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재 부족으로 허덕이는 신생국에
    친일파 숙청 문제의 대두


       신생국 정부에게 가장 시급했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인재 부족이었다.
    식민지 시대에 고위직에 있어본 경험이 있는 지도급 인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분야에서 경험을 가진 행정가나 전문가가 부족했다.
    심지어는 장관들도 자기 부서를 어떻게 끌고 나가야 할지 잘 모를 정도였다.
     
       여기서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든 일이 일어났다.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도 안되는 1948년 9월 7일에 국회가 서둘러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방 이전의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이었다.
       그 법을 시행하기 위한 조직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그에 따라 특별재판관, 특별검찰관이 임명되었다.
  • ▲ 체포된 친일 혐의자들. 경성방직 김연수(가운데)와 33인의 최린.(자료사진)
    ▲ 체포된 친일 혐의자들. 경성방직 김연수(가운데)와 33인의 최린.(자료사진)
       해방 직후 친일파 숙청은 좌익들이 유난히 끈질기게 요구하던 것이었지만,
    당시 국민의 대다수도 어느 정도 공감하던 문제였다.
       그러나 미 군정은 3년간의 통치 기간에 일제시대의 관리와 경찰을 거의 그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과도입법의원에서 친일파를 숙청하기 위한 법이 제정되기는 했지만, 하지 중장은 그것을 묵살했다. 인재부족이 그 이유였다.
       그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친일파 문제는 어느 정도 가라 앉은 분위기였다.
    김구 조차도 일제시대의 고위관리들을 포섭하기 위해 행정조사연구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처럼 수그러져 가던 친일파 숙청 문제가 건국초기에 다시 표면으로 떠오르게 되자, 국가를 경영해야 할 이승만으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이 볼 때, 국가의 성공적인 출범을 위해서는 국민을 단합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때문에 이승만은 소수의 극악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친일 행위는 식민지 백성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일로 관대하게 보려고 했다.

       더군다나 인재 부족으로 허덕이는 건국 초기에 친일 행위를 문제 삼게 되면, 인재를 찾기가 더욱더 어려워지게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처벌 대상을 가능한 한 줄이기 위해 증거가 불충분할 경우에는 관대한 쪽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 문제는 나라 전체에 손해가 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날에 얽매어 앞날을 그르치기 보다는 앞으로 할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 ▲ 반민특위의 특별재판 광경.(자료사진)
    ▲ 반민특위의 특별재판 광경.(자료사진)

    반민특위에 대한 이승만의 불만

     
       그러나 다양한 정치 세력들로 이루어진 국회의 의견은 달랐다.
    그 문제에 있어서 좌파들이나 남북협상파들이 특히 강경했다.
    따라서 국회와 행정부의 대립은 불가피해 보였다.
       대립은 1949년 1월 25일 반민특위가 일제시대 고등계 형사였던 노덕술을 체포하면서 표면화됐다.

       이승만이 볼 때, 공산주의자들이 살인, 방화, 파괴를  일삼고 있는 마당에 경험 있는 경찰관을 잡아들이는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
       친일 혐의를 받으면서 수세에 몰려 있던 경찰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
    1949년 6월 그들은 반민특위에 소속된 특별경찰인 특경대를 공격함으로써 친일 행위 처벌에 반대했다.  
  • ▲ 국회의원들의 집단 친북간첩행위가 드러났던 국회프락치사건 당시 부의장 김약수.
    ▲ 국회의원들의 집단 친북간첩행위가 드러났던 국회프락치사건 당시 부의장 김약수.
       국회 안에서도 반민특위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반민특위 부위원장인 김상돈 의원이 일제시대에 저질렀다고 주장되는 친일 행위와 자동차로 사람을 치어 죽인 교통 사고가 문제되었다.

       1949년 5월에는 좌익 혐의를 받던 김약수,이문원,노일환 등10명의 국회의원들이 체포되는 ‘국회 프락치 사건’이 일어났다.
       국회의원들이 체포되었으므로, 반민특위는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국회는 서둘러 반민특위의 활동 시한을 앞당기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 혐의로 체포된 사람은 682명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서 221명이 기소되는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재판에서는 7명만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 ▲ ⓒ여수순천 반란사건 현장에 출동한 진압군.(자료사진)
    ▲ ⓒ여수순천 반란사건 현장에 출동한 진압군.(자료사진)

    혁명가들의 자유를 제한할 수 밖에 없었던 자유주의자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 시절의 스승이었던 우드로 윌슨처럼 자유방임(自由放任)의 장점을 믿는 제퍼슨 계통의 자유주의자였다.
       그러나 새로 탄생한 국가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조차 확실하지 않은 불안한 상황에서 정부가 개인(個人)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는 자유주의 노선을 지키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혁명(革命)을 목표로 테러 활동을 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자유를 제한할 수 밖에 없었다.   
       5 · 10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일으켰던  제주 4 · 3폭동은 정부가 수립되었는 데도 가라앉지 않았다. 그것은 10월 17일 여수 · 순천 반란사건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좌익들의 ‘해방구’에서는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러므로 1948년 12월초 공산주의자들의 자유를 제약하기 위한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이 국회에서 제정되었다. 따라서 그 법을 집행하게 될 이승만은 집권초기부터 ‘독재자’로 불리게 될 운명이었다.
       게다가 국민에게 여전히 큰 영향력을 가진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 세력도 아직은 정부 수립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였다. 
  • ▲ 여수순천 반란군에 학살된 양민시체.(자료사진)
    ▲ 여수순천 반란군에 학살된 양민시체.(자료사진)
    정부 출범 5개월 만에 내각제 개헌을 요구한 국회

       국회도 건국 초부터 행정부를 괴롭혔다. 나라가 선 지 겨우 5개월밖에 안 된 1949년 에 민국당 중심의 국회의원 79명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한 것이다.
       이제 막 출발한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를 다시 프랑스식 내각책임제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볼 때 내각책임제는 영국과 같은 군주제 국가에나 적합한 것이었다. 
       국회에서 표결에 붙인 결과 내각제 개헌안은 부결되었지만, 문제는 그것에 대한 반대표가 겨우 33표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은 대통령이 국회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처럼 국회 안에서 지지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이승만은 내각 구성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제일 먼저 북한 출신의 이윤영 목사를 국무총리에 지명했으나, 국회의 인준을 받지 못했다. 
       뒤이어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물러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신성모(申性模)를 그 후임으로 임명했지만 국회의 인준을 받을 자신이 없어서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해 내각을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덧붙여 국회는 내각 총사퇴 결의안을 연거푸 통과시키는가 하면, 장관들을 쫓아내려는 불신임안도 계속 제출했다.
    그 때문에 갖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계속>
    <이주영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