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창균 정치부 차장이 쓴 <이명박의 '혹 달기' 고심(苦心)>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16대 대선 다음날인 2002년 12월 20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측근 학자 여섯 명을 불러 모았다. 대통령직 인수위 구성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그 자리에서 노 당선자가 처음 한 말이 “혹 뗐다”였다. 함께 공동정부를 꾸리기로 했던 정몽준 의원이 대선 전날 공조(共助)를 깬 것을 가리킨 것이다. 정 의원은 노무현 정권이 탄생할 경우 상당한 지분을 확보해 놓고 있었는데 스스로 그 옵션을 걷어찼다. 노 당선자가 오죽 홀가분했으면 “혹 뗐다”는 말부터 꺼냈을지 짐작이 간다.

    노무현-정몽준 커플은 합방 하루 전에 파경을 맞았지만, 김대중-김종필 커플의 DJP연합은 상당 기간 지속됐다. 그러나 공조 기간 내내 양쪽 진영에선 서로를 향한 볼멘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DJ 쪽은 “(JP는) 대선 1000만표 중에서 충청권 40만표 벌어준 것밖에 없는데 정권은 반반씩 나눠먹자고 한다”고 했다. ‘염치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반면 JP 진영은 “(DJ는) 우리가 보탠 표가 아니었으면 절대로 집권할 수 없었다. 그런데 화장실 다녀와서는 딴소리를 한다”고 했다. ‘신의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DJP 공동정부는 JP의 자민련이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건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2001년 9월 붕괴됐다. DJ는 집권 3년 반 동안 JP라는 혹을 달고 다닌 것이다.

    권력을 나눠 갖는다는 것은 이처럼 성가신 일이다. ‘권력은 아들과도 나눠 갖지 않는 법’이라는 옛말이 그냥 나왔겠는가.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박근혜 전 대표를 끌어안으라는 당내 주문에 대해 머뭇거리는 심정도 그래서 이해가 간다. 박근혜라는 ‘성가신 혹’을 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선거를 앞둔 후보의 짝짓기 대상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 주는 정치인이다. 가령 미국에선 대선 후보가 동부 출신 상원의원이라면 서부 혹은 남부 출신 주지사를 부통령 후보로 고른다. 이런 선택을 ‘대통령·부통령 후보 티켓의 균형을 맞춘다(balance the ticket)’고 부른다.

    이런 정치공학대로라면 이 후보는 굳이 박 전 대표와 손잡지 않아도 된다. 지난 8월 19일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 후보는 서울과 호남이라는 한나라당 약세 지역에서 압승을 했다. 이 후보 자신이 ‘한나라당 티켓의 균형을 맞추는’ 득표력을 보여준 것이다. 반면 이 후보는 한나라당의 심장부라는 대구·경북에서 완패했고 영남 전체에서도 박 전 대표에게 밀렸다. 이들 박 전 대표 지지자들은 어차피 한나라당 울타리를 벗어나 범여 진영 후보에게 옮겨가기 힘들다. 이런 계산을 하다 보면 이 후보 진영이 “박 전 대표 진영과 불편한 공조를 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장밋빛 시나리오는 대선까지 4개월, 이 후보가 앞이 훤하게 뚫린 탄탄대로를 달린다는 조건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 후보는 한나라당 주변을 맴돌던 산토끼들을 몰아 왔지만, 한나라당 핵심 지지층인 집토끼의 마음은 얻지 못했다. ‘이명박 지지자’는 표면적은 넓지만 뿌리는 옅다. 비바람이 몰아치면 쉽게 흔들릴 수 있는 구조다. 그리고 이 후보 앞에는 지난 두 차례 대선에서 노하우를 축적한 범여 네거티브 전문가들의 가혹한 공세가 기다리고 있다. 이런 악천후를 헤치고 가려면 어떤 경우에도 한나라당 깃발을 놓지 않을 ‘박근혜 지지자’들로 방어막을 구축해야 한다. 이 후보가 단독 플레이로 대선 고지를 넘는다 해도 ‘좌파정권 10년 적폐’를 청산하고 세상을 바꾸려면 한나라 핵심 지지층의 응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후보가 결심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먼저 서두를 일이 있다. 어렵사리 승복 결정을 내린 상대를 향해 “반성해야 한다”는 황당한 말을 하는 측근들을 조심시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