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평양을 포기한 유엔군이 철수하며 폭파한 대동강 철교. 북한 주민들이 무너진 철교에 올라 필사적으로 남하하고 있다.
    ▲ 평양을 포기한 유엔군이 철수하며 폭파한 대동강 철교. 북한 주민들이 무너진 철교에 올라 필사적으로 남하하고 있다.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 6.25침략 6개월만에 통일 문전에서 대한민국이 맞닥뜨린 운명이다. 중공군이란 새 태풍이 몰아치자 북한의 국내전선도 미국과 유엔의 외교가도 풍비박산, 미군 철수론이 일어나고 38선에서 휴전하자는 패배주의가 벌벌 떠는 12월 한달을 살펴보자.

    마침내 대동강 철교도 폭파되었다. 평양에서 원산에서 중공군과 싸우지도 않고 돌아서 후퇴만 앞장 서는 미군, “왜 그들은 한국군처럼 터키 해병대처럼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가” 프란체스카는 좌익들이 퍼트리는 유언비어가 더 걱정스럽다고 [난중일기]에 썼다. 
    미8군과 미10군단이 한반도를 떠나 일본으로 철수한다는 소문을 퍼트려 서울시민들도 “이번엔 피난가야겠다”며 모두 피난 짐을 싸고 있다. 북한 동포들이 하루 50만명씩 탈출한다는 신문기사는 서울 근교에만 수십만명이 몰려들고 있다고 전한다.

    ◆“로마는 불타고 있는데 미국은 말로만 싸우나?” 

     무초 미국대사는 툭하면 나타나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워싱턴에서 보낸 비밀 전문들을 보여주며 미국이 전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변명하듯 달래듯 말했다. 
    이승만은 똑 같은 말에 짜증이 절로 터져 나온다. 
    ”보시오. 지금 로마는 불타고 있는데 미국과 유엔이 하는 일은 말뿐 아니오?“ 

    맥아더도 이승만에게 ”조금만 참아 달라“고 부탁해왔다. 본국과 유엔이 중공군 참전에 대한 대책으로 ’만주 폭격‘을 결정해줘야 하는데 기다리는 맥아더 자신도 지쳐서 지금 견딜 수 없는 지경이라며 이승만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위로했다. 그러면서 현재 유엔군은 ’작전상 후퇴‘를 할뿐 ‘포기’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작전상 후퇴라고?“ 맥아더의 입장을 잘 아는 이승만은 무초에게 묻는다. ”영국이 미국과 의견을 달리하는데 그것이 현정세에서 가장 큰 약점이고 이것을 소련이 이용할 것“이라고 지적하며 만일 유엔이 중공과 무슨 협상을 하기로 한다면 미국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다름 아닌 ‘휴전 협상’ 제기 가능성에 대한 우려였다.
    “미국과 유엔이 시간만 허비하며 서성거리는 사이에도 우리 국민은 수천명씩 학살되고 있다. 지금 할 일은 토론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전면 반격전을 거듭거듭 촉구하였다.

    대동강 철교 폭파 보고를 들은 이승만은 한강으로 달려가 시찰했다. 그리고는 미8군 인사처장 챔프니 대령을 방문, 한강에 시민들을 위한 가교(假橋) 3~4개를 더 설치해달라고 부탁한다. 현재 한강 인도교 옆의 가교는 9.28 서울 탈환 때 설치한  한 개 뿐이므로, 가교를 증설하여 시민들의 교통편의를 해결해주고 만약의 경우 이용할 ‘피난용’이다. 이승만은 이미 전선이 38선을 향해 밀려 내려오자 또 다시 임시 천도(遷都)에 대비하고 있었다. (프란체스카, 앞의 책)
  • ▲ 흥남을 철수하는 미군이 부두에 남은 폭약과 유류를 남김없이 폭파, 엄청난 화염이 치솟았다.
    ▲ 흥남을 철수하는 미군이 부두에 남은 폭약과 유류를 남김없이 폭파, 엄청난 화염이 치솟았다.
    ◆중공과 38선 협상? ”절대 용납 못한다“ 이승만 또 대미투쟁 

    12월11일 맥아더가 도쿄에서 날아왔다. 중공군 침략이후 처음, 장진호 전투 상황이 심각해지자 직접 시찰하러 온 것이다.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래트메이어 장군을 대동한 맥아더는 서부전선의 미8군 워커 사령관과 동부전선의 미10군단 알먼드 사령관을 만나 선후책을 논의하고, 장진호에서 포위되었다가 탈출한 해병대 병사에게서 직접 증언도 들었다. 
    양쪽 전선시찰을 마치고 김포공항으로 돌아온 맥아더는 서울의 지휘관들과 작전회의를 가진 뒤 도쿄로 돌아가며 간단한 성명을 배포했다. 주한 유엔군은 아직도 왕성한 사기와 우수한 전투능력을 가진 불패의 군대임을 확인하였고, 적군이 중공군으로 바뀐 큰 변화와 위험에도 불구하고 적의 야망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만 보인 내용이다.  
    맥아더의 한국전선 시찰은 ”미군이 철수하려 한다“는 국제적 추측보도들을 잠재우는 동시에, 현재 물밑 외교적 노력이 실패할 것이 뻔하므로 결과에 관계없이 주한미군을 증강하여 승리하겠다는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조선일보] 12.13일자)

    맥아더의 방한에 맞춰 기자들이 이승만에게 몰려와 질문공세를 폈다. 다음은 [조선일보] 12월13일자 1면에 보도된 내용을 인용한다. 
    -서울의 방위태세에 대하여 말씀해주십시오.
    “모든 애국단체들을 규합하여 수도방위 강화 대회를 개최하도록 조병옥 내무장관에게 지시했다. 나로서는 동포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서울을 공산군에게 내놓을 생각을 현재도 않고 있으려니와 장차도 내놓을 생각을 않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워커 8군사령관도 무단히 서울에서 후퇴하지 않겠다고 언명하였다.”
    -트루먼-애틀리 회담에서 ‘유엔군의 부득이한 철수’ 운운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비유하건대 마치 로마가 불타고 있는데도 정치가들은 태연히 토론만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격이다. 맥아더 장군은 유엔에 대하여 북한괴뢰군 격멸의 권한은 자신에게 부여되어있지만 중공군 불법침투로 인한 신전쟁(新戰爭)에 대한 권한에는 하등의 결정권이 없으므로 유엔에서 결정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압록강 국경까지 적을 격파하면서 진격하였던 것을 다시 후퇴한다면 우리 한국인은 무엇 때문에 피를 흘려가며 전쟁을 하였는지 알 수 없는 게 아닌가. 유엔에서는 속히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엔군은 한국에서 결코 철수할 수 없는 것이다. 
    중공군의 ‘38선 정지설’이 대두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유엔에서 그것이 옳다고 투표할 수는 없는 것이다. 38선을 이제 또 다시 형성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단연코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을 어제 주미대사에게 훈령하였다.”
    -북한 수복지구에서 월남한 애국청년들을 무장시킬 의사는?
    “나는 1백만의 국군병사를 무장시킬 병기를 미국에 요청하고 있다. 북한포로 11만4천명 중에서 우선 4천명을 심사하였는데 그 중 3천명이 한국에 대한 충성자들이라 하니, 전원 심사가 끝나면 충성자의 숫자는 막대할 것으로 본다.”

    ‘원한의 38선’ 부활? 6.25남침으로 공산군이 없애버린 38선,
    유엔군이 38선이북 진격을 멈추었을 때 국군으로 하여금 먼저 돌파시킨 38선,
    남북통일 눈앞에서 중공군이 몰래 침략하여 38선까지 내려와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이대로 38선을 경계로 휴전이 된다면 한반도는 영원히 분단국가로 고착될 것이다.
    임병직 외무장관이 레이크 석세스 유엔본부로 달려갔고 워싱턴 주재 장면 대사에게 휴전협상 반대’ 훈령을 보냈으나 결과는 보나마나 아닌가.
    “내가 통일 미치광이 돼야지!” 이승만 대통령은 이때부터 또 다시 ‘휴전 결사반대’ 대미(對美)투쟁을 시작하였다.

    이승만의 대미투쟁 20년=이승만의 지미친미용미(知美親美用美) 독립외교전략은 변화무쌍한 국제정치전술을 동원한다. 독립운동기간을 비롯, 해방후 건국투쟁과 유엔외교, 건국후 6.25침략전쟁중 휴전반대투쟁, 휴전후 4.19때 하야까지 이승만이 미국을 다루는 글로벌 국가외교 스타일은 약소국 지도자의 강대국 활용외교의 세계적 롤모델로 정립해야 할 대상이며, ‘이승만 외교’란 장르로 연구-집대성해야할 국제정치외교 교과서이다. 필자는 편의상 그 시대구분을 3단계쯤으로 나누어 본다.
    *제1기=1941년 태평양 전쟁부터 해방3년간 미국과의 투쟁, 유엔외교와 건국까지.
    *제2기=6.25전쟁중 부산정치파동-한미동맹-사사오입개헌까지 제2의 건국투쟁.
    *제3기=휴전후 4.19 하야까지 국가이익 충돌과 대한민국 정치-경제-국민 정체성의 확립.
    강대국 미-영의 ‘중공군 38선 저지’ 협상론을 보자 즉각 ‘38선 부활 반대’를 들고 일어선 이승만 대통령의 저항은 ‘휴전결사반대-단독북진 통일’ 카드로써 공산권과 자유세계를 뒤흔들어 절반의 성공을 거둔다. 통일을 못했지만 대한민국 '안보의 철벽‘ 한미동맹을 쟁취한다. ◙
  • ▲ 유엔총회가 중공군을 38선에서 머물게 정전협상을 제의한 인도의 결의안을 가결한 기사. 소련이 반대하고 중공이 거부하여 무산된다. 조선일보 12월16일자ⓒ조선DB
    ▲ 유엔총회가 중공군을 38선에서 머물게 정전협상을 제의한 인도의 결의안을 가결한 기사. 소련이 반대하고 중공이 거부하여 무산된다. 조선일보 12월16일자ⓒ조선DB
    이승만 “한국 공산화 되면 일본도 필리핀도 오래 못 간다”

    12월 14일 유엔 총회는 인도가 제출한 ’한국 정전안‘을 절대 다수 52대 5표로 가결한다. 소련과 공산권 나라들만 반대표를 던져 남한 무력장악의 결의를 보였다. 이승만은 임병직 외무장관을 파견, 인도결의안을 반대하고 자유세계의 공산주의세력에 굴복하는 유화정책을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만일 중공군이  북한에서 전원 철수한다면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고 응수한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소련이 거부하고 중공이 거부함으로써 일단 무산되었다.
    미국 라디오와 신문들은 ‘미국민들이 휴전을 원한다’는 보도를 대서특필한다. 영국 애틀리 수상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맥아더 사령관의 파면을 요구했다는 뉴스도 충격을 던졌다. 

    그 무렵 이승만은 유엔한국위원단의 네덜란드 대표 판 에드알드 남작을 경무대로 불러 점심을 같이 하며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유럽제일주의자 v 이승만의 대화
    남작▷ 대한민국의 앞날이 매우 암담하다. 유엔군은 조만간 유럽 방위를 위해 철수해야 할 것이다. 한국정부는 곧 망명해야 할 때가 올지 모른다. 국군도 오끼나와나 일본으로 철수시켜 훈련시켜야 하고 반격의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약 6개월 후에나 모든 나라들이 소련과 싸울 준비를 갖추어야 한국에 대한 관심이 그때 다시 살아날 것이다. 
    대통령▷당신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공산주의자들은 6개월은 고사하고 3개월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공산주의자 수중에 떨어지면 전세계 공산세력에 파급되어 일본이나 필리핀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며 인도네시아나 그 밖은 아시아 각국도 그런 식으로 넘어갈 것이 확실하다.
    남작▷전적으로 동감이다. 대통령의 장래에 대한 견해가 정확하며 앞으로 다가올 일에 잘 알고 계신다. 하지만 지금 유엔이 한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 같다. (프란체스카, 앞의 책)
    판 에드알드 남작은 태평양 전쟁때 이승만이 한국청년들을 OSS 대원들로 편입시키는데 도움을 준 굿펠로 대령의 친지로서 이승만과 협력했던 사람인데 역시나 유럽제일주의자였다. 그가 이처럼 비관스러운 전망을 내놓을 정도로 트루먼은 자신의 발표약속 ‘남북통일’을 사실상 철회하고 ‘38선 휴전 협상’에 기대하며 영국 편에 붙은 상황으로 변해버린 것이 분명해 보인다. 
    “믿고 믿었던 미국이 결국 ‘겉과 속이 다른 두 얼굴’을 가진 강대국”으로서 국제적 기회주의를 보여주자 프란체스카는 좌절과 분노를 일기에 쏟아내고 있다. 

    12월16일 38선마저 포기하고 후퇴를 거듭하는 미8군은 드디어 3천5백명의 가족을 제주도로 피난시킬 준비를 갖추었고 미국 대사관 직원들도 대부분 일본으로 소개시키고 있다. 서울 시민들은 빠짐없이 피난 가려는 듯 서울 거리와 한강다리는 인파로 술렁거린다.
  • ▲ 흥남부두에 몰려든 북한 주민들이 미군 선박에 타려고 기다리고 있다.
    ▲ 흥남부두에 몰려든 북한 주민들이 미군 선박에 타려고 기다리고 있다.
    흥남 철수...“북한 애국동포 다 태워라” 이승만의 요구

    12월16일 트루먼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비의 대폭 증액을 의회에 요청했다. 그만큼 중공군과의 전쟁이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인해전술로 덮치는 10여만명 중공군에 B-29 편대와 해군함대 함포사격으로 불세례를 퍼부으며 사투를 벌인 미10군단은 가까스로 ‘흥남교두보’를 확보하고 탈출로를 뚫는다. 
    12월 20일쯤 장진호의 얼음지옥에서 미해병1사단과 미육군 등 살아남은 병력들이 빠져나와 흥남에 집결하여 세계전쟁사상 최대 규모의 철수가 시작된다. 
    이를 미군사전문가들은 ‘성공적인 철수작전’이라 주장한다. 한달 넘게 중공군 주력부대를 장진호 일대에 붙잡아 둠으로써 북한 전역의 유엔군이 흥남까지 후퇴, 함대로 철수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얼마나 흥남철수의 성공을 좋아하였는지 보여주는 기사를 소개한다. 
    ▶[흥남근해에서 24일발AP연착=합동] 유엔군은 24일밤 동북한국의 최후거점 흥남 교두보를 공산군 수중에 넘겨주었다. 10만수천명 유엔 대군의 해상철퇴작전은 질서정연하였으며 전적으로 성공적이었다. 감격에 넘친 10만의 북한 반공산주의자들도 민주지구를 찾아 유엔군과 더불어 출범하였다
    공산군 전초부대는 흥남근교 고지에서 총 한발 쏘시않고 최종이륙부대 미3사단 장병들이 상륙용 주정으로 떠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해군 파괴기술자들은 무서울 정도로 흥남항을 폭파시켰다. 미군이 적의 압력을 받아 해상으로 철수한 것은 미국사상 이번이 처음이다.
    ▶[동경25일발 AP=합동] 맥아더 장군은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장군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이 흥남으로부터의 철수작전 완료의 희보는 때가 크리스마스이니만큼 그 기쁨이 더욱 크다고 말하였다.
    미주리(Missouri)주의 인데펜덴스(Independence)에서 트루먼 대통령도 “이 소식은 그가 가질수 있는 가장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말하였다. 
    “오늘 밤 수마일 저쪽에서 동북전선의 철수한 유엔군 최종잔류부대는 함흥 흥남교두보로부터 철수하였다. 전사에 영광의 한 페이지를 삽입한 이 용사들은 한국의 맑은 밤하늘을 우러러 보고 갑자기 이날이 크리스마스임을 깨달았다. 제1해병사단, 미육군3사단 및 7사단, 남한군, 영국군을 포합한 6만명의 미10군단은 이 험난한 철수작전을 한국시간 12월11일에 개시하였던 것이다. 북한 공산군이 6월에 점령한 후 유엔군이 9월에 해방한 서울시는 새로운 신경과민증을 노정하고 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권면에 의하여 국회는 남한항구도시로 이동을 개시하리라 한다. 내각은 당분간 서울에 잔류할 예정이나 이승만 대통령은 불요불급의 정부기관은 서울을 떠날 것을 권하고 있다. ([조선일보]12.27일자)
    미국 AP통신 특파원은 맥아더와 트루먼이 기뻐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말하고 있다.
    맥아더는 장병들에게 크리스마스엔 전쟁을 끝내고 집에 가자는 ‘크리스마스 공세’를 펴다가 난데없는 중공군에 참패한 뒤에야 크리스마스에 맞춰 철수함으로써 ‘약속’을 지킨 셈이 되었다. 트루먼 대통령도 고향 집에 내려가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다가 ‘흥남철수’ 소식을 듣자 벌떡 일어났다. 미국민들에게 ‘성탄선물’이 되었으니 자신에게도 정치적 선물이 된 것이었다. 이것이 제3자 강대국의 전쟁논리, 당사국 대한민국은 어쩌란 말인가. 
    통일의 꿈도 한순간에 잃고 다시금 남한까지 위협받는 이 흥남철수를 ‘구경’해야 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 국민들은 국군의 생환만을 기뻐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 

    굳세어라 금순아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데를 가고 긿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훌리면서 1.4이후 나홀로 왔다
                  (강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당시 흥남철수에서 함께 피난오던 여동생을 잃고 혼자 미군함정에 매달려 월남한 오빠의 피끓는 심정을 토로하는 ‘굳세어라 금순아’ 유행가는 휴전때 1953년에 나와서 ‘국민가요’가 된다.
    고향 잃은 실향민의 설움뿐 아니라 북한을 잃은 전쟁국민 전체의 애통한 마음을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흥남부두’ ‘철의 장막’ ‘국제시장’ ‘영도다리’ 등 부산 피난살이까지 울리고 울리는 노래, 마지막 3절에서 ”남북통일 그날이 오면 얼싸안고 웃어보고 춤도 추자“고 다짐한다. 이 노래처럼 흥남철수엔 남북한국민의 애환도 사연도 많고 많아서 소설로 영화로 보고 또 보고 또 울었다. 64년이 지난 2014년 박근혜 정부 때도 영화 ‘국제시장’으로 나와서 6.25도 흥남철수도 모르는 세대들이 ‘북한과 통일’을 생각하는 눈물을 훔치기도 하였다. 

    왜 군함에 피난민을 9만8천명이나 태워 데려왔나?

    당시 12월11일부터 크리스마스 이브 24일까지 흥남부두를 떠난 한국군과 유엔군은 도합 10만5천여명, 북한 동포 피란민은 흥남 8만6천, 원산과 성진을 합쳐 9만8천100명이나 된다. 각종 차량 17,500대, 각종 물자도 35만 톤이었다. 
    피란민을 태운 미군 함정과 민간용역선박들은 다음과 같다. 
    메러디스 빅토리호: 14,500명
    버지니아 빅토리호: 14,000명
    레인 빅토리호: 7,000명
    마다케츠호: 6,400명
    토바츠 마루호: 6,000명
    요나야마 마루호: 3,000명
    BM 501: 4,300명
    LST 074: 3,500명
    LST 081: 4,000명
    LST 661: 9,400명
    LST 666: 7,500명
    LST 668: 10,500명

    기네스북에 오른 철수작전의 엄청난 드라마! 철수 규모에서 전쟁사의 신기록이며, 역사상 처음 있는 어마어마한 피난민 철수의 휴먼 스토리는 그동안 몇가지 미담이 회자되어 왔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함흥출신 의사 현봉학(玄鳳學, 1922~2007) 이야기였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지 3개월 만에 6.25가 터지자 서울에서 입대하여 종군하다가 영어를 잘해 미10군단장 알먼드 소장의 고문 겸 통역으로 근무하던중 흥남 철수때 북한 피난민을 태워달라고 요청하고, 미국상선 매러디스 빅토리(SS Meredith Victory)호의 라루(Leonard P. LaRue, 1914~2001) 선장에게 직접 호소하여 라루 선장이 무기장비를 내려놓고 피난민을 무려 1만4천명이나 태움으로써 기네스북(Guiness World Records)에 「단일 선박 최대의 구조작전 수행」(Largest evacuation from land by a single ship)기록을 남긴다. 그러나 지옥의 동포를 구해내고 싶은 휴머니스트가 어찌 현봉학 한 사람 뿐이랴.
  • ▲ 북한 주민을 미군선박에 승선하도록 노력한 주역들. 왼쪽부터, 매러디스 빅토리호 라루 선장, 김백일 장군, 현봉학 박사.
    ▲ 북한 주민을 미군선박에 승선하도록 노력한 주역들. 왼쪽부터, 매러디스 빅토리호 라루 선장, 김백일 장군, 현봉학 박사.
    김백일-정일권의 증언
    북한 동포들은 미군이 철수한다는 소문에 장진호 일대까지 몰려들었다. 미군은 북한 민간인들을 일단 위험분자로 보고 격리시킨다. 중공군이 피난민을 가장하여 침투하기 때문이다.  이에 ”죽어도 자유를 찾아가겠다“며 떼지어 따라다니다 함흥까지 왔는데 그곳은 글자그대로 인산인해, 흥남행 기차에는 5만명도 넘는 사람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피난민을 태워줄 선박도 없고 시간을 지체할수록 미군이 희생되는데다가 병력과 장비를 실어갈 함정도 태부족인지라, 10군단은 일본해역에서 가능한 선박들을 동원하였고 한국해군은 인천과 부산등지의 선박들을 끌어와 200여척이나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만약 피난민을 위장한 중공 첩자들이 승선후 반란을 일으키면 어쩌겠는가. 미군은 피난민을 조사하여 3~5천명 정도만 태우겠다고 자를 수 밖에 없었다. 

    이를 전해 들은 1군단장 김백일 장군, 유원식 대령 등 국군 지휘관들은 펄쩍 뛰었다. 
    [정일권 회고록]에 나오는 대화를 옮겨보자.
    "우리야 군인이니까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여기 동포들은 어디로 가나, 모두들 울면서 제발 이남으로 데려가 달라고 아우성이야. 북괴 놈들이 무지막지 보복을 하고 있다니,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동포들을 태우겠네. 그러니까 말썽나면 잘 수습이나 해주게.“
    "끝까지 미군과 교섭을 벌여야지. 수십만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정 못 하겠다고 하면 미군 앞에서 배라도 갈라야 한다.” 
    "동포들을 버리고 가느니 차라리 우리가 피난민을 데리고 걸어서 후퇴 하겠다“
    정일권과 김백일은 모두 함경도 사람, 고향이 함경북도 경원과 명천이다. 

    이때 현봉학이 나서고, 미해군 군수 참모 에드워드 포니 대령이 합세하여 국군과 피란민의 요청을 알먼드에게 전하며 간청하였고, 알먼드 사령관도 동의하여 피란민 승선이 가능해졌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먼저부터 손을 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다. 
  • ▲ 이승만대통령이 북한 애국동포들의 승선을 요청한 사실을 보고한 극동사령부의 영어전문ⓒ안재철
    ▲ 이승만대통령이 북한 애국동포들의 승선을 요청한 사실을 보고한 극동사령부의 영어전문ⓒ안재철
    ★이승만, 맥아더에 북한동포 구원요청 전문

    현장의 실무차원 ‘간청’보다 보름이나 앞서 이미 ‘결정적 방침’이 정해졌던 사실이 뒷날 밝혀졌다. 미국방성에서 비밀 해제된 흥남철수 문서들, 미10군단사령부 지휘보고서와 도쿄 유엔군사령부 간의 무선통신 등 9개문서가 그것이다. 
    ”북한 피란민들을 구출하라"는 맥아더 원수의 명령은 1950년 12월 8일부터 하달되어 있었다.  당시 항해사였던 제임스 로버트 러니(James Robert Lunney) 역시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거기 무선통신에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 피난민들을 수송해달라”고 요청해왔다는 전문(12.14일자)이 들어있다. (안재철 [생명의 항해] 월드피스자유연합, 2015)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직접 요청한다. 
    “이대로 철수하면 북한의 애국동포들이 다 죽는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이 가능한 한도까지 최대한 많은 동포들을 구원해주지 않으면 우리가 벌을 받을 것이다.” 
    이승만은 유엔의 북한군정실시를 거부했을 때 ‘이북5도 도지사’ 5명을 비롯, 행정조직을 설립하여 북한통치를 시작하였으며 북한출신 청년단체들을 앞세워 수복지역 주민 계도를 담당케 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5도지사들에게 피란자 명단까지 만들어 미10군단 알먼드 사령관에게 전하도록 재촉하였다. 맥아더의 심복 알먼드 사령관은 이승만이 경무대로 불러 만찬도 회의도 했던 사람이다. (프란체스카, 앞의 책. )
    이승만의 요청 사실을 맥아더에 보고한 10군단 사령부의 전문을 소개한다.

    ▶극동군 사령부 수신 메시지(무선)◀
    일자: 1950년 12월14일.
    발신: 10군단 사령부
    수신: 극동군 사령관, 일본 도쿄.

    보병 3사단장으로부터 수신한 다음의 편지를 정보용으로 제출함.
     1. 아래의 함흥시 대표자들이 1950년 12월12일 14:30에 우리 측 대표를 방문함.
    이우춘(함흥시 부시장), 모학복(함흥시 남구청장), 김일성(한국청년회 함남의장, 북한 김일성과 동명이인). 이들은 다음과 같은 요청을 했음.
    A. 피란 가지 못하면 공산군이 다 죽일 것이기 때문에 공포에 떨고 있다. 
    우리들을 모두 데려가든가 유엔군이 끝까지 여기 남아서 우리를 지켜달라.
    B. 육로는 공산군에 막혀 못 내려간다. 유엔군이 철수하는 선편을 제공해 달라. 
    꼭 피란가야 할 사람 30,000명 명단이 여기 있다.
    사령부 대표는 급한 식량 제공을 약속하고 요구사항을 사령부에 전달하겠다고 했다.
    (중략)
    그런데, 함흥시 대표들이 자리를 뜨고 나서 통역을 맡았던 통역관이 이런 말을 했다.
    “저들이 통역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함흥 대표에게 말하기를, 직접 미군을 찾아가서 피란민 명단을 제출하고 선편 수송을 간곡히 부탁해 보라고 해서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이상 위의 사항을 심사숙고하여 지시 요망함.
    추신: 이 메시지는 참고용으로 서울의 미 대사관과 8군 사령관에게 전송하였음.
    (안재철, 앞의 책)

    이처럼 주도면밀한 지도자가 이승만이다. 맥아더와 알먼드 사령관에게 요청해 두고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 함흥시장에게 직접 또 채근한 것이다. 북한 애국자들 명단도 꼭 미군에게 제출하라고 다짐까지 두었으니, 자식 챙기는 부모 마음이 떠오른다.  

    피란민 수송이 19일 시작되어 24일 마지막 배가 떠난 흥남 부두에는 천지를 흔드는 폭발음이 불꽃처럼 터졌다. 피란민 때문에 미처 싣지 못한 다이너마이트 400여톤, 폭탁 227톤, 휘발유 200여 드럼을 중공군이 쓰지 못하게 폭파시켰다. 마지막 드럼통이 터지는 것을 지켜본 사람은 10군단장 알몬드 소장과 미해군 90상륙지원단장 제임스 도일 소장, 인천상륙작전의 기함이었던 마운트 맥킨리호를 타고 이들이 최후로 흥남항을 떠난 시간은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오후16시 32분이었다. 최고책임자는 언제나 마지막에 떠난다.

    흥남철수작전이 성공이라 함은 군사적 의미에서만이 아니다. 극한의 독재치하에서 고통 받는  ‘적국의 국민‘까지도 최대한 구원한 미국 군인정신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도주의적 사명감이 더 빛나는 역사성 때문이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전쟁의 궁극적 목표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피란민을 태우고 떠난 매러디스 빅토리아호 레너드 라루 선장의 외침, ”무기를 버리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태우자“며 1만4천명이나 가득 싣고 격랑을 헤쳐나갔다. 

    당시 36세 라루선장은 22년을 바다에서 상선을 운용한 항해 고수, 1954년 바다를 떠나 뉴저지주 뉴턴의 베네딕토회 성 바오로 수도원(St. Paul's Abbey)에 들어가 수사가 된다. 카톨릭에 귀의한 남자는 수사(修士, Brother), 여성은 수녀(修女, Sister)이다. 다음은 흥남철수에 대한 라루 수사의 회고담이다. 
    "비참한 광경을 지켜보는 나는 쌍안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불쌍한 피란민들은 이거나 지거나 끌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몰려들었고, 병아리처럼 겁에 질린 아이들과 함께였다. 그 항해를 생각할 때 그 놀라운 감격을 잊을 수 없다. 어떻게 그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던지, 어떻게 한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 거칠고 얼음 같은 한국의 바다 위에서 맞은 크리스마스에 틀림없이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한 메시지가 나에게 와 있음을 깨달았다" 
    '마리너스'(Marinus)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봉헌한 라루 수사는 87세(1914~2001)로 세상을 마감한다. ’하느님이 이끈 구세주의 배‘는 부산항이 초만원상태여서 거제도 장승포에 1만4천의 생명을 무사히 풀어 자유세상을 선물하였는데, 그 밤바다에선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출산을 도운 항해사는 아기들을 일단 ’김치1~김치5’로 이름 지었다. 그래서 안재철(월드피스 자유연합 이사장)은 흥남철수가 ’생명의 항해‘라는 책을 써냈다.

    ▶중공군은 12월4일 평양을 점령하고 38선으로 밀고 내려왔다. 그러나 동부전선에서 미10군단 해병1사단의 완강한 저항과 역공에 격심한 피해를 당한 중공9병단은 ”38선을 언제 넘느냐“는 갈등에 빠진다. 전력 보강 없이는 전쟁이 블가능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22일까지는 38선을 넘어 서울을 점령하라“고 재촉하였고, 펑더화이는 ”이 상태론 못 싸운다. 서울은 북조선군에게 맡기자“고 투덜거렸다. ([한국전쟁과 중공군] 앞의 책)
  • ▲ 교통사고로 전사한 워커 8군사령관(왼쪽)과 후임 리지웨이 장군.
    ▲ 교통사고로 전사한 워커 8군사령관(왼쪽)과 후임 리지웨이 장군.
    ◆워커, 교통사고로 전사...후임 리지웨이 장군에 기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22일 이승만 대통령은 춘천과 원주의 국군사령부를 방문 위문한다. 장병들이 지게로 날라오는 얼어버린 밥을 먹는 다는 말을 듣자, 미군에 전화를 걸어 레이션(미군용식량)을 나누어달라 요청했으나 ”우리도 모자라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이튿날 23일 무초 대사가 달려와 ”부산으로 정부를 옮겨야한다“고 서두르는 것이었다. 지난 주 ”걱정 말라“고 큰소리치던 때와 너무 달랐다. (프란체스카, 앞의 책)

    이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충격뉴스가 날아들었다. 
    워커 8군사령관이 의정부 방면에서 교통사고로 전사했다는 것, 그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영국군을 표창하고 나서 훈장 받은 외아들 샘 대위를 축하하러 가려던 길이다. 과속운전 하던 워커의 차가 마주오던 미군트럭을 피하려다 전신주를 들이받고 낭떠러지로 굴렀는데 급히 병원에 데려갔으나 아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워커의 늦둥이 무녀독남 25세 샘 워커 대위는 미24사단 소총부대 중대장, 낙동강 전투 등 여러 무공을 세워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아버지와 기쁨을 나누기 직전 영영 이별했다.
    샘 워커는 미국에서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고 한국부대로 복귀하여 파병기간을 모두 채우고 돌아갔다. 직업군인으로 베트남에도 참전한 그는 1977년 당시 미육군 역사상 가장 젊은 대장(52세)이 되고, 아버지와 함께 유일한 ’부자 대장‘이란 기록을 세웠다. 
  • ▲ 북한 피란민 1만4천명을 태워  흥남을 철수한 미국화물선 매러디스 빅토리호, 기네스 북에 올랐다.
    ▲ 북한 피란민 1만4천명을 태워 흥남을 철수한 미국화물선 매러디스 빅토리호, 기네스 북에 올랐다.
    텅빈 교회서 성탄 예배...특별 성명 ”우리 전쟁 우리가 싸우자“

    이승만 대통령 부부는 크리스마스 이브 정동교회를 찾았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텅 빈 예배당엔 교인 20여명 뿐, 목사도 사라져 평신도 한명이 예배를 인도한다. 설교하며 마태복음 10장을 봉독할 때 대통령도 신도들도 모두 울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

    25일 이승만은 전 국민을 향하여 ’성탄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우리가 우리나라의 주인이오, 이 전쟁이 또한 우리의 전쟁이므로 우리가 나라와 자유를 위해서 끝까지 굴하지않고 싸워나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 손님들(참전국)들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고 더욱 돕고자하는 마음이 커질 것이다. (중략)
    우리가 금수강산을 잃어버리고 우리 집과 땅을 빼앗긴다면 우리는 또 다시 남의 노예가 되어 압박과 설움을 받을 것이다. 중공군은 무서워할 것이 없다. 국군과 방위대와 함께 맹렬히 싸운다면 중공군을 무찌를 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 역사에서 중국의 침략을 받은 것이 하두번이 아니지만 그때마다 뭉쳐서 이겨내어 몰아냈으니 두려워할 것이 없다. (중략)
    유엔군과 미군이 작전상 후퇴가 필요할 때 지장이 없도록 국회의원들과 정부가 부산으로 잠시 옮길 것을 요청해왔다. 국민 여러분을 소개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하므로 권고하는 바이다...“

    이날 이승만은 구황실 관리책임자 이병주를 불러 중요한 국보와 문화재들의 안전한 대피를 직접 챙겼다. 이병주는 어릴 때 서당친구였다. 그리고 마지막 황제 순종의 계비 윤비(尹妃)의 부산피난 준비까지 체크하였다.

    리지웨이 장군의 북진 약속...’천국행 티켓‘ 들고 부산으로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1895~1993) 장군이 무초와 함께 나타났다. 
    ”대통령 각하, 저는 한국에 온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기어이 적을 박살내겠습니다“
    덤덤하던 이승만의 얼굴이 활짝 펴지면서 키 작고 듬직한 미군대장의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가장 맛있는 차를 끓여 오시오“ 프란체스카에게 말하는 이승만의 얼굴은 기쁨이 가득하다.
    워커의 사고사 즉시로 임명된 후임 8군사령관, 이승만은 프란체스카에게 ”미국 정부가 맥아더를 견제하려는 인사 같다“며 염려하던 터였는데 예상과 다른 장군의 언약에 귀가 번쩍 뜨인 듯 하다.  리지웨이는 ”태세를 정비하는 대로 공세를 재개할 것“이라며 어제 서부전선 제1사단을 찾아 ”앞으로 후퇴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명령하였다고 했다. 신국방장관은 리지웨이 장군이 한국군 전체에게 ”방어선을 사수하라. 적을 분쇄하라, 최후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다“는 메시지를 발표하였다고 설명하자 이승만은 듣던 중 반가운 말에 일단 안도한다. 
    그동안 동서로 분리되어 적군 방어에 혼선을 빚었던 미군의 지휘권도 일원화되었다. 맥아더가 직접 맡았던 미10군단 지휘권을 리지웨이가 인계받아 8군과 합친 것이다.  

    떠나선 안될 서울을 또 떠나야 하나...고뇌에 싸였던 이승만은 리지웨이의 북진 장담에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부산행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 임명되어 오는 미지휘관들은 아무리 봐도 미국방부나 국무부가 맥아더의 굳건한 반공 전법을 방해하려고 그들의 심복을 보내는 것이 틀림없어 보이므로 이승만은 대응책에 골몰하게 되었다. 

    ▶섣달 그믐 12월31일, 이승만 부부는 정동교회에 나갔다. 모든 예배가 취소되어 단둘이서 예배를 보았다. ”오 하나님! 당신 만이 악을 물리칠 힘을 가지고 계시옵니다. 부디 불쌍한 이 나라 국민들을 도와 생명을 구원하시옵소서!“
    새해 1951년 1월1일 각료들과 신년 하례 모임을 가졌는데 조병옥 내무장관은 또 빨리 서울을 떠나야한다고 재촉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는 마지막에 떠나야한다. 미군이 철수하면 떠나자“고 말했다. 모든 공무원들에게는 두 달 치 월급을 이미 지불하였다.
    2일 리지웨이 장군과 무초 대사를 대동한 이승만은 군용기로 원주로 날아가 국군을 격려하고 왔다. 각의에서 조병옥 내무가 또 다시 남하를 재촉하여 3일 오전에 떠나기로 결정했다.
    ”원자탄은 언제 쓰려고 안쓰는가“ 며칠 전 콜린스 미육군참모총이 부산에 들렀다가 중공군 장교 포로와 나누었다는 대화가 화제에 올랐다. ”공산당은 무엇으로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중공군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오직 한가지 원자탄 뿐이다.“

    ▶1.4 후퇴...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한 날 1월4일, 그 하루전 3일의 해가 밝았다. 
    이승만 대통령 일행이 경무대를 나서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비서 황규면, 주방 양노인, 여성 고용인 한명만 대동한 피란길,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의 몸에는 숨어있는 일행이 또 있었다. 바로 6.25때 간직한 권총과 ’천국행 티켓(극약)‘이다. 6개월 만에 다시 한번 중공군과의 최후를 각오한 대통령 부부! 군용기는 부산을 향해 굉음을 토하며 날아오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