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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은 이론화된 신념이다. 99%의 사람들이 자신을 반대하고 비판하여도 이념무장이 된 사람들은 당당하게 버틴다. 자기 정당성의 확신이 있음으로. 이념무장이 약하면 이겨 놓고도 주위사람들이 졌다고 하면 진 줄 안다. 10.26 서울시장 등 지방자치단체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선전(善戰)하였다. 나경원 후보는 불리한 여건에서도 박원순 후보를 끈질기게 추격하였다. 다른 지역에선 전승(全勝)하였다. 오랜만에 범우파(汎右派) 전선이 형성되었다.
물론 나경원 후보가 이길 수도 있었다. 이른바 무상급식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박원순 후보의 종북성(從北性)을 강하게 제기, 보수층을 격동시켜 투표장으로 끌어냈더라면 이길 수 있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진 진짜 이유는 청년층의 반(反)한나라당 정서가 아니라 노장층이 투표장에 많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장층을 끌어내려면 박원순 후보의 약점을 폭로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좌경적 정체를 드러내 선거운동의 쟁점을 안보(安保)-이념문제로 가져갔어야 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직(正道)이고, 이번 선거의 본질에 충실한 자세였다.
나경원 후보와 한나라당은 애써 오세훈 시장과 거리를 두려고 했으며 박원순 후보의 이념적 문제점을 형식적으로 지적하는 데 그쳤다. 이념적 정면대결을 회피하였다. 노장층은 안보상의 불안감을 가지게 될 때 결속하고 행동한다는 점을 또 다시 간과한 것이다.
우파 세력이 이번 선거 결과를 놓고 공황 상태에 빠질 이유는 없다. 處變不驚(처변불경)의 자세가 중요하다. 변고를 당하였을 때는 놀라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선장이 폭풍을 만나도 정신만 똑 바로 차리면 헤쳐나갈 수 있다. 선장이 겁을 먹은 모습을 보이면 선원들이 당황하여 실수를 하게 된다. 박원순 시장은 너무나 약점이 많은 인물이다. 첫날부터 편가르기를 한다. 시민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못된 말을 한다. 탄핵을 면하고 대통령직(職)에 복귀한 노무현씨가 '보수, 보수 하지만 별놈의 보수라도 개혁을 못한다'는 식의 말을 한 것이 그와 보수층을 결정적으로 갈라놓았던 일이 생각난다. 우파의 1등 운동원이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박원순 시장도 그 길을 가려 한다. 말릴 필요가 없다.
우파가 좌익을 폭로하는 것보다는 좌익이 스스로를 폭로하는 경우가 더 많다. 좌익의 태생적 한계는 오만과 거짓이다. 우파의 한계는 게으름과 분열이다. 실수를 덜 하는 쪽이 이긴다. 한나라당이 희망이 있는 정당인가의 여부는 박원순씨에 대한 수많은 의혹(특히 이념적 의혹)을 덮는가, 계속 파고드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념은 공동체의 적(敵)과 동지가 누군가를 분별하게 해주고 자기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준다. 이념전장(戰場)인 한반도에선 이념이 가장 큰 전략이다. 이념무장이 약한 이명박 정부는 대북(對北)봉쇄정책, 금융위기 극복, 4대강 사업 등 잘한 일이 많은데도 자신 있게 자랑하지 못한다. 이념무장이 약하니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안 서는 것이다. 좌익은 거짓선동으로 이 정부의 잘한 일까지 실패작으로 몰아세운다. 정부 여당이 동네북이 되고 있다. 이념적 확신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처변(處變)공황이 될 것이다.처변(處變)하였을 때는 역사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우리의 선배들은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였는가를 참고하기 위해서이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은 북진(北進)을 개시, 10월18일 평양을 수복하였다. 맥아더 사령관은, 태평양상 웨이크 섬까지 날아온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중공군이 개입하기는 너무 늦었다. 하더라도 간단하게 격멸시킬 수 있다"고 안심시켰다. 10월 하순 유엔군은 총공세를 시작하였다. 10월 중순 압록강을 건너와 산에 숨어 있던 중공군이 이때 한국군을 상대로 기습작전을 벌였다. 일격을 당한 유엔군은 공세를 중단하였다.
맥아더 사령관은 강을 넘어온 중공군은 3~4만밖에 되지 않는다고 誤判(오판)하였다. 당시 북한지역으로 들어온 중공군은 30만 명을 육박하였다. 11월23일 그는 다시 대공세를 명령한다. 빨리 공산군을 몰아내고 통일을 시킨 다음 유엔군 병사들을 철수시켜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내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중공군은 이번엔 전(全)병력을 투입, 본격적인 반격으로 나왔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곳곳에서 포위당하거나 우회, 차단당하였다. 맥아더는 중공을 해안봉쇄하고 만주를 폭격하고 대만으로 물러난 장개석 군대를 중국에 투입하지 않으면 한국을 지킬 수 없다면서 유엔군의 철수를 검토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트루먼 행정부는 중국을 직접 공격하면 소련이 개입, 3차 대전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걱정하여 맥아더의 擴戰(확전) 건의를 거부하였다. 맥아더는 "그렇다면 후퇴하여 철수 준비를 하여야 한다"면서 유엔군에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는 "중국으로 확전을 하든지, 한국을 포기하자"는 외통수로 트루먼 대통령을 압박하였다. 미군을 주력(主力)으로 한 유엔군은 싸우지도 않고, 저지선을 치지도 않고, 평양을 내주면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운명이 다시 한번 頃刻(경각)에 달렸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이 사태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국군의 작전(作戰)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넘긴 상태에서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적 대전략을 구사해야 하는 트루먼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입장을 고려할 여지가 아주 좁았다.
6.25 직후보다 더 암담한 상황에서 열린 1950년 11월29일 국무회의에서 이(李)대통령은 이상한 이야기를 하였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쓴 일기(日記)-기파랑 출판 <6.25와 이승만>에서 인용-에 따르면 李 대통령은 "중공군이 지금 침략한 것은 하나님이 한국을 구하려는 방법인지 모른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소련(주-李대통령은 북한군을 소련의 괴뢰라고 보았기에 이런 표현을 쓴 듯하다)이 한국 국경 너머로 후퇴하고, 국제연합에서 이제는 특권이나 이권들을 흥정하게 되었더라면, 국제연합과 미국사람들은 소련 연방과의 협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무슨 일이라도 했을 것이며 군사상의 승리만이 아니라 외교상의 승리라고 만족하였을 것입니다. 국제연합군 부대와 장비들은 조만간 철수되었을 것이며, 한국군은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는 너무나 긴 국경선을 점령하도록 남겨놓았을 것입니다. 미국 국민의 분노가 가라앉고 공산당의 평화선전 공세로 국민들이 잠잠해진 가운데 중공군의 준비가 끝났다면, 이들의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 현대적인 항공지원, 그리고 한국의 全 해안선을 둘러싼 해군작전 등을 저지하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현재 해안선을 봉쇄하고 있는 함선들을 철수시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한국 지배가 소련의 계획 안에 들어 있고, 북한군의 실패가 그들 계획의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한국에 중공군을 끌어들인 것은, 국제연합군이 철수한 뒤에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보다 우리에게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최악의 경우가 닥칠지 모르나 민주주의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무초 미국대사로부터 '세계정세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이해한 사람'이란 평을 들은 李 대통령의 이 분석이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고 북진(北進)통일이 되었더라면 곧 바로 평화가 찾아왔을 것인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중공군 개입 직전인 10월15일 태평양상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맥아더 회담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곧 북괴군을 섬멸한 뒤 미군을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부 철수시키겠다"고 보고하였다. 그는 "모든 점령은 재난이다"고 했다. 대통령을 수행한 딘 러스크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가 "유엔군을 한만(韓滿) 국경지대에 주둔시켜 공산군과 미군 사이의 완충역할을 하도록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건의하였다. 맥아더는 이렇게 잘랐다.
"한만(韓滿) 국경지대는 군사적 관점에선 방어가 불가능하다. 나는 한국군을 국경지대에 배치하도록 할 계획이다. 그들이 완충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유엔군이 승리를 선언하고 철수하였더라면 산악지방에 숨어 있던 공산게릴라들이 월남식으로 준동하였을 것이다. 만주로 쫓겨난 김일성 일당도 중공의 비호 아래 병력을 투입하였을 것이다. 이런 식의 간접침략에 대하여 미국이 또 다시 파병하는 것은 국민 여론상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월남처럼 赤化(적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예언대로 중공군 개입은 재앙으로 위장한 축복이었다. 중공군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한국군은 증강되었고, 한미(韓美0동맹의 필요성을 두 나라 지도부가 절감하게 되었다. 중공군 개입이 선물한 것이 한미(韓美)동맹이었다.
월남은 17도선으로 일단 分斷(분단)되었다가 북쪽의 월맹이 정규군을 내려 보내 남쪽의 게릴라를 돕는 월남전을 시작, 결국 공산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북진(北進)통일을 하였더라도 중공과 김일성 세력이 만주에서 공산게릴라를 들여보내고, 국내 공산세력이 이에 호응하여 들고 일어났다면 월남전의 양상을 띠었을 것이다. 한미(韓美)동맹 조약이 없는 상황에서 미군이 두 번 돕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공군 개입이 없었다면 한국은 적화(赤化)되었다. 중공군 개입이 오늘의 한국 번영을 만들었다"는 가설이 성립한다. 그렇다고 해서 중공군 개입의 불법성(不法性)과 침략성을 용서할 순 없다. 역사는 도전과 응전, 작용과 반(反)작용 사이에서 많은 기적과 逆轉(역전)의 드라마를 만들면서 흘러간다.재앙으로 위장한 축복이 있지만, '축복으로 위장한 재앙'도 있다. 대한민국 세력이 좌경 인사 박원순 시장의 당선을 '재앙으로 위장한 축복'으로 만들려면 處變不驚(처변불경)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처절하게 싸워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