’을 진압하고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켜 군대안의 공산당을 청소하는 ‘숙군’과 동시에 사회전반의 불순분자들을 전면 탐사 정리하는 과정에 있었다. 
    노덕술과 경찰간부들이 검거되면서 경찰의 대공수사도 손을 놓게 되고 공무원사회도 개점휴업 상태로 흘러간다. 급기야 이범석 국무총리가 ”이승만 대통령각하의 생각이 확고하시므로 관공리는 필요이상으로 동요하지 말고 행정에 지장이 없도록 대한민국 발전에 임하라“는 통첩까지 전국에 내리기에 이른다.([국무회의록] 1949.2.4.)
  • 이승만은 반민특위에 '관용과 준법'을 거듭 요구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조선DB
    ▲ 이승만은 반민특위에 '관용과 준법'을 거듭 요구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조선DB
    ★이승만 ”범죄자는 엄벌하되 국가 치안은 지켜야“ 

    이 무렵 국무회의에서는 반민특위 활동에 관한 보고가 잇따랐다.
    특위의 구금, 구타 등 검찰, 사법, 행정을 독자적으로 행함은 치안과 민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므로 반민법안을 3권분립에 맞게 개정하여 국회에 제출하자는 결론을 모은다. 
    또한 이인 법무부장관의 보고는 반민특위 조사관 2명이 노덕술을 사무실내 금고에 이틀동안 감금하는 고문을 행했다는 것이었고 정체불명의 ‘특별경찰대’(특경대)가 조직되어 경찰을 무시하는 횡포가 늘어난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잇따라 담화를 발표한다.
    ”반민법이 헌법과 모순되는 법률이므로 속히 개정해야 한다. 반민특위의 특별경찰대가 피의자를 체포 구금하는 일은 금지되어야 한다“면서 ”정당한 절차에 의해 제정된 법률이라도 전국의 치안에 중대한 관련이 될 때에는 임시로 정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격하게 경고하였다.
    ”행정부, 사법부의 일까지 맡아가지고 2~3인의 자의에 따라 사람을 잡아다가 난타 고문하라는 문구나 법률은 없는 것이니, 즉시 개정하는 것이 옳다.“ ([조선일보]1949.2.16.일자)
    그리고는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는 국회대로 ”대통령 담화는 부당하므로 취소하라“는 결의문을 전격적으로 통과시켰으며 정부가 제출한 법개정안은 심의도 안하고 폐기시켰다.
    이승만은 기자회견을 열어 반박한다. ”국회가 치안혼란을 선동하고 있다. 과거에 친일한 자들을 한꺼번에 숙청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지난 미군정3년간 못한 것을 지금에 와서 단행한다하면 나라 운영에 지장이 많다. 반민자 처벌을 하지말자는 것이 아니라, 처단하되 정당한 방법을 취하는 동시에 그 때를 고려하자는 것이다.“ ([서울신문]1949.2.19.일자)

    이승만은 국회에서 미군철수문제를 들고 나온 것에 분노를 터트린다.
    ”미군철퇴문제를 제출한 것은 과연 민심을 정돈하려는 것인가? 미군을 배척하고 공산군을 청해 오려는 주의인가? 전쟁이 발생할 때까지는 경찰이 치안을 전담하고 책임짐을 다 알 것이다. 경찰의 보고를 들으면 공산당이 경찰과 가족을 기회 있는대로 살해하는 중이오, 안에서는 국회의원들이 경찰을 못살게 만들고 있으니 어쩌란 말이냐고 눈물로 호소하는 중이다. 지방에서는 3~4명씩 살해당하지 않는 날이 없지 않다고 한다. 
    국회에서는 특경대를 조직한 일이 없다하나 각 신문에 연일 보도되는 체포사건들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 반민분자들을 처벌하더라도 치안을 보장하면서 다 할수 있을 터인데 기어이 치안을 파괴하는 일만 한다는 것은 누구도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9.3.29.일자)

    당시 신문보도를 보면 이승만의 주장을 증명하는 사건들이 잇따르고 있었다.
    3월17일엔 연희대 총장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 元漢慶)의 부인이 자택에서 교수부인들과 간친회를 하던중에 괴한을 총탄을 맞고 숨졌고, 29일엔 [남로당 총비판]이란 책을 출간한 저자 박일원(朴馹遠)이 정체불명의 범인에게 살해되었다. ([조선일보]1949.3.30.일자)
  • 반민특위 국회의원들의 친일행위 처벌을 싸고 비밀회의를 열었다는 기사. 가운데 언더우드 부인의 피살사건 보도와 왼쪽엔 조선일보 사설. ⓒ조선DB
    ▲ 반민특위 국회의원들의 친일행위 처벌을 싸고 비밀회의를 열었다는 기사. 가운데 언더우드 부인의 피살사건 보도와 왼쪽엔 조선일보 사설. ⓒ조선DB
    ★반민특위, 자신들의 ‘친일행위’에 발목 잡히다

    ‘친일파 청산’의 혁명 깃발을 휘두르는 반민특위에 역풍이 몰아쳤다.
    ”국회의원들 중에도 친일파 많다. 당신들은 특권층이냐?“ 국민들의 손가락질은 물론 국회 내에서도 자책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황한 반민특위는 자체조사 하겠다며 가림막을 치지만 국회의원 가운데 이종린, 한엄회, 이항발, 이각종, 신성균 등 여러명의 부일(附日) 행적이 표면화되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의 인물은 바로 반민특위 핵심 부위원장 김상돈이었다.
    친일파를 청소하여 국민의 박수를 받자며 앞장섰던 김상돈은 일본식민지기간 10여년동안 서울 서교동, 합정동, 망원동의 총대(總代)를 맡아 총독부에 협력한 경력들이 금방 표면화되어 국회 본회의에서 본격적인 성토가 벌어졌다. 
    여기에 엎친데 덮치는 사건이 일어난다. 김상돈이 자신의 차를 몰고 시내로 달리다가 아현동 로타리에서 교통사고를 일으켜 길가의 어린이를 치었다. 8세 어린이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러자 김상돈이 동승했던 호위경관에게 사고사실을 극비에 부치라고 명령한다. 경찰들은 마포구청으로 달려가 직원 오봉갑에게 압력을 가해 “어린이가 전날 병사”한 것으로 조작, 묘지사용 허기를 받아 어린이를 화장 매장하였다. 그러나 검찰은 수사 끝에 김상돈과 두 경관, 구청 직원을 업무상 과실치사, 허위 공문서 작성 교사 등의 혐의로 기소하였는데 김상돈은 불구속 기소였다.([동아일보] 1949.4.14.일자).

    반민특위의 일탈행위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거물 피의자들을 기소유예나 보석으로 석방하는 일이 자꾸 생겼다. 박흥식은 물론, 중추원 참의로 전쟁협력단체를 만든 충남 공주갑부 김갑순(金甲淳)도 석방시켰다. 보석공탁금은 각 100만원씩이다, 중추원 참의 방의석은 보석되었다가 재구속되기도 했다. ([조선일보]1049.4.22.일자)
    그러자 반민특위의 특별 검찰부 검찰관 9명 전원이 “이런 특위에서는 더 이상 직무를 감당키 곤란하다“며 집단사표를 제출하였다.

    이때 기자들이 검찰들의 집단사퇴와 교통사고 문제를 김상돈에게 물었다. 
    김상돈은 “보석문제에 대해 오해 없기를 바란다”면서 자신의 교통사고 은폐에 관해서는 길게변명한다. “개인의 교통사고문제를 가지고 특위까지 결부시켜 신문방송이 떠드는 것은 그 진의를 이해하기 곤란하며, 사고 피해자의 인권옹호와는 별개인 것이다.” ([평화일보]1949.4.24.일자)

    국회는 김상돈의 어처구니없는 언동 때문에 사면초가에 빠졌다. 결국 그의 반민특위 조사위 부위원장 직책을 박탈하는 파면 결의안을 제출하였는데 반발세력의 반격에 격론을 벌이기만 하였다. 반민특위의 친일파 청산작업에 대한 남로당 박헌영의 국회공작 때문인데 이는 뒷날 드러난다. 
    이때 반민특위는 결국 “국회 안에는 반민족행위자가 없다”고 공포하였다.([제헌국회속기록(4)] 1949.8.19.) 김상돈과 국회의원들의 친일행각을 덮어버린 발표였다.

    반민특위를 둘러싼 잡음은 끊일 날이 없었다. 조사관을 사칭하여 피의자들의 가정을 찾아가  금품을 뜯어내는 사기꾼들이 돌아다니고, 사건담당 변호사가 친일분자로 체포되는가 하면, 조사위 국회의원의 경호 경찰이 살해되는 사건도 났다. 신문마다 사회면이 어지러웠다.

    ★이승만, 미군 철수와 북한군 침략 위기감

    “인권상 가장 중요한 것이 생명-재산 보호권이요, 정부의 제일 중요한 책임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다. 반민특위 어느 국회의원이 어린아이를 치어 죽었다는데 사실을 없이하고 시신을 없앴다니 경찰과 검찰이 정당히 조치할 줄 믿고 기다렸거늘...”
    국회의원에 의한 인권유린과 검-경의 일탈에 실망한 이승만은 “준법”을 역설하였다.
    “특위 조사위원들이 평민을 고용하여 특경대를 만들어, 국회의원의 명령 만으로 반민을 자의로 가두고 고문하니 이것이 다 위법한 행동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불법 횡포를 경고하며 치안유지를 재삼 촉구하는 담화를 계속 내놓는다.
    경찰을 무력화시키고 경찰 대신 설치는 특경대를 해산하고 공권력을 회복하지 않으면 나라가 위험해진다. 미군도 은밀히 철수계획을 진행하여 이젠 1만 명도 남지 않았다. 
    이승만은 제주도 폭동을 비롯한 공산분자들의 준동과 언제 쳐내려올지 모르는 북한군의 침략을 걱정하며 안절부절이다.

  • ◆국회프락치사건...친일파 청산은 6.25전쟁 중 끝나다

    터질 것이 터졌다. 5월18일부터 6월20일까지 국회의원 13명이 체포되었다. 바로 국회프락치사건이다. 소장파 의원들과 그 중심인물 국회부의장 김약수(金若水)까지 제헌국회에서 미군 철수 선전공작을 벌인 암약이 들통 난 것이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은 다음 장으로)

    마침내 특경대가 경찰의 공격을 받았다. 6월6일 이른 아침 남대문로 2가(현 광교 부근)의 반민특위 사무실에 중부경찰서장 지휘로 경찰 40명이 들이닥쳤다. 특경대원 20명을 무장해제 검거하고 반민특위 사람들의 권총 16자루와 관련서류들을 압수한 뒤 2시간 만에 철수하였다. 

    잇따라 서울시경찰국 산하 간부들은 반민특위 쇄신, 특경대 해산, 경찰신분 보장 등 요구조건을 결의하고 이를 이승만대통령에게 제출하였다. 서울시내 경찰관 9.000명과 철도경찰대도 합류하였다. “48시간내 요구조건을 수용하지 않으면 총퇴진” 결의문도 냈다.

    이튿날 이승만 대통령은 “내가 특경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 명령했다”고 자신이 AP통신기자에게 공개하였다. “헌법은 오직 행정부만이 경찰권을 가지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에” 국회 자의로 만든 특경대는 해산돼야 한다고 밝혔다.

    국회는 ’특경대 해산‘문제가 제기되어 갑론을박을 거듭한 끝에, 내각불신임안이 나오고 정부법안들과 예산안 심의를 거부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맞섰다. 하지만 결국 무릎을 꿇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의 증거가 속속 드러나므로 저항력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달 후 7월6일 국회는 정부가 제출한 ’반민법 개정안‘을 가결하였다. 개정안은 반민자들의 공소시한(1950.6.20.)을 앞당겨 1949년 8월31일까지로 단축한 것이다.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을 비롯한 특별조사위원들이 전원 사표를 냈다.
    후임 위원장에 법무장관이던 이인이 취임하였다. 그는 지난 3월 미국대사로 부임한 장면의 선거구 종로(을)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던 참이다. 
    10월5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다시 개정되고 반민특위 특별조사부, 특별감찰부, 특별재판부가 폐지되었다. 그 대신 대검찰청과 대법원이 친일파처리를 맡았다. 이 작업은 6.25전쟁 중에도 계속되다가 1951년 2월3일 전시 국회에서 ’반민법 폐지에 관한 법률‘이 가결됨으로써 대단원을 내렸다. 

    1948년 8월 정부수립 전에 시작하여 3년 만에 마감한 친일파 청산의 성적표는 어떠했던가. 
    모두 633명을 조사하여 599명을 송치하고 그 중에, 293명 기소, 7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독일은 2차대전에서만 수천만명을 살해하였는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기소된 전범들은 22명이었다. 일본의 전범재판도 고작 25명 기소로 끝이었다. 이승만 정부가 기소한 친일파 293명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프랑스의 친나치(親Nazi)분자 숙청과 비교하지 말라. 그들은 독일이 점령한 상황에서 조국을 배신하고 나치에 협력한 전쟁중의 현행범들이었다. 단기간의 점령시 적의 앞잡이로 뛴 반역자들과, 한세대가 넘는 40년 식민치하의 민생차원 삶의 행적은 비교의 기준이 그 차원을 달리한다. 
    프랑스가 독일패전후 나치의 꼭뚜각시 비시 정권(Régime de Vichy)을 집단숙청하 듯이, 우리도 한일병탄 직후에 친일파를 처벌할 수 있었다면 고종 황제 부자를 비롯하여 ’진짜 반민족행위자‘들을 모조리 처단하지 않았겠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