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李承晩, "중공군 개입, 차라리 잘 되었다." 
      
     李承晩 대통령의 예언대로 중공군 개입은 재앙으로 위장한 축복이었다.
    중공군 개입이 선물한 것이 韓美동맹이었다.

    趙甲濟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은 北進을 개시, 10월18일 평양을 수복하였다. 맥아더 사령관은 태평양상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중공군이 개입하기는 너무 늦었다. 하더라도 간단하게 격멸시킬 수 있다"고 안심시켰다. 10월 하순 유엔군은 총공세를 시작하였다. 10월 중순 압록강을 건너와 산에 숨어 있던 중공군이 이때 한국군을 상대로 기습작전을 벌였다. 일격을 당한 유엔군은 공세를 중단하였다.
     
     맥아더 사령관은 강을 넘어온 중공군은 3~4만밖에 되지 않는다고 誤判하였다. 당시 북한지역으로 들어온 중공군은 30만 명을 육박하였다. 11월23일 그는 다시 대공세를 명령한다. 빨리 공산군을 몰아내고 통일을 시킨 다음 유엔군 병사들을 철수시켜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내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중공군은 이번엔 全병력을 투입, 본격적인 반격으로 나왔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곳곳에서 포위당하거나 우회, 차단당하였다.
    맥아더는 중공을 해안봉쇄하고 만주를 폭격하고 대만으로 물러난 장개석 군대를 중국에 투입하지 않으면 한국을 지킬 수 없다면서 유엔군의 철수를 검토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트루먼 행정부는 중국을 직접 공격하면 소련을 끌어들여 3차 대전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걱정하여 맥아더의 擴戰 건의를 거부하였다. 맥아더는 "그렇다면 후퇴하여 철수 준비를 하여야 한다"면서 유엔군에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미군을 主力으로 한 유엔군은 싸우지도 않고, 저지선을 치지도 않고, 평양을 내주면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운명이 다시 한번 頃刻(경각)에 달렸다. 李承晩 대통령은 이 사태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국군의 作戰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넘긴 상태에서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적 대전략을 구사해야 하는 트루먼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李承晩 대통령의 입장을 고려할 여지가 아주 좁았다.
     
     6.25 직후보다 더 암담한 상황에서 열린 1950년 11월29일 국무회의에서 李 대통령은 이상한 이야기를 하였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쓴 日記(기파랑 출판 '6.25와 이승만'에서 인용)에 따르면 李 대통령은 "중공군이 지금 침략한 것은 하나님이 한국을 구하려는 방법인지 모른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소련(주-李대통령은 북한군을 소련의 괴뢰라고 보았기에 이런 표현을 쓴 듯하다)이 한국 국경너머로 후퇴하고, 국제연합에서 이제는 특권이나 이권들을 흥정하게 되었더라면, 국제연합과 미국사람들은 소련 연방과의 협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무슨 일이라도 했을 것이며 군사상의 승리만이 아니라 외교상의 승리라고 만족하였을 것입니다. 국제연합군 부대와 장비들은 조만간 철수되었을 것이며, 한국군은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는 너무나 긴 국경선을 점령하도록 남겨놓았을 것입니다. 미국 국민의 분노가 가라앉고 공산당의 평화선전 공세로 국민들이 잠잠해진 가운데 중공군의 준비가 끝났다면, 이들의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 현대적인 항공지원, 그리고 한국의 全 해안선을 둘러싼 해군작전 등을 저지하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현재 해안선을 봉쇄하고 있는 함선들을 철수시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한국 지배가 소련의 계획 안에 들어 있고, 북한군의 실패가 그들 계획의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한국에 중공군을 끌어들인 것은, 국제연합군이 철수한 뒤에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보다 우리에게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최악의 경우가 닥칠지 모르나 민주주의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무초 미국대사로부터 '세계정세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이해한 사람'이란 평을 들은 李 대통령의 이 분석이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고 北進통일이 되었더라면 곧 바로 평화가 찾아왔을 것인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유엔군의 主力이 철수하면 산악지방에 숨어 있던 공산게릴라들이 월남식으로 준동하였을 것이다. 만주로 쫓겨난 김일성 일당도 중공의 비호 아래 병력을 투입하였을 것이다. 이런 식의 간접침략에 대하여 미국이 또 다시 파병하는 것은 국민 여론상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월남처럼 赤化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李承晩 대통령의 예언대로 중공군 개입은 재앙의 얼굴을 한 축복이었다. 중공군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한국군은 증강되었고, 韓美동맹의 필요성을 두 나라 지도부가 절감하게 되었다. 중공군 개입이 선물한 것이 韓美동맹이었다.
     
     월남은 17도선으로 일단 分斷되었다가 북쪽의 월맹이 정규군을 내려 보내 남쪽의 게릴라를 돕는 월남전을 시작, 결국 공산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北進통일을 하였더라도 중공과 김일성 세력이 만주에서 공산게릴라를 들여보내고, 남한 내부의 공산세력을 조종하였더라면 한국의 힘만으로써는 대처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란 이야기이다.
     
     李承晩 대통령의 역사와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