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 생머리, 천상의(?) 노래를 부르는 세 여자들이 덕산에 가려고 하는 목적은 온천욕을 위해서였다.

    세 명의 여자들은 극도로 말을 아꼈고, 덕산까지 오는 내내 딱 두마디만을 했을 뿐인데, 그 두마디를 통해 여자들이 덕산까지 가려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성규와 함께 차 안에 타고 있던 여자 둘은 어땠을지 몰라도 나와 지만이와 함께 트럭의 짐칸에 타고 있던 여자는 그처럼 말수가 적었다.

    왜 덕산에를 가느냐고 지만이 물었을 때 짐칸의 여자는 온천욕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덕산이 온천으로 유명하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래서 덕산에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예산에서는 무슨 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느냐고 묻자, 여자는 당연히 노자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들은 서울에 있는 '천상의 아카펠라 합창단'의 멤버들인데, 덕산온천이 좋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오다 마침 노자가 떨어져 아까 거기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거라고 했다. 그 장소가 노래를 부르기에 마침 좋은 장소였고, 누군가 자신들을 도우러 올 사람들을 불러오기 위해서 그랬었던 거라고 했다.

    여자는 지만이의 물음에 그와같이 대답하고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여자의 얘기를 들어보면 긴 생머리의 세 명의 여자들이 예산의 그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은 일종의 낚시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들을 덕산까지 데려다 줄 물고기를 낚기 위한 낚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여자들이 쳐놓은 그 낚시에 걸린 물고기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알고보면 낚시에 걸린 물고기의 신세였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낚시에 걸린 모든 물고기가 다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이게 웬 떡이냐 싶게 좋아하는 물고기도 있는 것이었다. 자기가 걸리기를 바라는 낚시에 걸린 경우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는, 성규는 잘 모르겠고, 적어도 트럭 짐칸에 타고 있던 나와 지만이는 여자들의 낚시에 걸려든 게 마냥 즐겁고 신날 뿐이었다.

    덕산에 도착해서 또 한차례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여자들이 각각 남탕 여탕으로 들어가지 말고 가족탕이나 연인탕에 들어가 함께 온천욕을 즐기자고 했다. 가족탕이니 연인탕이니 하는 게 있는 줄도 알 수 없었지만, 여자들이 함께 목욕탕엘 들어가 온천욕을 하자는 데에는,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물론 여자들이 그러는 데에 전제조건이 없지는 않았다. 자신들의 온천욕비를 우리들 보고 대신 해결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전제조건을 충족시키는 건 우리로써는 하등 어려울 게 없는 일이었으므로, 여자들이 우리와 함께 온천욕을 하겠다고 하는 건 여자들의 조건을 넘어서도 한참은 넘어서는 서비스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연인탕이라는 게 있었다. 일반탕보다 가격이 배의 배가 비쌌다. 일반탕보다 배의 배가 비쌌지만, 돈이 아깝다는 생각같은 건 들지 않았다. 그보다 몇 배가 더 비쌌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여자들이 천상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인된 사실이었지만, 여자들이 천상의 몸매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었다. 옷이란 일반적으로 여자들의 몸매를 돋보이게 하지만, 그와같지 않을 경우도 있는 모양이었다.

    여자들의 경우가 그럴 듯 했다. 옷을 입고 있었을 땐 별로 못 느꼈는데, 옷을 벗고 나신이 된 여자들은, 천상의 몸매였다. 천상의 몸매라는 게 있을 수 있는 거라면, 이 세 여자의 몸매와 같지 않거나 버금가지 못하고서는 결코 성립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여자들이 천상의 몸매를 가진 터라 온천욕을 하는 도중 수시로 그게, 발딱발딱 서곤 했다. 물론 나의 경우이다. 지만이와 성규의 경우에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내 발등에 떨어진 불 탓에, 지만이와 성규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짐작컨데, 지만이나 성규도 마찬가지였지 싶다. 저런 몸매를 코 앞에 두고 꿈쩍않을 남자란, 적어도 여기 대한민국에는 없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참을 수 없는 나머지 몇 번인가 세 여자에게 돌진해 그 짓을 하려고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그 때마다 세 여자들은 완강히 거부했다. 여기서는 그걸 할 수 없고, 그건 나중에 하자고 했다. 나중 언제냐고 물어보면 세 여자는 대답은 않고 씨익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 씨익 웃는 모습은 더욱 고혹적이고 유혹적이었다. 세 여자의 씨익 웃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온천욕은 그만 하고 어서 빨리 나가고 싶어졌다. 온천욕은 뭐 말라비틀어진 온천욕이란 말인가. 세 여자가 여기서는 그 짓을 할 수 없고, 그건 나중에라고 하므로 그 짓을 할 수 있는 장소로 나가는 게 무엇보다 서둘러야 할 급선무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여자들의 목욕은 더디고 느리고, 길었다. 우리들은 후딱 목욕을 끝냈지만, 여자들은 우리들이 후딱 한 목욕 열 번은 반복되었을 만큼 하고도 목욕이 끝나지 않았다.

    여자들이 마치 어린아기에게 하듯 우리들에게 비누칠을 해주고 물을 끼얹어주고 때를 밀어주었었다. 여자가 내 몸을 더듬으며 비누칠을 해 줄 때 내 그게 대포의 포신처럼 발끈 섰다. 그럴 수 밖에 없었는데, 여자의 손길이 아주 부드럽고 감미롭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자극적이어서였다. 그러나 여자는 나의 발끈 선 그걸 보고도 무심하게 거기에도 살짝 비누칠을 하고는 지나쳐갔다. 나는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비애감이 들기도 했다. 나의 발끈 선 그게 여자에게 아무런 감흥도 영감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게 부끄러웠고, 화가 났고, 비애감이 든 탓이었다.

    우리들도 여자들에게 비누칠을 해주고 물을 끼얹어주고 때를 밀어주려 하였다. 여자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해주었으므로, 우리도 여자들에게 그렇게 해주는 게 예의일 터였다. 그러나 여자들은 사양했다. 자기는 자기들끼리 하겠노라고 했다. 그런 게 어딨냐고 우릴 해주었으니 우리도 마땅히 해주겠노라고 하지만, 여자들의 거부는 의외로 완강했다.

    여자들은 지들끼리 번채로 비누칠을 하고 물을 끼얹어주고 때를 밀었다. 간혹 지들끼리 그러면서 뭐가 좋은지 깔깔대고 웃어대기도 했다. 일찍 목욕을 끝낸 우리들은 그런 여자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욕탕 밖으로 나와야 했다. 나는 지들끼리 잘 노는 여자들을 보면서 한순간 쟤들은 레즈비언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옷을 입고 한참을 욕탕 밖에서 여자들이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좀처럼 여자들은 나오지 않았다. 지루하다 못해 짜증이 날 정도까지가 되어서도 여자들은 욕탕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참지 못한 지만이 욕탕문을 열고 안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만 좀 하고 나옵시다 라고.

    그러나 실제 우리가 여자들을 기다린 시간은 생각보단 길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실제 현실의 일반적인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들에 대한 욕망이 치밀대로 치밀어 올라있는 우리에게는 단 일 분 일 초도 기다리기에는 지나치게 긴 시간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보면 그때 우리가 너무 오래 여자들을 기다렸다는 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여자들이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 우리들은 당연히 여자들을 데리고 여관이나 모텔로 들 참이었다. 그건 거의 예정된 수순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목욕을 마치고 나온 여자들이 다른 소리를 했다. 다시 수덕사로 가 구경을 하고 저녁을 먹고 생각해보자는 것이었다.

    아랫도리가 급하긴 하였지만, 여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여자들이 우리들의 흥분된 아랫도리를 외면하고 달아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여자들이 야속하기도 하고, 얄궂기도 했다. 연인탕에 들어가 같이 목욕을 하자고 해서 아랫도리의 욕망을 한껏 부풀어오르게 만든 장본인이 여자들이었다. 그래놓고는 이제와서 그건 나중으로 미루고 수덕사 구경부터 하자니.

    어쩌면 이게 여자들의 전략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의 욕정이 뜨겁게,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절을 구경한다고 해서 우리의 눈 먼 욕정이 가라앉을 리는 없었으니까.
     
    내게로 와요.
    나와 함께 가요
    지구는 이제 신물이 나지 않는가요
    지구는 더 이상 섹시하지 않아요
    내게로 와요
    내가 그대를 달의 나라로 안내하겠어요
    달의 나라는
    새로운 땅, 섹시한 땅
    삶은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수덕사로 오는 내내 나와 지만이와 함께 트럭 짐칸에 몸을 실은 여자는 노래를 불렀다. 여자는 여전히 말수가 적었고, 말하는 대신 노래를 불렀다. 여자의 노래는 역시 듣기에 너무 좋았다. 그러나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자의 노래는 좋지만, 여자의 몸매는 더 좋다는 것이었다. 노래는 그만 듣고 이젠 좀 여자의 몸매를 감정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수덕사에 오자고 한 건 절도 절이지만 보다 더 수덕사 여관 때문이었어요."
     "수덕사 여관?"

    여자들의 그 말에 우리의 귀가 솔깃해졌다. 여자들이 덕산에서 안 하고 굳이 수덕사까지 가자고 한 게 이런 깊은 속뜻이 있었구나 싶어져서였다. 수덕사 여관이라는 그걸 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따로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여자의 말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수덕사 여관은 옛날 여관이에요.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지요."
    "엥? 그럼 왜 거길 가자는 거야.?" "옛날에 그곳에서 이응노 화백이란 분이 머물렀었지요. 이응노 화백의 추억과 흔적이 베어있는 곳이 거기이지요." "이응노 화백?"

    지만이나 성규는 이응노 화백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여자들에게 대꾸를 했다.

    "영화배우 윤정희를 북한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다 못 데리고 간 그 사람 말하는 거요?"
    "그건 모함이에요. 이응노 화백님은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으세요. 그런 짓을 할 분도 아니구요."
    "모함은 무슨 모함.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긴데."

    솔직히 나는 이응노 화백에 대해 잘 몰랐다. 그의 그림 한 점 글 한 줄 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니, 곰곰 생각해보면 의도적인 것일 수도 있는 일이긴 하겠다. 나는 어려서 영화배우 윤정희를 무척 좋아했는데, 그래서 박통을 심각하게 미워하기도 했었다. 그가 윤정희를 건드렸고 그래서 윤정희가 프랑스로 갔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러나 이건 소문이 아니라 윤정희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한 얘기였다. 이응노 화백 내외가 자신과 남편 백건우를 납치해 북한으로 데리고 가려 하였었노라고.

    그래서 이응노 화백을 알게 되었고, 내가 이응노 화백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이유였다. 실상 그게 내가 이응노 화백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의 전부이기도 했다. 헌데, 그 이응노 화백이 한때 젊어서 여기 수덕사 여관에 머물며 배고픈 그림을 그리기도 한 모양이었다.

    내가 이응노 화백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는 걸 눈치챈 탓인지 여자들은 쉽사리 그에 대한 얘기를 접었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누구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인지는 모르겠다. 나의 입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었고, 지만이의 입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성규의 입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었다. 하여간 누구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인지는 불확실하지만, 그런 말이 들려왔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아가씨들 노래나 한 번 뽑아보지. 죽여주게 노래를 잘하던데."

    하지만 여자들은 노래를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청을 해왔다.

    "술이나 한 잔 해요."

    우리가 저녁을 하고 반주로 술 대여섯잔을 하고 나왔을 때, 밖은 이미 어두웠다. 밖의 어두운 밤세상이 괜시리 반가웠다. 오늘 내내 달고 다니던 우리의 아랫도리 욕정이 그렇게 어두운 밤의 시간을 반기고 있었다.

    우리는 수덕사 아래의 새로 지은 결코 아담하지 않은 모텔을 찾아들었다. 그렇게 하자고 누구 하나 대놓고 주장한 사람은 없지만, 그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늘 우리가 긴 생머리의 세 여자들을 만나고, 여자들과 함께 온천욕을 하고, 수덕사와 수덕사 여관을 찾아온 이 모든 게 이벤트라면, 모텔에 들어 여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은 이벤트의 메인이요 하이라이트요 끝이었다. 우리나 여자들이나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거기에 의구심을 가져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우리가 원하는 것이었고, 또한 여자들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발가벗은 채였다. 몸을 좀 움직이자 몸이 몹시 찌푸둥하고 무거워 잘 안 움직여지는 게, 지난밤 일을 생각나게 했다. 지난 밤은 정말이지 격정적인 밤이었다. 여자 셋을 상대하는 혼음의 밤이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세 여자가 모두 에네르기가 철철 넘치는 젊은 아가씨들이었으니.

    옆의 지만이도 벌거벗은 채였다. 성규는....성규는 보이지 않았다. 여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성규가 여자들과 함께 잠시 밖에 나간 건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담배 생각이 나 주머니를 뒤지자 지갑이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방박닥에 떨어진 게 아닌가 싶어, 모텔 방바닥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하단 생각이 들어 지만이를 깨우고, 지만이에게 그의 지갑을 살펴보라고 일렀다. 지만이의 지갑도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묘연했다. 나와 지만이는 아뿔싸 하는 생각이 들었고, 지갑과 마찬가지로 사라진 성규를 향해 정신없이 핸드폰을 때렸다. 성규의 핸드폰 벨소리는 방안에서 울렸다. 성규는 핸드폰을 놓아두고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성규와 여자들은 연락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았다. 여자들이 돌아오지 않는 거야 그러려니 하지만 성규가 돌아오지 않는 것은 의문이고 걱정이었다. 여자들이 성규에게 집단으로 해꼬지라도 한 게 아닌가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엉뚱한 생각 때문에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성규의 실종신고를 낼까 싶기도 했다. 결국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유혹에 몹시 시달렸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낮 열 두시에 모텔을 나왔다. 더 성규를 기다려보고 싶었지만, 낮 열 두 시에는 모텔을 비워야 했다. 모텔을 나온 나와 지만이는 딱히 갈 데가 없었다. 수덕사 아랫 마을을 한 두차례 거닐다, 결국 서울로 올라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지갑을 도난당하기는 했지만 어제 술을 먹고 술값을 계산하면서 지갑에 넣어놓지 않고 주머니에 그냥 쑤셔박은 돈이 있어, 다행히 그 돈으로 서울행 차표를 끊을 수가 있었다.

    서울행 차편에 몸을 실으면서 다시 한번 성규가 걱정스러웠다. 이대로 서울로 가버려도 되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애써 스스로를 달랬다. 성규는 다 큰 어른이고, 지 앞가림은 지가 알아서 할 거라고. 성규가 사라진 건 일이지만, 그렇다고 큰 일이 생긴 건 아닐 테고, 조만간 성규로부터 연락이 있을 거라고. 진득허니 기다려보는 게 지금으로써는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말이다.

    나와 지만이가 스스로를 달래는 데 사용했던 그 논리들은 의외로 적절했다. 다음날 오후 성규가 우리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틀만에 거지같은 꾀죄죄한 모습으로 나탄나긴 하였지만. 이틀만에 우리 눈 앞에 나타나 털어놓는 성규의 얘기는 대강 이랬다.

    성규는 누군가 궁시렁대는 소리 때문에 눈을 떴다고 했다. 여자들이었다.

    눈을 뜬 성규가 발견한 것은 세 여자가 우리들의 호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훔치고 있는 정경이었다. 그 모습을 본 성규는 무슨 짓을 하느냐고 조건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세우며 여자들에게 항의를 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모른 체 하고 가만히 있다가 여자들이 지갑을 훔쳐 달아날 때 일어나 나와 지만이를 깨워 여자들을 추적했더라면 그런 수모를 당하지는 않아도 되었을 것이었다. 몸을 일으켜세우며 무슨 짓을 하느냐고 성급하게 소리치는 바람에 여자들이 성규가 자신들이 하는 못된 짓을 다 보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래서 성규를 가만두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이었다.

    세 명의 여자가 성규를 둘러싸 강제로 옷을 입히고 또 강제로 밖으로 끌고 나갔고, 성규의 낡은 트럭에 태워 자신들과 함게 도주의 길에 동행시켰던 것이었다.

    물론 여자들이 성규를 영원히 자신들의 도주의 길에 동행시키지는 않았다. 한나절을 가서 거기가 어딘지도 모를 벌판의 한가운데에 성규를 홀로 떨어뜨려 놓고 굿바이 아저씨라는 한마디만을 남겨놓고는 성규의 낡은 트럭을 타고 길의 끝으로 달아나버렸던 것이었다.

    홀로 낯선, 쌩판 모를 곳에 버려진 성규는 걱정많은 한 사람을 만날 때까지 수형자처럼 사방을 헤매어야 했다. 걱정많은 그 사람을 만나고서야 방향을 잡을 수 있었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성규가 버려진 곳은 어느새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였다.

    성규는 그 걱정많은 사람으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변통해 서울로 올라올 수가 있었다. 그 걱정많은 사람은 정말이지 걱정이 많아서 여자들에게 사기당해 버림받고 길을 헤매이는 성규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성규를 위해 무엇이든 하려 하였던 것이었다.

    성규의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우리가 내린 결론은, 나와 지만이와 성규가 동일했다. 결국 우리가 만난 그 여자들은 꽃뱀이었다는 것이었다.

    천상의 목소리와 천상의 몸매를 지니고 있어 그 사실이 자꾸 희석되어지기는 하지만, 우리의 돈과 지갑 그리고 성규의 낡은 남색 트럭을 무단으로 훔쳐갔다는 점에서 꽃뱀은 꽃뱀이었다. 여자들이 꽃뱀이라면, 결국 우리들은 꽃뱀들에게 당한 한심한 녀석들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렇게, 생각처럼 한심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꽃뱀도 꽃뱀 나름이라는 생각이 드는 탓이었다. 천상의 목소리에 천상의 몸매를 지닌 꽃뱀이라면, 이들에게 당해도 싸고 별로 속상할 일이 아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