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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현직 국회의원들의 서예 작품이 정국 상황과 관련해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사진은 국회본청~의원회관 지하통로에 자신의 서예 작품을 내건 전현직 국회의원들. 선수(選數)에 따라 왼쪽 윗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만섭 전 국회의장, 김종호 전 국회부의장,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 문희상 의원, 한화갑 전 의원, 주승용 최고위원. ⓒ연합뉴스 및 뉴데일리 사진DB
추석 연휴 이후 정국의 흐름이 특히 야권을 중심으로 격렬한 움직임을 보일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전현직 국회의원의 서예 작품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정국을 관조하는 듯 하면서도 자신의 속내를 은연 중에 드러내고, 한편으로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암시하는 듯한 글귀 속에서 정국의 맥을 짚을 수 있다는 평이다.
서울 여의도 국회본청에서 의원회관으로 이어지는 지하통로에는 전현직 국회의원들의 서예 작품이 상설 전시돼 있다. 본회의나 상임위 회의 및 당무 관계로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본청을 오가는 국회의원은 물론 보좌진·당직자 그리고 취재진의 눈길을 모으는 작품들이다.
작품을 내건 주체들도 다양하다. 국회부의장을 지냈던 6선의 중진 의원으로부터 19대 총선에서 처음 당선된 초선 의원까지, 선수(選數)와 당색(黨色)을 달리하는 의원들의 작품이 다채로운 개성을 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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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헌 김종호 전 국회부의장의 [위민선정]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김종필 전 국무총리(JP)와 정치적 행보를 함께 해 청구동계로 분류되는 충청북도 괴산 출신의 6선 의원 동헌(東軒) 김종호 전 국회부의장은 기묘년(1999년) 추석에 [위민선정(爲民善政)]이라는 글귀를 써서 내걸었다. JP가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연립 정권을 구성한 이듬해라, 국민을 위한 바른 정치를 펴겠다는 다짐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19대 총선에서 처음 당선된 새정치민주연합의 초선 의원 운정(雲汀, JP의 아호 운정(雲庭)과는 한자가 다르다) 김승남 의원은 을미년(올해) 설날에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내세웠다. 2·8 전당대회가 막 끝난 직후라 당이 어수선했던 시점, 최고의 가치는 다투지 않으면서 만물을 이롭게 하는 물(水)과 같다는 노자의 가르침을 역설한 것이다. 김승남 의원이 민평련계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점을 생각하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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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정치민주연합 김승남 의원의 [상선약수]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이외에도 국회본청~의원회관의 지하통로에 전시돼 있는 서예 작품들은 서예의 특성상 담고 있는 글귀가 현재의 정국 상황과 연관돼 관심을 끌기도 한다.
청강(靑江)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임오년(2002년) 입춘에 [대도재중화(大道在中和)]를 써내렸다. 큰 도는 중용과 화합에 있다는 뜻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화당에서 정치 인생을 시작했지만, 전두환 정부에서는 야당인 국민당으로, 이후 삼당합당을 거쳐 여당인 민자당~신한국당으로 돌아왔으나, 탈당 후 국민신당으로 향하며 야당 생활로 돌아선 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로는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에 몸담으며 정치 역정을 마무리한 이만섭 전 의장다운 작품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여당에 있었을 때도 정부에 쓴소리를 하며 치우치지 않았고, 야당에 있었을 때도 무작정 발목잡는 반대만 하지 않는 등 항상 중용의 처신을 보여줬다는 평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최고위원이 지난해 7·14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선출된 이후 [대도재중화]를 강조한 데 이어, 최근에는 개혁적 국민정당의 창당을 선언한 천정배 의원이 신당이 추구해야 할 가치로 [중용]을 제시했다. [중용]은 예나 지금이나 세인들의 사랑을 받는 만큼 정치인들의 관심을 끄는 가치라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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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대도재중화]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범중(凡中)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은 [대명무사조(大明無私照)]를 썼다. 출전은 당나라 태종 때 장온고가 집필한 대보잠(大寶箴)이다. 본래는 [대명무사조 지공무사친]으로 짝을 이룬다. 밝은 해는 사사로이 비추지 않고, 지극한 공정함에는 사사로운 편애가 없다는 뜻이다.
밝은 해는 예로부터 임금·나랏님·지도자를 상징한다. 장온고 또한 당태종에게 황제가 취해야 할 바를 제시하기 위해 상주했다. 현대 대한민국에 있어서 밝은 해란 대통령, 그리고 정당에 있어서는 당 대표다. 사사로이 비추지 않고, 사사로운 편애를 하지 않는 자가 대표로서의 자격이 있고 대통령이 될 자질이 있다고 역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신상우 전 부의장은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했다. 1997년 대선에서 패배한 이회창 총재가 2002년 대선에 다시 도전하기 위해 당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민정계의 수장인 허주(虛舟) 김윤환 의원과 함께 민주계의 수장으로 지목돼 숙청됐다. 이회창 총재는 삼당합당 때로부터 내려오는 민정계·민주계 따위의 계파를 모두 해소하고 자신이 제왕적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정당으로 한나라당을 재편하려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신상우 전 부의장은 탈당해 허주,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조순 전 서울시장 등과 함께 민국당을 창당할 수밖에 없었다. 사분오열 끝에 이회창 총재는 2002년 대선에 다시 도전했으나 그 결과는 누구나 아는 바와 같다. 공천(公薦)을 사천(私薦)처럼 행하며 사사로이 비춘 그는 결국 '밝은 해'가 되는 데 실패했다.
지금 2012년 대선에서 진 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당내 계파 수장들을 숙청하며 제왕적 대표 권력을 휘두르려고 하는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의 모습이 문득 떠오르는 역사의 교훈이다. "20대 총선에서는 전략공천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유성엽 전북도당위원장의 고언마저 들리지 않는 듯한 행보다. 2017년 대선에 다시 한 번 도전하겠다는 우격다짐이리라. 사사로이 비추고 사사로이 편애하는 자는 결국 그 자신을 망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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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의 [대명무사조]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이와 관련해서는 우촌(牛村) 한화갑 전 의원의 [접물지요(接物之要)]도 눈에 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글귀다.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고, 행하고도 얻지 못했다면 돌이켜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하라는 뜻이다.
기묘년(1999년) 추석에 쓴 글귀이지만, 마치 지금 추석 연휴의 야권 내홍을 바라보며 관전평을 쓴 듯한 느낌이다. 4선의 한화갑 전 의원은 비노계 호남 거물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특히 느낌이 묘하다.
최근 새정치연합 혁신위에서 혁신안을 발표하며, 문재인 대표에게는 원래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 사상 출마를 권하고, 김한길·안철수·정세균 등 타 계파 수장들에게는 적지출마 또는 용퇴를 권했다는 점에서 이를 꼬집한 듯한 느낌이다.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고 했거늘, 과연 문재인 대표는 대구나 강원 같은 적지에서 출마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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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화갑 전 의원의 [접물지요]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전직 정치 거물들의 글귀가 현 상황을 관조하는 느낌이 든다면, 정치권에서 한창 현역으로 활약 중인 중견 정치인들의 글귀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거나 운명을 암시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3선의 새정치연합 주승용 최고위원은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를 써내려갔다. 김승남 의원처럼 을미년(올해) 설날에 써서 내걸었다. 2·8 전당대회에서 유일한 호남 출신 최고위원으로 최다 득표를 통해 선출된 직후 내건 작품이다. 수석최고위원이 된 흥분에 사로잡히거나 우쭐하지 말고, 당원과 국민이 준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스스로 수양하며 써내려간 듯한 느낌이다.
[답설야중거]는 서산대사가 쓴 시다.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말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후세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리니]라는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의원회관으로 가는 길에 가만히 멈춰서서 주승용 최고위원의 서예 작품 액자를 바라보노라면 그의 품격과 인성이 읽혀진다. 고지식한 원칙주의자, 정략과 술수를 모르는 정공법의 정치인, 대의(大義)의 사내라 불리는 주승용 최고위원답게 서예 작품도 마치 자를 대고 쓴 것처럼 상하좌우가 반듯반듯하다.
주승용 최고위원은 4·29 재보선에서 당이 참패했음에도 지도부가 책임을 회피하자 지난 5월 8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지 불과 3개월 밖에 안 됐음에도 미련없이 최고위원직을 던져버렸다.
이후 8월 24일 '안에 들어가 싸우고 바로잡으라'는 당원과 국민의 호소에 못 이겨 사퇴 의사를 번복하고 지도부에 복귀했다. 그러나 자신이 내건 서예 작품에서의 다짐을 생각하면, 단순히 마음이 바뀐 것에 따른 번복은 아닐 것이다. 함부로 어지러이 발걸음을 내딛은 것이 아닌, 후세 사람들의 이정표가 될만한 보다 큰 정치적 결단을 준비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 때문에 주승용 최고위원의 향후 정치적 행로와 관련해 세인들의 관심이 더욱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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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정치민주연합 주승용 최고위원의 [답설야중거]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주승용 최고위원의 글로부터 얼마간 의원회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산민(山民) 문희상 의원의 [태산불양토양 하해불택세류(泰山不讓土壤 河海不擇細流)]라는 글귀를 맞닥뜨리게 된다. 사기(史記) 이사열전(李斯列傳)이 출전이다.
태산은 작은 흙덩이도 꺼리지 않고, 강과 바다는 실개천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큰 당, 큰 나라는 인재의 출신과 성분을 가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사마천이 쓴 사기의 해당 항목을 좀 더 참조하면 이렇다. 진(秦)나라 장양왕 때 한(韓)나라 출신의 정국(鄭國)이 진나라에 와서 벼슬을 살면서 300리에 달하는 농수로의 건설을 상신했는데, 사실 이것은 진나라의 국력을 고갈시켜 한나라를 침략하지 못하게끔 하려는 술책이었다.
이 의도가 탄로나자 진나라 사람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외국 출신으로 진나라에 와서 벼슬하고 있는 사람들을 전부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사도 초(楚)나라 사람이었으므로 추방 대상이 됐다. 그러자 이사는 "태산은 한 줌의 흙도 양보하지 않았으므로 그 높음을 이뤘으며, 하해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았으므로 그 넓음을 이뤘다"고 간언해 상황을 반전시켰다. 이후 이사는 진시황을 도와 천하를 통일했다.
5선의 친노(親盧) 원로인 문희상 의원이 을미년(올해) 설에 쓴 글이다. 지난해 10월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뒤 2·8 전당대회를 치러내, 같은 친노인 문재인 대표에게 당권을 넘겨준 직후다. 비대위원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뒤 홀가분한 마음으로, 후임인 문재인 대표에게 당부하며 쓴 형식으로 해석된다. 인재의 색깔을 가리지 말아야 대업을 이루므로, 타 계파의 인재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리라.
문제는 문행일치(文行一致)가 되느냐는 것이다. 문희상 의원은 지난해 10월 친노의 당권 탈취 공작 때문에 김한길·안철수 지도부가 사퇴하고 박영선 전 국민공감혁신위원장의 탈당 소동이 일어나자 비대위원장에 올라 당을 수습했다. 당무위·중앙위와 각 시·도당을 구성하고 당가를 제정하는 등 체제를 정비한 것은 이사의 활약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사의 말을 실천하지는 못했다. [태산불양토양 하해불택세류]는 계파패권을 지양해야 한다는 뜻이지만, 문희상 비대위원장은 전당대회 경선이 한창 진행되는 도중에 자신의 계파인 친노 문재인 후보를 위해 '여론조사 룰 해석'을 바꾸는 데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당시 비노 박지원 후보는 "당 지도부가 이제는 내 전화를 받지도 않는다"라고 섭섭해 했다.
여론조사 룰 해석은 결국 문재인 후보를 대표의 자리에 올리고 박지원 후보를 떨어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자신부터가 계파패권을 지양하고 천하의 인재를 색깔에 관계없이 품지 못했는데, 그 전당대회 직후에 [태산불양토양 하해불택세류]를 써내려갔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지금 문희상 의원은 위기에 처해 있다. 새정치연합 혁신위는 23일 혁신안을 발표해 그의 실명을 거론하며 적지출마를 하거나 용퇴를 하라고 압박하고 나섰다. 혁신위가 지도부의 뜻을 관철하는 방향으로 혁신을 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문재인 대표가 문희상 의원을 향해 정계 은퇴를 압박하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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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 의원의 [태산불양토양]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문희상 의원이 마침 사기(史記)를 인용해 서예 작품을 써내려간 만큼, 지금의 이 상황을 보니 사기의 다른 유명한 구절이 절로 떠오른다. 몽염열전(蒙恬列傳)의 마지막 대목이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도운 명장 몽염이 정작 그 뒤를 이은 2세 황제에 의해 사약을 받게 됐다. 몽염은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잘못도 없이 죽어야 한단 말인가"라고 부르짖었다가 "내 죄 참으로 죽어 마땅하다. 만리장성을 짓는 동안 지맥을 끊어놓은 곳이 어찌 없었으리"라고 탓을 엉뚱한 곳에서 찾았다.
이에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은 "시황제의 야심에 동조한 것이 죽을 죄인데, 왠 지맥을 끊은 것으로 탓을 돌리느냐"고 꾸짖었다. 문희상 의원도 마찬가지다. 박지원 전 원내대표가 순리대로 당원과 국민의 뜻에 따라 2·8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선출됐더라면 4·29 재보선에서 질 일도 없었고, 혁신위가 구성될 일도 없었을 것이며, 혁신위에 의해 자신이 살생부의 숙청 대상으로 오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억지로 친노 문재인 대표를 세운 것이 곧 자신의 정치적 명줄을 재촉한 셈이 됐는데 탓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그가 쓴 [태산불양토양 하해불택세류]를 바라보는 세인들의 심정이 모두 같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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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 의원의 [태산불양토양] 서예 작품이 걸려 있는 국회본청~의원회관 사이의 지하통로. 국회 보좌진들이 문희상 의원의 서예 작품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