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1일 오피니언면 '동아광장'에 이상묵 삼성생명 상무(경제학 박사)가 쓴 '신용불량 기록 말소의 위험성'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신용불량자 대책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우리나라의 신용불량자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다. 신용등급이 낮아 제도권 금융기관과의 신용거래가 사실상 불가능한 국민이 72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성인 인구 3560만 명의 20% 수준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가장이고 가장의 문제는 가족 전체의 문제인 점을 감안하면 그 심각성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금융시장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기형적이다. 최근 사정이 다소 어렵기는 하지만 금융시장은 앞으로도 자금 과잉 상태가 지속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기관들이 잠재고객의 20%를 영업대상에서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있고, 그 반사이익으로 대부업과 사채업이 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현실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 어디엔가 시장실패가 존재하고 있다.

    저(低)신용등급자가 이렇게 많아진 배경은 사상 초유의 가계금융 팽창기에 가계와 금융기관, 감독 당국이 미숙하게 대응한 데 있다. 가계부문에 신용이 과다하게 공급되면서 채무불이행자가 양산됐다. 그런데 이들 중에는 채무가 단기적인 소득수준을 초과해서 채무를 불이행하기는 했으나 평생소득의 관점에서 보면 채무를 이행할 수 있었던 사람이 다수 섞여 있다. 현금서비스 100만 원을 돌려 막다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사회 초년생이 단적인 예다.

    신용 좋은 사람까지 의심받게 돼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량신용기록을 일괄해서 말소하자는 이야기가 있다. 과거를 지우고 모두 새로 시작할 수 있도록 해 주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안은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불량신용기록을 말소하더라도 성인의 20%가 자력으로 채무를 상환하지 못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 자체와 금융기관의 인식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불량신용기록을 말소하면 금융기관들이 20%와 나머지 80%도 분간하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될 뿐이다.

    기록을 말소하면 금융기관은 어떻게 행동할까? 모두 신용이 좋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모두 신용불량자로 의심하고 행동할 것인가?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금융기관은 대출 창구에 나타난 모든 사람을 의심의 눈으로 샅샅이 점검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720만 명의 최소 두 배인 1440만 명의 성인이 기록이 말소된 신용불량자였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받아 제도금융권 이용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이는 가계금융의 위축으로 이어지고 그 혼란은 금융기관이 말소된 신용기록을 원본에 가깝게 복원했을 때 비로소 해소될 것이다.

    바람직한 신용불량자 대책은 단기적인 소득과 채무 간의 불일치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과 평생소득을 감안하더라도 결국은 채무를 이행할 수 없는 사람을 재분류하는 시장의 프로세스를 유도하고 촉진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저신용등급자로 떨어지고 난 후 대부업체에서 빌린 고금리 차입금을 상당 기간 제대로 상환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제도금융권을 이용하더라도 문제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신용등급은 신속히 상향 조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업체를 이용한 실적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심지어는 문의한 사실만으로도 신용등급이 하락하는 것이 현재의 신용평가체제다.

    상환능력 고려한 재분류 바람직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대부업체 차입금 상환실적을 포지티브 정보로 신용정보에 포함시키는 등 신용평가제도를 개편할 필요가 있다. 또 대부업체 상환실적이 좋은 사람에 대해 공적기관이 신용보증 서비스를 지원해 제도금융권으로의 재진입 속도를 높이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금융기관 차원에서도 해법을 찾는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 대형 대부업체에 고수익을 올려 주는 고객을 경직적인 신용평가방식 때문에 문전박대함으로써 잠재적인 수익기반을 포기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신용불량자 문제를 사회복지 차원에서 접근하면 한도 끝도 없다. 더욱이 우리 사회에는 신용불량자보다 우선적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아야 할 저소득계층이 많다. 신용불량자 대책은 금융시장의 실패 요소를 찾아내고 그것을 교정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