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사를 바꾼 간첩들 이야기 
      
     유엔과 IMF 설립을 주도한 히스와 화이트, 영국 정보기관 고위직에 오른 4인방도 소련 간첩이었다. 
    趙甲濟   
     
     李承晩을 괴롭혔던 미 국무부 高官 히스도 소련 간첩
     루스벨트 대통령이 총애하였던 히스는 유엔 창립을 주도하였다.
     
  • ▲ 이승만을 괴롭힌 소련간첩, 루즈벨트 대통령 측근 앨저 히스.
    ▲ 이승만을 괴롭힌 소련간첩, 루즈벨트 대통령 측근 앨저 히스.

        <1942년 2월 2일, 미국에서 31년째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李承晩은 美 국무부를 방문하여 국무장관 헐과 국무부의 실력자 앨저 히스와 면담하였다. 이승만 박사는 한국인이 일본을 패망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도를 설명하고 동시에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요구하면서 경제원조를 해주면 한국인들이 연합국 지도하에 일원이 되어서 사보타지나 게릴라 활동에서 중요한 역량을 발휘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히스는 “임시정부 승인에 대해서는 미국이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 없다”고 선언하고 “소련이 동아시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소련의 의중을 무시할 수 없다“고 부언했다. 당시 이승만은 히스가 소련의 첩자로서 소련의 이익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청년 히스의 정치적 판단력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자리를 물러섰다.>(이주천 교수, 뉴데일리 기고문에서)
     
      세계금융질서를 주도한 IMF를 창립할 때 미국 대표로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당시 미국 재부부의 해외담당 책임자 화이트가 소련 정보기관에 포섭된 간첩이었듯이 유엔의 창립 때 사무총장이었던 국무부의 차관보급 高官 앨저 히스도 소련을 위해 복무한 간첩이었다.
     
      히스도 화이트처럼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뒤 변호사가 되어 연방 대법원의 대법관 서기, 법무부 직원으로 일하다가 1936년에 국무부에 들어갔다. 1939년, 미국 공산당 당원이었고 轉向한 뒤 기자로 일하고 있던 휘테커 참버스는 국무부의 아돌프 벌 차관보에게 히스가 공산당원이었음을 알려주었다. 프랑스 정보기관도 "미국 국무부의 한 차관보가 소련 스파이다"는 정보를 미국측에 제공하였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좌익성향의 인물들을 많이 썼기 때문에 이런 정보에 무관심하였다. 이 틈을 타고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루스벨트 정부의 要職으로 진출하였다.
     
      히스는 국무부에서 가장 촉망 받는 엘리트였다. 그는 1945년 초 루스벨트 대통령을 수행하여 얄타 회담에도 참여하였다. 이 회담에서 스탈린은 루스벨트의 戰略을 정확하게 간파하여 회담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히스를 비롯하여 루스벨트 정부 안에 심어놓은 소련 간첩들이 제공한 정보 덕분이었다고 한다.
     
      히스는 얄타 회담이 끝난 뒤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소련 공산당의 외무부장 안드레이 비신스키는 히스를 만나 그동안의 협조에 감사하였다. 이 정보를 미국의 NSA가 암호해독으로 파악하고 있다가 冷戰이 끝난 뒤 공개하였다. NSA의 해독문서엔 '아레스'라는 암호몀으로 나오는데, 얄타 회담 직후 모스크바를 방문한 미국 高官은 히스뿐이었으므로 아레스는 히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히스는 1947년 미국 국무부를 떠나 카네기 財團의 대표를 맡았다. 1958년 당시 타임 잡지사의 편집위원이던 휘테커 참버스는 美 하원의 非미국활동 조사 위원회에 출석하여 히스가 1930년대 공산당원이었으며 자신에게 美 국무부 문서를 건네주었고 자신은 이 문서를 소련에 전달하였다고 증언하였다.
     
      히스는 이 사실을 부인하고, 참버스를 명예훼손 혐의로 提訴하였다. 참버스는 이에 대응하여 히스가 써준 메모와 타이핑한 문서를 공개하였다. 히스는 의회에서 위증한 혐의로 기소되어 實刑을 살고 나온 뒤에도 무고하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의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도 히스를 편들고 히스를 몰아세웠던 닉슨을 비방하였다.
     
      1996년 미국 NSA는 소련측의 암호를 해독한 문서를 공개하여 히스가 소련 간첩이었다는 物證을 제시하였다. 이밖에도 소련측에서 나온 많은 문서와 소련 정보기관 출신들의 증언 등으로 히스가 간첩이었다는 주장은 이제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확정되었다.
     
      히스와 같은 知性人도 공산주의에 물들면 염치불구하고 거짓말을 한다.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단 공산주의에 오염된 경력이 있는 인물들에 대하여는 신뢰성을 무조건 의심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게 안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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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바꾼 간첩-6.25 때의 영국 4인방 
        
      대학생 시절 좌경이념에 노출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잘 보여준 것은 1930년대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 다니면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가 소련 첩보기관에 의하여 스파이로 포섭된 4명의 엘리트들이었다. 필비, 매클레인, 버지스, 블런트는 영국정보기관과 외무부에 들어가 엘리트 코스를 밟고 요직에 근무하면서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고급정보를 제공하였다. 이념적 소신에 따른 행동이었다.
     
      이들의 간첩질은 한국전쟁의 향방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1950년, 그 운명의 해에 간첩 필비는 영국 해외정보기관(MI 6)의 對美 연락관으로서 미국 CIA와 FBI 최고위층과 자유롭게 접촉, 고급정보를 공유하였다. 같은 시기 필비의 동료인 간첩 버지스는 미국주재 영국대사관의 2등 서기관으로서 고급 문서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같은 시기 이들의 동료인 간첩 매클레인은 영국 외무부의 미국 데스크였다.
     
      당시 영국과 미국은 고급정보를 공유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한국전에 대한 미국의 전략정보를 자연스럽게 얻어 소련에 제공하였다. 매클레인은 美 국무부의 고위직에 있으면서 소련에 정보를 제공하던 엘저 히스와 친하였다. 매클레인은 6.25 이전에 히스로부터 입수한 주한미군을 비롯한 해외미군에 대한 정보를 소련측에 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 애틀리 수상은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그로부터 맥아더 사령관에게 원자폭탄 사용권한을 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이 정보도 매클레인에 의하여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네 명의 간첩중 블런트만 제외하고 3명은 정체가 탄로 나자 소련으로 도망가서 여생을 마쳤다. 소련은 고르바초프 시절 필비를 기리는 우표까지 발행하였다. 
        
      좌파정권 10녀간 한국에선 필비와 같은 자발적 간첩이 없었을까? 북한의 核 및 미사일 개발 관련 자금을 관리하는 은행에 비자금을 송금하고, 核실험을 해도 달러를 계속 보내주고, 미리 미리 “당신들이 핵실험을 해도 우리는 제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계속 던지고, 미국이 김정일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은행에 제재를 가하는 것에 대하여 집요하게 미국 대통령을 물고 늘어지고, 북한이 핵실험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미연합사 해체 계획을 확정해버리고, 대통령이 나서서 북한간첩을 早期(조기)에 석방, 북한 방문까지 허용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를 조사하지 않는다면 이건 나라도 아니다.
     
      누구 북한의 핵개발을 도왔는가를 조사하려면 국가의 정보 수사 능력이 총동원되어야 한다. 한국은 북한 核개발을 막을 수 있었다. 主敵(주적)의 핵무장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려는 국가지도부의 의지가 이스라엘처럼 강하고 韓美동맹에 충직하였더라면 북한의 핵무장을 막을 수 있었다.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용기가 부족하여 핵무장을 허용하였다.
     
      북한의 핵무장 성공은 한국의 국가적 실패이다.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국가적 반성이 있어야 한다. 청문회, 감사, 조사, 수사는 다시는 이런 실수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일이다. 李明博(이명박) 정부는 ‘누가 北核(북핵) 개발을 도왔는가’라는 보고서를 국민들에게 내어놓을 의무가 있다.
     
      한 사람의 용기 있는 실무자가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 2003년 가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국회 연설에서 북한노동당 비밀당원 송두율씨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고, 국정원 수뇌부와 청와대가 수사에 미온적이었지만 계급정년을 앞둔 수사과장이 “자료가 완벽하다. 법대로 하겠다”면서 밀어붙여, 결국 宋씨의 정체를 밝혀내고 구속기소하도록 하였다. 수사과장 孫씨는 불이익을 각오하였으나 언론이 국정원을 칭찬하는 분위기에서 오히려 승진하였다.
     
      林東源의 국정원은 김정일의 해외비자금 계좌로 2억 달러를 송금해주는 얼빠진 짓을 했으나 孫 과장의 奮鬪(분투)가 국정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어느 정도 유지시켰다. 一流(일류)국가의 절대적 조건은 반역자와 惡黨(악당)에 대한 응징력과 법치력이다. 조국의 법치주의와 응징력을 무력화시킨 다음 主敵을 도와 핵무장을 하게 한 자를 가려내 처벌할 수 없는 나라는 망하는 게 正義(정의)일지 모른다. 한국판 로젠버그는 누구인가? 국가가 대답해야 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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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바꾼 간첩-IMF 創立을 주도한 미국의 화이트
     그는 미국 공산당의 지하당원으로서 재무부 고위직에 올랐다.
    職位를 이용, 소련에 독일화폐銅版을 제공하기도. 
        
      세계의 금융질서를 이끄는 IMF와 세계은행의 創立에 소련 정보기관에 간첩으로 포섭된 미국 재부부의 고위 관리가 주도적으로 개입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그 간첩의 이름은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이다. 그는 미국 재부부의 海外담당 책임자로서 1944년 미국의 브레턴 우즈에서 IMF를 만들기 위한 회의를 할 때 영국 경제학자 케인즈와 함께 참석하여 그 뒤 세계금융질서를 이끌어갈 기관의 産母역할을 하였다.
     
      1892년 보스턴에서 유태系 리투아니아人 집안에서 난 화이트는 콜럼비아, 스탠포드를 거쳐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교수 생활을 좀 하다가 재무부에 들어갔다. 화이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지지하였다. 재무부에 들어갔을 때 이미 화이트는 미국 공산당의 地下조직원으로 활동중이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화이트는 당시 재무장관이던 헨리 모겐소 2세의 보좌관으로서 국무부와 연락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는 많은 고급 정보에 접하게 되었다. 親共주의자인 헨리 월래스 부통령의 신임도 받았다.
     
      화이트는 이윽고 재무부의 海外담당 책임자로 승진하였다. 이때 그가 主導하여 만든 것이 '모겐소 계획'이다. 2차 대전이 끝나면 독일의 産業시설과 군대를 해체하여 농업국가로 전락시킨다는 계획이었다. 화이트는 이 계획서를 소련측에 미리 제공하였다. 이 계획은 언론에 새어나갔다. 독일의 괴벨스는 이 언론보도를 이용하여 독일사람들에게 決死抗戰을 호소하였다. 소련의 스탈린은 당시 독일이 미국 영국과 먼저 강화한 뒤 소련을 공격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모겐소 계획의 공개로 독일이 발끈함으로써 그런 염려가 사라졌다. 화이트가 소련을 위하여 이 계획서를 言論에 누출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1945년 11월 소련 스파이 엘리자베스 벤틀레이가 서방세계로 탈출, 화이트의 正體에 대하여 FBI에 진술하였다. 벤틀레이는 화이트가 기밀문서를 스파이網을 통하여 소련측에 제공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FBI 국장 에드가 후버는 화이트를 비롯한 소련 간첩일 가능성이 높은 공무원들의 명단을 만들어 트루먼 대통령의 군사문제 보좌관 해리 본 장군에게 전달하였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 직후 화이트를 IMF의 미국측 理事로 임명하였다. 이 자리는 사실상 IMF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要職이었다.
     
      벤틀레이는 화이트의 반역행위에 대한 결정적 증언을 하나 하였다. 1944년 미국 재무부는 독일을 점령한 뒤 발행할 화폐의 인쇄용 銅版을 만들어 갖고 있었다. 소련 정보기관은 화이트에게 그 銅版을 소련에 제공해주도록 힘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화이트가 '미국 재무부는 그 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보고를 한 사실이 그 50년 뒤 당시 소련 정보기관 미국 과장의 증언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소련은 銅版을 얻어가선 독일점령지에서 멋대로 화폐를 발행, 인플레를 촉발시키고 미국의 물자를 구입하는 등 2억5000만 달러의 손해를 끼쳤다고 한다. 화이트는 1943년엔 反共 蔣介石 정부에 미국 정부가 2억 달러를 원조하기로 하였는데도 해외업무 책임자란 위치를 惡用하여 그 집행을 방해하였다.
     
      1948년 8월 미국 하원이 '非미국활동조사'를 할 때 화이트는 불려가서 증언을 하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심장발작을 일으켜 며칠 뒤 사망하였다. 당시 나이는 56세였다.
     
      그가 죽은 뒤 화이트가 간첩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많이 나왔다. 미국 NSA는 소련 등 외국의 암호 통신을 해독하는 VENONA 계획을 운영하고 있었다. 냉전이 끝난 후 그 자료들이 공개되기 시작하였다. 이 암호해독 문서에 따르면 화이트는 '주리스트' 등 세 개의 암호명을 갖고 있었다. 미국 법무부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주리스트'는 1944년 재무부 고위직에 있으면서 핸리 월래스 부통령과 훌 국무장관의 대화 내용을 소련측에 제공하는 등 暗躍하고 있었다. 그는 또 미국 공산당원이 재무부에서 출세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헨리 월래스 부통령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4년에 죽었더라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을 사람이다. 그는 "내가 만약 대통령이 되면 화이트를 재무장관, 로렌스 더간을 국무장관에 앉힐 생각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더간은 국무부의 南美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또한 소련 간첩이었다. 더간도 1948년 美 하원의 조사를 받은 뒤 뉴욕 맨해턴의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소련 문서에 적힌 그의 암호명은 '프랭크'였다.
     
      1944년 7월 미국 민주당이 全黨대회 決選투표에서 트루먼을 부통령 후보로 뽑지 않았더라면 1차 투표에서 1등을 한 월래스가 부통령이 되어 1945년 4월 루스벨트가 죽은 뒤 대통령직을 承繼, 소련 간첩들을 재무장관 및 국무장관직에 앉혔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도 못하고 공산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정일 정권이 무너진 뒤 북한측 문서와 國情院의 존안 자료가 공개되면 한국에도 화이트와 같은 거물간첩이 정부안에서 親北的인 정책을 입안, 집행하였음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화이트와 같은 엘리트중의 엘리트가 소련 간첩이 되는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이념 때문이다. 이념은 가치관이다. 그는 미국 정부내의 要職에 있으면서도 소련 정보기관의 말단 공작원을 대통령 모시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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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기술을 소련에 넘긴 간첩 이야기
     
      역사를 바꾼 푹스
       
      1945년 7월21일, 항복한 독일의 古都(고도) 포츠담에서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과 함께 회담을 하고 있던 트루먼 미국 대통령 앞으로 기다리던 보고서가 들어왔다. 原爆(원폭)개발 맨해튼 프로젝트 지휘관 글로브 장군이 보낸 電文이었다.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있었던 核실험에 대한 보고였다. 33m 철탑 위에 장치한 핵폭발장치를 터뜨렸더니, 화염은 버섯구름처럼 치솟아 고도 3000m에 달하였다. 수천 t의 모래, 쇠조각이 상공으로 말려 올라갔다. 먼지 구름은 상공 12km까지 솟았다. 섬광은 280km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었고, 160km까지 폭음이 들렸다.
      파괴력을 실험하려고 폭발장소에서 약800m 떨어진 곳에 철근 구조물을 시멘트로 단단히 고착시켜 세워 놓았다. 이 철 구조물은 뿌리가 뽑히고 휘어지고 산산조각이 났다. 철근콘크리트 건물도 핵폭발엔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사흘 뒤 이 정보를 스탈린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매우 파괴력이 강한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했다. 스탈린은 '일본에 대하여 그 폭탄을 썼으면 좋겠다'라고만 했고, 新武器(신무기)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자는 주문을 하지 않았다. 미국측은 차분한 스탈린의 반응을 보고는 이 사람이 핵폭탄의 역사적 의미를 잘 모르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는 誤判이었다. 스탈린은 뉴멕시코의 핵개발 연구소에서 일하는 스파이를 통하여 핵개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날 스탈린은 애써 무관심한 것처럼 행동하였을 뿐이다. 역사를 바꾼 核스파이는 클라우스 푹스라는 영국 과학자였다.
      그는 1911년에 독일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라이프치히 대학의 신학 교수였다. 그는 킬 대학에 다닐 때 독일공산당에 가입하였다. 敵의 핵 개발을 돕는 것과 같은 어머어마한 간첩질은 이념적 소신을 가진 자가 자진하여 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푹스도, 뒤에 설명하는 로젠버그 부부도 그러하였으니 한국도 그럴지 모른다.
      푹스는 나치가 집권하자 탄압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 量子力學(양자역학)을 전공하여 실력으로 에딘버러 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1942년부터 영국의 原爆(원폭) 개발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때 이미 푹스는 소련군 정보총국(GRU)과 접선하고 있었다. 푹스를 소련 스파이 조직에 소개시켜준 사람도 독일 공산당원이었다. 푹스는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였으니 소련에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1943년 푹스는 미국에 건너가 미국의 원폭개발계획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플루토늄 폭탄의 핵심 기술인 內爆(내폭)장치 개발에 종사하면서 정보를 소련의 첩보기관에 제공하였다.
     
      로젠버그 부부 간첩
     
      푹스는 미국이 原爆에 이어 수소폭탄 개발에 착수하자 수소폭탄의 이론적 개념을 적어 소련측에 주었다. 戰後(전후) 그가 제공한 정보 중에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의 핵물질 생산량에 대한 통계였다. 당시 미국은 한 달에 100kg의 우라늄과 20kg의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있었다. 소련은 이 정도의 생산량을 가지고는 1950년을 前後(전후)한 시점에서 미국이 핵무장한 소련을 상대로 핵전쟁을 일으킬 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소련은 1949년에 핵실험 성공). 이런 판단이 한국전쟁에도 영향을 끼쳤다. 스탈린은 미군이 한국전에서 핵무기를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김일성을 지원하는 모험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스탈린은 이때 미국의 핵 능력에 대하여 또 다른 루트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첩보기관 및 외무부 안에는 킴 필비 등 네 명의 간부가 소련을 위하여 일하는 간첩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인 도널드 매클레인은 미국과 영국의 핵 공동 개발 프로젝트에서 영국측의 창구였다. 예컨대 당시 미국, 영국, 캐나다는 ‘통합정책조정기구’를 만들어 핵무기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 기구 회의에는 푹스도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이 기구의 공동 사무총장 중 한 사람이 매클레인이었다. 두 사람의 고급 간첩을 통하여 들어온 정보를 토대로, 스탈린은 맥아더가 한국전에서 原爆(원폭)을 쓸 수 없을 것이란 판단을 하였다고 한다. 이런 판단이 모택동의 중공군 파견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푹스야말로 세계 역사를 바꾼 간첩이란 이야기를 듣는다.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은 당시 소련의 암호를 해독하는 베노나(VENONA) 작전을 통하여 푹스를 의심할 만한 단서를 얻었다(영국 정보기관 MI 6의 미국측 연락관 킴 필비는 이 암호해독 작업에 대하여 소련에 알려주었으나 소련측은 이 정보를 활용하면 필비의 정체가 들통 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모른 척하였다고 한다). 영국 방첩기관은 1950년 푹스를 신문하여 범행을 자백 받았다. 푹스는 징역 14년을 선고 받고, 9년을 복무한 뒤 풀려나 東獨(동독)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그는 중국의 물리학자들에게 원폭 기술을 가르쳐주어 1964년에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도록 도왔다. 그는 동독에서 과학원 회원으로 선출되고 원자력 기술 연구소 책임자로 근무하는 등 좋은 대접을 받다가 동독이 붕괴되기 한 해 전 사망하였다.
      푹스를 신문한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은 그가 해리 골드라는 미국 간첩을 통하여 소련측에 정보를 제공하였음을 알아내고 골드를 체포하였다. 골드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로스 알라모스 原爆(원폭)연구소에서 기계 기술자로 일하던 그린글라스를 간첩으로 붙들었다. 그린글라스는 자신의 형부인 줄리우스 로젠버그가 누나를 통하여 자신을 포섭하였다는 진술을 하였다.
     
      “핵 스파이는 살인범보다 더 악질”
     
      율리우스 로젠버그는 유태인으로서 미국 청년 공산 연맹원이었다. 공산당원인 부인을 만난 것도 이 연맹 활동을 할 때였다. 1942년, 로젠버그는 미국 공산당 간부를 통하여 소련의 KGB 요원 세메노프에게 소개되었다. 로젠버그는 미국 통신부대의 레이다 기술자로 근무힌 적이 있었다. 세메노프는 로젠버그에게 부탁하여 더 많은 무기관련 기술자들을 간첩으로 포섭하도록 하였다. 로젠버그에게 로스 알라모스에 근무하는 처남을 포섭하도록 시킨 것도 세메노프였다.
      이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일과 미국의 공산당원들이 소련을 위하여 核(핵) 스파이 역할을 자진하여 수행하였다. 1941~1945년까지는 미국과 소련이 연합군이었으므로 소련을 돕는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덜하였다.
      1951년 4월 한국전이 한창일 때 로젠버그 부부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어빙 카우프만 판사는 준엄하게 논고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나는 피고인들의 범죄가 살인보다 더 악질이라고 간주한다. 당신들은 러시아가 과학자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1년 먼저 핵실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침략전쟁을 벌여 5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생겼고, 백만 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이 피고인들의 반역으로 피해를 볼지 모른다. 피고인들의 반역은 역사의 흐름을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바꿔 놓았다. 우리가 핵무기 공격에 대비한 민방위 훈련을 매일 하고 있다는 것이 피고인들의 반역에 대한 증거이다.'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소련의 핵무기를 믿고 한국에서 침략전쟁을 벌였다는 논지이다. 1950년 무렵 핵 스파이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한국이다. 그 한국이 또 다시 북한의 핵무장을 도운 핵 스파이들로부터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계의 좌익 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나 로젠버그 救命(구명)운동을 벌였다.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주장, 유태인 탄압이란 주장이 난무하였다. 프랑스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사르트르, 아인슈타인, 교황까지도 이 운동을 지지하였다.
      로젠버그 부부는 1953년 6월19일에 전기의자에서 사형 집행되었다. 부인은 즉시 죽지 않아 의사들이 추가로 感電(감전)시켜야 했다. 로젠버그 사건을 둘러싼 논란은 공산권 붕괴 이후 그를 관리하였던 소련 요원의 증언, 소련 암호문 해독자료의 공개에 의하여 종지부를 찍었다. 흐루시초르 소련공산당 서기장도 死後(사후) 공개된 자신의 회고담에서 스탈린으로부터 로젠버그가 소련의 原爆(원폭)개발을 앞당겨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