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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한반도와 만주를 점령한 일제는 중국 침략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때 일제의 심장 동경에서 일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있었다. 붙잡힌 이는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 그가 바로 이봉창이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7일 “일제 강점기, 적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일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해 일제의 침략성을 만천하에 폭로하고 한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이봉창 의사의 순국 79주기 추모식을 10일 오전 11시 효창공원 내 의사 묘전에서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회장 문국진) 주관으로 열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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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식에는 최완근 서울지방보훈청장, 박유철 광복회장 등 독립운동관련 단체 대표와 광복회원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홍인근 기념사업회 이사의 약사보고와 기념사업회장의 식사(式辭), 서울지방보훈청장·광복회장의 추모사와 헌화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봉창 의사(1901. 8.10~1932.10.10)는 서울에서 출생했다. 1931년 1월 중순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상해로 건너가기 전까지 이봉창 의사는 ‘평범한 일본인’처럼 가스회사, 철도회사 등에 근무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사회생활에서 한국인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 때문에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자 모든 걸 포기한 듯 생활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이럴 바엔 일제에 항거하자’고 생각,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가 한인애국단의 김 구 단장을 만난다. 이봉창 의사는 자신의 일본생활 경험을 토대로 일왕 폭살계획을 세우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면서 거사를 계획․준비하였다.
이봉창 의사는 1년여의 준비 끝에 1931년 12월 13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후 거사를 실행한다. 12월 말 동경에 도착한 이 의사는 일왕 히로히토가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기(大大木) 연병장(현 요요기 공원)에서 신년 관병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 이 날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상해 김구 단장에게 전보를 보냈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8일 사쿠라다문(櫻田門) 앞에서 일왕 행렬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행렬이 나타나자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수류탄은 일본 궁내대신(宮內大臣)이 탄 마차 옆에 폭발해 일장기 기수(旗手)와 근위병이 탄 말 두 필만을 거꾸러뜨리고 실패했다.
현장에서 붙잡힌 이봉창 의사는 같은 해 9월 30일 동경 대심원(大審院. 대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시곡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이봉창 의사는 비록 일왕을 제거하는데는 실패했지만,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투쟁의 도화선이 됐다. 이후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전선은 석 달 뒤인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구(虹口.홍커우)공원 의거 등을 포함, 일제 수뇌부 공격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만보산 사건 후 한․중 국민의 감정대립도 씻을 수 있었다.
일본에 있던 이봉창 의사의 유해는 김 구에 의해 1946년 6월 30일 국내로 봉환되어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