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아~ !병(病)든 정권


    지난 6일 북한 권좌 2인자였던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조명록이 지병인 심장병으로 사망하자 장의위원장이 된 김정일이 9일 김정은을 대동하고 빈소를 조문하였군요. 북한 언론은 이때다 하고 그 장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김정은 우상화에도 열을 올렸습니다.

    정말 놀랍군요. 살아생전 군인으로 특히 95년 이래 군의 사상통제를 관장하는 총정치국장(차수)으로서 선군사상과 핵무장을 외쳐대며 체제구축에 직접 기여했던 조명록이 82세에 운명하면서도 후계구축에 충성을 다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평양을 떠나는 혼백이나마 인민의 고통과 세계의 변화를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한 달 전 비슷한 병환으로 명을 달리한 87세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끝까지 김정일의 패망을 외치면서 우리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요?

    황 전 비서의 사망 9일 전인 9월30일, 필자는 한 친목단체 회원으로 그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틀 전 노동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이 중앙군사위원회부위원장에 공식 선임되었던 차라 그의 상황평가가 몹시 기대되기도 했었지요. 그러나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일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불편한 걸음으로 들어와 연단 앞 의자에 텁석 주저앉던 모습, 그러나 평소 지론(持論)을 언급한 1시간 가량의 강연은 청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했지요.

    그 내용은 이렇게 집약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 애비는 그렇지는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작자가 세상에 나왔는지? 인간중심의 사고인 주체사상을 제멋대로 해석해 막나니 짓을 벌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150만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굶어 죽은 나라! 사회주의 국가 어디서나 볼 수 있겠습니까? 150만은  제가 그곳 현직에 있을 때 비밀리 확인한 공식 통계인데 아마 300만으로 추정하는 것이 무리가 아닙니다. 꼭 나쁜 방향으로만 나가고 있는 김정일, 그를 막을 수 있는 뾰족한 수도 없으니 그저 답답한 심정입니다. 

    97년 통일에 기여하겠다는 일념으로 귀순했지만 남한 내 정권교체로 기회를 놓치고 14년의 세월을 그냥 흘려보낸 것 같습니다. 한국 내 좌파! 국가관이나 있는 것인지? 또 북한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사람도 너무 많아요. 뭘 그렇게 두려워합니까?

    북한이 아니면 누가 천안함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단 말입니까?  일제(日帝) 하 삼척탄광에서 노동을 한 적이 있어 과거 남한 형편을 잘 아는데 불과 60여년 만에 이렇게 발전한 나라를 세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한국 민주주의도 위기입니다. 국회인사청문회를 보십시오. 시시콜콜 개인문제나 흔들어댈 줄 알고 나라 일은 생각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충정을 잃지 말고 나라를 지켜야합니다. 몇 명 안 돼도 좋습니다. 나이든 저도 죽는 날까지 여러분들과 함께 싸울 것입니다.

    지금 북한 문제의 해결방안으로 딱 두 가지, 전쟁이냐 아니면 중국식 개방유도라 생각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전쟁은 피해야겠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중국으로 하여금 북한을 개방시키게 하는 외교적 노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의 지배력을 강화시키는 것이라며 반론을 제기하지만, 제가 확인한 바로는 중국은 지역의 안정을 희망할 뿐이며 북한에 대한 영토 욕심이 없습니다.”

     

    조리 있는 언변, 사고, 기억 등 가히 노(老)석학의 면모를 잃지 않고 있었지만 높은 현실 장벽에 매우 지쳐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힘주어 말하는 주체(主體)이론과 중국식 북한개방론은 무신론적 유물사관(唯物史觀)에 집착, 중국의 경제발전을 사회주의의 승리로 간주하는 데서 나온 것 같아 다소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점도 있었지요.  

     

    2. 중국의 경제발전 모델에서 3대세습의 정당성을?         

    황 전 비서의 공과(功過)나 지론(持論)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의 귀순이 남북한에 미친 영향은 가히 역사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주체사상 창시자가 망명했으니 각 분야의 사상체계에 일대 혼란을 가져왔을 수밖에 없었고 또 자유세계 14년간은 햇볕정책, 동기(動機)논란, 테러위협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김정일의 실체와 모순을 당당히 설파해왔으니까요. 

    과거 북한 지도부에 미친 그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최근 김정일과 관료들의 잦은 중국 3성(三省)방문도 그의 ‘중국식 북한개방론’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고 놀라게 됩니다. 실제 그럴 리야 없겠지만 어쨌든 이 방안은,  공산당 유일독재 하의 중국의 경제발전이 북한의 3대 후계체제를 정당(正當)화시켜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또 교착된 6자회담을 풀 수 있고 북한 내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련국 모두가 선호(選好)할 가능성이 보입니다.

    그렇지만, 관계국의 이해를 모두 만족시킨다고 그 진행과 결과가 순탄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북한문제는 유엔 제제 등으로 이미 국제적 이슈화(化) 되어 있고 체제변화 없는 제한적 경제개방으로 미사일, 핵무기, 인권, 탈북자 등 근원적인 현안들이 해결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제는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어떤 대화나 협상의 장(場)을 만들어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김정일 정권은 공산당 1당 독재가 아니라 소수 이해집단(당과 군부 약 300여만)을 위한 실질 군사독재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평소 정당성, 합리적 기준을 찾다가도 상황이 급해지면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벼랑 끝 전술을 펼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요. 따라서 전쟁을 피하기만하려는 유화(宥和)적인 자세는 결국 그들에게 나쁜 습관만 길러주는 꼴이 됨을 명심해야겠습니다.

    3. 이제 남은 것은 체제변화뿐!

    체제보장과 경제지원! 바로 이것이 북한이 대량살상무기 폐기조건으로 줄기차게 내걸고 있는 슬로건이지요.  외부세력의 침략 등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 정당한 요구인 것처럼 포장(鋪裝)하고 있지만, 현재의 권력독점과 주민통제 체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면서 타(他)의 부(富)를 빼앗아 경제난을 해결하겠다는 속셈이란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결국 그들 스스로 집권의 부당성(不當性)을 인정하고 또 이를 대외적으로도 밝히면서 삶을 구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평화적 대화유지를 위해 체제를 인정해왔지만 북한인권 문제가 국제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귀순 탈북자 2만 명 시대에 북한정권 내 권력투쟁도 예견됨으로 우리의 입장을 바르게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친북좌파 세력은  동족, 통일 명분 차원에서 극구 반대하겠지만 21세기 세계 선도국에 속하는 우리로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관과 규범에 따라 행동해야 옳지 않을까요?
    김정은 후계구도 안착을 위한 선심(善心), 선무(宣撫)활동은 당분간 계속 확대되겠지만,  한편으로는 중국여행자가 늘어나면서 탈북자의 수도 증가하고 무리한 외화벌이 사업으로 불법 경제행위와 금전만능주의 사고가 사회 전반에 확산될 가능성이 있군요. 좋은 방향이던 아니던 김정은의 등장으로 북한 내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봐야겠습니다.

    그 변화의 물결이 권력투쟁의 단계를 넘어 금기사항인 체제에까지 밀려간다면 머지않아 북한에도 자유민주주의가 꽃피리라 확신합니다.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와 그 시행 방법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정당성을 잃은 정권이 설 땅은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는 사실을 북한인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또 그들이 찾아야할 발전 모델도 중국에서가 아니라 우리 한국에서 찾도록 그 생각을 바꿔 나가야겠습니다.  공식 행사에서 아들의 모습을 쳐다보며 박수치는 병든 김정일의 모습, 그와 그 측근들이 서울개최 G20 정상회담 장면을 보며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군요.

    ‘북한체제의 변화는 시대적 요구’란 사실을 조금이라도 느꼈기를 기대해봅니다.  우리도 국제위상에 걸 맞는 결의(決意)와 일관되고 엄정한 행동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정당성이 결여된 ‘체제보장’ 요구에 맞서 당당히 ‘체제변화’로!    

    * 이 글은 사단법인 ‘남북, 지역균형발전협의회’의 계간 ‘남북의 창’ 겨울 호에 게재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