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일 신임 국무총리로 한명숙 열린우리당 의원이 지명되면서 총리 인선 문제를 놓고 벌어졌던 20여일간의 여권 내부의 미묘한 신경전은 정동영 열린당 의장의 ‘승리’로 사실상 일단락됐다. 이해찬 전 총리의 사퇴부터 한 의원의 총리 지명까지의 일련의 과정이 정 의장의 ‘야심’대로 착착 진행됐기 때문. 이 때문에 한 총리 후보자의 발탁은 정 의장의 ‘작품’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정 의장은 지난 14일 청와대 단독 면담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이해찬 유임' 의중에도 불구하고 이 전 총리의 사퇴를 이끌어냈으며 이 자리에서 한 의원의 총리 기용도 건의했었다. 노 대통령은 장고끝에 정 의장의 요구(?)에 그대로 따랐다. 대통령 고유 권한인 총리인사권이 정 의장에 의해 사실상 휘둘린 셈이다.

    코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를 내세운 정 의장의 명분이 주요했다. 지방선거를 책임지고 치러야 할 당사자인 정 의장 주문에 노 대통령도 ‘역발상’ 전략을 구사하지는 않았다. ‘지방선거용’ 장관 차출 건의도 모두 받아들였다. 정 의장의 요구대로 모든 판을 깔아 줬다. 이제 지방선거에 전력투구하기 위한 모든 환경이 정 의장의 시계와 맞춰진 셈이다. 

    정 의장은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당으로 가져오는 부대 이익도 얻었다. 당내 정동영계 의원들 사이에서는 “당이 책임지고 이끌어 가는 상황이 마련됐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청와대 내부에서는 정 의장의 이런 태도에 매우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보완이 요구되는 총리 인선 과정에 대한 정 의장의 ‘언론플레이’에도 다소 불만을 표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과정이 정 의장의 대권 도전과 맞물려 그에게 독배(毒盃)가 될 지, 월계관이 될 지 여부는 두고 봐야 한다. 그러나 청와대 내부와 정 의장과의 미묘한 기류를 감안한다면 독이 든 잔이 될 수 있다. 

    당장 청와대는 지방선거 책임론을 놓고 정 의장과 분명한 선을 긋게 됐기 때문이다. 지방선거 패배의 순간 정 의장은 모든 것을 잃게 되리라는 계산이다. 명분은 물론 자신의 정치적 입지, 총체적으로는 대권 도전 자체도 모두 물거품이 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지방선거 대승만이 유일한 길인데, 이마저도 대선 행보의 전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정 의장의 고민도 깊어지는 꼴이다. 

    현재 여권 내부의 역학관계를 볼 때 정 의장이 지방선거 대승을 이끌어 내더라도 자신의 대권 도전을 위한 유리한 고지를 이끌어내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대권 도전에 유리한 위치를 한발짝 선점할 수는 있겠지만 대세론을 몰아가기에는 부족하다. 정 의장의 독주 체제에 적잖은 우려를 가지고 있는 당내 세력이 모종의 역할을 꾀할수도 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인물군이 있다는 것이다.

    당장 김근태 최고위원, 천정배 법무부 장관을 비롯해 이해찬 전 총리도 얼마든지 정 의장의 견제에 활용이 가능하다. 이들은 정치스타일이나 정치이념 측면에서도 정 의장과는 뚜렷한 각을 보이고 있다. 대선 후보가 되지 못하더라도 얼마든지 '고추가루'는 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총리 인선 문제를 놓고 노 대통령이 장고에 들어갔을 당시, 당 내부에서 “이해찬의 그림자가 여권 내부에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는 말이 나돌았던 점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좋은 게 좋다’는 말이 있듯이 정 의장으로서는 지방선거 승리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낮은 당 지지율이 좀처럼 반등의 기미가 보이지 않은 데다가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인 전라북도 지역마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바람에 그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지방선거 연대를 거부한 고건 전 총리가 전북에서의 행보를 슬슬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 전 총리와 지역적 지지기반이 겹치는 정 의장으로서는 여간 신경쓰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고 전 총리가 당내 경선 잡음에 불만을 품은 강현욱 전북지사(현 열린당 당적 보유)와의 만남을 놓고서 정 의장과 고 전 총리측이 신경전을 벌인 것도 이런 의미다. 전북 지역의 한 의원은 고 전 총리를 향해 “정치적 도리가 아니다”고 강한 불만도 털어놨었다.

    게다가 한 의원의 총리 지명으로 정 의장이 여권의 ‘제2인자’로 떠오르기는 했지만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완전히 당으로 가져왔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한 총리 지명자가 노 대통령의 ‘분권형 국정운영’ 기조를 유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럴 경우 노 대통령이 직접 국정 전반을 챙기기 위해 전면에 나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 대통령의 장기적 국정과제와 정 의장의 대선 행보가 서로 마찰을 빚을 때, 여권 내부의 극단적 이탈 조짐이 가속화 될 것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총리 인선 문제를 놓고 빚어진 청와대와의 미묘한 갈등 기류도 향후 정 의장의 대권 행보에 발목을 잡아 자칫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관측이다. 지방선거 이후 노 대통령이 ‘새판짜기’ 카드를 꺼내들 경우, 그동안 정 의장이 확보해 왔던 유리한 위치 선점에 따른 우월적 지위를 한꺼번에 잃을 수도 있다는 계산이다. 이렇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판인데, 이때 노 대통령과 각을 세우기가 그리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여권 일각에서는 코앞에 닥친 지방선거란 명분이 사라지는 순간, 정 의장이 노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공격이 제일의 방어'라는 입장이다. 과거 역대 정권에서도 봤듯이 임기말 대통령과 집권 여당과의 관계를 노 대통령과 정 의장이 그대로 답습하는 모양새로 나가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국민의 정부 시절, 동교동계에 대한 정풍운동이 생각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가 정 의장에게 일정 부분의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된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여권 내 역학구도를 감안할 때, 정 의장은 앞으로의 대선까지 2년남은 기간동안 살엄음판 위를 걸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분위기가 정 의장의 리듬에 맞춰 흘러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과거 한창 잘나가던 때에 벌어졌던 ‘노인폄하’ 발언과 같은 돌출 변수를 경계해야 하는 등의 세밀한 부분도 정 의장은 '노심초사' 고민해야 할 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