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60년대, 부정부패로 얼룩진 軍 진급체계

    나는 주월 한국대사관 무관 생활을 끝내고 1966년 10월 9일 귀국했다. 3년 만에 귀국해 보니 우리 육군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군의 옳고 떳떳함이 무엇인지를 상징해 주던 이종찬 장군은 이미 군을 떠났고, 탁곡(濁曲)의 물결이 세상을 좌우하는 뇌물과 아부와 권력자 문전에 줄서기 풍조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부정부패로 얻은 배경이 장군 진급도 시켜주고 좋은 보직도 주었으며, 눈부신 출세가도를 달리게 해주는 세상으로 변질돼가고 있었다.

    나는 달라진 군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직업 전환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어서, 육군본부에서 보직발령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새로 얻은 서교동의 15평짜리 전셋집에서 책이나 읽으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끔은 공원에 책을 들고 나가기도 했다. 나뭇잎들이 초겨울 바람에 떨어져서 지상에 쌓이며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의 군 생활도 낙엽의 계절을 맞이한 것인가? 공원 안에서 순진난만하게 뛰어놀고 있는 네 살, 두 살 먹은 셋째 아들과 넷째 아들을 바라보며 예편 후의 호구지책을 궁리했다. 항상 자기가 서 있는 발밑의 돌밭을 갈고 가는 성실한 사람에게 마음의 고뇌가 왔다. 그러나 죽어도 부정과는 타협하지 않기로 했다. 하루는 친구가 찾아와서 “높은 장성들, 권력 있는 기관의 인사를 찾아다니며 줄을 대고 보직 운동을 해야지 가만히 집에 틀어박혀 책이나 읽고 있으면 되느냐?”는 충고를 해주는데, 나는 고맙다고 웃어 넘겼다.

  • ▲ 국군의 날을 기념하는 한국대사관 파티에서 외국무관을 맞이하는 이대용 전 주월공사
    ▲ 국군의 날을 기념하는 한국대사관 파티에서 외국무관을 맞이하는 이대용 전 주월공사

    기나긴 무보직 생활이 이어지면서 해가 바뀌어 1967년 새해가 되었다. 어린 애들까지도 아버지는 왜 자동차도 없고 사무실도 없이, 군복도 안 입고 집에서 놀고만 있느냐고 걱정을 했다. 애들 눈에도 과거 그렇게 자랑스러웠던 아버지가 이제는 군에서 소외된 초라한 모습으로 미친 모양이었다. 무보직 기간 중에 대령에서 준장으로의 진급심사가 있었으나 물론 탈락했다. 재작년에도 탈락하고 작년에도 탈락했으며 금년에도 또 탈락한 것이다.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 군인도 줄을 잘 잡아 장군 진급을 하고, 6·25 때 육군본부에서 3년 1개월 계속 근무하여 전투 경험이 전혀 없으면서도, 일선에 나가 전투한 경험이 있는 것 같이 개인 기록카드를 위조 작성한 군인도 장군 진급을 했다.

    무보직 3개월 5일 만인 1967년 1월 14일부로 육군본부는 나에게 동국대학교 학도 훈련단장을 명한다는 보직명령을 내렸다. 나는 보내온 군용 지프를 타고 출근하기 위해 아침에 집을 나섰다. 아내와 아이들은 긴 동면에서 깨어나 첫 출근을 하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려고 대문 밖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대학생들을 교육시킨 다는게 즐거웠다. 집무실은 남산 숲속에 있었다. 봄에 꾀꼬리가 여러 쌍 모여와서 둥지를 틀고 노래하다가 알을 낳고, 새끼를 까서 먹이를 물어다가 기른 후에 가을에 가서 비행 연습 시키는 것을 보는 것도 즐거웠고 평화스러웠다.

    그러나 내 대령 계급 정년은 겨우 2년여가 남아있을 뿐 장군으로의 진급은 절망적으로 보여, 새로운 민간직장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1967년 9월 어느 날, 주한월남대사관 웬반큐 공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연간 5만 톤 생산규모의 압연공장을 사이공 교외에 건립하려고 하는데, 한·월 합작을 할 수 있는 한국 측 파트너회사를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수소문 끝에 한국철강주식회사의 신영술 사장을 월남 측에 소개했다.

    웬반큐 공사와 신영술 사장은 약 1개월간의 교섭 끝에, 영등포에 있는 한국 철강주식회사의 압연공장을 사이공 교외로 이전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나를 그 합작회사의 현지 책임자로 결정하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10주간의 교육을 한국철강주식회사에서 받기로 했으며, 교육은 신영술 사장과 영업부강 차장이 맡기로 했다. 1967년 10월 중순, 나는 군예편원을 써서 육군본부인 사참모 부담당관에게 제출했다.

    담당관 강경순 중령이 예편원은 내가 사이공으로 떠나는 12월 하순에 제출하라면서 되돌려 주었다. 나는 다음날부터 매일 오전에 한국 철강주식회사로 출근하여 네 시간의 교육을 받고, 오후 1시경 동국대학교 학도 훈련단에 출근한다는 양해를 육군 본부로부터 받았다.

     ◆ "큰 별이 번쩍하고 찬란하게 빛났다"...'장군'으로의 진급

    11월 초순 어느 날, 나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한국철강주식회사로 출근했다. 신영술 사장이 사장실에서 그동안 배운 것을 질문하며 철강에 대한 지식을 넓혀주고 있었다. 이때 사장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사장이 몇 마디 주고받더니 수회기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동국대학교 학도 훈련단 선임하사관 송 상사로부터의 전화였다.

    “단장님, 방금 육군본부 비서실장이 건영 장군님의 전화가 왔는데, 단장님이 장군으로 진급이 되셨다고 하시면서, 즉시 이건영 장군방으로 오시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낮 12시에 정식 발표가 있을 때까지는 비밀에 부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뭐? 내가 장군 진급? 그럴리가, 그럴리가 없는데......? 혹시 이대부 대령이나 이대철 대령 같은 이름을 내 이름으로 잘못 본거 아닐까? 내가 장군진급 됐을리는 만무한데?”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단장님, 어서 육군본부로 가보시지요.”

    “알았어!”하고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신영술 사장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장군진급이 되셨어요?”하고 한 박자 뜸을 들이더니“별 달면 뭐합니까. 몇 년 있으면 어차피 제대할 텐데, 이거 하세요. 큰돈을 벌수 있어요”라고 했다.

    군용 지프를 타고 육군본부 비서실장실로 갔더니 이건영 장군이 장군진급을 축하한다면서 준장 계급장 한 쌍을 선물로 주었다. 장군으로 진급된 것이 틀림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선물 받은 계급장 상자를 열어보았다. 큰 별이 번쩍하고 찬란하게 빛났다. 나라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새삼 더욱 굳게 했다.

    한편 권력층에 줄을 대고 이 전투구를 해도 따기 힘든 별이 어떻게 해서 내 어깨에 기적같이 굴러 떨어졌는지 그 수수께끼를 풀길이 없어 궁금증에 목말랐다. 장군 진급자 명단을 공식 발표하는 낮 12시를 몇 분 남기지 않았을 때, 동

    국대학교 학도훈련단장 책상 위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 이대용 대령, 나 장우주(張禹疇) 장군이요. 장군 진급을 축하해요. 즉시 우리 집으로 오시오. 어딘지 아시오?”

    “죄송합니다. 어딘지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장소장은 사직동에 있는 집 위치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장우주 장군은 6년 전 내가 연대장으로 있을 때 우리 사단장이었으며,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에 유학을 갔다 온 유능하고 열성적인 지휘관이었다. 내가 아내와 함께 장장군의 집에 도착하자, 나의 장군 진급에 대한 비화를 장 장군이 말해주었다.

    그분의 성명에 의하면 나는 전투경험이 많은데다가, 연대장 재직시 공금은 단돈 1원 한푼 손대지 않는 깨끗함이 있었고, 연대 장병들을 정량(定量) 대로 잘 먹여 훈련시키고 사랑하여, 부하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으므로 저런 사람은 앞으로 꼭 장군 진급을 시켜야 한다고 지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해마다 장군 진급에 탈락하자 세상이 잘못됐다고 여기던 차에, 이번에 자신이 대령-준장  진급심사위원 일곱 명 중의 한 사람으로 지명되자 나의 진급에 전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장 소장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600여명의 전투병과 대령 가운데 25명을 준장으로 진급시키는 심사과정에서, 최초 심사 때는 일일이 개인 기록카드를 보면서 탈락시켜 나간다. 그러다가 200명쯤으로 심사 대상자가 줄어들면, 그때부터는 개인 기록카드는 한군데 쌓아놓고 보지도 않는다고 한다. 대신 200명의 사진을 심사실 벽에 사진전시회를 하듯 붙여놓고, 심사위원들이 그 앞을 돌면서 이 사람은 이러저러한 흠이 있다면서 사진을 뜯어 내리면 사진의 주인공은 진급에서 탈락되는 것이라고 했다.

    벽에 붙어있는 모든 사진은 컬러사진이며, 대령 계급장을 단 최근 사진이었다. 그런데 유독 내 사진만은 15년 전쯤 찍은 소령때의 흑백사진이 확대되어 희미하고 뿌연 모습이었다면서, 그것이 모두 이전투구의 슬픈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심사위원장인 김 중장이 내 사진을 뜯어 내리면서 이 사람은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 탈락시킨다고 했다. 장우주 소장이 그렇지 않다, 개인기록카드를 가져다가 확인하자고 하니까, 김 중장이 내 사진을 다시 그 자리에 붙여 놓았다는 것이다.

    그 후 약 100매의 사진이 벽에 남아 경합을 벌이고 있을 때, 김중장이 다시 내 사진은 뜯어 내리면서 이 사람은 연대장 경력이 없어 탈락시킨다고 했다고 한다. 장소장이 이를 저지시키고 개인기록카드를 가져다 확인하자면서 “바로 내 밑에서 가장 우수하고 깨끗하게 연대장을 했다”고 말했더니, 김 중장이 장 소장을 한참동안 말 없이 응시하더라는 것이다. 김중장이 나를 탈락시키려 애썼던 이유는, 나와 육사동기이며 출신 도(道)도 같은 김 대령을 진급시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같은 도 출신, 같은 육사 동기생끼리의 경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김 대령은 마음이 착하고 좋은 친구였다. 그러나 그는 전투부대 지휘관이 아니라, 사단 사령부에서 보급관 또는 후생장교를 지낸 비 전투 장교였다. 1951년 가을부터 1952년 봄까지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해방 후 공산당원들이 살다가 6·25 때 북한으로 달아나 빈 집으로 남아있는 적산가옥(=일제 때의 일본인집)을 찾아내서 높은 장령 급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했다. 심사위원장 김 중장과 심사위원 장우주 소장은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섰다. 이 싸움을 식히기 위해 잠시 심사를 중단하고, 심사위원장과 위원 7명이 육군 인사참모부장 황필주 소장과 함께 골프를 치는 화해와 조정의 휴식시간을 가졌으나 그래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심사위원과 인사참모부장의 궁리 끝에 묘안이 나왔다. 25명을 진급시켜야 하는데, 26명을 선발해 청와대에 올라가서 박정희 대통령의 의중을 떠본 후에 최종결정을 내리자는 것이었다. 26명의 사진을 앨범에 한 장씩 붙여서 육군참모총장이 진급 심사위원들을 대동하고 청와대로 가서, 사진을 한 장씩 넘기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설명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참모총장 김계원 대장의 설명을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내 사진이 나오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음, 이대용, 성실하고 우수하지. 장군이 돼야지. 월남에서도 일 많이 했어.”

    내가 꿈에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 관한 별난 드라마는 여기서 끝이 나고 나는 별을 달았다. 장군 진급 명단이 공식으로 발표된 후 진급심사위원회 해산의 저녁 회식이 있었다. 이 연회 석상에서 술이 얼큰히 취한 심사위원장 김 중장이 재떨이를 장우주 소장에게로 던지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자기가 전력을 다해 밀었던 김 대령이 이번 진급에서 탈락한데 대한 화풀이였다. 그 후 두 사람의 사이는 계속 원만하지 못했다.

     

  • ▲ 국군의 날을 기념하는 한국대사관 파티에서 외국무관을 맞이하는 이대용 전 주월공사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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