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택시기사 일을 하면서 뉴데일리에 '삶, 그 길을 걸으며'를 연재하는 이나향씨의 글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늦은 밤, 우산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가 우두둑 우두둑 어둠 속의 적막을 깨트린다. 인적 없는 아파트 현관엔 휘몰아치는 바람에 떠밀려온 빗줄기가 바닥에 고이면서 차츰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화장을 곱게 한 한 여인이 생기 넘치는 웃음을 흘리며 그곳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우산을 접어 털어내는 소리와 함께 여인의 억제하지 못하는 콧노래가 조용한 공간에 울려 퍼져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여인은 사뿐한 걸음으로 그곳에 들어섰다. 여인이 내릴 층의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는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서서히 움직여갔다. 문을 바라보고 선 여인은 조금 전까지 같이 했던 한 남자와의 시간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때, 차가운 액체가 한 방울 그 여인의 이마에 떨어졌다. 생각에 빠져있던 여인은 아무런 의식 없이 손가락으로 그것을 닦아냈다.

    잠시 후 또 한 방울 두 방울 ...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져보던 여인은 그것이 젖어있지 않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엘리베이터 천정을 바라봤다. 천정 사방에도 역시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또다시 천정을 향하고 있던 여인의 이마에 연속해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여인은 당황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흠칫하며 무엇엔가 놀란 듯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여인은 동작을 멈췄다.

    얼굴을 감싸 쥔 여인의 손가락에 더욱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떨며 망설이던 여인은 마침내 손가락 틈새를 살짝 열어 벽에 부착된 거울을 응시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그 여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졌다. 여인의 등에는 하얀 소복을 입고 긴 머리를 풀어헤친 채 비에 흠뻑 젖어 웃고 있는 다른 여인이 업혀 있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 들었던 ‘엘리베이터 귀신’ 이야기를 각색해 보았다. 지금도 비가 오는 날 밤 혼자서 엘리베이터를 탈 때면 가끔 이 생각에 혼자 웃곤 한다. 하여튼 조금 전까지 남편 아닌 남자와 오순도순 정답게 서로 꿀을 나눠 먹던 이 여인은 귀신의 장난에 혼을 잃고 만 것이다.

    4~5년 전에 교체된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에는 실제로 귀신이 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파트 주민들 중 누구도 이 귀신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이 귀신이 수시로 해대는 협박에도 전혀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강심장들을 소유하고 있다. 어쩌다 처음 타는 사람이나 귀를 솔깃하며 순간 공포를 느낄는지 몰라도 이 귀신은 지금 주민들에 의해 철저하게 왕따 당하는 신세가 되어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불안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데도 말이다.

    “정전입니다! 정전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세 살짜리라도 절대 기다리지 않고 집으로 향한다. 닫힌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귀신은 또 혼자 허탈하게 괴담을 늘어놓고 있다. “정전입니다. ...”

    말이 한 번 터지니 새로운 말이 또 꼬리를 물로 나온다. 오늘은 어쩔 수 없다. 내친 김에 엘리베이터 시리즈를 엮어보아야겠다.

    오늘 새벽,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엘리베이터를 탔었다. 습관적으로 버튼을 누르고 시선은 바닥에 고정시킨 채 계속 생각을 더듬어 갔다. 63빌딩도 다 올라갔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엘리베이터는 멈추지 않았다. 이상해 바라보니 아뿔사! 또 내릴 층의 버튼을 누르지 않아 엘리베이터는 내내 1층에 그대로 서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가 왕왕 있으니 그럴 때는 스스로를 쥐어박는 방법 밖에는 별 도리가 없을 것이다.

    또 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데 한 여성이 “잠깐만요!”라고 구원을 청했다. 내가 내릴 곳보다 한참 아래층의 버튼을 눌렀다. 어색한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킨 채 또 무의식 상태로 빠져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반사적으로 내려 걸어갔다. 앞서가던 여자가 이상한 눈빛으로 계속 흘끔흘끔 뒤를 바라봤다. ‘왜? 나 지금 내 집에 가는 건데 뭐 잘못됐수?’

    이유 모를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통로 끝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긴장하여 주춤주춤하는 여성의 표정이 역력히 느껴져 왔다. ‘왜 그래? 이상하게. 가던 길이나 계속 갈 것이지... 그런데 이상하긴 이상하다. 못 보던 이웃인데? 언제 이사 왔지? 어, 우리 집 문고리를 잡고 있잖아? 도대체 누구야?’

    발걸음을 좀 더 급히 하여 집 앞에 다가갔다. 그 여인이 본능적인 방어 자세를 취해왔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 여성을 바라보며 초인종을 누르려했다. ‘뭐야 이거? 언제부터 여기가 801호였지? 아이고...’

    뒷걸음질 치는 그 여성에게 할 말이 없었다. ‘그러게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지 왜 따라 타가지고 사람 푼수 만들고 있어...’ 얼굴이 후끈 달아올라 오히려 적반하장의 마음으로 돌변하여 그대로 앞의 비상구문을 열고 위기를 탈출했었다. 그 여성에게 대인공포증이 생기지 않았길 바라고 싶다.

    하나만 더 이야기해보자. 그 날도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내릴 사람은 나밖에 없었으니 문이 열렸을 때 내리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안심하고 짧은 시간도 최대한 활용하는 노력을 해갔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무심코 내리는데 나와 교대로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사람의 시선이 왠지 모르게 기분 이상하게 느껴져 왔다. 그냥 이웃이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머뭇머뭇 눈인사를 보냈다. 그 사람도 여성이었다. 그렇게 나에겐 여성과 엘리베이터 인연이 질기게 이어져가고 있었다.

    터벅터벅 걸어 집 앞에 다다르니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듯 온갖 잡쓰레기가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이게 뭐야? 정리 좀 해 놓지...’ 허리를 굽혀 이것저것 주워 담아 놓고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어? 이 여자가 집을 안 지키고 어디 나간 거야? 또 이성을 차단시키고 잠에 빠져 들어갔나?’ 초인종을 다시 눌렀다. 어떤 인기척이 들리는 가 했는데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번에는 더 세게 신경질적으로 연속해 눌렀다. 그래도 묵묵부답이었다. ‘이 사람이 세상 포기했나? 안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기에...’

    차츰차츰 용광로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한 눈에 무언가가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못 보던 교회 표지며 이중자물쇠까지 새로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뭐야 이거? 이 여편네가 완전히...’

    마음이 더욱 다급해져갔다. 휴대폰을 꺼내 집으로 전화를 했다. 벨이 몇 번 울리지 않고 아내가 전혀 딴사람이 되어 상냥하게 대꾸하고 있었다.

    “어디야? 왜 안 들어와? ...”
    “뭐? 문 왜 안 열어?”
    “무슨 문? 집에 온 거야? 초인종 소리 못 들었는데. 잠깐만...”

    ‘이게 무슨 소리야?’ 머리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져 갔다. 잠시 후 휴대폰에서 아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는 거야, 자기. 또 장난하는 거야? 얼른 들어 와...”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내도 시원치 않을 순간이었다. 남의 집 문고리를 잡고 흔들고 있었으니...

    그 집에 주부가 있었건 누가 있었든지 간에 모니터를 통해 이상한 사람의 행동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모든 것이 나의 착각에서 비롯된 해프닝들이었다. 누구나 다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한 일이었지만, 그 이후로 나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면 요주의 인물로 손가락질 하지 않을까 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항상 시선을 천정, 벽, 바닥에 고정시키거나 게시판의 공고물을 뒤적이는 척 딴청을 피워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