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직은 신분상승의 수단이 될 수 없다 
    출세하지 않아도 잘 사는 나라, 다양한 출세의 길이 보장된 나라
     
    “양극화된 한국 사회에서 고시는 마지막 남은 신분 상승의 기회” ‘3대 고시 존치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라는 이름의 온라인 카페를 만든 20대 고시생 전모씨가 내세운 이유이다. 전모씨는 11, 12일 서울 관악구 대학동의 고시촌에서 ‘고시제도 부활을 위한 고시생 토론회’를 열 계획이라 한다.

    행안부의 행정고시 개혁안이 발표된 뒤 한나라당 역시 고시생들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특히 안상수 대표는 “고시라는 게 돈 없는 사람에게는 신분 상승 기회”라며 “행안부 안은 고시를 준비하는 많은 이들의 희망을 앗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당의 전현희 의원도 서울경제에 기고한 ‘개천에서 용되기 힘든 사회’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비록 어려운 환경에 놓였어도 열심히 노력하면 평판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각종 고시에도 합격하는 미담을 종종 접할 수 있었다. 내세울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의 도움 없이도 오직 자신의 노력으로 원하는 학교와 직장에 합격하는 것이 우리네 젊은이들의 작은 출세였다.

    그런 점에서 고시를 비롯한 각종 시험은 자아실현의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신분상승의 통로로서 우리 사회의 계층 간 갈등을 완화하는 기제이기도 했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줬던 것이다“

    물론 유명환 전 장관의 딸 특채 논란으로 인해 서민층의 청년들이 분노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측면이 크다. 그러나 공직자가 되겠다는 청년층, 집권 여당의 대표, 제1 야당의 대변인이 드러내놓고 공직을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인정하고 있는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이들의 논리라면 수많은 정부부처의 공무원들이 신분상승이라는 출세만을 목표로 암기 과목을 달달 외워 합격하여 공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안상수 대표와 전현희 의원이 또 다른 공직인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도 바로 출세와 신분상승이 아니었는지 엄중히 물어야할 사안이다.

    최근 미디어워치에 방송 기술장비 업체에 다니는 20대 후반의 한 청년이 찾아왔다. 그 청년은 서른이 넘기 전에 무언가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영역으로 직장을 옮기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필자가 참여하는 저작권 유통시장 개혁 정책이 가시화되면서 이쪽 시장이 급성장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저작권보호센터, 콘텐츠유통기업협회, 유통회사 중 어느 것이 출세의 길인가

    이 청년이 원한 곳은 문광부 산하의 저작권보호센터였다. 물론 이는 신임 저작권보호센터장이 임명권자로서 필자는 이쪽의 인사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 필자가 관여할 수 있는 곳은 민간에서 정책을 실현할 콘텐츠유통기업협회와, 필자가 운영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협회장으로서 인사를 추천할 수는 있는 콘텐츠 유통회사 및 저작권보호기술 회사이다.

    인사권 자체가 없기는 하지만 필자는 처음부터 저작권보호센터는 권하고 싶지 않았다. 현재 저작권보호센터에서 성실히 일하는 또 다른 청년층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저작권보호센터는 준공무원 신분으로서 철저한 단속과 정책 집행으로 저작권보호를 위한 공적 임무를 수행해야하는 것이다. 아무리 콘텐츠 유통 시장이 성장해도 준 공무원 신분의 저작권보호센터의 직원들의 급여가 연봉 1억원 대로 올라갈 수 없다. 또한 이들에게 필요한 자세는 엄격한 자기 통제를 해야하는 수도승과 같은 것이다. 신임 저작권보호센터장은 센터 직원들에게 아예 콘텐츠 유통회사 측과 일체의 접촉조차 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콘텐츠 유통 시장 활성화를 위해 자기 헌신과 희생할 자신이 없으면 감히 권할 수 없는 직책이다.

    반면 콘텐츠유통기업협회의 업무는 문광부, 방통위, 저작권보호센터의 새로운 개혁정책을 이해하여 민간시장에서 이 정책이 신속하게 관철될 수 있도록 민간 유통기업들을 독려하고 강제하는 일이다. 또한 불법 유통을 방조한 뒤 웹하드로부터 뒷돈을 뜯는데 혈안인 KT, CJ 등의 거대 저작권자들의 횡포에 맞서 이들에게 스스로 저작권 보호에 나서도록 권유하는 일도 필요하다. 공직인 저작권보호센터보다는 좀 더 유연할 필요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방통위 산하의 민간 사단법인으로 활동해야한다는 점에서 이 역시 절제와 자기 통제가 필요한 직책이다.

    마지막으로 웹하드가 중심이 되는 콘텐츠유통기업과, 저작권보호기술 회사의 직은 정부 정책에 따라서 합법화 작업에 나선. 뒤, 치열한 시장경쟁을 통해 더 많은 콘텐츠와 기술을 팔아 수익을 창출하고,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며, 청년 일자리를 늘여나가는 직책이다. 민간 회사야말로 가장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를 갖춘 인재가 필요하기 때문에, 정부 산하기관이나 사단법인의 절제된 자세보다는 유연하고, 자유롭게 폭넓은 사고가 필요하다. 저작권보호센터와 콘텐츠유통기업협회의 직원들에게는 단 하나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는 반면, 민간회사의 직원들은 오히려 적당히 실수를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더 큰 시장으로 나가고자 하는 용기와 배짱이 중요하다.

    저작권보호센터, 콘텐츠유통기업협회, 민간 유통 및 보호기술 회사 중 무엇이 신분상승의 길인지 정확히 가려낼 수 있겠는가. 각자의 적성과 과거의 학습경험, 그리고 인생의 설계에 따라 스스로 알아서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굳이 필자보고 가려보라 한다면 차라리 수백억대 회사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민간회사 직원들이 오히려 신분상승과 출세에 더 가까운 길에 서 있다. 물론 필자가 인사를 한다면, 오직 신분상승과 출세만을 위해 회사에 지원한 청년이라면 곧바로 집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일 자체의 즐거움을 모르고 주위의 평가만을 의식하는 청년이라면 민간회사에서도 재능을 발휘하기 못할 게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대학시절 최근 작고한 백현락 선생의 ‘미국놈 미국인 미국분’과 ‘한국놈 한국인 한국분’이라는 책을 너무나 감명깊게 읽었다. 개중 기억에 남는 문장은 “대한민국은 출세를 하지 못하면 살 수 없는 나라”였다. 백현락 선생이 미국과 한국을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로 이 점을 꼬집었던 것이다.

    대통령직 고사하고 농장 경영 일로 돌아간 조지워싱턴의 미국

    반면 전북대 신방과의 강준만 교수는 최근 시리즈로 펴내고 있는 ‘미국사 산책’에서 미국과 한국을 가장 닮은 나라로 규정하고, 각 개인들의 초고속 성장에 대한 욕망을 공통점을 짚었다. 즉 미국이라는 나라 역시 한국과 더불어 개인들의 출세욕망이 강하게 발현되는 나라임에도 10년 이상 미국에서 살아본 백현락 선생의 눈에는 그런 미국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한민국이 출세에 목숨을 거는 나라로 보였던 것이다.

    필자의 시각으로는 그 차이는 공직에 대한 관점, 즉 출세의 다양성의 문제로 보인다. 미국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한 번의 대통령직 연임 직후 더 이상의 연임을 포기하며 고향의 농장으로 돌아간 나라이다. 이 사례는 미국의 민주주의 쾌거로 불리기도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기껏해야 20명 정도의 직원만 있는 미국의 대통령직보다 수천 명의 하인과 노예가 일하는 활기찬 미국의 농장 경영이 조지 워싱턴에게 더 매력적인 직업으로 인식될 정도로, 민간 주도의 국가를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44명 중 43명을 사회적 낙오자로 전락시키는 대한민국 고시제도

    민간 중심사회는 치열한 경쟁사회로 볼 수도 있지만, 출세의 다양한 길이 보장되는 사회라는 긍정적 측면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지난해 행정고시에 1만821명이 응시해 겨우 244명이 합격 44 :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신림동과 노량진 고시원에는 무려 20만명에 가까운 청년들이, 안상수 대표와 전현희 의원의 말대로라면 오직 신분상승과 출세를 위해 고시책이나 달달 외우고 있다. 그나마 44명 중 단 한 명만이 그 신분상승의 길로 들어설 수 있고 나머지 43명은 점점 더 사회적 낙오자의 길로 접어든다.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청년들의 미래를 고민하는 지도자들이라면 국민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공직을 놓고 ‘신분상승’ 운운하기 전에, 출세를 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는 나라, 이것이 정 어려우면 다양한 출세의 길이라도 열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변희재 /객원논설위원 bignews@bi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