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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문광부는 조희문 영화진흥위원장을 해임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유는 독립영화전용관 운영자 선정과 관련해 좌파 진영이 반발하면서 논란이 커지자 해임이 이뤄진 것이다. 한편 지난 8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상임위원 2명이 현병철 인권위원장의 운영에 반발, 자진사퇴한 것에 대한 전원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인권위원들은 현 위원장을 비난하며 그의 사퇴를 종용했다. 우파 진영은 이번 논란이 좌파의 치밀한 각본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진지전’의 목표
우파 진영에서 보는 이번 논란의 ‘키워드’는 ‘진지전’이다.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주창한 ‘진지전’은 사회 혁명을 위해서는 사회 각 분야의 주요 지위를 하나의 진지로 삼아 혁명분자를 차근차근 심어놓고 이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키워야 혁명의 순간에 성공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일성이 이와 유사한 개념의 비밀교시를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퍼트린 바 있다. 지금 상황에서 ‘비밀교시’를 보면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부분이 보인다. 김일성은 ‘비밀교시’에서 남한의 고시제도와 민간단체, 안보기관과 언론사의 공채 시험에 주목했다.
김일성은 1973년 대남공작원들과의 대화에서 “남조선에서는 고등고시에 합격만 되면 행정부, 사법부에 얼마든지 잠입해 들어갈 수가 있다. 머리가 좋고 확실한 자식들은 데모에 내보내지 말고, 고시준비를 시키도록 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1968년 12월 대남공작원과의 대화에서는 “변호사는 법정에 있어서의 우리 측의 유리한 원조자다. 변호사에게 100만 원 쓸 것인가 1,000만 원 쓸 것인가로 그들의 목소리가 달라진다. 법정에는 예심과정에서의 진술내용도 모두 뒤집게 되는 것이다. ‘왜(진술을)번복하는가’라고 판사나 검사에 묻는다면, 경찰이 고문을 했기 때문에 허위진술을 했다고 끝까지 버티고, 상처나 흔적을 보여주면서 역습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일성은 여기다 설립에 별 다른 제한이 없는 민간단체가 중요한 ‘틈’이라고 보고 이들을 지원하거나 직접 조직해 ‘통일 운동’에 앞장서게 하고, 이들을 규합해 한 목소리를 내도록 하는 걸 ‘시멘트 전술’이라 부르며 적극 권장하기도 했다. 김일성은 또한 사명감이 없는 군인, 돈에 따라 움직이는 법조인, ‘방종’을 희망하는 작가, 소설가, 연예계 인사, 사회에 대한 반감이 심한 언론인 등을 포섭하는 데에도 많은 공을 들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화된 ‘진지전’
물론 김일성의 ‘비밀교시’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진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같은 내용을 배우며 ‘사회운동’을 했던 주체사상 신봉자들은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중요한 일을 하며 생활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1980년대 초반 운동권 내부의 분파 간 갈등은 나중에 주체사상 신봉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정부는 1990년대 초반 동구권 붕괴와 냉전질서 종식으로 운동권 세력들이 모두 사라졌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1990년대 말부터 사회 각층에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2000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 이후 사회에서 승승장구하며 우리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로 급부상했다.
이후 ‘운동권 출신’들은 대부분 변신에 성공했다. 과거 ‘사회운동가’였던 이들이 지금은 기업가로, 금융전문가로, 법조인으로, 교수로, 고위 공무원으로, 정치인으로 각계각층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활동하고 있다. 인터넷은 물론 트위터나 미투데이 같은 SNS, 각종 방송도 이들의 세력권 안에 있다. 공직 사회도 마찬가지다. 지난 정권에서 계약직 공무원으로 임용된 이들은 몇 년 사이 ‘정규직 공무원’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은 ‘공무원법’에 따라 함부로 해임할 수도 없다. 여기에는 일부 위원회 소속 직원들, 정부 부처 직원들이 해당된다.
이들은 촛불난동, 미네르바 사건 이후 한동안 조용하다 최근 들어 서서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런데 내용이 달라졌다. 지난 정권 때처럼 무조건 ‘통일’ ‘민족’ ‘반미’를 외치지 않는다. 단체 이름에도 이런 ‘정치적 단어’들이 사라졌다. 대신 국민들이 고통을 느끼는 청년실업, 민생경제, 치안질서, 안보불안 등이 새로운 화젯거리로 등장했다. ‘운동권 출신’들은 이런 주제를 논하면서 ‘기득권’을 비판하고, 우리 사회에 ‘혁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난감한 점은 현 정부와 여당 관계자들이 이들의 주장에 솔깃해하며 자금을 지원하고, 정책을 펴고 있다는 점이다.
우파 무기력증 만든 ‘중도실용’
한편 지난 정권 같으면 곧바로 집회를 열고 ‘투쟁’을 했을 우파 진영은 이 같은 ‘운동권 출신’들의 활동재개에도 잠잠하다. 가장 큰 이유는 우파 내부의 무기력 때문이다.
우파 진영의 무기력은 촛불난동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현 정부는 촛불난동 당시에는 우파 진영을 찾아다니며 ‘아쉬운 소리’를 하다 논란이 서서히 잦아들자 곧바로 ‘중도실용’을 내걸고선 외면했다.
여기다 지난 정권에서는 일만 생기면 우파 뒤에 숨던 재계와 정치권도 현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우파 진영을 보며 ‘주장이 너무 강해 부담스럽다’는 핑계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젊은 활동가들은 환멸을 느끼고 떠나기 시작했고, 무기력증이 우파 전체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현 정부는 ‘중도실용’에 빠져 우파 진영에는 무관심하다. 정부 고위층은 ‘나눔’과 ‘기부’에 빠져 이름을 바꾼 좌파 단체를 지원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런 모습을 본 좌파 진영은 현 정부의 무지와 기회주의적 태도에 용기를 얻어 2012년 대선 승리를 목표로 ‘진지전’을 재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현 정부 관계자들이 이런 지적을 들으면 ‘중도실용’의 장점을 설명하느라 바쁠 것이다. 국민들이 우파 진영의 극단적인 주장을 부담스러워한다고도 말할 것이다. 하지만 체제위협세력이 안보불안을 일으키고, 그들을 따르는 자들이 우리 사회의 ‘정의’를 왜곡하는 상황에서조차 정부가 ‘중도실용’만 내세운다면 ‘신념도 도덕도 없는, 기회주의 정권’이다. 더군다나 정권 핵심인사들이 자기네가 뽑아서 앉힌 사람마저도 제대로 보호하지 않는 모습은 우파 진영의 무기력을 넘어 국민 전체의 외면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다.
장담컨대 현 정부와 여당, 재계가 영진위와 인권위에서 벌어지는 ‘진지전’과 최근 우파 진영의 무기력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2012년 대선 승리가 아니라 그 후 자신들이 언제 ‘서초동’에 서야할 지나 고민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