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단체 "다른 나라는 개인정보 없어" 개편 요구… 실제 미국-프랑스는 개인정보 다 들어 있어
  • ▲ 정미경 자유한국당 최고위원이 지난 19일 당 최고위원회에서 행정안전부가 추진하는 주민등록번호 체계 개편에 대해
    ▲ 정미경 자유한국당 최고위원이 지난 19일 당 최고위원회에서 행정안전부가 추진하는 주민등록번호 체계 개편에 대해 "간첩을 못 잡게 하려는 것"이라고 발언해 논란을 일으켰다.ⓒ연합뉴스
    행정안전부가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생성 체계를 바꿀 것이라고 예고했다. 지난 17일 행안부의 발표 이후, 이런저런 잡음과 논란이 커져가고 있다. 국가안보를 지키는 데 필요한 대공·방첩기능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와, 프라이버시 보호 차원에서 미흡하다는 의견이 상충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사용되는 주민등록번호는 앞 여섯자리가 생년월일을 나타낸다. 뒤에 이어지는 일곱자리 중 맨 앞자리는 성별과 출생연대, 두 번째에서 다섯 번째 자리는 지역코드, 여섯 번째는 신고 당일 해당 지역의 같은 성을 쓰는 사람들 중 신고한 순서, 마지막 일곱 번째는 오류검증번호다. 행정안전부(행안부)가 이번에 내놓은 개편안은 뒤 여섯자리를 모두 임의번호를 부여한다는 게 핵심내용이다.

    좌파 시민단체가 줄기차게 폐지-개편 요구

    그런데 이 방식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현재 행안부 소속 주민등록번호 변경위원회는 번호 변경을 원하는 개인의 신청에 따라 심사를 거쳐 새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하고 있다. 지역코드가 기존 번호와 같을 경우에는 임의번호도 부여한다.
  • ▲ 바뀌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체계ⓒ행정안전부
    ▲ 바뀌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체계ⓒ행정안전부
    이 주민등록번호 변경제도는 2017년 5월부터 시행됐는데, 그 배경은 2015년 12월 헌법재판소가 주민번호 변경을 불가능하도록 한 주민등록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린 데 있다. '주민등록법 제7조 제3항 등 위헌소원'에서 헌법재판소는 2017년 12월 31일까지 주민번호를 변경할 수 있도록 규정을 변경하라고 판시했다.

    우리나라 주민등록번호 제도는 특히 좌파성향 시민단체들이 그 폐지 내지 전면 개편을 줄기차게 요구해온 사안이다. 당시 이 주민등록법 관련 헌법소원 청구 역시 진보네트워크센터(진보넷)라는 시민단체가 주도했으며, 청구 대리는 김기중 변호사가 맡았다. 김기중 변호사는 더불어민주당의 추천으로 지난 2016년 9월부터 2019년 10월까지 국가인권위원회 비상임위원을 역임했으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언론위원장 등을 맡기도 했다.

    "분단 상황… 국가안보 차원서 정확한 신원확인 필요"

    이 재판에서 반대의견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허용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국민들의 신원을 보다 용이하게 확인할 수 있어 범죄의 예방이나 범인 검거 등에 있어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음은 부인할 수 없고(...) 우리나라는 분단국가로서 아직도 체제대립이 상존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그러한 사정에 있지 아니한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국가안보차원에서 국민의 정확한 신원확인의 필요성이 크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주민등록번호 뒤 여섯자리를 임의번호로 만들었을 때 부작용은,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반대한 이 의견에서 이미 다 제시된 셈이다.

    주민등록번호 체계 변경에 대해 일각에선 "간첩을 못 잡게 만들기 위한 것"이란 주장을 펴고 있다. 정미경 자유한국당 최고위원은 1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당 최고위원회에서 이 같은 취지의 발언을 했다. 정미경 최고위원은 이 자리에서 "문재인 정권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있다"며 "멀쩡한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왜 바꿀까. 간첩을 아예 잡지 못하도록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닐까"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북에서 내려온 사람이 도대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왔는지 아예 불분명하게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닐까"라며 "이런 막가파 정권은 도대체 볼 수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관이 고쳐도 되나… '포괄적 위임 금지 원칙' 위반 시각도

    주민등록번호 체계 개편과 관련해 달리 지적되는 문제는, 번호 부여 체계개편과 같은 중요한 결정이 장관의 권한으로 돼 있다는 점이다. 현행 주민등록법 시행규칙 제2조 "주민등록번호는 생년월일ㆍ성별ㆍ지역 등을 표시할 수 있는 13자리의 숫자로 부여한다"고 돼 있다. 이 시행규칙은 부령으로 개정규칙은 장관이 국회 동의 없이 공포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헌법학계에선 이 시행규칙의 모법인 주민등록법 시행령 제7조 4항이 포괄적 위임입법 금지 원칙에 위반된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동 조항은 "주민등록번호의 부여에 필요한 사항은 행정안전부장관이 정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도 생일-출생지 정보 담겨 있어

    한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진보네트워크센터를 비롯한 총 39개 시민사회단체는 19일 공동성명을 내고 "주민번호 자체에 성별·생년 등 고유한 개인정보가 포함돼 있기 때문에 유출로 입는 피해뿐만 아니라 차별에 노출될 가능성도 굉장히 높다"라며, "현재 대부분의 국가는 우리처럼 개인식별번호에 민감한 개인정보를 포함하지 않고 조세·사회보장 등 극히 제한된 공공 행정업무에만 한정해 사용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의 사회보장번호 역시 생일과 출생지와 관련된 번호가 부여된다. 프랑스의 경우는 우리나라의 주민등록번호와 유사한 개인식별번호로 '총람등록번호'를 부여받으며, 이 번호는 성별·생년월·출생도시 등의 정보로 구성된다.

    프랑스에선 성별·생년월·출생도시 정보 모두 담아

    또 한편으론 보수시민사회 일각에서도 주민등록번호 임의번호화를 찬성하는 흐름이 존재한다. 북한이 중국을 거쳐 그동안 우리 국민의 주민등록번호를 상당수 수집해왔고 이를 통해 우리 국민의 동태를 파악해왔다는 것이다. 한 보수 성향 시민단체 대표는 "내년부터 주민등록번호에서 출생지역 정보를 노출시키지 않도록 한 개편안이 오히려 안보상 이익을 가져올 수도 있다"며 "장기적으로 모든 국민의 주민등록번호 앞뒤 자리 전부를 임의번호화하는 것이 안보상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내년 10월부터 시행될 예정인 개편안은 출생 등 신규국적 취득과 같이 새롭게 주민등록번호를 발급받는 국민에게만 적용하도록 돼 있다. 또, 생년월일 및 성별 식별 방식은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행정안전부는 앞서 언급한 이러한 논란과 상충하는 의견들을 고려해, 주민등록번호 체계개편 시행 전에 국민들에게 충분한 설명과 홍보작업을 벌여야 할 것이다. '쓸모없는 일'이라거나 '안보상 위험한 일'이라는 시각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