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25 피난민들이 지은 부산 산동네 판자촌. 70년대 초까지도 큰 변화가 없었다.(쟈료사진)
    ▲ 6.25 피난민들이 지은 부산 산동네 판자촌. 70년대 초까지도 큰 변화가 없었다.(쟈료사진)
    서울 환도 3개월 만에 또 ‘임시 수도’가 된 부산은 지난번보다 엄청 많은 피난민이 들끓는다. 
    경남 도지사 공관은 다시 임시 경무대가 되고 경남 도청은 정부청사와 국회의사당이 되었다.
    워낙 인구 50만명도 안되던 부산은 6.25이래 1백만이 넘는 피난민이 들이닥쳐 산등성이까지 천막촌 판잣촌으로 뒤덮인 ‘거대한 빈민촌’으로 변했다고 신문보도가 말한다. 
    더구나 이번 1.4후퇴로 수도권은 물론 중부이북 피난민이 몇 배로 늘어나 인구가 얼마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지경, 실업자들과 걸인들을 구분할 수도 없는 부산은 밤낮없이 생존경쟁의 아귀다툼과 각종 범죄들로 아비규환에 허덕이고 있다. 중심가 도로 양쪽은 물론, 뒷골목 등 보이는 빈터, 하천변, 남의 집 마당까지 움집과 판잣집을 짓지 않은 곳이 없다. 이것조차 못하는 사람들은 노천에서 자고 먹는다. 떠도는 고아들은 또 얼마던가. 
    그러나 인간사회의 본능적 추태는 전쟁 중이기에 더욱 기승하는 법...정치 권력층과 부유층의 부패와 사치, 유흥가의 불야성은 평화시 서울보다 더 요란하다. 그 난맥상을 [동아일보]가 집중보도하여 아연케 한다. 기사 제목만 훑어보면 다음과 같다. 
  • ▲ 피난 임시수도 부산에서 권력가들과 부유층이 탈선 부패 향략을 일삼는 행태를
    ▲ 피난 임시수도 부산에서 권력가들과 부유층이 탈선 부패 향략을 일삼는 행태를 "적발하자"며 대대적으로 보도한 동아일보 1951년1월11일자 2면.ⓒ동아DB
    「戰列(전열)을 離脫逃避(이탈도피)하려는 자 누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자신의 손에 놓여있다」 「조국 잃고 개인 명맥 유지란 될 말? 부패한 권력가를 적발하자」
    「일본 밀항 기도자를 엄중처벌」 「제주도 피난행 금지」
    「해외 여행권 불교부. 외무부, 부유층 망동 봉쇄」
    「전쟁을 망각한 부산...보이소, 피난을 왔소? 유람을 왔소?」 
                               ([동아일보] 1951년1월11일자 2면)

    전쟁하는 국군의 사진과 야간 유흥업소에서 술 마시며 노래하는 사진을 곁들인 고발 기사들이 사회면 전체를 머리부터 막단까지 넘쳐난다. 여기서 ‘권력가’와 ‘부유층’은 누구인가.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국회의원들의 일본 밀항...아들 병역기피 ‘유학’ 러시

    ‘대표적 권력가’ 국회의원들이 일본으로 몰래 밀항하려다 적발된 것은 이미 지난해(1950) 8월이다. 국회의원 50여명이 배를 구입해서 다대포에 숨겨놓고 대마도로 도피하려다 들통났다. 물론 국회의원만이 아니다. 부유층과 군장성들도 배를 구입하려 경쟁하니 배 값도 밀항 값도 폭등했다. 일본 밀항은 당시 ‘돼지몰이’로 불렸는데, 비용은 1인당 50만원, 나중에는 100-150만원까지 뛰었고, 선박 빌리는 가격도 500만~1천만 원에 달하였다. 2차 피난으로 수요가 급증한 탓임은 물론이다. 제주도 피난도 규제하자 암거래 인플레는 하늘을 찌른다. 

    외무부가 비명을 질렀다. 일본으로 미국으로 나가려는 여권신청자들이 몰리기 때문이다. 온갖 청탁과 압력이 줄을 잇자 외무부는 “공무이외의 개인 여행은 일체 금지”를 발표했지만 “빽을 쓰려는 ‘빽값’ 뒷돈 액수만 올라간다는 기사가 나왔다. 견디다 못한 외무부 모 국장이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와 호소한다. 
    ”자녀들을 병역기피 시키려고 외국에 빼돌리고 재산도 자녀 편에 빼돌리고, 일단 외국에 나가면 온갖 구실로 돌아오지 않으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소문에는 장면 미국 대사의 두 아들도 유학 비자를 받아 나가버렸다고 했다.
    무초 대사도 이승만에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정치 요인들이 아들들의 유학 비자를 내달라고 날마다 성화를 하니 골치가 아픕니다“ 
    무초가 돌아간 뒤 이승만은 아내 프란체스카에게 말했다. ”이럴 때 우리 아들이 있어서 본보기를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프란체스카는 아들을 못 낳는 자신이 죄인 같았다고 일기에 적어놓았다. 
  • ▲ 부산 임시국회 건물에서 전황을 보고받는 이승만대통령(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국회의장, 장면 국무총리, 무초 미국대사.
    ▲ 부산 임시국회 건물에서 전황을 보고받는 이승만대통령(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국회의장, 장면 국무총리, 무초 미국대사.
    ★이승만 특별담화 ”세력가-재정가들은 중국공산당 노예 되려느냐“

    참다못한 이승만은 ‘국민정신 재무장 총궐기대회’를 열도록 지시하고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소위 세력가와 재정가라는 사람들이 부산에 모여들어서 공산당의 선전에 피동(被動)되어 공포심을 가지고 저희 생명과 재산만 보조할 생각으로 피신할 자리만 찾고 있음으로 국민 분위기가 자연 공포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그런 사람들은 일일이 조사해서 어디로 몰아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런 사람들도 생명과 재산을 내놓고 우리와 같이 싸워서 적군을 소탕할 결심을 가지고 일어나야 될 것이니...(중략)....주먹밥 한덩어리라도 싸우는 사람들을 먹이도록 해야 할 것이오. 그러지 않고 피난이나 선동하는 자들은 특별히 조처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이 다 합해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는 결심만 굳게 가져야 할 터인즉, 조국을 빼앗기는 날이면 재정가도 세력가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중국 공산당의 노예가 되는 것임을 아는가 모르는가....(후략)“

    국회의원들, 세비 3배 인상...국민 분노...언론의 맹비난

    ‘거대한 빈민촌’ 부산 시민들이 굶주리든 말든 국회의원들은 자기 월급을 대폭 올렸다. 무려 3배 인상! 피난 국회에서 의원세비 7만여원을 22만5천원으로 인상하는 안을 멋대로 만들어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것이다. 
    분노의 여론이 폭발했다. ”일본밀항 배를 사고 병역기피 아들을 미국 보내는 돈 때문이냐...뇌물로도 모자란단 말이냐“ 염치도 양심도 없다는 ‘부패 규탄’의 소리가 들끓었다. 
    오죽하면 당시 국회의 중심세력 한국민주당 김성수의 신문 [동아일보]까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쓰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전쟁 이재민에 잠자리를 주라던 그 입과 그 손을 손수 들어 자신의 월수입 증액만 만장일치로 가결하다니...」 기사 제목부터 이렇게 길게 붙였다.
    「...드디어 시국을 망각하였는가? 우리들의 대변자로 성스러운 의정단상에 서게 된 그대들 선량(選良)들! 적색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그대들이 권총을 차고 호신경관을 대동하는 것은 지금 호국을 위하여 모든 무기들을 일선장병에게 제공해야하는 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묵인하려 하였고, 또 일선 장병들이 다 헤진 군복을 입고 악전고투하므로 비전투원들의 군복을 일선에 보내자는 민성(民聲)이 높은데도 국회의원의 체면을 위하여 그대들이 군복착용에 매력을 느끼는 위선적 유행을 차라리 묵인하려고 했던 것이 선량한 국민의 구김살 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대들에 대하여 이제 민중이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렸으니 하루 3홉의 쌀과 부식대 50원의 생활조차 보장되지 못하는 수백만의 난민들과 허다한 시민들이 직장과 생계의 길을 상실한 채 수난 가운데 있으며, 또 혹한의 일선에서 24시간 죽음을 넘어 악전고투 조국 수호의 혈전을 계속하고 있는 장병의 보수가 2만원에 불과한 실정을 알고 있는 그대들이, 제2국민병에게 밥과 옷과 잠잘 집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정부를 통박하던 그 입으로, 그대들 월수 22만5천원을 확보하려는 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은 즉, 민중은 실망이 지나 분노하지 앓을 수 없으니...」 ([동아일보] 1951년 2월4일자 2면)
  • ▲ 국회의 세비인상 등을 비판한 조선일보 1면 사설.ⓒ조선DB
    ▲ 국회의 세비인상 등을 비판한 조선일보 1면 사설.ⓒ조선DB
    ‘세비 인상’만이 아니었다. [조선일보]는 사설로써 국회의원들의 정쟁과 이권추구 추태를 종합적으로 비판 경고하였다. 주요대목만 읽어보자.
    「....그런데 국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개설 이래 정부와 대소사 간에 감정적 대립과 항쟁을 일삼는 경향으로 일관했다. 그 뒤에서는 자신의 이권을 타개하는데 눈이 앞서고 있음을 흔히 보인다. 이번에 부산에 와서도 자신들의 국록(國祿)을 3배이상 올려서 이십 몇 만원을 만들어 놓았고 또한 정무차관 제도를 만들려 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국회의원 수입이 생계에 모자라서 이권이나 낚으려 하는가. 정무차관은 정부와 긴밀을 도모함에 뜻이 있다고 하지만 벼슬자리를 더 만들어서 행세의 권한을 높이려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가는 국회가 아주 정부의 장중(掌中:손아귀)에 들어가고 말든가 국회가 관료적 폐풍에 젖어버리고 말 것이 염려된다...」 ([조선일보] 1951년2월5일자 1면 사설)

    세비를 한꺼번에 3배 이상 올리고도 모자라 벼슬자리를 더 달라는 추태를 지적하고 있다.
    ‘정무장관제’는 이승만이 건국내각에서 도입한 것으로서 국회 등 각 정파들과의 협력이 목적이므로 차관이나 행정조직이 불필요한 사실상 1인 조직이다. 여기에 차관자리를 만들어 국회의원 몫으로 해달라는 요구는 누가 봐도 ‘벼슬 행세’ 감투나 탐내는 사리사욕, 세금 도둑이라는 비판을 길게 보도하였다. 


  • ▲ 1948년 12월 파리 유엔총회에 참석하여 대한민국 국가승인 외교를 벌인 대표단. 앞줄 왼쪽부터 모윤숙 조병옥 장면 김활란, 뒷줄 왼쪽부터 정일형 김우평 장기영 김진구.ⓒ조선DB
    ▲ 1948년 12월 파리 유엔총회에 참석하여 대한민국 국가승인 외교를 벌인 대표단. 앞줄 왼쪽부터 모윤숙 조병옥 장면 김활란, 뒷줄 왼쪽부터 정일형 김우평 장기영 김진구.ⓒ조선DB
    장면, 총리임명 2개월 거부...‘3다 선생’ 비아냥 나돌아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총리로 임명한 장면(張勉, 1899~1966) 주미대사가 한 달이 넘도록 귀국하지 않았다. 몸이 아프다는 이유였다. 파리에서 열린 제6차 유엔총회에 참석했던 장면은 11월23일 ‘총리 임명’ 통지를 받고도 ‘간염’을 치료한다며 하와이로 건너가 쉬고 있었다. 중공군 침략으로 한미외교가 다급한 그때, 워싱턴을 비워놓은 장면은 대통령에게 보고조차 없었다. 
    이런 장면의 근무태도가 바로 이승만이 주미대사를 바꾸려는 본심이었다. ‘총리임명’은 사실은 주미대사 장면을 ‘소환’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장면이 워싱턴 대사자리에 적임인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은 장면에게 ‘대사라는 자리는 인기를 얻고 우방의 신뢰를 얻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러나 우방으로 하여금 우리 입장을 잘 이해토록 해야 할 것인데, 그러자면 대사의 인기를 희생해야 할 경우도 있는 것’이라고 완곡하게 장면의 소환배경을 설명했다. 더구나 소환(recall)이라는 말을 쓰기가 안돼서 ’서울의 무초 대사와 여러 미국 친구들이 당신은 서울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라고 외둘러 표현했다...“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앞의 책)
    이승만의 정치홍보 자문교수 올리버는 이승만의 요청에 따라 ’미국대사로서의 장면 평가‘ 보고서도 자신이 관찰한대로 써서 전했다.
    ”...그는 착실한 노력형입니다. 적을 만들거나 반감을 일으키지 않으려 합니다. 외교관으로선 바람직 하지만 그의 두 가지 결점을 말한다면, 하나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일하기가 힘들다는 점입니다. 아마 유엔 대표들 전원이 이 점을 매우 예민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둘째는 미국 고문들에게 너무 의존하고 자신이 자주독립국가의 대변자라는 인식을 덜 하는 경향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운석기념회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고는: 장면 박사 회고록] 가톨릭출판사, 1999)

    총리자리를 비울 수 없어 허정을 총리서리로 임명한 이승만은 장면에게 조속 귀국을 거듭 재촉하며 애를 태우고 있다. 그런데 도쿄까지 왔다는 장면은 다음해 1951년 1월24일 되어서야  드디어 서울에 나타났다. 총리임명을 받은 지 두 달 만이다. 화를 참는 이승만은 일주일쯤 휴식시간을 준 뒤에 1월31일 경무대에서 총리취임 축하 다과회를 열었다.
    ”장 총리, 몸도 불편한데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았오“ 이승만이 반갑게 악수한다.
    ”저 아직 총리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장면은 물러나며 임명권자에게 말했다.
    ”며칠 더 생각해 보아야겠다“는 장면은 워싱턴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자기는 총리 같은 중요한 임무를 맡을 의사가 없으며 워싱턴에서 좀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는 투였다. 겸양이 아니라, 요컨대 위험한 전쟁국가 총리는 싫고 미국 근무가 좋다는 식이다.(올리버, 앞의 책).

    이튿날 2월1일 국회에서도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새 총리의 귀국 연설을 듣기로 예정되어 있는데 장면이 총리직을 수락하지 않았으니 호칭을 무어라고 소개해고 불러야 하나.
    그 무렵부터 정가에서는 ’장면-짜장면‘이란 별명과 함께 ’카톨릭 밖에 모르는 숭미(崇美)주의자‘ 그리고 우유부단한 ’3다(三多)선생’이라고 불렀다. ‘3다’는 겁 많고(怯多), 욕심 많고(慾多), 모르는 게 많은(無知多) 사람이란 뜻이다. 여기에 총리란 사람이 아들들을 조국수호전쟁에 데려오지 않고 유학비자 받아 ”미국 대학에 피신시켰다”는 비난이 곁들여진다. (조용중의 한국현대사 연구 [대통령의 무혈혁명] 나남, 2004. 프란체스카, 앞의 책). 장면은 6남3녀를 낳았다.

    독실한 카톨릭교도 장면은 1948년 12월 파리 유엔 총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 로마교황청과의 친분으로 신생 대한민국 국가승인 외교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초대 미국대사로서  6.25때는 미국정부와 유엔에 구국외교를 벌인 공로도 누구보다 뒤지지 않는다. 모두 이승만이 장면이란 인재의 남다른 장점을 알아보고 잘 활용한 예이기도 하다.
    원래 장면의 정치후견인은 이승만이었다. 뉴욕 맨해튼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일제치하에서 카톨릭계 동성학교 교장 등 교직에만 오래 봉직한 장면, 이승만이 해방 후 귀국하여 그를 만나자마자 중용하게 된다. 아들 같은 24살 아래 착실한 미남 청년, 기독교신앙이 깊고 매너도 훌륭한 귀공자 같은 외모에 영어가 유창하므로 민주의원과 입법위원등에 천거 활용하였고 5.10총선에서도 종로구에 출마시켜 제헌의원으로 만들었다. ‘친일’ 비난도 일었으나 장면은 “카톨릭을 지키기 위함”이었다고 방어해서 넘겼다.
    그런 장면이 미국 주요 인사들과 친해지고 총리까지 역임하게 되자 어느새 이승만의 라이벌로 변신, 미국의 ‘이승만 축출공작’에 동원되기도 한다. 그 역사의 아이러니는 다음해 1952년 벌어지는 ‘부산 정치파동’에서 구경해보자.
  • ▲ 유엔에서 '중공 침략자' 결의안이 절대다수 찬성으로 통과된 뉴스를 보도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1면.ⓒ조선-동아DB
    ▲ 유엔에서 '중공 침략자' 결의안이 절대다수 찬성으로 통과된 뉴스를 보도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1면.ⓒ조선-동아DB
    ◆유엔, ‘중공=침략자’ 결의...미국, 본격 휴전협상은 이제부터

    장면이 국회에 ‘총리 데뷔’ 연설을 하던 그날, 2월 1일 유엔 총회는 또 하나의 중대 결의안을 가결한다. 미국이 중공을 한국에 대한 침략자로 규정한 결의안인데,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온 지 무려 100일 만에, 장진호 결전에서 패퇴한 유엔군이 흥남철수를 단행한지 40일 만이다. 
    그동안 미국은 중공군 침략을 두고 우왕좌왕 정치적 무관심-현실부정으로 외면하던 중, 미군의 처참한 떼죽음을 겪게 되자 눈을 떴다. 뒤늦게 트루먼이 ‘원폭 협박’을 하자 놀란 영국 애틀리 수상이 달려와 ‘원폭 불가-즉시 휴전’ 압력을 가했다. 내심 휴전을 원했던 트루먼은 구제주를 만났다는 듯 ‘휴전 카드’에 매달리고 말았다.
    ‘중공군의 38선 정지 휴전‘ 협상안은 트루먼-애틀리 회담이 진행되던 1950년 12월 5일쯤에 등장한다. 영국이 주도하여 영연방 인도 등 아시아-아프리카 13개국이 제시한 구상은 즉시 휴전, 평화회담 개최, 모든 군대 단계별 철수, 남북한 전역 행정 시행 준비 등 4개 조건이다. 
    미국은 고민에 빠진다. 국무장관 애치슨이 회고록에 고백한 것처럼 ’진퇴양난‘이다. 
    13국안에 동의하면 한국의 상실은 물론 의회와 언론의 분노 폭발로 정치위기, 반대하면 유엔에서 지지국가들을 잃게 된다. 애치슨의 고민은 ’살인적(murderous)’이었다고 써놓았다. 
    그때 확전을 반대하는 합동참모본부가 38선 정전안을 내놓는다. 38선을 남방 한계선으로 하고  이북에 20마일 비무장지대를 설치, 이를 감시할 감독위원회를 두자는 그림이다.
    그동안 거론되던 ‘평양-원산선 완충지대’ 설치안보다도 훨씬 내려온 휴전선, 그러나 애치슨은 트루먼에게 이를 받아들이자고 주장하여 결재를 받았다. 중공이 받아들여도 좋고 거부해도 밑져야 본전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과 논의는 고사하고 철저한 극비로 배제하였음은 물론이다. 
    유엔 제1위원회는 1월13일 이 정전안을 찬성 51, 반대 5, 기권1표로 통과시킨다. 그러나 중공 마오쩌둥은 17일 이를 거부하였다. 이때 마오는 중공군이 서울 남쪽 평택(37도선)까지 장악한 상태인지라 승리에 자신감을 가졌을 것이다. 애치슨은 일단 안도의 숨을 쉬었다고 한다. 
    만약 이때 휴전협상이 시작되었다면 휴전선이 37도선으로 흥정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한국의 운명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국이었다. (남시욱, 앞의 책)

    중공의 휴전 거부를 보자 이번엔 서방국가들이 들고 일어났다. 미국은 주판알을 굴리며 ‘중공은 침략자’란 결의안을 만들어 유엔에 회부하였고 유엔 총회는 2월1일 절대다수 찬성으로 가결한다. 
    애치슨과 트루먼은 이 유엔 결의안이 ‘휴전 협상’ 흥정에 유리한 카드임을 계산하고 있었음은 의심할 바도 못된다. 왜냐하면, 다음에 보는 것처럼 미국은 이제 협상 대상으로 중공이 아니라 그 배후조종자 소련을 정식 파트너로 선택하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