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자유민주제의 도입과 실험

    전쟁 중에도 먹혀들지 않는 대통령의 권위  

  •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을 당했을 때
    제2대 국회의원을 뽑은 5 · 30선거가 끝난지 한 달도 안 된 때였다.
    따라서 국회는 열리지도 못한 채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5 · 30선거에서는 남북협상론자들인 김규식과 김구의 추종자들도
    적지 않게 당선되었기 때문에 이승만 정부에게 제2대 국회는 걸끄러운 상대였다. 
       당선자 210명 중 무소속이 126명으로 전체 의석의 절반을 훨씬 넘었기 때문에
    정치적 안정도 찾기 어려웠다. 무소속이 많은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정당 정치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 김일성(앞)과 남북협상하러 평양에 간 김구(뒤).
    ▲ 김일성(앞)과 남북협상하러 평양에 간 김구(뒤).
   그러므로 피난지에서 열린 국회는 대체로 행정부에 적대적이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 정부는 전쟁 수행과 국정 운영에 있어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으로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는데도 국회 의원들 가운데는
 피난을 가면서도 정부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7월 16일 그들을 질책했다.
난리가 나서 나라가 어려운 때 국가의 안위는 돌보지 않고
사리사욕만 채우려는 소인배라고 비난했다. 
   제갈공명이 국무총리가 되고 관우와 장비가 군사령관이 되었던들
어떻게 저 공산군의 탱크와 대포를 막아냈었겠느냐고 반박했다. 

   그리고 왜 정부는 남침을 막아낼 대책을 미리 세우지 못했느냐고 비난하지만,
미국의 무기 지원이 계속 미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침략을 당한 것이지,
 우리가 몰라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님은 내외국인이 다 아는 바라고 반박했다.   
  • ▲ 부산으로 피난간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거제도를 방문했다.(1951)
    ▲ 부산으로 피난간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거제도를 방문했다.(1951)


  • 갑자기 전쟁을 맞은 신생국 행정의 난맥상

       임시 수도 부산에서 행정부와 국회의 갈등은 마침내
    1951년 2월에 터진 ‘거창사건’으로 폭발했다. 
       그것은 경상북도 거창군 신원면의 마을 주민 수백 명이 빨치산과 내통한 혐의로 
    지리산 공산 게릴라를 토벌하던 국군에 의해  희생된 사건이었다. 
       국회는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고 강력하게 정부의 책임을 물었다. 

       여기에 덧붙여 전남 출신의 국회의원 서민호가 군 장교를 권총으로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에 따라 국회와 행정부의 대결은 더욱더 심각해졌다. 이승만은 서 의원의 사형을 희망했다. 그렇지만 법원은 가벼운 처벌로 대통령에 도전했다.

       1951년 3월에 터진 ‘국민방위군 사건’도 행정부와 국회의 갈등을 부추겼다. 
       ‘국민방위군’은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북한군에 끌려가지 않도록
    후방으로 미리 이동시키기 위해 급히 만든 조직이었다. 
       그것은 6 · 25 전쟁 첫 3개월 동안 수많은 남한 청년들이 의용군이란 이름으로
    북한군에 강제로 끌려갔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조직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50년 12월부터 17~50세의 장정 50만여 명이 징집되어 남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수송수단이 없어 먼 길을 걸어야 했고 보급품도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많은 인원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희생이 더 커진 데는 국민방위군 간부들의 예산 낭비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951년 3월 29일 국민방위군의 비참한 상황이 알려지자 국회와 언론은
    행정부를 맹렬히 공격했다. 5월에는 이시영 부통령도 항의 표시로 사퇴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6월 이기붕(李起鵬)을 국방장관에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했다.
    이기붕은 김윤근을 비롯한 5명의 간부를 공금 유용 혐의로 사형시킴으로써
    성난 국회와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다.

    대통령 직선제의 도입과 부산정치파동

       이처럼 정치적으로 험악하고 전쟁이 계속되는 속에서,
    1952년의 제2대 대통령 선거가 닥아 오고 있었다. 
       현행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접선거’를 통해 뽑게 되어 있었다. 
       국회 구성을 볼 때 그 경우에 이승만의 재당선은 어려워 보였다.
    그것은 이승만에게 적대적인 김성수가 국회에서 부통령에 당선된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 ▲ 초대 미국 주한대사 무초.
    ▲ 초대 미국 주한대사 무초.
       무초 미국 대사도 미국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이승만 보다는 
  • 온건한 태도의 장면(張勉)을 더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민 대중이 자신을 지지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것은 1951년 4월 25일의 지방의회 선거와 5월 10일의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이승만 지지자들이 많이 당선된 사실로 확인된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대통령 선거 방식을 ‘국회 간접선거’로부터
     ‘국민 직접선거’로 바꾸려고 했다.

    1951년 11월 30일 이승만 정부는 직선제(直選制)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승만에 적대적인 국회는 1952년 1월 8일 그것을  부결시켰다.
    그리고는 1월 17일 현재의 대통령 중심제를 완전한 내각책임제로 바꾸려는
    새로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했다. 

       국회가 그처럼 이승만 대통령에게 도전할 수 있었던 데는
    미 국무부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 대사 무초는 국무총리 장면의 비서실장이었던 선우종원을 통해
    지지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다.  

       이처럼 불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이승만은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한
     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그는 1952년 5월 26일 임시수도 부산, 그리고 공비들이 출몰하는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 일대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자 미국이 이승만의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고 나섰다. 
       육군참모총장 이종찬도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명분에서 계엄사령관 취임을 거부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에게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에게
    계엄업무를 맡기는 도리밖에 없었다.  
       헌병들은 국회의원들이 탄 출근 버스를 강제로 연행하고 그 가운데 10여 명을 간첩 혐의로 구속했다.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국내외의 많은 언론기관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김성수 부통령도 그에 대한 항의 표시로 사퇴했다.
  • ▲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을 찬성하는 시위대와 계엄군.
    ▲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을 찬성하는 시위대와 계엄군.


  • 국민은 대통령을 직접 뽑을 능력이 있다

       이승만은 이른바 부산정치 파동을 통해 전시 중에 국가생존을 위해서는
    국회의원들의 권한을 제약(制約)할 수 있음을 국민에게 알리려고 하였다.

      1948년 건국 당시 국회가 대통령을 뽑았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6·25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을 직접 뽑을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래서 자기는 대통령 선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려고 하는데
    국회와 언론이 반대한다는 논리였다.   

       그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성공했다.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을 계기로 국회와 언론에 의해 수세에 몰린 대통령을
    지지하는 여론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지방의회들은 직선제 개헌안 지지 결의안을 채택했다.
    지방의원들 가운데는 부산에 와서 국회의사당을 에워싸고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과격한 청년들은  국회 의사당에 밀고 들어와 국회의원들을 4시간이나 감금하기도 했다. 
  • ▲ 한국 최초의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국회의원들.(부산,1952,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 최초의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국회의원들.(부산,1952,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    결국 국회는 1952년 7월 4일 이승만이 요구하는 직선제 개헌안을 가결했다. 
       이처럼 국회가 이승만의 초강수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던 데는
    국회의 대통령 간선제안이 이승만의 대통령 직선제안 보다 명분(名分)에서 약했던 사실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게다가 국회의원의 상당수가 이념적 소신이 뚜렷지 못하여
    정당을 수시로 옮겨 다닐 정도로 안정성이 없었기 때문에,
    대통령에 맞 설 응집력을 갖지 못했던 사실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미 국무부도 전시중에 이승만을 대신할 만한 강력한 영도력을 가진 인물을 찾을 수 없었다.
    미 국무부가 눈여겨 보았던 장면과 조병옥도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듯이 보였다. 

       게다가 전선의 미군 지휘관들은 거의 대부분 이승만 지지였다.
    그 때문에 미국은 이승만의 재집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계속)

    이주영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