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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교과서도 엉망! 김구가 김일성과 어쨌다고?

평양 가서 이용-농락 당해 동조한 사실 소개도 없이감상적 문장-유도성 질문으로 '한반도 赤化 노력'에 찬사

조갑제 조갑제닷컴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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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4-05 16:14 수정 2011-04-07 09:31

김구, 김규식의 建國방해를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으로 美化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네 金씨의 평양회동은 대한민국의 建國을 방해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일관하였다. 
趙甲濟   
 
  올해 李明博 정부가 채택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들은 거의가 김구, 김규식이 1948년 4월 평양에 가서 김일성과 회담한 것을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이라고 美化하였다.

천재교육에서 펴낸 교과서는 '생각 열기'란 항목에서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반쪽을 낼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김구, 김규식이 김두봉에게 보낸 편지)란 감상적 문장을 소개하면서 '김구, 김규식은 왜 남북협상에 나섰을까?'라고 유도성 질문을 던졌다.

이 교과서는 김구, 김규식이 김일성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한 사실을 소개하지도 비판하지도 않았다.
평양회담을,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란 제목하에서 기술,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이 통일국가 수립을 위하여 만난 것처럼 왜곡하였다. 네 金씨의 회동은 대한민국의 建國을 방해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일관하였다.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赤化를 위한 노력'이었다.
 
  李承晩의 建國 노선에 반대한 金九, 金奎植은 1948년 북한으로 올라가 김일성과 회담하고 4월30일에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는 金九, 金奎植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 치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이 철저하게 김일성에게 이용당하여 대한민국 建國을 방해하려 하였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명서는 5월10일로 예정된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하여 회의가 열렸음을 분명히 한 뒤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즉시 철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소련은 북한과 接境하고 있어 군대를 철수하더라도 언제든지 개입할 수 있지만 미군은 한번 철수하면 한국이 남침을 당하더라도 제때 파병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명백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兩金씨는 공산주의자들의 주한미군 철수론에 동조한 것이다.
  이 성명서는 또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퇴한 후에 內戰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한 1년 뒤 북한군의 南侵이 있었다. 주한미군 철수는 南侵의 초대장이었다. 그럼에도 金九, 金奎植은 외국군대가 철수한 후에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확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들을 속인 셈이다.

지도자가 속는 것은 결국 국민들을 속이는 행위이다.
 
  이 성명서는 또 ‘외국군대가 철퇴한 이후 下記 諸정당단체들은 공동명의로써 全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선거를 통하여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통일정부 수립을 주도할 ‘下記 諸정당단체들’은 북조선노동당, 남조선노동당, 한국독립당, 민족자주연맹, 근로인민당, 북조선농민동맹 등 56개 단체였다. 金九, 金奎植 세력과 남북한 좌익단체 연합체가 건국을 주도한다는 말이다.

즉 李承晩 세력 등 자유진영을 제외하고, 남북한 공산세력이 뭉쳐 공산국가를 만드는 데 김구, 김규식이 가담한다는 뜻이었다. 여기서도 金九, 金奎植은 철저히 이용당하였다.

  梁東安 교수는 이렇게 평하였다.
  <이것은 美蘇공위에서 소련이 주장해온 것, 즉 남한의 우익진영을 배제하고 통일임시정부를 구성하자는 주장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단지 美蘇공위 때는 소련이 배제하려 했던 김구와 김규식 및 그들의 추종정당과 단체들을 추가로 참여시킨 점이 다를 뿐이다. 김구, 김규식 등이 이제는 소련의 제안을 지지했기 때문에 공산당지배정부 수립에 참여할 수 있는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모든 일이 성명의 내용대로 진행되어서 공산당이 지배하는 정권이 수립되면 그 다음에 생길 통일정부가 소련이 원하는 공산정권이 될 것은 너무나도 自明한 것이었다. 요컨대 4.30 성명도 공산당의 한반도 지배를 위한 소련의 정책을 뒷받침해주는 결과를 초래할 문건이었다>
 
  金奎植은 평양에 가 있을 때 김일성이 주최한 초대연에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북조선으로 오니 북조선은 살 토대가 있다. 남쪽은 공장이 없고 미국 차관만 가져오고 여기 공장은 일하고 있으며 남쪽은 망하는 집안 같고 여기는 새로 잘 되는 집안 같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 다음날(5월6일) 외신기자들과 회견하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되풀이하였다.
  <남조선에는 도처에 부패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북조선의 공장은 남조선의 공장보다도 충실한 생산을 하고 있다. 소련인은 그다지 표면에 나서지 않는데 남조선 미국인은 너무나 간섭이 심하여 현재 군정부에는 부패가 심하다>

  金九, 金奎植은 5월6일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 두 사람은, 4.30 공동성명이 통일조국을 건설할 방향을 명시하는 것이라고 自讚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북조선 당국자도 單政은 절대 수립하지 아니 하겠다고 확언했다>
  4.30 성명대로 통일조국이 건설되면 자유진영이 배제된 공산국가가 될 것이다. 金奎植, 金九는 사실상 공산국가 건설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힌 셈이다.

  <북조선 당국자도 單政은 절대 수립하지 아니 하겠다고 확언했다>는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당시 이미 북한엔 ‘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북조선 당국자’란 말 자체가 정부를 전제로 한다. 남한엔 ‘남조선 당국자’로 불릴 만한 조직도 사람도 없었다. 美軍政이 있을 뿐이었다.

  4.30 성명은, 2000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김정일과 만나 발표한 6.15 선언이 연합제-연방제 혼합방식의 反헌법적 통일방안을 제시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김구, 김규식이 했던 역할과 비슷한 役을 김대중이 再演했다. 김구, 김규식이 김일성의 대변자 비슷한 말을 한 것이나 김대중이 김정일의 대변자 같은 말을 지금껏 계속하고 있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두 김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10 선거는 투표율 90% 이상의 참여로 공정하게 치러졌다.
김구는 그러나 “선거가 부자유한 분위기 속에서 실시되었다”는 논평을 냈다. 유엔감시기구도 공정하다고 평한 선거를 惡評한 것이다. 양동안 교수는 이렇게 논평하였다.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김구와 김규식은 대한민국 건국을 훼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제헌국회가 開院되고 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이 제헌국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고 말한 데 대하여 “현재 국회의 형태로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아무 조건도 없다”라고 말하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6월7일 보다 조직적으로 5.10 선거 무효화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키로 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김구, 김규식은 나중엔 북한에 대하여도 정부 수립 움직임을 비판하여 兩非論을 보이기도 하였다. 梁東安 교수는 <그러나 그들의 분단정권 반대는 남한의 대한민국에만 타격을 줄 뿐 북한의 단독정권에는 타격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이 남한에 거주하고 있었고, 남한의 정치체제가 개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고 평하였다.
 
  李承晩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박사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북한은 소련군에 의하여 공산화되어 이미 김일성 정권이 들어섰으니 남한의 갈 길은 북에 조직된 공산군의 武力 앞에 굴복하여 공산화를 감수하든지 아니면 정통성을 가진 자유민주 국가를 세워서 반공으로 국가발전을 도모해 자유통일을 진행하든지 두 가지가 있었다. 여기에 제3의 길이란 한국엔 없었다. 金九와 金奎植, 兩金은 북한에 가서 이미 양성된 공산군의 실태를 보고 남한에 정부를 수립해도 곧 붉은 군대가 쳐내려와 인민공화국이 될 터이니 대한민국을 建國할 필요가 없다고, 끝까지 소련과 북한공산정권의 편을 들어 정부수립을 반대하다가 마침내 해방정국의 迷兒가 되고 말았다(*아래 대화록 참조)>
  그는 또 이렇게 설명하였다.
  <金九와 金奎植은 북의 공산집단이 머지않아 남침해 올 것을 알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면서 두 金은 그럴 일은 없다고 거짓성명을 하였다. 정부를 수립해 봐야 곧 없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그들의 강력한 建國반대 이유였다. 그대로 있다가 공산화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민족통일이었다.
金九는 西山大師의 漢詩 구절,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를 愛誦(애송)하였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눈길을 金九는 옳게 걸어갔는가? 과연 김구를 따르는 용공통일의 길이 옳았던 것인가?
반세기 이상을 신문과 방송이 김구 찬양 일색인데 과연 그 추종자들이 우리 사회를 이롭게 하고 있는가 말이다. 김구는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간판을 유지하였던 공로는 1945년까지 혁혁하였다. 역사의 진실을 가리고 한국사회가 지금도 金九예찬론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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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九-劉馭萬 대화 비망록
 
  유엔한국위원회의 중국대표인 劉馭萬(유어만) 公使는 1948년 7월11일 오전 11시 金九를 자택으로 방문,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劉 공사는 대화의 내용을 英文으로 요약하여 국회의장 李承晩에게 전달하였다. 이 문서는 梨花莊(이화장)에 보존되어 있다. 이 대화는 대한민국 建國에 반대하는 일에 공산주의자들과 손잡은 金九의 심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劉馭萬: 나는 선생님의 어떤 면보다도 정직한 분이란 점에서 존경하여 왔습니다. 나도 비록 외교관이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서울에 부임하게 된 것은 나로선 최초의 외교관 임무입니다. 오늘 선생님을 화나게 만들지 모르지만 정직한 사람과 정직한 사람 사이의 대화를 하기 위하여 방문한 것입니다.
  金九: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떡일 뿐)
 
  劉: 유엔 위원단의 한 사람으로 上海를 방문하고 돌아온 후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며느님과 아드님께서 중국에 체류중인 것으로 알고 있고 엄씨도 선생님과 같이 살고 있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어 나를 통역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래서 자주 여기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金: 귀하가 말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 없어도 귀하를 위하여 통역할 사람은 있어요.
 
  劉: 나는 오철성이 보내는 편지를 갖고 있는데 공사관에 두고 왔습니다. 중국 외무장관 왕시굴도 직접 편지를 보낼 것입니다. 蔣介石 총통께서도 편지를 직접 쓰려고 하였는데, 외무장관이 오늘 대화에 대한 보고를 받고 나서 쓰시도록 건의를 드렸습니다. 저는 이 세 통의 편지가 같은 메시지를 선생께 전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李 박사와 협력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李 박사와 선생과 金奎植 박사가 남한 정권을 수호하는 데 협조해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런 중국 格言이 있습니다. “집안에서 형제들이 다툴 순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自招해선 안된다.”
선생들 사이에서 이견이 많다고 해도 소련이 지배하는 세계 공산주의라는 공통의 위협 앞에선 다 형제들입니다. 나는 선생의 아들 김신을 나의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듣기 거북하시더라도 아들이 자신의 아버님에게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라고 생각 해 주십시오.
만약 선생께서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가담하실 생각이라면, 저는 그렇게는 믿지 않습니다만, 제발 그렇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적 敵手로서 서로 헤어지고 다시는 만나지 않으면 됩니다.

  金: (심각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나는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어요. 사실은 내가 마음에 준비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내 최측근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라 당신에게 털어놓는다는 게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로만 말씀드리지요. 머지않은 장래에 모든 것을 밝히겠습니다. 귀하를 포함한 내 친구들이 좋아하든 않든 간에. 귀하는 기다려주실 거죠?
 
  劉: 지금 생각하고 계시는 것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오히려 말씀 하시지 않도록 권하고 싶어요. 저에게 부과된 메시지 전달은 끝났으므로 허락해주신다면 선생님께서 고민하고 계시는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실 때 도움이 될 만한 저의 개인적 생각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金: (찬성은 아니지만 예의상 승낙한다는 표정을 지음)
 
  劉: 내가 李 박사에게 선생과의 협조 가능성을 타진할 때마다 그분의 대답은 변함없이 “만약 그가 나와 함께 일할 생각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에게 다가가 환영하겠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李 박사께서 부통령직을 선생에게 제의하실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갖고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나는 귀하께서 그런 자리를 초월하신 분이라 그런 점에 대하여 제가 언급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선생님께선, “부통령 같은 것은 집어치워! 어떤 공직도 맡지 않겠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선생께서 李 박사와 협력하시고 싶다면 새롭게 구성되는 정부에서 그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적어도, 많은 사람들과 당황하고 있는 선생의 지지자들에게 右翼진영의 단결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께선 애국활동의 찬란한 기록을 갖고 계십니다. 선생께서 최근 평양에서 열린 소위 남북한 지도자 협의회에 관계하신 일은 그런 기록에 타격이 되었습니다. 북중국에서 조선인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포로가 되면, 목숨이 아까워서 그러겠지만, “우리는 김구 지지자들입니다. 그분이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아시시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일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선생의 모든 동지들은 선생의 찬란한 과거 업적이 이런 식으로 허물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金: 나도 알 알고 있는 일입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자신들의 협력자로 간주합니다. 내가 귀하께 이야기했듯이, 모든 사람들이 내 입장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남한 정부에 참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귀하도 알다시피 李 박사는 한민당의 포로가 되어 , 말하자면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하는 신세입니다. 내가 만약 정부로 들어가면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일어나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내가 바깥에 머무는 게 낫습니다. 나는 그 더러운 정치싸움에 연관되는 게 싫습니다.
 
  劉: 선생님의 말씀은 오히려 바깥에서 계시는 것보다는 정부에 들어가셔야 한다는 논리를 갖게 합니다. 李 박사께서는 한때 선생님의 동지이셨던 신익희, 이범석, 이청천씨 같은 분들을 麾下(휘하)에 두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참여하셔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시지 않으신다면 모든 게 한민당 뜻대로 되고 말 것입니다. 李 박사께서 國益을 위하여 그렇게 하고 싶으셔도 혼자서 그 정당을 제어하는 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선생께서 정부에 들어가셔서 그들을 견제하면 李 박사를 강화시켜줄 것이고 만약 버리신다면 李 박사를 한민당의 수중에 떨어지게 할 것인데, 선생께서도 한민당이 국가의 운명을 견제 없이 함부로 농단하여선 안 된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金: (정치싸움 등 이미 말한 것을 되풀이 한 다음) 더구나 나는 한 특정 정당의 비방전에 의하여 反美주의자로 광범위하게 색칠당하였습니다. 나는 중국과 미국만이 한국에 도움이 되는 이웃나라라고 생각하는 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한데 내가 정부를 구성할 때 그 안에 있으면 미국인의 동정심에 찬물을 끼얹어 국가이익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劉: 선생님 말씀은 틀렸습니다. 李 박사도 한때 반미주의자로 惡評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미국 사람들이 태도를 바꿔 그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결국 한국인의 고유한 일입니다. 한국에 있는 미국인이 선생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들은 결국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 장군도 명예롭게, 창피를 당하지 않고 소환될 것입니다. 가도 괜찮습니다. 귀측이 단결하고 유엔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되면 미국측이 떠나가는 일도 앞당기게 될 것입니다.
  金: 귀하는 중국이 한국을 인정하는 첫 번째 나라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까?
 
  劉: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국, 미국, 영국이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그렇게 할 것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金: 미국이 (지금 입장을) 물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劉: 불가능합니다. 왜냐 하면 미국인들이 한국의 독립을 확고하게 지지하니까요.
  金: 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한 가지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주-북한군)을 南進하는 데 써 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劉: 러시아가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 그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과거에 러시아는 두 번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한국으로부터, 또 한 번은 요동반도로부터 물러났습니다. 유엔을 통하여 세계 여론이 일어나면 러시아는 그 충격 앞에서 다시 굴복할 것입니다. 여기서 만들려고 하는 정부가, 북한정권이 러시아의 꼭두각시인 것처럼 미국의 꼭두각시라면 나는 선생께서 어느 쪽과도 협력하지 않으려 하는 입장을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유엔의 지지 덕분에 한국 정부는 主權국가가 될 것이고, 통일을 성취할 基地가 될 것입니다. 선생께서 한국이 약하게 보일수록 선생께선 조건 없이 (建國을 위하여) 투신하셔야 합니다(끝). 
    
  金九-劉 공사의 대화를 읽으면 金九가 보인 행동의 모순점이 드러난다. 金九는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주-북한군)을 南進하는 데 써 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즉,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의 남침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평양에서 발표한 4.30 성명서 중 "외군이 철수해도 內戰은 없다"는 대목은 완전한 속임수가 된다.
 
  金九는 북한군이 반드시 남침할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할 유일한 수단은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이었다. 金九는 이 안전판의 제거를 요구한 것이 된다. 즉, 북한군의 남침에 대한 장애물을 치우는 일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서울주재 중화민국 공사이던 劉馭萬은 장개석 총통의 뜻을 받들어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화합, 대한민국 건국에 협조하도록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일행이 1948년 1월8일에 서울에 왔다. 유어만(劉馭萬: Liu Yu-man)은 이승만, 김규식, 그리고 김구가 한 자리에 모이게 하기 위해 점심에 초대하였다. 그것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위원들이 “한국의 지도자들이 장래성이 없이 분열되어 있고 서로 마주 보지도 않을 정도라는 인상을 가지고 돌아가는” 불행한 일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정창인)>.
 
  劉馭萬은 장개석 정부가 대만으로 물러난 뒤 유엔주재 중화민국 대표부 처장, 駐韓 대사 등을 역임, 1966년에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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