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대행은 빨리 헌법재판관을 임명하라"
  •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이제 하루만 지나면 나올 것이다.
    그렇기에 헌재 변론을 3개월 연장하라는 이 글의 주장이 엉뚱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변론을 3개월 연장하여 헌법재판소 법이 정한 180일 즉 6개월 동안, 탄핵 심리를 진행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답이라고 나는 본다.
    대통령 변호인단을 비롯한 많은 법조인들이 이미 탄핵 변론 재개를 요구하고 있다.

    판결을 내리기 전에 밝혀져야 할 진실이 너무 많다.
    지금 조급하게 판결을 내리면, 판결불복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 날 것은 명약관화하다.
    탄핵 찬성파와 반대파 사이의 격돌은 심화되며 장기화될 것이다.
    또한 8인 재판관 상태에서 판결이 나오는 것 역시 큰 흠결이다.

    아마도 지금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이른바 ‘국정의 공백’이라는 것일 게다.
    대통령 대행체제가 더 이상 지속돼서는 안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생각을 조금 바꿔 보자.
    지금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를 좀더 안정화시키면 어떨까?
    황교안 권한대행이 헌법재판관을 임명할 수 있도록 하자.
    그것이 대행체제 안정의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이제까지 사람들은 황교안 대행이 정식 대통령이 아니므로 권력 행사에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과연 그 생각이 옳은가?

    국회가 탄핵소추를 의결하면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된다고 헌법에는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대통령 유고시에는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직무를 대행한다고 되어 있다.
    헌법재판소의 심리기한은 6개월이다.
    따라서 현행 헌법이 가진 논리는 분명, 대통령 권한대행이 6개월 동안 대통령의 권한을 모두 대행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통령 권한의 일부만을 예외적으로 대행하도록 규정이 헌법 어디에 명문화 되어있는가?
    현재의 황교안 대행이 헌법재판소 재판관 임명권이 없다는 논리는 헌법 논리에 위배된다.
    황교안 대행은 그런 권리가 있을 뿐 아니라, 의무가 있다.
    새로운 재판관을 임명하지 않으면 직무 유기다.

    현재 재직중인 헌법재판관 중 3명(이정미 헌재소장 대행 포함)은 이미 3년 전에 국회가 새로운 헌법재판관을 신속히 임명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그런 의견을 제출한 헌재 재판관 3명은 대통령 대행이 재판관을 임명하지 않음으로써 헌법을 위배하고 있다고 판단해야 맞다.

    위와 같은 논리 구성 아래, 내가 헌법재판소에 권유하는 행동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3월 10일 탄핵 심판을 선고할 것이라 발표했지만, 이를 취소하고 변론 재개를 선언한다.
    2.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그들의 헌법적 의무인 헌법재판관 임명을 신속히 할 것을 요구한다.
        대법원장은 이미 후임자를 지명했다.

    3. 9명의 재판관이 충원될 때까지 휴정한다.

    지난 3개월 동안 헌재는 일반 법원과 국회의 역할을 대신해왔다.
    탄핵에 관련된 사실관계는 원래 일반 법정에서 밝혀져야 한다.
    실제로 최순실 등의 형사재판에서 점점 사실관계가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헌재가 너무 성급하게 탄핵 심판을 개시하여 사실 관계를 따졌다.
    이는 순서가 바뀐 것이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증인은 지금의 진술이 증인 본인이나 직계 가족의 형사 재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 진술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지난 3개월 동안 국회 청문회와 헌법재판소 심리에서 많이 듣던 소리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일반법원보다 헌재가 미약한 존재라는 말인가?

    그렇다.
    형사재판에 관해서는 그렇다.

    원래 헌법재판소는 어떤 법률이 헌법에 위배하는지 합치하는지를 따지는 기관이다.
    그래서 형법상 사실관계를 확인하는데는 무력하다.
    증인이 나오기 싫으면 안 나와도 헌재는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 없다.
    일반 법원은 강제 구인이라도 하지만, 헌재는 그럴 권한이 없다.
    헌재의 원래 사명이 그렇다.

    원칙대로라면, 형사재판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어 대법원 판결까지 아니 최소한 1심 판결이 나와, 관련자들의 혐의사실이 거의 확정된 상태에서 헌법재판소의 심리가 개시 되어야 했다.
    그런 순서를 국회가 일체 무시하고, 무슨 요새 습격전 하듯 탄핵소추를 의결, 헌재에 그 심리를 맡겼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만일 지금 진실 규명을 좀더 하지 않으면, 탄핵 찬성파와 반대파는 장기적 정치투쟁의 구실을 갖게 된다.

    헌재가 탄핵 기각 내지 각하의 결정을 내리면, 최순실-차은택-안종범 등에 대한 재판은 어떻게 될까?
    아무리 공정하게 재판한다 해도 탄핵찬성파 즉 찬탁파는 허술한 재판을 통해 이들의 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주장할 것이 분명하다.

    반대로 헌재가 탄핵 인용 결정을 내리면 어떻게 될까?
    재판이 아무리 공정하게 진행된다 하더라도 반탁파 즉 탄핵반대파는 편파적인 재판으로 이들의 죄상이 지나치게 추궁되었다고 주장할 것이 뻔하다.

    그렇기 때문에 헌재의 최종 결정이 나기 전에, 이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어야 헌재 결정의 객관성이 담보될 것이다.
    헌재는 형사재판이 좀더 진행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주어야 한다.

    졸속 재판으로 인해 엄청난 쟁투가 벌어진 역사적 사례는 많다.

  • 그 가운데 하나가 17세기 중반에 있었던 영국의 내전이다.
    청교도 혁명이라고도 불린다.
    십여년 동안 이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이 전쟁의 참혹상을 더해준 것은 영국 국왕 찰스1세에 대한 졸속 재판과 급속한 처형 집행이었다.

    당시 영국의 기존 법정은 국왕에 대한 재판을 거부했다.
    그러자 의회는 특별법정을 따로 만들어 찰스1세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이 특별법정 재판관은 135명으로 구성되었지만 많은 구성원이 참석을 거부하여 68명만으로 진행되었다.
    국왕파는 법정 구성이 불법이라고 계속 항의했지만, 재판 개시 6일 만에 이 특별법정은 찰스1세가 외국과 내통하여 국가를 배신했다는 등의 죄목에 유죄 판결을 내렸고 다시 4일 뒤 찰스1세를 처형해 버렸다.
    재판 개시부터 처형까지 딱 11일 걸렸다.

    사실관계 확인과 법적 사안의 미결,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법원 구성의 미흡 상태에서 급속하게 진행된 이 재판과 국왕 처형은 의회파와 국왕파를 극도로 흥분시켜 영국을 내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갔다.

    “혁명”이니 “아스팔트 위의 피”니 하는 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다.
    역사적 사례와 현재 상황 분석에 기반에 기반을 둔 예측이라고 볼 수 있다.

    헌재는 또 국회가 해야 마땅한 토론-청문회와 유사한 절차를 진행하는데 지난 3개월을 허비했다.
    헌재에서 진행된 변론의 상당부분은 주변 정황 청취와 정치적 의미에 대한 양측의 논쟁이었다.

    이런 것은 국회에서 진행되어야 마땅한 것 아닌가?
    왜 법률 전문가인 변호사와 판사들이 이 사건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단 말인가?
    이런 정치적 토론을 할 의무가 있는 국회의원들은 별다른 토론 없이 탄핵 소추를 의결하여 헌법재판소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헌재는 이를 덥썩 받아들여 평생 법만 공부한 자신들이 할 줄 모르는 정치적 토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헌재가 국회에 이용당한 것이다.

    헌재가 빨리 결정을 내려주길 가장 바라는 집단은 아마도 국회-언론-검찰일 것이다.
    그래야 빨리 다른 정치적 국면이 시작되어 탄핵정국을 일으킨 그들의 죄상이 덮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많은 국회의원들은 지금 낮에는 태극기 쪽, 밤에는 촛불 쪽에 기웃거리고 있다.
    헌재가 판결을
    빨리 내려줘야 지난 몇 달 동안 노출된 자신들의 무기력과 무능력과 우유부단함이 숨겨질 수 있을 것이다.
    헌재가 양단간 결정을 내려주면 재빨리 새로운 세 규합과 입지조정에 나설 것이다.
    언론인들은 과장 의혹 보도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고 이 새로운 정치판에 대한 보도를 하기 시작할 것이다.
    검찰은 고영태 등에 대한 수사를 할까 말까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국회-언론-검찰은 지금 헌재가 탄핵 찬반의 결정을 내릴 두 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나름 각자 할 일을 준비해 놓고 있을 것이다.

    요컨대 새로운 정치 게임의 시작이다.
    이른바 ‘금수저’들이 일으킨 현재의 탄핵정국.
    이제 누군가 피를 흘려야 한다면, 그것은 ‘흙수저’들이 될 것이다.

    혹자는 “이제까지 3개월의 혼란을 어떻게 더 계속하란 말인가”라고 물을지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형사재판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으며, 절차상 중요쟁점에 대한 심리도 없었고, 가장 중요하게는 결정의 당사자인 헌재가 결원인 상태에서 지금 급속한 결정을 내린다면, 더 큰 혼란이 야기될 위험이 있다고.

    역사는 때때로 별로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자에게 중대한 결단의 책임을 맡긴다.
    정치인과 검찰과 언론이 해야 할 일을 지금 헌재 재판관들이 떠맡은 듯하다.
    안쓰럽다.

    어떤 법관이든, 법관이 원래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제대로 된 형식을 갖추는 일이다.
    “초읽기에 들어갔다”
    “역사적 판결을 헌재가 앞두고 있다”
    이같은 언론의 부추김에 흔들리지 말고, 제대로 된 형식 즉 헌법재판관 9인 충원에 전념하는 법관다운 고지식한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그리고 법률이 보장한 180일의 심리 기한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천천히 차분하게 변론을 다시 진행해 나가다 보면, 모든 일이 평화적으로 순탄하게 잘 진행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양현수
    전문 번역가, 미국 컬럼비아대 정치학 석사-박사.
    1958년 서울 출생,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서울대 서강대 한국외대 강의.
    <장칭: 정치적 마녀의 초상> <트로츠키> 등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