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건국후 최초의 한미협정 체결. 미군정의 통치권을 이양 받고, 미군정이 관리하던 '귀속재산' 일체를 인수하는 협정이다.ⓒ조선DB
    ▲ 대한민국 건국후 최초의 한미협정 체결. 미군정의 통치권을 이양 받고, 미군정이 관리하던 '귀속재산' 일체를 인수하는 협정이다.ⓒ조선DB
    건국선포식 즉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 행정이양 협정을 추진한다. 
    1948년 8월15일 자정을 기해 미군정이 장악했던 모든 통치권을 이양 받는 ‘한미간 통치권 이양 및 주한미군에 관한 협정’으로 독립국가의 주권이양과 미군주둔 문제가 각서로 교환되었고, 또 하나는 협상을 거쳐 9월11일 체결된 ‘한미간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The Initial Financial and Property Settlement between the Government of R.O.K. and the Government of U.S.A.)으로써 미군정이 관리하던 모든 한국내 유무형 재산이 대한민국 정부 산하로 이관을 완료하였다.
    그것은 일본의 항복과 함께 일본이 한반도내에 구축한 재산중 남한내 일본재산을 미군정이 맡아 관리하다가 이승만 정부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었다는 의미이다. 바로 ‘귀속재산’이 그것이다. ‘귀속재산’ 문제는 뒤로 미루고, 미군철수 문제부터 살펴보자.

    ◆ 국가존립의 최대 변수 ‘미군 철수’...이승만은 발벗고 나섰다

    이승만에게 해방3년간 ‘미군 철수’ 문제는 건국투쟁의 핵심 주제였다. 
    미소공위에서 미국이 소련에 양보한다든지, 이승만을 감금하며 우파를 전면 배제시키고 좌우합작을 추진한다든지, 이는 모두 미국이 얼렁뚱땅 한국문제를 해결했다며 소련에 넘겨주고 한국에서 ‘명예롭게 철수’하려는 작전임을 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사령부에 보내는 미국정부의 각종 지시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음을 이승만은 놓치지 않았다.

    여기서 이승만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든 것이 한국에 진주한 미군장병들의 불만이었다.
    마샬 국무장관의 최측근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1897~1989) 장군의 한국시찰 보고서들(Wedemeyer Reports)이나, 아놀드에 이은 2대 미군정장관 러치(Archer L. Lerch) 소장의 보고서와 편지들은 “한국은 비용만 많이 들고 전략적 가치가 적은 지역”이라면서, 주한 미군의 조기철수를 주장하고 미군들의 불평불만과 사기 저하를 그 이유의 하나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 증거물 가운데 하지 미군정사령관이 보관했던 ‘하지 파일’에 들어있는 미국 언론의 보도내용은 아주 충격적이다. (김택곤 [미국 비밀문서로 읽는 한국 현대사 1945~1950] 맥스media, 2021).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을 현장 취재한 [시카고 트리뷴 The Chicago Tribune]의 월터 시몬스(Walter Simons) 기자가 쓴 1946년 12월13일자 기사를 ‘김택곤 저서’에서 인용한다.
  •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장군이 보관한 '하지 파일'에서 김택곤 교수가 발굴한 자료. 주한미군들이 한국근무를 극도로 기피하였다는 내용이다.
    ▲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장군이 보관한 '하지 파일'에서 김택곤 교수가 발굴한 자료. 주한미군들이 한국근무를 극도로 기피하였다는 내용이다.
    ★열악한 주거 환경에 불만 폭발...“소련이 남한을 점령했으면 좋겠다”

    「미군 병사들은 한국에 대해 좋게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한국에 비하면 일본은 천국”이라고 했다. 일본에서 휴가를 보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미 해군 수송선에 탄 주한미군 37명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일본과 한국 사이 대한해협에는 거친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북해의 찬바람에 익숙한 기자이지만 금새 손이 차갑게 변하고 떨어져나갈 듯 아프다.
    호테이호(號)는 바닥이 평평한 민간선박인데 미 해군에 편입되어 주한미군들을 일본의 미군 휴양소까지 실어 나르는 왕복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풀죽은 표정을 지은 병사 한명이 외치듯 말했다. 
    “일본에서 내내 근무할 수 있다면 10년 복무 계약이라도 냉큼 서명할거야.”
    그에게 물었다. “한국은 어때요?”
    잠시 침묵하던 미시간주 출신 돈 벡(Don Beck) 병장이 대답한다.
    “지금 우리를 놀리는 거요? 미국과 일본이 다르듯이 일본과 한국도 엄청 다르지요. 한국인들은 거칠게 대하면 대할수록 우리를 좋아합니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면서죠. 일본서 근무하는 미군은 천국에 있는 겁니다.”
    다음은 펜실베이니아주 출신 일병의 말이다.
    “일본인들은 친절합니다. 한국인들은 적대적입니다. 우리가 한국 어린이들을 사진 찍으려하면 달아납니다. 우리가 한국인들을 잘 대해주면 그들은 우리를 속입니다. 물건을 놓아두고 잠시 자리를 비우면 순식간에 없어지거든요.”
    다른 병사가 중얼거렸다.
    “나는 소련이 남한을 차지하면 좋겠어요. 그러면 나는 일본으로 떠날 수 있으니까요”
    그 뒤를 따라 말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한국에 대해 좋게 말하는 병사는 한명도 없었다. 대화가 잠잠해지자 듣고만 있던 대위가 말했다.
    “한국에 근무한지 1년이 넘지만 우리가 한국인들과 가깝게 지내려는 노력은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습니다. 밤에 뒤척이면서 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만 전혀 희망이 안보입니다”...」

    하지 파일에 보관된 극비 문서 <한국문제 요약 보고서>가 비중있게 다룬 문제는 주한 미군 인력의 열악한 근무여건과 주거환경 문제였다.
    「주한미군의 인력난은 일본의 적정한 수준에 비하면 너무 심각하다. 38선을 따라 경계하는 전투병력과 마찬가지로 각 분야에서 기본적인 복무, 점령에 관한 업무 등을 수행하는 개개인에게 주어진 부담은 너무 크다. 민간인 군속의 인력난은 더욱 심각하다. 극도로 열악한 한국의 생활 환경은 역량있는 고급인력을 구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하지 주한미군 사령관은 특히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고 보고서는 쓰고 있다.
    “점령초기부터 지속되는 열악한 주거여건이 미국인들의 가족동반을 제한시켜왔고 이것 때문에 미군과 민간인 신분의 근무자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일본과의 심각한 차이점이다. 개선될 가망이 없는 한국내 주택난과 서양식 가구의 부족, 호텔이나 유사한 시설이 없다는 점, 일본에는 가게 곳곳에 쌓여있는 생필품들이 한국에서는 극도로 부족하다는 점이 큰 문제이다.”
    그러면서 하지 사령관과 참모들은 ‘한국으로부터의 조속한 탈출‘을 본국정부에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 파일] 김택곤, 앞의 책).
  • 현재 서울시유지 '송현 녹지'의 모습. 이승만대통령이 미군의 장기주둔을 위해 주거단지로 제공했던 토지중의 한곳. 이곳에 이승만기념재단이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 현재 서울시유지 '송현 녹지'의 모습. 이승만대통령이 미군의 장기주둔을 위해 주거단지로 제공했던 토지중의 한곳. 이곳에 이승만기념재단이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승만, 이왕가 소유 송현동-사간동 일대 땅을 미국 측에 주거단지로 유상제공. 

    ’한미 최초 협정‘을 보면 제9조에 한국정부가 미국이 필요로 하는 건물과 토지를 유상으로 제공한다는 내용과 그 대상 부동산들이 낱낱이 열거되어있다.
    모두 이승만 대통령이 물색하고 주선해서 주한 미국 외교관과 미군에 제공한 것들이다. 
    “미군을 붙잡아야 이 나라가 살 수 있다. 미군이 떠나면 소련이 쳐내려온다”
    7월20일 국회에서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24일 취임식을 마친 그날 오후부터 ’미군 붙잡기‘ 작전에 발 벗고 나섰다.
    그가 단번에 지목한 토지는 송현동과 사간동 일대였다.
    경복궁 동편에 북악서 흘러내려 삼청동부터 안국동 수송동까지 이어진 긴 언덕은 예부터 울창한 소나무 숲, 그래서 송현(松峴:솔고개, 솔재)라 불렸는데 인공 식수로 더 울창하게 만들었다.  풍수적으로 왕궁의 우백호(右白虎) 인왕산은 높고 험준한데 비해 좌청룡(左靑龍) 낙산은 빈약하므로 경복궁 동편 긴 등성이 지역에 소나무를 싶어 보강한 것, 왕궁보호림이요 바람막이다. 한때는 금단의 숲인지라 왕조시대 그린벨트라 할까.
    풍광이 좋아 왕족과 실세 귀족들의 놀이터가 되고 그들의 주거지로 금방 변하였다. 
    조선왕조 개국혁명가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이곳에서 죽는다. 경복궁을 세우고 광화문 앞에 육조거리(六曹街)를 조성하고서 그 뒤편 광대한 저택에 살았던 그는 1398년 10월6일 밤, 이웃 송현에 사는 남은(南誾, 1354~1398)의 소실 집에서 개국공신들과 ’왕자의 난‘ 움직임에 대책을 논의하다가 역습을 당한다. 선수를 친 이성계의 5남 이방원(李芳遠, 1367~1400) 일당이 불지르고 쳐들어가니 정도전은 칼을 맞고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종이 일본에게 나라와 백성을 내준 뒤 송현의 운명도 일본 손아귀에 들어갔다. 일본 식산은행 소유로 사택단지가 되었다가 해방이 되자 이왕가(李王家)에게 돌아온다.

    1948년 7월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은 그 땅이 시급히 필요한지라 땅주인 이왕가를 불렀다.
    “구왕실의 죄가 엄중하나 그보다 급한 일은 이 토지를 국가를 위해 내놓지 않겠느냐?”
    이승만은 미국인들이 살 곳이 마땅치 않아 철수하려 하니 그들의 주거단지로 만들어주어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켜야 한다고 간곡히 설득하였다. 그렇게 해서 송현동과 사간동(司諫洞) 일대를 확보, 미국 측과 ’유상제공‘에 합의한 땅이다.
    당시 미국 영사관이 들어있는 을지로 입구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 및 동편 주차장, 정동의 미국 영사관저(현 대사관저) 일대도 미외교관 주택지로 매매하기로 함께 합의하여 협정에 명문화 하였다. 그 토지와 부동산 리스트가 모두 공개되어 지금도 볼 수 있다. ([조선일보] 1948.9.19.일자 1면)
    이승만은 일단 안도하였으나 국회에서 들고 일어났다.
  • 한미최초협정 내용에 반발,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제2 을사조약' 운운 비난한 기사를 보도한 조선일보 1면.ⓒ조선DB
    ▲ 한미최초협정 내용에 반발,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제2 을사조약' 운운 비난한 기사를 보도한 조선일보 1면.ⓒ조선DB
    ★국회서 난리 “제2의 을사조약 아니냐” 협정에 반대

    “「동산 또는 부동산, 유형 무형의 금융재산을 막론하고 미국정부가 관심을 가진 한국내 재산 및 그 첨부물의 취득과 그 재산은 본 협정의 부록에 열거한 재산을 포함함」이란 조문은 아무리 도의적으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사태의 변화가 있을 때에는 미국이 관심을 가진 한국재산은 여하한 것이든지 무조건 요구할 수 있는 것으로써 이는 곧 주권을 침해할 위험성이 있다“
    정부의 한미협정을 받아든 국회는 ’주권침해‘를 들어 전면 삭제나 수정을 요구하고 나왔다.
    연일 격론을 벌인 의원들은 추석날 17일 아침부터 다시 모여 정부를 성토한다. 
    특히 소장파로 불리는 국회의원들은 한술 더 떴다. ”우리 주권을 침해할 위험성이 뻔한데 이를 수정하지도 않고 그대로 동의 한다면 골수에 사모치는 을사조약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으리라고 단언할 수 없으니, 근시안적인 정세론에 흐르지 말고 뼈저린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결코 찬성할 수 없다“

    정부는 이럴 줄 알고 미국측 책임자에게 해명서를 받아 국회에 돌렸다.
    미군정 민사처장이며 군정장관 대리인 한미협상 대표 헬믹 소장이 논란의 대상인 한미협정 제9조 2호에 대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한국화폐를 포함한 모든 한국내 미국재산은 한국내에서 지출하는 예산에 포함된다,
    둘째, 앞으로 대사관으로 승격할 경우를 대비한 건설증가 등에 사용함을 의미한다.
    셋째, 미국정부의 정책변화에 대비하여 융통성을 부여한 것으로서 모든 매수는 대한민국 정부와 합의하에 진행될 것이며, 미국 원조사절단 및 군사사절단을 위하여 사용될 것이다.
    현재에 너무 국한시키면 그 범위가 너무 협소해서 장래 한미 양국 간의 이익을 위한 계획을 진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조선일보] 1948. 9. 19일자).
    다시 말하면, 미국이 한국내에서 사용하는 재산에 대해 지불하는 자금은 한국 것이고, 원조-군사 사절단 등 모두 한국을 위해 일하는 미국인들을 위해 쓰여진다는 말이다. 즉, 앞으로 확대되는 미국용 재산과 거기에 쓰이는 지출자금도 한국인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므로 미국용 부동산을 옹색하게 제한하면 그만큼 미국이 한국을 위해 일할 수도 없으니 결국 한국인에게 불리하게 된다는 가시돋친 지적이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 대표적인 귀속재산의 하나, 일본이 건설한 한반도 철도망과 서울역의 모습.,
    ▲ 대표적인 귀속재산의 하나, 일본이 건설한 한반도 철도망과 서울역의 모습.,
    ★강경 소장파 ”제2의 을사조약...죽음으로써 반대“

    추석 다음날 18일 오전 9시 제69차 본회의가 열렸다. 
    소위 ’강경 소장파‘ 국회의원들은 이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가로막고 나서 독설을 퍼부었다.
    ”연합국이 해방하여 준 것은 감지덕지하는 바이나 민족이익에 불리한 협정을 수정치않고 통과애서는 안되며 불리한 조약은 죽음으로써 반대해야 한다“ (유진홍 의원)
    ”만약 이대로 통과되면 미국이 언젠가 필요하다며 인천항이나 부산항을 요구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누가 하겠는가.“(장홍염 의원)
    조선일보는 「열렬한 소장파 의원들의 절규가 연달아 터졌다」고 썼다. 
    이때 11시쯤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에 나와 연단에 올랐다.
    ”이 땅의 전체재산을 찾기 위하여 조금 주는 것이니, 조금 주지 않으려다가 전체를 찾지 못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이승만은 국회의원들을 설득하였다.
    정부대표로 참석한 윤치영 내무장관은 직격탄을 날렸다. ”국회가 부결하는 것은 자유일 것이나 이 긴박한 국제정세하에서 이 협정을 승인하여 주권을 찾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

    이승만이 말한 ’전체‘란 바로 ’귀속재산‘(歸屬財産)이다. 일본이 한국을 장악한 을사조약 이래 남북한에 투자-개발해 놓은 모든 재산, 그것을 일본의 항복을 받은 미국이 ’귀속재산‘(Vested Property)으로 이름 지어 미국 국가재산으로 귀속시킨 것이다. 
    대규모 철도망, 어마어마한 공장들과 기업들, 발전소들, 광산들, 항만들, 수많은 건물과 부동산, 유무형의 금융재산 등등, 이것은 글자 그대로 전승국 미국의 노획 전리품인데 해방 후 3년간 일부 불하한 토지 등을 제외하고 모든 재산을 한국정부에 남김없이 무상양도한 나라가 미국이다. 
    소련은 어떠했던가, 당시 최첨단 중화학 공장과 발전소 시설을 보자 눈이 뒤집힌 소련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시설을 뜯어내 본국으로 가져가지 않았던가.
    이승만과 미국은 달랐다.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양자는 신생독립국에게 필요한 경제력을 양수양도하기로 합의하였고 이를 국제법 박사 이승만은 ’한미협정‘으로 명문화 시켰던 것이다. 미국은 협정 당시 ”이것만은 미국 것“이라 챙겨놓은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마침내 ’한미 최초 협정‘이 국회본회의 표결에 붙여졌다.
    분을 참지 못한 소장파 의원 4명이 ’분연히 의석을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조선일보, 앞의 기사). 투표 결과는 재석 109명중 찬성 78, 반대 28, 기권3으로 나왔다.
    이로써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이 이 땅에 40년간 구축한 경제력과 사회간접자본 인프라까지 대한민국의 소유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가장 필수적인 미군의 장기주둔을 위해 ’조그만 땅‘도 제공하는 ’안보 투자‘도 했다.

    ◀’한미최초협정‘에서 미국에 유상제공하기로 합의한 부동산의 지목은 다음과 같다.
    (가) 미군가족 주택 제20호 및 대지 정동(貞洞) 1의 39.
    (나) 러시아인 가옥 제1호(720평) 정동1의 39.
    ----(중략)----
    (바) 전미군정청 제1지구 전부 및 그 대지. 식산은행 소유재산 전체를 포함함.
        송현동(松峴洞) 9의 1 전부. 사간동(司諫洞) 96, 97, 99, 102, 103의 1, 104의 1, 기타건      물 등 약 9915평.
    (사) 반도 호텔 및 그 동편.  
        ([조선일보]1948.9.19.일자 1면)
  • ▲ "미국은 분단 책임상 철수하면 안되고, 남한을 중심으로 남북통일 하라"고 주장한 이승만 대통령의 기자회견 내용을 머리기사로 보도한 조선일보.ⓒ조선DB
    ◆이승만 ”소련군은 나가라. 미군은 국군 확보 때까지 못 간다“

    한미협정이 국회를 통과한 이틀후, 파리 유엔총회 개막(9.21)에 맞춰 소련은 일방적인 ’북한으로부터의 철군‘을 발표했다. 한 달 전 남한에 수립된 대한민국 독립정부를 파괴하려는 선전술임을 말할 나위도 없다. 그 대한민국 유엔 사절단이 유엔에 파견되어 국가승인을 받으려는 노력에 폭탄을 던진 것이었다.

    「[런던 20일발 UP보도] 금반 당지에서 청취된 모스크바 방송에 의하면 소련은 1949년 1월1일까지 북조선으로부터 소련주둔군의 철퇴를 명령하는 한편, 미국에 대해서도 주둔군의 동시철퇴를 제의하였다고 한다. 그 원문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소련정부는 조선으로부터의 소미양군 동시 철퇴에 관한 조선최고인민회의의 요구를 소련연방 최고회의 간부회에 회부하였던바, 동간부회는 이를 검토하고 조선의 요구에 입각하여 미국정부도 남조선으로부터 미군은 동시에 철퇴시키는데 동의할 것을 희망하는 한편, 북조선으로부터 소련군의 철퇴를 단행할 적당한 시기가 도래하였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소련 각의는 최고회의간부회의 결정에 의하여, 첫째 북조선에 잔류하고 있는 소련군을 소련영토로 철퇴시킬 것을 선언하고, 둘째로 소련군무성에 대하여 1948년 10월중순까지 소련군의 철퇴를 개시하여 1949년1월1일에 이를 완료할 것을 지시하였다.‘」 ([조선일보]1948.9.21.일자)

    이에 대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즉각 논평의 내놓았다.
    ”만일 소련군이 금년 말로 북한에서 철퇴키로 결정하였다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당연한 조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와 의논함이 없이 어떤 협정을 함으로써 소련의 책략에 함입하지 않기를 바란다. 한미간의 상호방위에 대한 성문(成文)된 협정이 없다고 하지마는 우리는 한미 양국의 상호안전보장을 위해서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일해 왔고 또한 민주주의적 세기관의 보존을 위해서 노력해 왔다. 대한인은 이 원칙에 충실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해온 것이다...“ ([조선일보] 1948.9.21.일자)

    이승만은 미군의 장기주둔에 관한 견해를 여러번 밝혔는데 다음은 그 이유를 명확히 규정한 인터뷰 내용이다.
    ”나의 주장은 소련은 무조건하고 즉시 철퇴해야 하고, 미군은 치안유지상 지장이 없을 깨까지 주둔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이 철퇴하면 미군도 철퇴하겠다 하여도 애걸복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분단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오 미소 양국이 행한 것이며, 그 책임은 미국에 있다. 따라서 책임을 진 미국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철퇴해야 될 것이며, 또한 북한에는 20만의 공산군이 조직되어 있는데 반하여 남한에는 미국이 앞서 우리의 군대조직을 허가하지 않은 관계상 아무 준비가 없다. 그러므로 치안을 유지할 상당한 국방군이 조직되면 그때 철퇴하라는 것이니, 이것도 미국의 책임이다.“ ([조선일보] 1948, 10. 9일자)

    ★이승만이 끝까지 물고 늘어진 ’미국의 분단 책임‘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한반도에서 일본이 물러가면 소련이 내려와 점령할 것”이라며 미국정부에 ’임정 승인‘을 끈질기게 요구했던 이승만 국제 전략가, 그 예언 그대로 일본이 물러가고 소련이 북한을 점령, 해방반년 만에 공산정권을 세웠다.
    미국이 38선을 경계로 소련의 북한점령을 허용한 이래, 이승만은 이 ’분단‘을 두고두고 대미전략카드로 휘두른다. “너희가 한반도를 잘라 놓았으니 너희 손으로 통일 시켜라”
    그것은 ’전략‘ 차원을 넘은 약소민족의 한 맺힌 절규, 그의 대미투쟁은 그래서 미국도 꼼짝을 못하게 된다. 6.25침략에 유엔군 이름으로 파병하여 싸우고, 휴전을 결사반대하는 이승만을 제거하려다가 못하고 결국 목숨 걸고 덤비는 이승만의 ’한미동맹‘까지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신의 한수‘ 한미동맹이 맺어지기까지 대한민국은 3백만명이 생명을 잃고 국토는 초토화되고 말았다. 모두 그때그때 이승만의 말을 듣지 아니한 미국의 책임이었다. 
    건국 한 달후 나온 소련의 동시철군 선전선동 때에도 미국은 이미 철군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소련의 스탈린은 김일성의 수하 공작원 성시백을 시켜, 대한민국 국회의원들로 하여금 ’미군철수 결의‘를 감행하게 만든다. 바로 ’국회프락치 사건‘이 그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