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바친 애국자, 손 진 대한민국건국회 명예회장 주제발표“이런 나라가 되라고 건국운동하고 6·25 싸웠나”
  • 손 진 대한민국건국회 명예회장은 8일 4·11총선을 앞두고 지난 62년전 제 2대 총선의 예를 들면서 국민들에게 올바른 판단을 부탁했다.

    손 회장은 “당시 대한민국에 남아있던 공산세력이 후보자들에 대한 정보를 알리는 역할을 하며 좌경향 후보자들을 대부분 당선시키는 역할을 했다”며 “이번 총선에서도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자”고 말했다.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가 주최하는 제 13회 이승만포럼에서 ‘제2대 5·30총선을 돌아보며 오늘을 생각한다‘라는 주제로 손 회장의 강연 내용은 참가자들에게 위기의식을 고취시켰다.

    평생을 바친 애국자, 손 진 대한민국건국회 명예회장

    강연자로 나선 손 진 대한민국건국회 명예회장은 1920년생으로 해방 당시 25세였다. 고향은 강원도 철원으로 중학교는 서울에서 다녔고 일본 게이오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학창시절 동산 윤치영, 승당 임영신, 몽양 여운형 등을 알게 됐다.

    손 회장은 8·15 해방을 강원도 철원자치위원회 치안대장으로 맞이했고 서북청년회를 거쳐 대한민국 건국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정부수립 후는 윤치영 초대 내무부장관의 비서, 제헌의회 부의장의 비서, 대한국민당의 계획부 차장을 역임하면서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암살계획을 같이 했던 우덕순을 가까이서 보좌했다.

    손 회장은 또 6·25전쟁 때 대한유격대 대장 자격으로 비밀리에 박순천 여사(2대 국회의원)를 서울에서 만나 UN군 서울 입성 환영준비위원장의 임무를 부여받은 바도 있다. 또한 미극동군사령부(GHQ) 첩보부대의 한 책임자로 북한, 중공(중국)을 상대로 정보수집활동을 4년간 한 바 있다.

    손 회장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애국활동에 한 평생 몸 바친 애국투사로 이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느낀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과 다가올 선거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지금 정권 도대체 뭐했나?...올해 선거 걱정이다

    손 진 대한민국건국회 명예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을 거론하며 첫 화두를 꺼냈다. 그는 “우리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기대하고 바란 것은 중도실용주의도 아니고 4대강사업도 아니었다”며 “김대중, 노무현이 10년간 박아놓은 대못을 빼고 전국 도처에 매몰되어 있는 지뢰를 제거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대못도 지뢰도 그대로 남아있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태다”고 말했다.

    손 회장은 “이런 시국에서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치러야 할 입장이라 불안하다”며 “서울시장에 박원순이 당선되고 민주통합당 대표에 한명숙이 피선되는 등 세상인심이 변해도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하는 충격을 받았다”고 탄식했다.

    손 회장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을 겪으면서 공산주의자가 대한민국 정권을 장악했다고 느꼈다. 김대중은 평양까지 가서 김정일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까지 합의한 사실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국고를 퍼주어 미사일과 핵을 개발하도록 반국가적 반민족적 반역행위를 자행하였고, 김대중의 뒤를 이은 노무현은 엄연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인데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부끄러운 역사를 가진 나라’라고 비하하기도 했다”며 분개했다.

    이와 관련해 손 회장은 “대한민국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부끄러운 역사는 아니라 세계가 부러워하는 자랑스러운 역사다. 부끄러운 역사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노무현이 대통령 재직 시의 부정과 비리가 폭로되는 것이 두려워 자살한 사건이다”고 말했다.

    손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도 답답하다. 지난 번 박원순을 만나서 ‘내가 서울시장할 때 급여를 아름다운재단에 기부금으로 낸 것 기억하느냐’고 물은 바 있는데 이게 뭐하는 짓이냐, 이게 할 소리냐”고 말하며 “노무현이 자살했을 때 이명박은 자신이 보낸 조화를 짓밟아버린 그런 인간들에게 조문을 갔는데 국민들의 조의를 대표해서 보낸 대통령의 조화가 짓밟혔는데 문상을 가다니 아무리 좋은 것이 좋다고 생각해도 이명박의 태도는 이해가 안간다”고 강력히 현직 대통령을 비판했다.

    62년 전 선거를 통해 본 오늘

    손 진 대한민국건국회 명예회장은 오는 4월 11일에 치러지는 총선의 방향을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와 비교, 설명했다.

    손 회장은 “지금으로부터 62년 전이다. 그때 문맹률이 70%에 한자로 후보자들의 이름을 적었기에 작대기로 숫자를 표시해 간신히 선거를 치렀는데 당시 교육수준이 높았던 우익진영의 유능한 제헌의원이 대부분 떨어졌다. 대신 남북협상파를 위시하여 좌경향 중간파를 대거 당선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늘과 같이 통신망이 발달하지 못한 관계로 후보자에 대한 정보가 구전으로 전파되었고 대한민국에 남아있던 좌익세력이 국민 속에 그대로 남아 선거운동원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결과가 그렇게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손 회장은 올해 치러야 하는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그는 “해방되고 군정 3년간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해서 피를 많이 흘렸다. 건국운동이라는 것은 지금처럼 시위하는 것이 아니다. 공산당이 대한민국을 세우는 것을 막으려 건국세력을 죽이기도 했기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야 하는 살벌한 운동이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손 회장은 “당시 우익단체에서 건국운동을 했던 청년들이 많았는데 최근 우익의 모임에 가면 2030세대가 없다. 건국과정에서 반공운동을 하다가 2만여명이 죽었다. 하지만 국가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사회가 알아주는것도 아니다. 나도 1원도 보상 받은 적 없다. 이렇게 몰라주는데 2030세대가 왜 모이겠는가”라고 탄식했다.

    손 회장은 “좌익단체에는 젊은이들이 많다며 이번에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대학시절 북한을 방문했던 임수경이 거론되고 있다. 분명 제2, 3의 임수경이 좌익에서는 나올 것이다”고 전망했다.

    다음은 손 회장의 주제발표 전문.


  • 제13회 이승만포럼

    2012. 3. 8(목) 오후2:30~4:30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

    제2대 5·30총선을 돌아보며 오늘을 생각하다

    손 진 (대한민국건국회 명예회장)

    2012년 올해는 4월에 총선, 연말인 12월에는 대선을 치러야할 선거의 해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다. 특히 서울시장에 박원순이 당선되고 민주통합당 대표에 한명숙이 피선되는 등 세상인심이 변해도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하는 충격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다가온 4월 총선과 12월의 대선 등 양대 선거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30여 년 전 ,친구인 모 대학교수로부터 “우리의 통일은 두 가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 첫째가 북한이 붕괴되었을 때, 둘째는 남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세워졌을 때”라는 말을 들었다. 이때 나는 “전자인 북한이 붕괴되었을 때 통일이 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후자인 남한에 공산주의자가 정권을 잡는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요.”하며 일축한 적이 있다.

    그 후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을 겪으면서 공산주의자가 대한민국 정권을 장악했을 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무리 좌익이 대한민국의 정권을 장악했다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적화통일(赤化統一) 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김대중은 평양까지 가서 김정일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까지 합의한 사실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국고를 퍼주어 미사일과 핵을 개발하도록 反국가적 反민족적 반역행위를 자행하였고, 김대중의 뒤를 이은 노무현은 엄연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인데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부끄러운 역사를 가진 나라”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부끄러운 역사가 아니라 세계가 부러워하는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부끄러운 역사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 재직 시의 부정과 비리가 폭로되는 것이 두려워 자살한 사건인지 모르겠다.

    ● 조화가 짓밟혀도 문상 간 대통령

    상가에 보내는 대통령 명의의 조화(弔花)는 대통령은 물론 국민의 조의도 포함돼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번 노무현 전 대통령 상가에 보낸 이명박 대통령의 조화가 짓밟혀 파손되었다. 그런데도 좋은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조문을 갔다. 이때 나는 21년 전인 1991년 남북교류를 위해 북한에서 온 여운형의 딸 여연구가 선친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은 인륜상 당연한 일이지만, 평양에서 가져온 김일성 화환이 묘소 앞에 나타나는 순간 우리 단체(대한민국건국회)의 유족(6·25때 인민군에게 학살된 유가족)들이 흥분하여 당장 화환을 부수러 가겠다는 것을 만류하며 “김일성 화환은 안 된다”라는 전단을 살포한 것을 상기하기도 했다.

    모르기는 하지만, 나는 전직 대통령 상가에 현직 대통령이 보낸 조화가 짓밟혔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고 하지만 어쩌다가 오늘과 같이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했는지 고민하면서 62년 전인 1950년 제2대 5·30총선을 여러분과 함께 되돌아볼까 한다.

    ● 제2대 5·30총선

    62년 전의 상황을 현재의 시각, 현재의 잣대로 재어서는 이해하기 곤란하다. 당시 문맹률은 70%였고, 국민소득(GNP)는 35불에 불과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10명 중 7명은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르는 까막눈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하는 국민소득 35불이었다. 이것이 62년 전 우리의 자화상이었다.

    먼저 이해를 돕기 위해 본인의 소개를 잠시 하고자 한다.

    본인 1920년생으로 해방 당시 25세였다. 고향은 강원도 철원으로 중학교는 서울에서 다녔으며, 대학은 일본 동경에서 다녔다. 중학교 3학년 때 동산(東山) 윤치영(尹致暎) 씨와 승당(承堂) 임영신(任永信) 씨를 알게 되었고, 5학년 때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씨를 알게 되어 학창시절 많은 사랑을 받은 바 있다. 특히 윤치영 씨와 임영신 씨는 해방 후 지금까지 생애를 통해 사사한 분들이다. 8·15 해방은 강원도 철원에서 맞이하여 짧은 시일이지만, 철원자치위원회 치안대장으로 난생 처음으로 소련군 환영준비를 하는 등 직접 소련군을 상대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월남 후는 서북청년회를 거쳐 대한민국 건국운동에 참여하였고, 정부수립 후는 윤치영 초대 내무부장관의 비서, 제헌의회 부의장의 비서, 대한국민당의 계획부 차장을 역임하면서 우덕순 선생을 모신 바 있다. 그리고 6·25전쟁 때 대한유격대 대장 자격으로 비밀리에 박순천 여사(2대 국회의원)를 서울에서 만나 UN군 서울 입성 환영주비위원장의 임무를 부여받은 바도 있다.

    또한 미극동군사령부(GHQ)의 첩보부대의 한 책임자로 북한, 중공(중국)을 상대로 정보수집활동을 4년간 한 바 있다. 이런 입장에서 제가 직접 듣고, 보고, 느낀 것을 가식 없이 말하고자 한다.

    먼저 제2대 5·30총선 결과부터 말하자면 역대 선거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참으로 엄청난 유권자의 심판을 받는 결과가 나타났다. 서울만 하더라도 국회의원 16명 중 성동갑구의 지청천(池靑天)이외는 모조리 떨어졌다.

    김도연, 홍성하, 백남훈, 윤치영, 김상돈 등이 떨어졌고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유능한 인재라 할 수 있는 정치인들이 모조리 떨어졌다. 서상일(徐相日), 백관수(白寬洙), 김동원(金東元), 김준연(金俊淵), 나용균(羅容均), 허정(許政), 조병옥(趙炳玉) 등이 낙선되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철저하게 물갈이된 선거결과는 제2대 5·30총선을 제외하고는 오늘날까지 수많은 선거를 치렀지만, 찾아볼 수 없다.

    2대 총선 결과는 대한민국이 새로 탄생한 후 제헌국회(制憲國會)를 통한 2년 간의 국정운영의 평가라고 볼 수 있는데, 초대 내각에 한민당 출신으로는 재무장관에 김도연(金度演) 한 사람만 등용되었다. 한민당(韓國民主黨) 입장에서는 이때부터 이승만 대통령에게 배신당하고 지금까지 짝사랑했다는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범석을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겸직시킨데 대한 반응은 한민당뿐만 아니라 일반 여론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특히 지청천은 제헌국회 선거에서 성동갑구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단장으로 이승만 박사 정치노선을 지지하며 대한민국 건국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이전에는 광복군 총사령관이었으나 참모장에 불과한 이범석을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을 겸임케 하고 자기에게는 무임소장관이 돌아온데 대한 불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대동청년단과는 하등의 논의도 없이 무임소장관을 사임하면서 야당 입장에 있는 한민당에 입당했다. 한민당은 신익희 국회의장과 지청천 장군을 맞이하면서 당명을 민주국민당(민국당)으로 변경했다.

    실은 지청천 장군은 정치인이 못 되고 어디까지나 무골(武骨)인 무인이었다.

    대통청년단을 떠난 지청천 장군의 정치 생명은 끝났지만 그래도 민국당의 지청천은 유일하게 서울에서 2대 의원으로 재선되었다. 야당인 민국당뿐만 아니라, 여당격인 대한국민당도 윤치영 대표를 위시하여 중추 핵심인물이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럼 제헌국회 2년간에 어떠한 일이 있었기에 이러한 엄청난 평가가 내려졌는지 살펴보자.

    ① 신생국가의 기본이 되는 헌법 제정
    ② 정·부통령 선출
    ③ 국무총리 인준
    ④ 국회 프락치 사건
    ⑤ 반민특위 사건
    ➅ 국가보안법 제정(여순반란사건 여파)
    ➆ 내각책임제 개헌문제

    등으로 요약할 수 있으나 이중 특히 국민의 관심을 끈 사건은 ④번 국회프락치사건과 ⑤번 반민특위(反民特委)의 친일파 문제 그리고 ➅번의 국가보안법 제정 문제, ➆번의 내각책임제 개헌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보안법 제정은 대한민국 정부 출범 후 불과 2개월 만에 여수·순천반란사건이 일어나 수많은 양민이 반란군과 지방좌익분자들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되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또 다시 좌익공산분자들의 반국가적, 파괴적 폭거를 방지하기 위해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을 제정하였다. 여순반란사건 때 여수에서의 손양원 목사 사건과 여수에서의 민족청년단 문화부장 사건은 인류애와 감동의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➆번의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대한 설명을 할까한다.

    제헌국회 임기 3개월을 앞둔 1950년 1월 27일 원내 제일 야당인 민주국민당(민국당)은 79명의 연서로 헌법기초위원장이었던 서상일 의원을 제안대표로 하여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 당시는 지금과 같이 여야 정당에 속한 의원보다 무소속이 다수였다.

    무소속 의원의 정치적 성분은 대부분 야당인 민국당에 속해 있었다. 원내 세력 분포로 보아 개헌정족수 확보가 가능하다고 본 민국당은 공세를 가일층 강화해 나갔다. 그런데도 이승만 대통령은 강력한 지지세력으로 정당을 조직해야 되겠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이 보였다. 이러고 보니 다급해진 것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이었다.

    원내에는 윤치영 국회부의장을 중심으로 국민회,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출신을 규합하고 특히 다수의 무소속 의원을 규합하는데 주력하고, 원외는 우덕순, 배은희, 오하영, 이갑성, 이규갑 등 정치 원로들이 비록 제헌의원은 아니지만 여론을 환기시키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이러는 과정에 우덕순, 윤치영을 공동대표로 하는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을 1949년 11월 20일 결성하게 되었다.

    대한국민당 선전부장에 선우기성(서북청년회 위원장), 조직부차장에 장창원(서청 조직부장), 사업부장 김성주(서청 부위원장), 이선파(서청 2대 조직부장), 청년부 차장 등으로 서북청년회 출신들이 집행부의 소장파로 많이 참여하였고, 본인은 계획부 차장으로 공동대표인 우덕순 선생을 보좌하게 되었다.

    우덕순 선생은 개헌파동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화가 있다. 그중 하나만 소개하면, 당연히 개헌을 반대해야 할 위치에 있는 민족청년단 출신으로 울산에서 당선된 김수선(金壽善) 의원이 내각책임제로 개헌해야 된다는 찬성 발언을 했다. 이 찬성 발언이 대단한 설득력으로 파문이 일자 제안자인 서상일 의원은 자기의 제안설명서를 철회하고 김수선 의원의 연설문으로 대체하는 소동도 있었다.

    ● 내각책임제 개헌안 부결

    논란을 거듭하던 내각책임제 개헌안은 드디어 1950년 3월 14일 표결 결과 재석 179명 중 찬성 79명, 반대 33명, 기권 66명(대한국민당의 백지 투표), 무효 1명으로 부결되었다. 여기서 기권 66표는 대한국민당 표로 보아야 한다. 대한국민당은 작전상 가, 부 표시 없이 백지 투표하기로 결의했기 때문에 기권으로 간주된 것이다.

    제헌국회에서 여러 가지 사건이 야기되고 새로 탄생한 대한민국 행정부의 2년간의 업적이 평가된 것이 5·30 선거의 결과라면 낙제점을 받았고, 여야 할 것 없이 출출맹장들이 낙방되는 것을 볼 때 진정한 민주국가에서의 민의가 얼마나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제헌의원의 중추세력이 낙방하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세력은 어떠한 세력인가 하는 것을 살펴볼 때, 5·10 총선을 단선(單選)으로 규정하고 거부하면서 평양에 갔다 온 남북협상파(조소앙), 좌로 편향된 중도파 거물들(원세훈, 윤기섭, 장건상) 등이 서울에서 당선되고 대한국미당은 대표인 윤치영이 낙선됨으로 자연 위축되어 갔다. 그렇다 민국당은 영호남 지방에서 서민호, 김의준, 장홍염, 엄상섭 등 소장파 맹장들이 당선되기도 했다.

    ● 6·25 전의 고요함

    5·30 총선이 끝나고 한 달도 못 되어 김일성의 무력남침인 6·25전쟁이 터졌다. 폭풍전야에 고요함이라고 할까 5·30 2대 총선도 끝나고 국회는 아직 개원도 안 된 상태였다.

    북한 김일성 집단은 6·25 무력남침을 은폐하기 위한 평화공세의 일환으로 평양의 고려호텔에 연금되어 있는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선생과 남한에 구속되어 있는 남로당의 핵심 분자인 이주하, 김삼룡과 교환하자는 김일성의 제안을 이승만 대통령은 인도적인 입장에서 이를 수락한 바 있다. 교환 날짜가 6월 26일 정오 황해도 38도상에 위치한 “여현”에서 교환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이것마저 거짓말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26일이면 조만식 선생을 뵙게 되겠구나 하며 기대했는데 , 전날인 25일 새벽에 인민군은 대한민국을 공격해 왔다. 또 속았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와 좌경 중간파 의원의 납북

    5·30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 중 조소앙을 위시하여 좌경 중간파인 원세훈, 윤기섭, 장건상, 안재홍 등은 피난을 안 갔는지, 못 갔는지 모르겠지만 인민군에게 납치되어 북한으로 끌려갔다. 본인이 전쟁 중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일개월간 경험한 바에 의하면 좌익은 물론이고, 친북적인 사상의 소유자인 일반 시민도 내가 무슨 죄가 있어 피난가? 하는 생각으로 피난 갈 생각조차 하지 않은 부류가 많았다. 5·30선거에서 당선된 중간파 국회의원들도 이와 같은 생각으로 있다가 납치되어 갔는지도 모르겠다.

    제헌국회의원 납북자 51명 중에는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었던 김약수 부의장을 위시하여 노일환, 김병회, 강욱중, 이문원 등 소장파가 다수 있다. 이분들도 인민군이 들어오면 영웅 대접을 받을 것으로 믿다가 납치되어 갔는지 모르겠다.

    ● 2대 국회는 피난국회

    이와 같이 전쟁이 터지자 국회는 부산으로 피난 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국회기능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 것만은 확실하다. 부산의 정치파동이란 국회에서 정·부통령을 선출하게 되어 있는 현행법을 국민 직선제로 바꾸자는 헌법개정파동이었다.

    원내 세력 분포도로 보아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한다면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이 어려운 상황이므로 여당인 자유당은 직선제 개헌안을 밀어붙이고 야당인 민국당은 결사적으로 개헌반대투쟁으로 대항함으로써 자연 정치적인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백골단이니 땃벌떼니 하는 단체가 생겼고 광복동 국제구락부 사건도 생겼다.

    전재 와중에 그래도 선거를 치러야하는 것이 민주주의인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고단한 시기였다. 이와 같이 우여곡절 끝에 결국 장택상 총리가 마련한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었다.


    ● 결론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지금으로부터 62년 전이다. 그때 문맹률이 70%에 작대기 선거를 치렀는데 어떻게 우익진영의 자타가 공인하는 출출맹장의 유능한 제헌의원을 낙선시키고 대신 남북협상파를 위시하여 좌경향 중간파를 대거 당선시켰는지 모르겠다.

    당시의 사회상은 법은 남녀평등인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숫닭이 울지 않으니까 암탉이 우는 것 아니냐”하며 공공연하게 맞받아쳤다. 심지어 박순천 씨는 홍일점으로 종로에 입후보하여 축첩을 반대하는 연설로 당선되었다. 또한 그 당시에는 오늘과 같이 통신망이 발달하지 못한 관계로 정보에 어두웠다. 이러한 악조건에도 선거결과는 완전히 물갈이 하는 결과로 나왔다.

    또한 지금과 같이 정당공천이 당락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에는 대세론이란 용어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선거결과가 나왔을까?

    그 이유는 선거전에서 좌익에게 완패(完敗)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때의 국민(유권자)은 선거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투표율이 지금과 같이 50% 이하가 아니라 90%의 투표율을 나타냈다. 여기에 일후보자의 정보를 구전(口傳)으로 얻었다. 지난날의 좌익세력이 국민 속에 그대로 남아있어 이들이 전부 선거운동원 역할을 했기 때문에 결과가 그렇게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진영 모임에는 20대, 30대의 젊은 층은 모이지 않았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제발 여러분들의 아들, 딸, 손자들을 데리고 나오라고 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10여 년 전부터는 그런 말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아들이 “아버지 그 일을 왜 하십니까? 국가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사회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또한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닌데요.” 젊었을 때 같으면 야단을 쳤겠지만, 아무 말 없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했다.

    6·25 전사자에게 61년 만에 5,000원을 주겠다고 하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해 목숨 바친 애국자에게 훈장 하나 주지 않고 헌신짝처럼 버리는 나라에 충신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기대하고 바란 것은 중도실용주의도 아니고 4대강 사업도 아니었다. 김대중, 노무현이 10년간 박아놓은 대못을 빼고 전국 도처에 매몰되어 있는 지뢰를 제거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못도 그대로 남아있고 지뢰 역시 그대로 남아있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태 하에서 양대 선거를 치러야할 입장이다. 또한 20대, 30대의 젊은 세대라 할지라도 또한 아무리 이명박 정부가 지긋지긋하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노무현 추종자들에게 표를 주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믿을 수가 없다.

    그래도 지난날에는 믿을 곳도 있었고, 믿을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둘 다 없어졌다. 여기에 저들과 대항해 싸울 조직도 없거니와 침도 없다. 그렇다. 대한민국에는 기적도 있었고 운도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은 자기 손으로 자기 무덤을 파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신조이다.

    ● 참고

    남북협상을 주장하며 평양까지 갔다 온 김구, 김규식도 이승만이 주장하고 UN이 결의한 5·10선거를 남한 만의 단독선거라고 처음부터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적극 찬성한 양 김씨의 단화문과 주장이 동아일보(1947. 12. 12)와 경향신문(1947. 12. 21)에 보도된 담화 내용을 참고하도록 첨부한다.


    동아일보 1947. 12. 22 보도된 김구 선생의 담화문

    불행히 소련의 방해로 인하여 북한의 선거만은 실시하지 못할지라도 추후에 하시에 든지 그 방해가 제거되는 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의연히 총선거의 방식으로서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남한의 단독정부와 같이 보일 것이나 좀 더 명백히 규정한다면 그것도 법리상으로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일 것이요 단독정부는 아닌 것이다. 이승만 박사가 주장하는 정부는 상술한 제일의 경우에 치중할 뿐이지 결국에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인데 세인이 그것을 오해하고 단독정부라 하는 것은 유감이다.

    경향신문 1947. 12. 21 김규식 선생의 주장

    남북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하고 UN감시 하에 남조선에만 정부가 수립된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자의 질문에 대하여 만일 그러한 조치가 된다면 그때에는 남조선 단독정부라 하지 않을 것이며 제주도 일부에서 수립되더라도 전 조선을 대표하는 중앙정부라고 하고 단독정부라는 명칭을 쓰지 않을 것이다.

    ※ 5·10 총선거

    유권자의 90%가 등록하고 등록자의 93%가 투표에 참여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