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항미원조'를 외치는 중국 시위대의 모습
    ▲ '항미원조'를 외치는 중국 시위대의 모습

    항미원조(抗美援朝), 북조선을 도와 미국을 몰아내자”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역전한 유엔군과 한국 연합군은 통일에 한발짝 다가선 듯했다. 하지만, 이러한 통일의 염원은 1950년 10월 13일, 중국군이 개입을 결정하면서 다시 멀어져 갔다.

  • ▲ 중공군의 상이군인 수첩에서 발견된 6.25전 참전인의 사진
    ▲ 중공군의 상이군인 수첩에서 발견된 6.25전 참전인의 사진

    유엔군의 참전 이후 김일성에게 중국의 개입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단둥(丹東) 항미원조(抗美援朝) 기념관에는 김일성이 모택동에게 6.25전쟁 군사지원을 요청한 편지가 전시돼 있다.

    이에 따르면, 김일성과 박헌영은 1050년 10월 1일 조선노동당 주앙위원회 명의로 작성한 이 편지를 마오쩌둥에게 보냈으며,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수세에 몰린 북한군의 다급한 처지가 기록돼 있다.

     앞서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패주하면서 중국 망명정부 수립을 준비 중이던 김일성은 ‘경애하는 마오쩌둥 동지’ 앞으로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 위험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며 "중국인민해방군이 직접 출동해 지원해 달라.”고 적었다.

    미국의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에서 중국 참전 결정의 모습이 상세히 기록했다.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동이 틀 때까지 줄담배를 피웠으며, 중국과 한국의 지도를 하염없이 쳐다봤다. 하지만, 갈수록 중국이 참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해졌다. 타이완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고, 미군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싶었다.

    그는 이번 전쟁의 승패가 가져올 정치적 여파를 꼼꼼히 계산했다. 미군이 참패를 맛볼 것이라 확신했다. 국공내전을 치르느라 쇠약해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항미원조 관련 물품들
    ▲ 항미원조 관련 물품들
     
  • ▲ 항미원조 관련 물품들
    ▲ 항미원조 관련 물품들
     
  • ▲ 중공군의 휴대용 밥그릇
    ▲ 중공군의 휴대용 밥그릇
     
  • ▲ 중공군의 군용 컵
    ▲ 중공군의 군용 컵
     
  • ▲ '항미원조' 문구를 새긴 인주통
    ▲ '항미원조' 문구를 새긴 인주통
     
  • ▲ 중공군 가방
    ▲ 중공군 가방
     
  • ▲ 중공군의 상이군인 수첩
    ▲ 중공군의 상이군인 수첩
    전쟁 당시 그들이 입은 솜을 넣은 군복, 비상식량이었던 미숫가루를 담은 자루와 순모로 만든 군용담요, 항미원조의 구호가 적힌 법랑과 컵 등 군용물품을 보면 당시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남한에 비해 철저한 준비 끝에 북한을 도와 한국전쟁에 개입했음을 알 수 있다.
  • ▲ 미숫가루와 곡식 등을 넣어 어깨에 차던 중공군의 전투식량 주머니
    ▲ 미숫가루와 곡식 등을 넣어 어깨에 차던 중공군의 전투식량 주머니
     
  • ▲ '항미원조' 기념훈장
    ▲ '항미원조' 기념훈장
     
  • ▲ 항미원조 문구를 새긴 상징물품 ⓒ 뉴데일리
    ▲ 항미원조 문구를 새긴 상징물품 ⓒ 뉴데일리
     
  • ▲ 중공군의 휴대용 수통
    ▲ 중공군의 휴대용 수통

    육군교육사령부의 ‘한국전의 기동전 분석’ 자료에 따르면 중공군 병사는 통상 하루 치 식량을 휴대했고 대대와 연대에서 각각 이틀 치 추가식량을 보유했다. 중공군 전투식량인 초면(炒麵)은 미숫가루와 비슷했다. 미군 보병사단은 식량 등 하루 보급품이 600t인 데 비해 북한은 60t, 중공군은 50t에 불과했다.

    겨울에는 야전상의를 뒤집어 입고 눈밭을 다니며 폭격을 피했다. 그들은 한국인의 기억에서 흰색 망토 같은 천을 두른 무뚝뚝한 사람들로 남았다. 전쟁 당시 사용했던 물품들을 당시 6·25전쟁에 나선 중공군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중공군의 모든 물품에는 ‘항미원조’ 문구가 선명하다.

    중국 측의 공식 통계로 6·25전쟁에서 전사한 중공군은 18만3108명이다. 미군 전사자 5만4246명과 유엔군 전사자 2143명을 합친 것보다 3배 이상 많은 수치다.

    며칠전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는 한국전쟁 전문가 상하이대 화동사범대 선즈화 교수의 말을 인용해 "한국전쟁은 북한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소년의 스탈린이 승인하면서 초래됐다"고 보도했다. 중국 정부의 기관지가 6.25를 남침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미군에 대항해 북한을 도왔다며 정당성을 주장했던 그들이 남침을 인정하는데 꼬박 60년이 걸렸다.

    2008년 한국통계정보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6.25'전쟁'을 일으킨 나라를 묻는 질문에 '북한'이라고 제대로 답한 학생은 59.9%에 불과했다. 특히, 초등학생 35.1%는 "한국이 일으켰다"며 북침설를 주장했다.또한, 2004년 국방부가 실시한 입대장병 의식조사에서는 75%가 반미감정을 드러내며 공산주의에 비해 자유민주주의가 우월하다고 답한 장병이 36%에 불과했다고 하니, 대한민국체제에 대한 불신과 북한체제에 대한 수용적 태도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6.25전쟁에 대한 이해 미흡과 친북적 인식은 대한민국의 안보에 우려스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6.25전쟁 발발 60주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들이 아직 너무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