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9일자 오피니언면 '광화문에서'란에 이 신문 권순택 논설위원이 쓴 '정운찬씨의 경우'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미국의 전현직 대통령 43명 중 대학 총장 출신은 28대 우드로 윌슨(1913∼1921년)과 34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953∼1961년) 대통령이 있다. 민족자결주의로 유명한 윌슨은 1902년부터 1910년까지 프린스턴대 총장을 지냈다. 대학총장 출신이라지만 그는 먼저 뉴저지 주지사로 성공한 뒤 대통령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영웅인 아이젠하워는 컬럼비아대 총장을 지냈지만 군인 출신이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 

    범여권의 구애(求愛)를 받고 있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에게 윌슨 대통령은 큰 힘이 될 듯싶다. 대학 총장 출신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윌슨만큼 잘 보여준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정 전 총장이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두 사람은 대학 동문인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도 1910년 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정 전 총장이 대선에 출마한다면 역대 대통령 선거 사상 가장 학벌 좋고, 학연 좋은 후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일류대학 총장을 지냈다고 좋은 후보, 좋은 대통령감이 될 수 있다면 굳이 정 전 총장일 필요는 없다.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과거에도 그런 후보들이 더러 있었다. 정 전 총장은 뭘 믿고 대통령 꿈을 꾸는 것일까. 남모를 비전과 전략이라도 있는 것일까.

    본인은 펄쩍 뛰겠지만 최근의 행보를 보면 그 역시 지역감정에 기대고 있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그는 충청도에선 ‘충청 중심론’ ‘충청 보은론’을 역설함으로써 자신이 이 지역 출신임을 강조하고, 호남에선 호남 사람들이 좋아할 말을 골라 한다. 지난주 전북대 특강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극찬한 것도 정책에 대한 소신만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서울대 송호근 교수는 그를 “데마고그(선동가)이기엔 너무나 온화한 그대”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선비이기엔 너무나 세속정치적인 그대’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를 대선에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은 15, 16대 때처럼 이번에도 ‘지역 대결 선거’를 꿈꾸고 있다. 충청과 호남을 묶기만 하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충청 출신인 정 전 총장이 나서준다면, 마땅한 후보가 없는 호남을 끌어들여 ‘충청+호남 대 영남’의 대결로 선거를 몰아가 51% 대 49%의 역전승을 거둘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 전 총장의 행보는 이들의 계산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 문외한이라고 정치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정당 경험도 없고 정치판에서 선거 한번 치러보지 않은 사람이 곧바로 대통령이나 총리에 도전하는 것은 선진국에선 극히 드물다. 백번 양보해 정치 이외의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아도 그걸 발판 삼아 대권을 노리지는 않는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을 18년이나 맡아 ‘경제 대통령’ 소리까지 들은 앨런 그린스펀이나, 지식정보화 시대의 문을 연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정치에 곁눈질이라도 하던가.

    대통령이 되려면 다양한 활동과 경험을 통해 정치력과 리더십을 검증받아야 한다. 그런 사람이 후보가 되는 것이 정상이다. ‘노무현 효과’일지는 몰라도, 정치공학적 연대(連帶)와 특정 시점의 사회적 분위기를 이용해 한순간에 ‘뚝딱’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통령을 넘봐서는 안 된다. 국민이 그렇게 만만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