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군 사진 분석결과 근거로 제시...반론도 만만치 않아
  • 1980년 5월 18일 북한특수군 600명이 전라남도 광주에 침투해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는 주장이 수년째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는 황장엽, 김덕홍, 박재경 등 북한 정권의 핵심 인물들이 1980년 광주에 내려왔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황장엽씨는 지금까지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정착한 인사 중 최고위급 인사다. 북한에서 김일성종합과학대 총장, 노동당 중앙위 비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거쳐 북한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을 지낸 정권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김덕홍씨 역시 북한 노동당 중앙위 주체사상연구소 부과장을 거쳐 조선여광무역연합총회사 총사장을 지낸 북한 최고 엘리트 출신이다.

    최근 북한을 탈출한 것으로 알려진 박재경 북한인민군 대장은 인민무력부 부부장과 총정치국 선전부국장을 지낸 북한 군부 주요 인사다.

    이들이 5.18 당시 광주로 침투해 소요에 가담했다는 의혹이 사실이라면, 5.18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전면 수정이 불가피하다.

    ‘5.18은 대한민국의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북한 특수군이 주도한 폭동’이란,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 ▲ 지만원 박사가,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비롯한 북한 정권 핵심 엘리트들이, 1980년 5월 광주에 침투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사진은 ‘황장엽 광주 침투’ 의혹의 근거로 제시된 분석 자료. ⓒ 사진 출처 시스템클럽
    ▲ 지만원 박사가,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비롯한 북한 정권 핵심 엘리트들이, 1980년 5월 광주에 침투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사진은 ‘황장엽 광주 침투’ 의혹의 근거로 제시된 분석 자료. ⓒ 사진 출처 시스템클럽

    5.18 북한특수군 침투설을 주장하고 있는 지만원 박사 등은 탈북자들의 여러 증언을 취합하는 한편, 광주사태 당시 사진기자들이 촬영한 시민군 사진을 북한 노동신문 등에 실린 노동당 고위 관료 모습과 비교한 자료를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지만원 박사 등이 제기하는 의혹은 보수 내부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근거가 미약하고 터무니없는 낭설에 불과하다’며, 지만원 박사의 주장을 부정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반면, 과거 동·서독이 통일된 후 공개된 ‘슈타지 비밀문서’를 통해, 서독에 3만여명이 넘는 간첩이 존재한 사실이 밝혀진 것처럼, ‘북한 특수군 광주 침투설’에 공감을 나타내는 이들도 있다.

    안보시민단체 <대한민국대청소 500만 야전군>(대표 지만원)은 지난달 2일 오전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광주 5.18사태는 북한정권에 의해 남파된 600명 정도의 북한특수군이 국가전복을 목표로 광주시민을 선동해 일으킨 게릴라 폭동이자 여적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이 자리에서 지만원 박사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불과 4시간만에 5,400여정의 총기를 탈취하고, 다이너마이트 폭탄 2,100여개를 조립해 전남도청 지하실에 설치하는 등 게릴라 폭동을 주도한 ‘600명의 연고대생’이, 실제로는 북한이 6개월여에 걸쳐 침투시킨 특수군”이라며, “당시 광주에는 (시민군이 탈취한) 4대의 장갑차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장갑차를 운전해 유공자가 된 사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 북한특수군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3D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해 분석한 모습. ⓒ 시스템클럽 제공
    ▲ 북한특수군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3D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해 분석한 모습. ⓒ 시스템클럽 제공


    지만원 박사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5.18사태 당시 사진기자들이 촬영한 시민군의 모습과, 북한에서 열린 ‘광주인민봉기 30돌 행사’ 사진 등을 비교한 자료를 시스템클럽 홈페이지(www.systemclub.co.kr)에 게재했다.

    지만원 박사는 위 자료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광수(광주 침투 북한특수군)’라고 이름 붙이고, 현재까지 80명이 넘는 ‘광수’를 찾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최근 탈북한 것으로 알려진 박재경 인민군 대장과, 1997년 망명한 故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김덕홍 전 여광무역사 총사장 역시 ‘광수’로 지목하고 있다.

    지만원 박사는 광주에 침투한 황장엽의 직책 및 임무를 ‘특수군 보위방첩소대 소대장’으로 추정했다.

    지만원 박사는 시스템클럽에 올린 글을 통해 광주에 침투한 황장엽과 김덕홍의 활약상을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황장엽은 1923년 생으로 만56세에 광주에 왔고, 김덕홍은 1938년생으로 만 41세에 광주에 왔다. 김덕홍은 무기 적재장의 특수군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찍혔고, 황장엽은 실로 무서운 모습으로 찍혔다.

    황장엽의 직책은 ‘특수군 보위방첩소대’ 소대장으로 보이며, 광주시내에 침투했을 한국 측 정보요원을 탐지하고 무전기를 통해 부하들을 시켜 끌고 가는 고약한 역할을 수행했다.

    사진에는 키가 큰 한 국민을 의심자로 점찍어 그를 연행해 가는 모습이 담겼다. 연행돼 가는 키 큰 우리 국민은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 살해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황장엽이 들고 있는 총은 M16소총인데 거기에 유탄발사기까지 달려 있다. 무거운 총과 묵직한 무전기를 들고 활달하게 걷고 있는 황장엽의 모습은 우리가 본 학자의 모습이 전혀 아니다.

    황장엽은 M16으로는 계엄군이나 광주시민을 죽였을 것이고, 유탄발사기로는 멀리 계엄군을 향해 위력 높은 유탄을 발사했을 것이다.“


    지만원 박사가 운영하고 있는 시스템클럽에는, 북한 최고 권력 실세로 알려진 오극렬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김정은의 최측근인 최룡해 노동당 비서, 최근 처형당한 현영철 전 인민무력부장 등도 5.18 당시 광주에 침투한 ‘광수’라는 게시글이 올라오고 있다.


    ◆ 북한이 매년 기념하는 5.18, 탈북자들이 증언한 5.18의 실체

    남한으로 망명한 故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김덕홍 전 여광무역사 총사장은 1998년 7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 ▲ ⓒTV조선 화면 캡쳐
    ▲ ⓒTV조선 화면 캡쳐
     
  • ▲ ⓒTV조선 화면 캡쳐
    ▲ ⓒTV조선 화면 캡쳐

    김덕홍: 북한 통일전선부에서는 분기에 한 번씩 강연을 하는데 광주문제를 자기네들이 한 것으로 이야기 합니다.

    황장엽: 북한 내부에서 대남사업 내용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상식화돼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생활수준이 높아가는 한국에서 왜 데모나 운동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모두 북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남정책의 두 가지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는 남로당때와 같이 조직을 노출시키지 말라는 것. 그래서 지하당을 이중 삼중으로 만들어 누가 지도하는지 모르게 합니다. 둘째, 노동자나 군인보다는 학생들 속으로 들어가라는 겁니다. 

    김덕홍: 김일성종합대학 옆에 3호청사가 있습니다. 광주운동 이후에 3호청사 사람들이 표창을 많이 받았습니다.

    황장엽: 동생, 그런 얘기 했다가 또 혼이 나려고 그래?

    김덕홍: 형님, 우리가 이런 얘기 하자고 남한에 온 것 아닙니까. 여기 남한에 와서 꼭 하고 싶은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3호청사에 소속돼 있던 사람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후 일제히 훈장을 받았습니다.

    내 친구들이 그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들도 광주민주화 운동 후에 훈장을 탔다고 축하술을 함께 마시면서 그들에게 직접 들은 겁니다.


    탈북자단체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는 지난 2006년부터 5.18사태에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 ▲ ▲TV조선 <장성민의 시사탱크>에 출연해 북한특수군의 광주침투를 주장한 임천용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 ⓒTV조선 화면 캡쳐
    ▲ ▲TV조선 <장성민의 시사탱크>에 출연해 북한특수군의 광주침투를 주장한 임천용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 ⓒTV조선 화면 캡쳐

    그는 2013년 TV조선 <장성민의 시사탱크>에서, “5.18때 북한특수군 600명이 동해, 서해 및 땅굴로 3차례에 걸쳐 침투해서 5.18때 무장책동을 벌였다”고 증언했다.

    북한군에 복무한 경험이 있는 김용화 탈북난민인권연합 대표 역시, <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이 같은 주장에 힘을 실었다.

    “이북에 있을 때 북한특수군이 광주에 침투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일명 ‘머구리 작전’이라고 한다. 특수군이 서해바다를 통해 광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북한에서 장교로 복무할 때 사단 보위부장에게서 들었다.

    당시는 80년대이기 때문에, 탈북한 사람 중 현재 60대가 지난 사람들이 좀 알고 있을 것이고,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 수도 있다.

    북한 황해북도 송림시에는 사회안전부 남파훈련소가 있는데 지형이 대동강 하류와 가깝다. 이곳을 통해 특수부대가 남파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는 김일성이 광주를 지원해야 한다고 떠들었던 때여서, 보위부가 매우 긴박하게 움직였다.“


    반면, 북한특수부대의 광주 침투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탈북자들도 있다.

    평양방어사령부 정치부에서 종합지도원 중좌로 30년간 근무하다 1998년 탈북한 심신복 탈북군인협회 회장은, 지난 2008년 북한 전문매체 데일리NK와의 인터뷰에서 “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주장은 현실과 맞지 않다”고 밝혔다.

  • ▲ ▲강명도 경민대 교수 著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뉴데일리DB
    ▲ ▲강명도 경민대 교수 著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뉴데일리DB

    북한군 복무 경험이 있는 이소연 코리아여성연합 대표도 <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북한에 있을 당시,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 침투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며, “다만, 북한 당국은 TV 등을 통해 광주의 반정부 집회 장면을 연일 내보냈다”고 말했다.

    지난 1994년 탈북해 현재 경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강명도 교수 역시, 1995년에 쓴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당시 대남공작 총책이었던 김중린 비서가 1,200명 정도의 특수부대를 차출해서 남한의 광주에 침투시켜 사태를 격화시키고자 했었다.

    실제로 일선급 특수부대에서 인원선발도 끝났고 세부계획도 마련돼 있는 상태였지만, 북한측이 예상했던 것보다 광주사태가 일찍 남측에 의해 진압돼버리는 바람에 투입하지 못했고, 김중린은 시기조절에 실패해 엄청난 문책을 받았다.“


    ◆ “‘광수(광주 침투 북한특수군)’은 거짓!” 반론도 만만찮아

    한편, 북한특수군 5.18 광주사태 개입설(說)에 대해 같은 보수진영 내에서도 강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5.18사태 당시 광주에서 기자신분으로 직접 현장을 취재했던 조갑제 대표는 <조갑제닷컴>에 올린 글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북한군 침투설'을 부정했다.

  •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1. 광주사태는 목격자가 많은 사건이다. 광주시민 수십 만 명과 진압군이 목격자이고, 수백 명의 직업적 구경꾼들, 즉 기자들이 취재했다. 외국 기자들도 많았다. 공개리에 일어나고 공개적으로 취재된 사건이다. 비디오와 사진도 많다. 광주사태를 취재했던 나를 포함한 어느 기자도 북한군 부대가 개입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2. 광주사태에 개입한 북한군이 대대규모, 즉 수백 명이라는데, 시민군의 편에 섰다는 이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을 당시 진압군(계엄군)의 장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북한군의 출현에 대해서 보고하거나 주장한 사람이 없다.
      
       3. 광주사태 사망자는 1995년 서울지검-국방부 조사에 따르면 193명이다. 이들중 군인은 23명이고 경찰관이 4명이다. 군인 사망자 23명 중 13명은 공수부대에 대한 국군 교도대의 오인 사격 등 진압군끼리의 충돌로 죽었다. 5월27일 광주 수복을 위해 계엄군이 진입할 때 국군 3명이 죽었다. 나머지 7명의 군인들이 무장시민들에 의해 죽은 셈이다. 대대 규모의 북한군, 그것도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면 국군 사망자가 이 정도에 그칠 리가 없다. 북한군이 소대규모로 일으킨 1·21 청와대 습격사건, 중대 규모였던 삼척무장공비 사건을 진압하는 데 국군은 各 수십 명의 戰死者(전사자)를 냈다.
      
       4. 당시는 계엄령이 펴진 상태였다. 해안과 항만은 철저히 봉쇄되었고 공중감시도 정밀했다.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어떻게 침투한단 말인가? 광주 인근에 낙하산으로 내렸단 말인가? 침투병력중 3분의 2가 희생되었다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이들을 섬멸한 국군이 있을 것 아닌가? 무장간첩 한 명만 사살해도 부대 표창을 받는데 수백 명을 사살한 국군 부대가 이 자랑스런 사실을 숨겼단 말인가?
      
       5. 全斗煥(전두환) 정권하에서는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단서가 나오면 이를 반드시 확인했을 것이다.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
      
       6. 탈북자의 증언은 傳言(전언)에 불과하다. "내가 광주에 내려왔었다"고 나서도 믿기 힘든 판에 "카더라"란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7. 광주사태는 1980년 5월18일부터 시작되었다. 그 직후 광주 일원은 봉쇄되었다. 5월21일 계엄군은 광주시내에서 철수, 외곽을 포위했다. 이때 市外(시외)로 빠져나가던 시민들이 매복하고 있던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죽기도 했다.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이런 상황에서 광주로 잠입했다면 국군과 대규모 전투가 발생했을 것이다. 광주에서 정규군끼리의 충돌은 한 건도 없었다. 김일성(또는 김정일)이 5월18일 광주 상황 보고를 받고 특수부대의 출동을 명령했다고 해도 그 부대가 광주 부근에 나타나려면 빨라도 20일 이후일 것이다. 그때는 이미 광주가 철통같이 포위되어 있을 때였다. 수백 명의 북한군이 등장할 무대는 없었다.
      
       8. 1개 대대중 3분의 2가 희생되었다면 약 200명이 죽었다는 이야기인데, 屍身(시신)은 다 어디로 갔나? 갖고 올라 갔나? 북한군으로 의심 가는 屍身은 단 하나도 발견된 게 없다. 그들은 투명인간 부대였던가? 과학적 상식으로도 성립이 불가능한 주장이다.
       요약하면 광주사태를 목격하였던 시민, 시위자, 진압군인, 취재기자들 가운데 북한군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거나 북한군 개입설을 믿는 이는 全無하다. 광주사태를 보지 않고 상상에 의존하는 이들중에서 믿는 이들이 많다.
      
       9. 광주發(발) 과장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사망자가 2000명이나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수 차례의 정부 조사로 부정되었다. 또 하나는 영화 '화려한 휴가'에 나오는 학살장면이다. 5월21일 정오 무렵 전남도청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비무장 시민들을 향하여 공수부대원들이 명령 일하에 일제 사격을 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다치게 하는 장면은 악랄한 空想(공상)이고 조작이다. 그런 학살도, 그런 사격명령도 없었다. 시민들이 차량을 탈취하여 공수부대원들을 덮쳤고, 현장에서 군인 한 명이 깔려 숨지자 군인들이 버스를 향하여 발포한 것이 본격적인 총격전의 시작이었다. 이런 미신에 북한군 개입이란 또 다른 미신을 추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正義(정의)는 진실에 기초해야 한다.
      
       10. 이념적 입장에서, 또는 희망적 관점에서 북한군 개입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광주사태 당시 시위대는 反정부적이었지만 親北的(친북적)이진 않았다. 시위대가 간첩 같은 사람이 끼여 있다고 軍 당국에 신고하기도 했었다.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가 늘 나왔다. 대한민국 세력은 진실 위에 정의를 세워야지 正義 위에 진실을 세우려 해선 안 된다. 신념보다 사실이 더 중요하다.
      
       11. 일부 방송이 광주사태 시의 북한군 개입 주장이나 서울 도심으로 장거리 땅굴이 들어왔다는 주장을 검증 없이, 여과 없이, 때로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하여 소개하는 것은 위험하다.


    조갑제 대표는 5.18광주사태를 둘러싼 ‘북한군개입설’이 인터넷을 떠돌던 하나의 풍문(風聞)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반(反)헌법적이고 거짓말을 일삼는 좌파와는 달리 보수는 진실·정의·헌법이라는 가치를 지향한다. 근거없는 거짓소문을 신봉하고 진실을 외면하면 보수의 역할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