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드 갈등 이후 중국이 오랜만에 한국의 행사에 참석하여 박수를 받았다.
    항일투사 윤봉길의사의 상하이 의거 85주년 기념식이 바로 한-중 악수의 현장이었다.
    (사)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회장 황길수)가 개최한 이 행사는 지난 28일 중국의 상하이 루쉰공원 매헌기념관에서 열었고, 한국에서는 의거당일인 29일 서울 양재동 매헌기념관에서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 ▲ 매헌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황길수 회장.
    ▲ 매헌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황길수 회장.

     한국의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 배치결정에 대한 반감으로 모든 한국행사에 불참해왔던 중국이 “양국의 항일투쟁에서 윤봉길 의사의 역사적 비중을 높이 평가하여 기념식을 공동 개최하기로 결정했다”고 상하이 변영태 총영사는 기념사에서 밝혔다.
    홍커우구(虹口區)와 공동 진행한 행사에는 한국측 김달수 매헌기념사업회 부회장과 회원 40여명을 비롯하여 변영태 총영사,  상하이 한국상회 송영희회장,  매헌기념사업회 장종섭 상하이지부장과 교민, 홍커우구 외사판공부 국제교류센타 관계자들과 진검(陳劍) 상하이장원집단 총경리 등 양국 200여명이 참석하였고 중국 측 홍커우구 양원성(楊原成) 부주임의 사회로 행사를 마쳤다. 이날 기념행사에로 상하이등 화동지방과 화북지방의 한국인학교와 교포학생들이 제14회 매헌 청소년 백일장을 열어 시상식도 가졌다.

  • ▲ 상하이 홍커우구 매헌광장에서 열린 중국측 기념행사 주요 참석자들.
    ▲ 상하이 홍커우구 매헌광장에서 열린 중국측 기념행사 주요 참석자들.
     
  • ▲ 서울 매헌기념관 '윤봉길의거 8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주요 인사들.
    ▲ 서울 매헌기념관 '윤봉길의거 8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주요 인사들.


    서울 매헌기념관에서 29일 기념식을 개최한 황길수 회장은 “상해의거 당시 중국의 언론들은 윤의사 의거가 한국의 독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양심·진리를 위한 고귀한 희생이며 전 세계 피지배 약소국을 위한 정의·평화의 거사 이었다고 높이 평가”했던 일을 회고하며, “북한의 핵위협과 주변강대국들의 긴박한 대치 속에 위기에 빠진 우리는 윤의사의 애국정신을 국민정신으로 모두 합쳐 이겨내자”고 강조하였다. 이 행사에는 국가보훈처(서울보훈청장 이경근)과 유족대표 윤주웅박사,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광복회원, 윤봉길호 잠수함부대 작전관 등 300여명이 참석하였다. 또한 전국독립운동기념관이 참여하는 ‘독립운동 체험박람회’가 매헌기념관이 위치하고 있는 양재시민의 숲에서 열리기도 했다.

      매헌윤봉길의사는 1908년 6월21일에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부친 윤황과 모친 김원상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덕산보통학교 2학년 때 일본식민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한 후 서당에서 신구학문을 공부하고 19세에 야학개설, 농민독본저술, 농촌부흥운동 등 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23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가서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에서 열린 일본의 일왕 생일축하와 상하이사변 전승기념 축하식 단상에 수통형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을 위시하여 중국 침략의 일본수뇌들을 도륙(屠戮)응징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침체되었던 항일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하였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그해 5월25일 군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구금 돠었다가 일본 가나자와시(金澤市)로 압송된 윤의사는 1932년12월19일 25세의 나이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가나자와시 교외 공동묘지 쓰레기장 도로에 암매장되었던 유해는 1946년 발굴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국민장으로 효창공원 삼의사묘역에 모셨다. 정부는 1961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서훈하였다.

    [황길수 회장 기념사] 

     오늘은 매헌윤봉길의사님께서 장열한 상해의거를 단행하신지 85주년이 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존경하는 내외귀빈님들께서 오늘 바쁘신 일정에도 기념식에 참석해주시고, 평소에도 본회에 많은 격려와 성원을 보내주시는데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을 맞아 조국광복을 위하여 고귀한 목숨을 바치신 윤의사님의 거룩한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빌며 유족분들께도 깊은 경의를 드립니다.

    윤의사님은 25세의 짧은 생애 전체를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바치셨습니다.

    19세부터는 야학개설, 농민독본저술, 농촌부흥운동을 이끄신 계몽가요 스승이셨으며 일본의 감시와 단속이 심해지자 23세 때 오직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으로 떠나셨습니다.
    그때에 남기신 말씀이 ‘장부가 뜻을 세워 집을 떠나면 그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丈夫出家生不還)’ 는 명언입니다. 동서고금의 어떠한 출사표보다도 강력하고 비장한 말씀으로 우리국민들 마음에 새겨져있습니다.
    중국에 가서 역경에 분투하시면서도 오로지 조국독립만을 열망하셨으며, 어머니에 대한 편지에서 부모에 대한 사랑, 처자에 대한 사랑보다도 더 강의한 사랑, 즉 조국과 겨레에게 바치는 사랑과 희생의 길을 가기로 각오하였음을 아뢰고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하였습니다. 이 큰 아픔과 고통 속에서 큰 역사는 이루어 졌습니다. 

    윤의사님이 25세 때 상해홍구공원에서 일본군관수뇌들을 향하여 던진 장열한 의거는 대한겨레의 독립염원과 단호한 의지를 뭉쳐 담은 정의의 일격이었으며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특히 장개석 총통은 만주에 이어 상해까지 일본군에 점령당한 굴욕적인 상황에서 윤의사님의 의거에 감동되어 ‘중국의 4억 인구와 100만 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하며 운영난으로 폐쇄위기에 있던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를 물심으로 적극 지원하여 활발한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한󰋯중 연대를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상해의거 당시 중국의 많은 언론들은 윤의사 의거는 한국의 독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양심·진리를 위한 고귀한 희생이며 전 세계 피지배 약소국을 위한 정의·평화의 거사 이었다고 논설하였습니다.

    어두운 식민지배의 미로 속에서 횃불처럼 빛난 윤의사님의 의거는 한국독립의 초석이 되었고, 그 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서있습니다. 어려움도 있었지만 자유와 독립과 번영이 펼쳐저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국내외의 많은 도전을 마주하고있으며 특히 북한의 핵위협은 날로 증가되고 있고 한반도에 주변강국들의 움직임이 긴박해지고 있는 엄중한 시기입니다.
    오늘 의거기념일을 맞아 윤의사님의 고귀한 애국정신을 깨어있는 국민정신으로 승화시켜 어떠한 어려움도 우리 모두 힘을 합쳐 헤쳐 나갈 것을 다짐하고 실천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노력만이 윤의사님의 숭고한 영령 앞에 우리후손들이 바칠 수 있는 조그마한 보답일 것입니다.

    존경하는 내외귀빈님들과 오늘 행사를 준비하느라고 수고해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모든 분들의 앞날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2017. 4. 29

    (사)매헌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황  길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