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들 빨리 돌려보내!’

    한나라당 J의원은 사무처 당직자들에게 황급히 명령했다. J의원이 사무처 당직자들에게 서둘러 기자들을 돌려 보낼 것을 명령한 이유는 박근혜 대표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 대표의 측근인 J의원은 얼른 박 대표의 눈물을 기자들에게 공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박 대표를 유약한 정치인으로 보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박근혜 대표가 흐느끼고 있는 모습을 보며 J의원도 눈물이 자꾸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애써 눈물을 참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가슴은 자꾸만 저려왔다.


    박근혜 대표가 기자들과 대화를 마치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유는 한나라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과 박근혜 대표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과가 나타났다. 한나라당은 서울-경기-인천, 즉 수도권 빅3를 모두 여당에게 빼앗겼다.

    이런 참패로 인해 한나라당이 시름에 잠겨 있는 동안 열린우리당은 축제 분위기였다. 열린우리당은 수도권 빅3를 석권했으며 대전광역시장을 차지하고 광주광역시장과 전북지사까지 거머쥐었던 것이다.

    더욱 열린우리당을 즐겁게 만든 것은 충북-충남에서 아슬아슬한 표차로 한나라당 후보에 패배했다는 것이었다. 국민중심당이 한나라당 표를 상당히 잠식해 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타 지역의 경우 강원-제주-영남지역 전체는 한나라당으로 넘어갔고 전남은 민주당의 손으로 들어갔다. 강원-제주-영남은 한나라당이 별 어려움없이 승리했고 전남 역시 민주당이 큰 표 차이로 가져갔다. 하지만 민주당 역시 전북을 빼앗긴 것과 광주광역시장을 극히 근소한 표차로 빼앗긴 것이 몹시 아쉬웠다. 민주당은 간신히 본전은 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이제 다음날 조간신문은 한나라당의 지방선거 참패를 1면 톱으로 올릴 것이 분명했다.

    한나라당의 지방선거 참패.

    있을 수 없는 이변이었다. 정치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중견 기자들조차도 이번 선거 결과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대 이변이었다. 이번 투표결과로 인해 보수진영의 한나라당에 대한 비난이 쏟아질 것이 당연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성향의 인터넷 정치 웹사이트들의 게시판에는 글들이 뜸했다. 너무 엄청난 패배 때문에 다들 망연자실해 있는 것이었다.

    정리하면 한나라당은 서울-경기-인천을 빼앗겼다. 물론 충북과 충남을 차지했고 강원과 제주, 영남 전체를 차지했지만 원래 수도권 빅 3 석권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만큼 한나라당과 보수진영 전체의 충격은 컸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은 왜 수도권을 모두 빼앗겼을까. 이제부터 하나씩 그 이유를 짚어보도록 하자.


    ‘우리가 너무 자만했어….’

    박근혜 대표가 울먹이며 말했다. 어느새 북적이던 기자들은 모두 사라지고 한나라당 대표실은 적막감만 감돌고 있었다. 한나라당 대표실에는 박근혜 대표의 몇몇 측근 의원들만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당연히 말이 있을 수 없었다. 너무나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2006 지방선거에서 ‘박풍’은 시들해졌다. 박 대표의 측근의원들은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어김없이 박풍이 불어 줄 것이라 크게 기대했지만 현장의 민심은 예전과 달랐다. 박 대표에게 내미는 손길들이 줄었고 박 대표를 바라보는 눈길도 냉담해져 있었던 것이다.

    한나라당 K의원은 말없이 창 밖을 응시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K의원은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았다. 그의 손에 빈 담배갑이 잡혔다. 답답한 마음에 갖고 있던 담배 한 갑을 다 피워 버린 것이다.

    이런 젠장, 담배 끊는다고 했는데.

    K의원은 담배 피우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기 위해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허를 찔렸어. 허를.

    K의원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K의원의 머릿 속에는 지방선거 이전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K의원은 지금 후회하는 중이다. 하지만 그 후회는 의미없는 일일 뿐이다. K의원은 그 사실을 알고 지나간 생각들을 지워버리기 위해 연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나간 생각들은 계속 K의원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강금실이를 너무 가볍게 봤나.

    K의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했다. 당해도 철저히 당했다.

    K의원은 갑자기 다음 대선 생각이 났다.

    다음 대선에서도 이렇게 당한다면?

    K의원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한나라당은 서울시장의 경우 결국 기존 당내 인사들 가운데 후보를 뽑지 못하고 외부 영입인사로 강금실 후보와 대결시켰다. 한나라당이 영입한 외부 영입인사는 CEO출신으로 유명한 Y씨.

    그러나 Y씨는 선거전 내내 고전했다. 친여 언론들이 모두 나서 Y씨의 과거 비리의혹을 캐내기 시작했고 이런 자료들은 강금실 캠프와 강금실 후보 자발적 지지세력의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

    또한 강금실 캠프는 뛰어난 선거전략으로 자만에 빠진 한나라당을 무찔렀다. 강금실 캠프는 서울시장 선거 판세에는 호남표의 결집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반 한나라 연합 전략’을 폈다. 그로 인해 민주당 측 후보는 호남 유권자들에게 거의 버림받고 말았다. 민주당으로 흘러들어가는 표는 사실상 죽은 표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호남이 고향인 유권자들이 대거 강금실 후보를 선택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한나라당 서울시장’을 만들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강금실 후보는 당찬 모습으로 여성 지위 향상을 강조하고 최연희 '성풍' 문제를 재부각시키면서 여성표들을 엄청나게 쓸어갔다. 강금실 캠프가 한나라당의 허를 찌른 또 다른 중요한 점은 2030 젊은세대들의 지방선거 투표율을 끌어 올렸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강사모’의 이름으로 부활한 노사모 세력들의 힘이 컸다. 강금실 후보가 아주 근소한 차이로 한나라당 후보를 이길 수 있었던데에는 2030 투표율 상승 효과가 있었다. 2030 젊은이들은 상당수 여당 지지층이므로 이들의 투표율 상승은 곧 여당의 이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한나라당은 2030 투표율이 올라가리라는 것은 전혀 예측 못하고 ‘설마 한나라당이 지랴’하는 식의 안이한 생각으로 선거전에 임했다. 한나라당은 경제불황을 계속 이야기하고 반노정서를 부추기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강금실 후보의 개인적 인기가 워낙에 높은 까닭에 한나라당의 홍보전략은 원래 한나라당을 지지하던 이들에게만 먹혔을 뿐이었다.

    한편 선거 직전 지지율이 어슷비슷하게 나오던 시점까지도 한나라당은 예의 특유의 ‘숨어있는 5%론’을 강조했다. 숨어있는 5% 표가 한나라당 서울시장을 만들어 줄 것이란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숨어있는 5%는 없었다.


    이런 일은 경기도에서도 벌어졌다.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는 예상 외로 강한 여당 지지바람에 부딛쳤다. 검찰이 진행하고 있는 재계 수사가 반 한나라 정서와 연결된 것이다. 그러니까 흔히 여당 지지자들이 말하는 기득권 대 반 기득권의 대결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한편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진대제 캠프의 치밀한 전략으로 인해 오히려 김문수 후보가 ‘불안’한 정치인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대제 후보는 경기도를 CEO적 능력으로 탁월하게 경영할 수 있는 참신한 새 정치인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진대제 후보는 자신의 장관 역임과 삼성전자 근무경력을 대중들에게 강조했는데 이것이 엉뚱하게 수도권 도심 지역의 중산층에게 크게 호감을 얻어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역시 호남세력이 경기도에서도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경기도 지사 자리도 호남이 찾아와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한나라당만큼은 밀어내자’는 목청이 높아진 것이다.

    김문수 캠프는 여론조사 결과를 너무 맹신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짝 추격해 오는 진대제 후보와의 지지도 격차를 더욱 늘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어 있었다. 진대제 후보는 출발 자체가 늦었기 때문에 선거 초반에는 지지율이 극히 낮았지만 시간이 갈 수록 경기지사 선거가 대중의 관심사가 됨에 따라 여야 간 지지도가 어슷비슷하게 변해간 것이었다.

    또한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이 현실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며 진대제 후보 지지로 대거 선회한 것도 진대제 후보의 급상승에 큰 기여를 했다. 민주노동당 지지자들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적어도 한나라당 후보보다는 열린우리당 후보가 나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문수 후보 측은 극약처방을 내놓았다. 진대제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를 강화한 것이다. 김문수 후보 측은 이것이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여론은 냉담했다.

    한나라당의 네거티브 공세를 비판하며 진대제 후보가 유세현장에서 눈물로 사죄하고 경기도민들에게 큰 절 올리는 장면이 텔레비전 화면으로 중계되고 난 뒤 진대제 후보는 김문수 후보를 따돌리기에 이르렀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게 된 김문수 후보가 그제서야 동분서주했지만 결과는 진대제 후보가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를 아주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이긴 것으로 나타났다. 인천도 서울-경기와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전북은 본래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고향이었던 관계로, 그리고 광주는 민주당에게 밀려 내주기 직전, 열린우리당 지지자들과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삼보일배’가 광주 유권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면서 아슬아슬한 차이로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열린우리당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다.


    한나라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날, 박근혜 대표는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자신의 거취를 걱정했다. 지방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대표직 사임을 발표할 것인가. 아니면 7월 전당대회까지 위치를 고수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측근들과의 협의 후에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박 대표는 이명박 시장에게 우호적인 비주류 측이 그리 쉽사리 박 대표에 대해 공세를 가하지 못할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이번 한나라당의 참패에 이명박 시장 관련 악재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일 뿐 한나라당은 엄청난 내홍에 휩싸이게 될 것이 분명했다.


    다음 날 한나라당의 지방선거 참패 소식을 알게 된 한나라당 당원인 서울시민 K씨는 이민 갈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방선거에서도 참패한 한나라당이 대권을 찾아 올 가능성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