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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8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권영빈 논설고문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열린우리당의 창당정신(지역주의 타파, 국민통합 정치)은 정치인 노무현이 지난 20년 동안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일관되게 매진해 왔던 가장 소중한 가치입니다. 하도 간절하여 정치적 목표를 넘어선 삶의 가치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열린우리당이 무너지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5월 7일 청와대 브리핑에 올린 글이다. 그의 논리는 당당하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평생 이 가치를 위해 헌신해 왔고, 그가 설정한 대의와 원칙에 따라 어려운 길을 걸어 대통령직에까지 올랐다. 그런데 그가 어렵사리 쌓아올린 당이 무너지고 있다. 대통령.국회의원이 되고자 당을 깨고 만들고 지역을 가르고 야합하고 보따리를 싸들고 이 당 저 당 옮겨다니는 구태정치의 고질병이 도지고 있다. 정치인 노무현의 비분강개는 당연하다.
정치인 노무현은 논리정연한 글에 절제된 감정과 호소력을 배합해 독자의 심금을 울릴 줄 아는 논객이다. 또 자신은 부인하고 있지만 여전히 전략가다. "대선 주자 한 사람은 당을 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한 사람은 당의 경선을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다닌다"며 김근태 정동영 두 전직 의장을 지목해 이들이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국민통합정치를 하겠다고 창당선언문을 낭독한 사람이 맞느냐고 묻는다. 당을 해체할 정도로 잘못됐다면 정치를 깨끗이 그만두는 게 국민에 대한 도리라고 몰아붙인다. 논리는 명쾌하고 주장엔 강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내각책임제도 아닌 막강한 대통령제하의 현직 대통령은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다. 그것도 대선을 눈앞에 두고 엄정하고도 중립적으로 선거를 치러야 할 현직 대통령이 탈당까지 한 시점에서 이런 인신적 비판을 가차없이 할 수 있는가. 이미 노 대통령은 여러 대선후보를 차례 차례 비판한 적이 있다. 대통령이 대선후보 저격수로 명명되는 것도 민망하다. 대통령은 논객이 아니다. 억장 무너지는 아픔이 있더라도 이젠 가슴에 묻어두고 갈 수밖에 없는 외로운 자리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역주의 타파와 국민통합은 여전히 유효한 정치적 목표다. 그러나 이젠 기본적 덕목에 그칠 뿐이다. 보다 더 긴요한 시대적 대의와 원칙, 그리고 방향 설정이 절실한 시점임을 노 대통령은 간과하고 있다. 이른바 1987년 체제가 20년이 됐다. 특히 지난 10년의 집권 결과 좌파 진보정당으로선 일류국가가 될 수 없다는 절박한 공감대가 설정되어 있다. 그래서 노무현당으로선 국회의원이 되기 어렵고 대선후보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됐을 것이다. 그들의 이합집산은 지난 10년에 대한 반성이고 새로운 2008년 체제를 나름대로 찾아 헤매는 껍질이 깨지는 진통이라고 본다. 보다 더 처절하게 깨지고 보다 더 맹렬하게 새로운 가치와 체제 방향을 찾아나서야 한다.
삼성경제연구소가 10년 후 세계경제 성장을 예측한 조사를 내놨다. 2006년 세계 국내총생산(GDP)은 47조6000억 달러고 10년 후면 67조 달러가 된다고 예측한다. 약 20조 달러 늘어난 부를 누가 얼마만큼 차지할 것인가. 현재의 성장률로 전망하면 미국이 24%, NAFTA(미국 캐나다 멕시코)가 28.8%, 유럽연합(EU)이 22.4%, 중국이 16.8%임에 비해 한국은 고작 2.6%의 부를 배분받을 수 있다. 그나마 자동차 반도체 조선 등 경기가 호황일 때 가능한 일이지만 10년 뒤면 이 모두 둔화될 수밖에 없다. 성장동력의 새 수종(樹種)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 기업 노동자 모두 총력체제로 나가야 한다. 규제를 풀고 기업의 활력을 솟구치게 하고 창조적 인재양성 체제를 재구성해야 한다. 그런 자질을 갖춘 후보들이 각자의 2008년 체제 구상을 발표하고 국민의 선택을 기다려야 한다.
막연히 몇% 경제성장 운운하는 구두선(口頭禪)으론 안 된다. 무슨 동력으로 20조 달러 배분을 향해 뛸 것인가, 그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이후 노 대통령 지지도가 높아진 것도 2008년 체제를 향한 시도라고 국민은 보기 때문이다. 87년 체제가 깨지는 분열과 혼란을 걱정하기보다는 새 시대를 여는 정비작업을 대통령이 남은 임기 중 추진하기를 기대한다. 시계추는 좌우로 움직인다. 지금 시계 추는 분명 우로 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