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린우리당의 사학법 강행처리에 반발해 온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13일 자신의 정치모토인 '대화와 상생'의 정치기조를 깨고 첫 장외투쟁에 나섰다. 12일과 13일 연 이틀 간 전투복으로 불리는 바지정장을 입고 온 박 대표는 영하 12도를 밑도는 강추위 속에서도 거리로 나가 마이크를 잡고 사학법 강행처리의 부당함과 노무현 정권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냈다.

    이 같은 박 대표의 모습은 지난해 7월 국가보안법 개폐 논란을 국가정체성 문제로 확산시키며 강경한 입장을 취한 이래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때문에 박 대표의 장외투쟁 방침 진위여부를 놓고 당 안팎에서도 말들이 많다.

    엄동설한에 장외투쟁을 해야하는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번 사학법 강행처리에 대한 박 대표의 강경한 태도에 어떤 입장을 갖고 있을까.   

    '국가정체성 문제로 확산시킬 필요가 있나'

    일단 박 대표가 하자는 데로 따라가는 분위기다. 최근 당 지지율의 고공행진, 잇따른 재보선 승리로 인한 박 대표의 대중적 인기 재확인, 박 대표의 지지율 회복 등으로 강화된 박 대표의 당내 입지 때문인지 소속 의원들은 군소리 없이 박 대표와 박자를 맞추고 있다.

    또 박 대표가 연일 사학법 강행처리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점도 소속 의원들의 목소리를 위축시키고 있다. 실제 13일 비공개로 진행된 의원총회에서 박 대표는 고압적인 분위기로 소속 의원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고 회의에 참석한 관계자는 전했다. 

    박 대표는 이 자리에서 소속 의원들의 의원총회 참석이 저조한데 대한 문제점을 강하게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국민과 동료의원들로부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자 장외투쟁에 비판적인 생각을 지닌 몇몇 의원들은 발언을 자제했다는 후문.  한 당직자는 "국가정체성 문제에 대한 박 대표의 강한 신념이 장외투쟁에 대해 비판적인 의원들의 목소리를 위축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상당수 의원들은 열린당의 사학법 강행처리에 대해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사학법 처리가 국가정체성을 훼손시킬 만큼 중대한 사안이라는 점에는 선뜻 동의하지 않는 모습이다. 때문에 엄동설한에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 의원들의 표정도 밝지 못하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한 소장파 의원은 "처음엔 당론으로 반대한다는 수준이었는데 강행처리를 막지 못했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에스컬레이트 되다보니 본질이 어디로 다 가버렸는지 모르겠다"며 "국민에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냉소적 반응을 나타냈다. 

    다른 소장파 의원도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당내 분위기가 격앙된 상황에서 꺼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13일 오전 열린 긴급의원총회에서도 의원들은 취재진의 '국가정체성 논란으로 확산시켜야할 만큼 사학법 처리가 문제를 갖고 있느냐'는 질문에 "지금은 답하기 곤란하다" "나중에 전화로 얘기하자"는 의원들이 대다수를 이뤘다.

    이들은 무언가 할 말은 있지만 당 분위기상 말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소장파 의원들은 사학법과 국가정체성의 연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원희룡 최고위원은 "사학법이 반미·친북 세력을 위한다는 논리는 지나친 과장"이라며 "일방적으로 이 문제를 국가정체성과 연계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주장했다.

    새정치수요모임(수요모임) 대표인 박형준 의원도 뉴데일리와의 단독인터뷰에서 "사학법을 국가정체성문제, 현 정권의 색깔론으로 끌고 가 과거의 방식으로 다루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만약 위헌적 요소가 있다면 헌재에서 판단하면 될 문제"라고 말했다.

    한 소장파 의원도 "여야가 의견 접근한 것까지 원천부정하고 과격한 색깔론으로 간 것은 박 대표 스스로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며 "사학집단을 정치적으로 옹호하는 것처럼 비치면 더 큰 것을 잃게된다"고 경고했다. 한 당직자는 "의원들 상당수가 사학법 문제로 이렇게 장외까지 나갈 필요가 있는가 생각하고 있다"며 "답답해하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고 시간이 갈수록 잘못했다는 생각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선거준비도 해야 하는데 장외투쟁 하자니… 안할 수도 없고"

    이런 당내 분위기는 의원총회에서도 느낄 수 있다. 12일 장외투쟁에 대한 향후 계획과 방침을 마련하기 위해 열린 의총에는 소속 의원 127명중 50여명이 참석하고 그나마 참석한 의원들의 모습에서도 비장한 각오나 투쟁에 대한 강한 의지 등은 엿보기 힘들었다.

    장외투쟁 첫 날인 13일에도 한나라당은 장외투쟁과 당의 최대핵심조직인 중앙위원회 의장 선거를 동시에 진행했다. 때문에 첫 날 장외투쟁부터 소속 의원들의 참여는 매우 저조했다. 의장선거에 출마하는 정형근 공성진 의원을 제외하더라도 첫 집회에 소속 의원 절반도 참석하지 않은 점은 과연 한나라당이 '투쟁의지'가 있는 것인지 의문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또 여성위원장, 디지털위원장, 청년위원장 등 선출직 당직선거에 출마하는 일부 의원들은 장외투쟁 전 열린 의총에서 자신의 선거운동을 걱정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당직 선거에 출마하는 모 의원은 "선거를 앞두고 지역구도 돌고 시당도 다녀야 하는데 사학법 장외투쟁까지 겹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며 "선거를 위해 돌아다녀야 하는데 그렇다고 장외집회에 참석 하지 않자니 위에서 또 한 마디 할 것 같고"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부에선 예산안과 관련한 계수조정위원회에는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고 덧붙였다. 결국 한나라당은 소속 의원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장외투쟁을 할 만한 당내 상황도 할 의지도 부족하다는 것.

    "박근혜, 이명박 쾌속질주 속에서 '나도 뭔가 해야한다'는 조급함 나온듯"관측도

    이 같은 당내 분위기를 박 대표 역시 짐작 못할 리 만무하다. 자신의 13일 일정에 '중앙위원회 선거인단 대회'가 고스란히 나와 있고 여성, 디지털, 청년 위원장 등 선출직 당직 선거도 코앞에 있다는 점도 알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 대표는 이제껏 한 번도 하지 않은 '장외투쟁'이라는 강공을 선택했다. 이를 두고 당 일각에선 "이명박 서울특별시장을 의식한 것 아니겠느냐"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박 대표에게 연일 악재가 닥치는 반면 이 시장은 지지율 상승, '2005년 최고의 옷 잘 입는 정치인' '주식투자를 가장 잘 할 것 같은 정치인 1위'에 오르는 등 잇따라 호재가 터지고 있기 때문.

    당내 사정에 밝은 한 당직자는 "요즘 이 시장이 다시 질주를 하는 반면 박 대표는 10.26재선거 뒤 앞서는 듯 했다 다시 밀리고 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이 시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시장이 사학법 처리 과정에서 나타난 한나라당의 무기력함을 겨냥, "야당다운 야당이 되어야 한다"고 비판한 점도 박 대표를 강경하게 만들었다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박 대표가 이날 오전 동국대 동문모임인 동국포럼 주최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특강에서 "잘못됐다고 비판하면 현정권은 무조건 색깔론이라고 하는데 그런 일이 있는데도 가만 있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을 모독하는 일"이라며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정치하는 정치인으로서 가장 큰 직무유기"라고 목소리를 높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또 "사학법 저지실패의 책임을 떠안고 사퇴의사를 표명한 강재섭 원내대표의 결정도 박 대표를 강경하게 만들었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이미 사퇴를 표명한 강 대표를 장외투쟁의 전면에 세우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주장. 위트와 유머를 통해 소속 의원들의 결속을 이끌어 왔던 강 대표의 모습도 최근엔 찾아보기 힘들다. 당 관계자는 "강 대표도 장외투쟁 등 당이 전면에 나서는 것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번 문제를 당이 앞장서 비리 사학단체를 옹호하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 보다 사학단체와 열린당의 대결구도를 만들어 놓고 당은 예산안 등 민생법안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박 대표가 워낙 강경하게 나오고 있기 때문에 반대의견을 가진 일부 의원들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며 "박 대표가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젠 갈 때까지 갈 수밖에 없는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강 대표가 사퇴할 경우 임태희 원내수석부대표를 포함 8명의 원내부대표단 전원과 원내대표 러닝메이트인 서병수 정책위의장과 7명의 정조위원장까지 모두 당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결국 전면에 나서야 할 사람은 박 대표 밖에 없다는 것.

    박 대표의 장외투쟁이 얼마만큼의 성과를 얻을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만일 성공할 경우 박 대표는 다시 도마위에 올라온 리더십 논란을 잠재울 수 있고 보수세력 결집이란 이득까지 챙기며 무난한 대권행보를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실패할 경우 리더십에 대한 지적 뿐 아니라 '예산을 볼모로 정쟁을 벌인다'는 비판과 함께 이제껏 쌓아온 서민정당의 이미지도 한 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다. 무엇보다 박근혜-이명박 두 대권 후보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소속 의원들의 발걸음도 이 시장 쪽으로 급격히 기울 개연성도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