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시절, 적국 상대로 각종 암살 때 활용한 ‘더러운 손’‘연 날리기’의 21세기 버전
  • ▲ TV조선은 2013년 1월부터 최근까지 20여 명이 김기종에게 3,000만 원을 후원했다고 보도했다. 이 가운데는 국회의원 등도 있었다. ⓒTV조선 관련보도화면 캡쳐
    ▲ TV조선은 2013년 1월부터 최근까지 20여 명이 김기종에게 3,000만 원을 후원했다고 보도했다. 이 가운데는 국회의원 등도 있었다. ⓒTV조선 관련보도화면 캡쳐

    지난 11일부터 주요 언론들은 김기종의 배후가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다양한 자료를 확보해 보도하고 있다.

    이 가운데 야당 의원 등 20여 명이 2013년 1월부터 김기종에게 3,000만 원을 후원했다는 TV조선의 보도나 김기종 개인의 일탈일 뿐 테러는 아니라는 여당 의원의 말을 전하는 일부 매체의 보도는 눈길을 확 잡아끈다.

    TV조선의 보도에 따르면 문화재청장을 지낸 Y씨가 “형편이 어렵다”는 말을 듣고 후원금을 보내줬는가 하면,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W의원, M의원, S 前의원, 민화협에서 활동하는 새누리당 L의원 등도 김기종에게 돈을 보냈다고 한다.

    김기종의 리퍼트 美대사 테러를 수사 중인 경찰은 “후원자와 김기종 간에 특별한 관계는 없어 보인다”면서도, 만에 하나의 가능성에 대비해 돈을 보낸 이들과 김기종 간의 관계를 조사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재 상황대로라면 ‘김기종의 진짜 배후’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김기종의 테러, 냉전 시절 사례로 보면….


    김기종의 리퍼트 美대사 테러는 냉전 시절 동서 양 진영이 적국 요인을 암살하기 위해 벌이던 첩보기관들의 ‘공작’과 매우 흡사해 보인다.

    냉전이 점점 격해지던 1970년대 동서 양 진영은 직접 맞부딪힐 경우 ‘열전(熱戰, Hot War, 실제 전쟁)’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 제3세계의 테러조직이나 첩보기관을 많이 활용했다.

    이때 공산권과 서방국가는 자신들이 ‘파괴공작’의 배후라는 점을 숨기기 위해 직접적인 연관성을 생각해 내기 어려운 조직들을 선호했다. 특히 적국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더러운 손(Dirty Hands)’을 많이 활용했다.

  • ▲ 냉전 시절 영국으로 망명했다 암살당한 불가리아 극작가 게오르기 마코프의 추도식 장면. 그가 불가리아 정보기관에게 암살당했다는 사실은 35년 만에야 밝혀졌다고 한다. ⓒ자유 유럽 방송 보도화면 캡쳐
    ▲ 냉전 시절 영국으로 망명했다 암살당한 불가리아 극작가 게오르기 마코프의 추도식 장면. 그가 불가리아 정보기관에게 암살당했다는 사실은 35년 만에야 밝혀졌다고 한다. ⓒ자유 유럽 방송 보도화면 캡쳐

    ‘더러운 손’이란 첩보기관들이 사용하던 속어다. 적성국의 파괴공작과 선전선동에 대응하기 위한 공작을 벌이면서, 불법적인 암살을 해야 할 때 마피아와 같은 범죄조직들을 활용했다. 미국은 물론 이탈리아, 스위스, 대만, 심지어 한국에서도 이런 ‘더러운 손’을 활용하다 발각된 사례가 있다.

    하지만 서방국가들은 ‘더러운 손’을 잘못 사용했다 역풍을 맞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내각제를 택한 일부 국가들은 ‘더러운 손’을 국내 문제에 잘못 활용했다 선거를 다시 실시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문제로 고민하던 서방국가들이 생각해낸 대안은 ‘연(鳶, Kite) 날리기’였다.

    ‘연 날리기’란 전직 특수부대원이나 첩보기관의 ‘무장 행동대’ 출신 사람들의 신분을 위장한 뒤 적국으로 들여보내 암살 등의 파괴공작을 시키는 것이었다. 대신 적국에 잠입하는 것은 도와주지만, 공작에 성공한 뒤 무사히 탈출하는 것은 장담하지 못했다.

    만약 공작에 실패해 적에게 붙잡힐 경우 ‘연 날리기’를 한 첩보기관은 ‘연’과의 연관성이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쉽게 비유하자면 남북한 간의 침투 공작원이나 한국 공군 첩보부대 2325전대(일명 OSI)에게 교육을 받았던 684부대(일명 실미도 부대)와 비슷했다.

  • ▲ 김일성 암살과 주석궁 폭파를 위해 창설한 실미도 684 부대원 사진. 이들은 공군 2325전대에게 교육을 받았다. ⓒ과거 언론보도 캡쳐
    ▲ 김일성 암살과 주석궁 폭파를 위해 창설한 실미도 684 부대원 사진. 이들은 공군 2325전대에게 교육을 받았다. ⓒ과거 언론보도 캡쳐

    미국의 경우에는 이런 ‘연 날리기’에 종종 해병대 ‘포스 리컨’이나 육군 특전단, 해군 네이비실 출신 요원을 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헨리 키신저가 지휘했던 美해군 비밀공작부대인 TF 157이나 BSI, 시스프레이 등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80년대 냉전이 끝나고, 이런 ‘연 날리기’ 사례가 비인도적이라는 비판이 내부에서조차 거세지면서, 미국은 물론 대부분의 서방국가들은 유사한 공작을 중단했다.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이런 ‘연 날리기’를 하는 것으로 확인된 국가는 이스라엘, 러시아, 중국, 북한 정도가 있다. 이중 러시아, 중국은 ‘더러운 손’도 그대로 사용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기종, 정부 규모의 ‘연 날리기’ 아닐 수도


    이들 가운데 이스라엘이나 러시아는 최정예 요원을 보낸다. 지금까지 ‘공작’ 과정에서 요원이 실수하거나 붙잡힌 적이 없다.

    실제 이스라엘의 경우 2010년 1월 20일(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에서 테러조직 하마스의 군 사령관인 ‘마흐무드 알마부’를 암살했고, 그 이전에는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핵물리학자의 자동차를 폭파시키기도 했다.

    이 같은 공작을 한 요원들은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 내의 특별부서인 ‘키돈(Kidon)’ 소속으로, 모두 정규요원이었다. 일종의 ‘연 날리기’, 하지만 ‘본부에서 먼저 끊지는 않는 연’이었다.

  • ▲ 2010년 1월 20일 두바이에서 하마스 군사령관을 암살했던 이스라엘 모사드 키돈 요원들. 유럽 언론에 공개된 사진이다. ⓒ유럽 언론 공개화면 캡쳐
    ▲ 2010년 1월 20일 두바이에서 하마스 군사령관을 암살했던 이스라엘 모사드 키돈 요원들. 유럽 언론에 공개된 사진이다. ⓒ유럽 언론 공개화면 캡쳐

    러시아는 푸틴 정권이 들어선 뒤부터 유럽 곳곳에서 망명객, 반대파 언론인들이 피살당했다. 英가디언은 최근 “러시아 정부는 해외정보국 SVR 산하에 전문 암살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들 가운데 수십여 명이 영국 등에서 활동 중”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실제로 암살당한 빅토르 유시첸코, 알렉산드르 루트비넨코, 안나 폴리콥스카야, 이반 사프로노프, 블라디미르 토카첸코 등 10여 명이 숨진 장소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영국 등 유럽 곳곳이다.

    중국 공산당의 경우에는 구체적인 사례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해외에서 삼합회, 14K와 같은 ‘더러운 손’을 사용하거나 위장한 인민해방군 특수부대 대원으로 ‘연 날리기’를 하고 있다는 근거는 곳곳에서 나타난다.

    가장 지저분한 활동을 벌이는 나라는 예상대로 북한이다. 북한의 ‘더러운 손’은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는 종북 세력과 조선족 조직폭력배 일부, ‘연 날리기’에 사용하는 수단은 3호 청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대남사업부서와 인민군도 일부 포함돼 있는 정찰총국이라고 보면 된다.

    이들 또한 실력이 뛰어난 편이다. 하지만 이들을 잡아내는 한국 또한 만만치 않아 실패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렇게 보면, 김기종의 리퍼트 美대사 테러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는 게 맞아 보인다. 김기종은 전문적인 암살 요원도, 조직 폭력배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제일 비슷한 ‘테러’가 바로 1974년 8월 15일에 일어난, 재일교포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총격 테러다. 


    40년 전 문세광 테러로 김기종 따라잡기


    1951년 12월 26일 일본에서 태어난 문세광은 고교 시절부터 공산주의에 심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이한 점은 문세광의 부친은 한국계 재일교포단체인 민단 소속이었다는 점이다. 문세광은 세이키 상고를 중퇴한 뒤 청소, 소화기 판매원, 빌딩 유리청소부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민단에 가입해 각종 활동에도 참여했다.

    그러다 1972년 9월 오사카에서 열린 조총련과 민단의 단합대회에서 김효룡을 만나 조총련에 포섭된다. 김효룡은 이후 수 년 동안 살림살이가 팍팍했던 문세광의 집을 찾아 각종 선물을 주며 환심을 샀다.

  • ▲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뒤 체포된 문세광. 법정에 나온 모습이다. ⓒ정부 전자역사관 캡쳐
    ▲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뒤 체포된 문세광. 법정에 나온 모습이다. ⓒ정부 전자역사관 캡쳐

    김효룡은 문세광이 ‘자기 사람’이 되었다고 판단한 뒤 문세광의 친한 친구이자 공산주의자인 일본 여성 ‘요시이 미키코’와 함께 ‘공작’에 가담하도록 훈련을 시킨다. 문세광과 요시이 미키코는 부부로 위장해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때 홍콩에서 권총을 구입하려 했지만 실패한다.

    문세광은 김효룡의 지시에 따라 1974년 8월 6일 요시이 미키코의 남편으로 위장해 한국으로 들어온다. 이때까지 문세광은 전문적인 사격 훈련을 받는다거나 특별한 첩보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점은 “박정희를 암살하겠다”는 의지였다.

    문세광은 1974년 8월 15일 오전, 호텔 직원에게 부탁해 빌린 포드 승용차를 타고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는 남산 국립극장으로 향했다. 이때 문세광도 김기종처럼 ‘비표’가 없었다. 하지만 문세광이 수입차를 타고 들어서자 정문 경비가 통과시켜줬고, 극장 입구에서는 일본어를 하면서 들어서자 경비팀은 외국인 VIP로 오인, 무사통과시켜줬다.

    김기종이 민화협 행사장에 들어설 당시의 모습, 문세광이 남산 국립극장에 들어설 때의 모습이 묘하게 일치한다. 이런 점을 보면 김기종도 북한이 아니라 종북 단체 등으로부터 부추김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김기종 배후? 지난 15년 행적 인내심 갖고 뒤져야


    현재 경찰 등 공안당국은 김기종에게 배후가 있는지 등을 조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리퍼트 美대사 테러를 보면 그의 과거 행적을 보다 면밀히 살펴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김기종에게 ‘배후세력’이 있다면, 그와의 관계는 몇 년 이상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김기종의 활동 내역으로 미루어 볼 때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주고받는 관계이거나 명령을 하는 관계의 사람이 아니라, 김기종이 스스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부추기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김기종은 ‘누군가의 명령을 받으면 실행 안 하는 증상’이 있어 보여서다.

    김기종이 주거지 겸 사무실로 사용하는 장소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창천동은 연세대 정문과 가까울 뿐 아니라 홍익대 인근과도 지척거리다. 이곳은 유흥가도 많지만 몇몇 단체의 본부가 있는 곳으로 알려진 지역이기도 하다.

    김기종이 2006년 ‘한미 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의 서대문구 운동본부 대표자로 활동했다는 주장도 눈이 띈다. 참고로 ‘한미 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는 노무현 정권 당시 NL계와 PD계는 물론 무정부주의자까지 참여할 정도의 거대한 조직으로 곳곳에서 폭력시위를 벌였다.

    김기종의 배후가 있다면, 그에게 재정적으로도 큰 후원을 해주기보다는 그때그때 필요한 정도의 현금을 줬거나 술, 식사 접대 등을 통해 김기종의 ‘자존심’만 채워주면서 길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단순히 금융거래 내역만 확인하기 보다는 김기종 본인 이름으로 10만 원 이상의 돈을 입금한 것으로 나온 날의 행적을 살피고, 무통장 입금한 내역을 찾는 게 중요하다. 

    어쩌면 김기종이 '기초수급대상자'가 되도록 도와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지 멀쩡한 50대가 무슨 이유로 '기초수급대상자'로 도움을 받았을까.

  • ▲ 휠체어에 탄 채 '경찰의 호위' 속에 나오는 김기종. ⓒTV조선 관련 보도화면 캡쳐
    ▲ 휠체어에 탄 채 '경찰의 호위' 속에 나오는 김기종. ⓒTV조선 관련 보도화면 캡쳐

    김기종의 과거 행적을 봤을 때 ‘배후세력’이 눈여겨보게 된 계기는 2010년 주한 일본 대사에게 콘크리트 덩어리를 던졌을 때일 가능성도 많아 보인다.

    그 전까지 한국 사람이 주한 일본 대사관에 오물을 투척하거나 독도 관련 항의시위를 벌이면서 ‘단지(斷指)’를 하는 사례는 있었지만, 주한 일본 대사에게 직접 폭력을 가한 사례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후 김기종이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던 점도 특이한 대목이다. 현행법에 외교사절에 대한 폭력을 저지를 경우 가볍지 않은 처벌을 받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당시 변호인이었던 박찬종 前의원이 김기종을 변호하겠다고 먼저 연락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소개가 있었는지 확인하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김기종은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거치는 사이 민주평통 자문위원, 민화협 회원,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성공회대 외래교수, 전쟁반대 평화실현 국민행동, 민족화합운동연합 등 다양한 연대 단체에서 활동했다. 따라서 ‘접점(接點)’도 많고, 행적도 복잡하다.

    한 예로 2007년 4월 5일 개성 ‘평화통일의 숲 나무심기’에 참가한 것을 놓고, 일각에서는 “북한 측과 접촉한 것 아니냐”고 의심하지만, 실제 현장에 참가한 사람으로서 보면, 당시 행사는 누군가를 따로 불러 만나기에는 부적절한 상황이었다. 수십여 명의 기자와 수백여 명의 사람이 참가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나무심기 행사가 끝난 뒤 동봉각에서 열린 오찬 자리에서 그의 옆에 앉았다면 ‘필요한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지난 15년 동안 수많은 종북성향 인사, 좌파 인사들과 만난 김기종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 사람을 찾기 위해서는 경찰 등 당국이 인내심을 갖고, 다른 공안사범을 수사할 때보다 더욱 많은 시간을 갖고 추적하겠다는 의지를 다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