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진호 전투에서 '유령들의 인해전술'을 보여주는 사진.
    ▲ 장진호 전투에서 '유령들의 인해전술'을 보여주는 사진.
     선전포고 없는 게릴라 전쟁, 비겁한 마오쩌둥의 은밀한 침략은 미국과 유엔군을 완전히 속이는 데 성공한다. 미국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려는 마오는 ’선전포고‘ 대신 ’경고‘를 몇 번 발하기는 했다. 앞에서 본대로 우리 국군이 먼저 38선을 넘은 직후 10월3일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시켜서 ”한국군이 38선을 넘으면 북한군이 막겠지만 미군이 38선을 넘어올 경우 중국이 개입하겠다“고 했다. 미국은 이를 깡그리 무시했고 아예 잊어버렸다. 
    이미 7월부터 만주에 한국침략 군비태세를 갖춘 마오쩌둥,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중국의 국가안보를 지켜주는 속방(屬邦)이고, 이념대결시대 미국식 자유민주체제가 된 남한은 중국을 겨누는 미국의 칼, 이참에 남북한을 중국에 예속시키는 공산화가 마오의 최종목표임도 이미 살펴보았다. 

    중공이 그동안 펴낸 ’조선전쟁‘ 기록들에 따르면, 중공군은 6.25전쟁 중에 도합 5차에 걸친 전역(戰役:공세)를 벌였다고 주장한다. 일정기간 전세와 지형 변화에 따라 전술을 바꾸며 집중공세를 펼치다가 잠시 휴식하고 다시 새로운 공세를 전개하였다는 말이다. 휴식기간엔 철저히 은신하여 보급과 병력을 보충하며 전열을 가다듬어 새 작전을 짜는 것이다. 중공측이 말하는 5차례 공세는 대강 이러하다.
    *1차공세=1950년 10월25일부터 11월5일까지 11일간. 이것이 ’운산전투‘였다.
    *2차공세=11월25일부터 1개월간. 동서공세, 서쪽은 평양 재점령, 동쪽은 장진호 전투.
    *3차공세=12월말부터 다음해 1951년 1월10일까지. 서울 재점령으로 한국정부 1.4후퇴.
    *4차공세=1월12일부터 4월21일까지 87일간, 수원이남 평택지역까지 남진작전.
    *5차공세는 2단계로 장기전, 휴전회담과 함께 유엔군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인다. 38선 중심으로 한치라도 점령지를 늘리려는 땅 빼앗기 전투양상이다.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 [한국전쟁과 중공], 박실, 앞의 책)
  • ▲ 만주폭격을 주장하는 맥아더 발언과 참전14개국 합의. 오른쪽은 미육참총장 콜린즈가 중공의 공군이 참전하면 만주와 본토를 폭격하겠다는 발언. 트루먼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조선DB
    ▲ 만주폭격을 주장하는 맥아더 발언과 참전14개국 합의. 오른쪽은 미육참총장 콜린즈가 중공의 공군이 참전하면 만주와 본토를 폭격하겠다는 발언. 트루먼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조선DB
    기울어진 전장(戰場)...’만폭‘ 금지령에 묶인 미군 "자승자박"

    누가 봐도 중공군의 참전은 무모하다. 군사최강 미국과 통일열정 한국군을 비롯한 17개국이 뭉친 유엔군은 독점적인 공군력에 힘입어 통일 직전까지 왔는데, 내란에 피로한 중공군이 빈약한 구식무기에 소련의 공군지원도 얻지 못한 채 어떻게 싸우려고 덤빈 것인가. 
    문제는 바로 이 공군력이다. 
    트루먼과 유엔은 유엔군의 38선 북진을 허락하면서 맥아더 사령관을 꽁꽁 묶어놓았다.
    ”압록강 너머 만주(滿洲)를 폭격하지 말라"는 만폭(滿爆:만주폭격) 금지령! 
    당시 “만폭만이 승리의 첩경"임을 부르짖는 것은 이승만과 맥아더만이 아니었다. 참전국 가운데 14개국에 맥아더는 사령관으로서 합의까지 얻어 놓고 만주폭격의 승인을 본국에 요구하고 있었다. 적의 배후 보급선을 끊는 것은 전쟁의 상식중의 상식이다.
    그 만주 폭격을 금지한 것은 자승자박이다. 중국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세계3차대전 회피론은 지극히 안일한 ’안방론‘이었다. 이러면 중공과 소련이 참전할 명분이 없으니 안심이라는 유치한 셈법이다. 중공을 모르면서 중공을 너무나 가볍게 본 미국은 아무런 대비책도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적이 누구인가. 지피지기백전백승(知彼知己百戰百勝)에 통달한 역전의 게릴라전 두목 마오쩌둥은 간첩을 통해 알아낸 이 빈 틈을 노렸던 것이었다. 세밀히 짠 전술 ’매복 기습작전‘은 1차공세부터 대승을 거둔다. 

    이 ’만폭금지‘보다 더 기막힌 정치적 초점은 마오쩌둥이 제1차공세 기간(10.25~11.5)으로 정한 그 타이밍의 절묘함이었다.
    바로 11월7일 미국은 중간선거가 실시되는 날이다. 트루먼 대통령 ’중간평가‘를 좌우하는 선거, 연방 상-하원의원, 주지사 등을 선출하는 정치바람 속에 한국전쟁은 ’잊고 싶은 악재’였다. 그토록 피하고 싶은 3차 대전인데 투표날 눈앞에서 ‘중공군 참전’ 사실을 공개할 수 있겠는가. 선거전에 몰입된 미국이 보란 듯이 마오쩌둥은 한-미 연합군을 작살내고 껄껄 웃었으리라.

    ‘운산전투’의 일방적 참패=역사상 최초의 미-중 전쟁, 그 첫 싸움이 제1차공세 운산전투였다. 중공군은 압록강까지 올라간 한국군의 배후를 급습 궤멸시키고 미군을 포위 압살하는 작전, 모두 낮에는 매복했다가 밤에만 귀신처럼 인해전술로 덮치는 야습(夜襲)이다. 
    1950년 10월 하순 미1군단 예하 한국군 6사단은 이미 압록강에 도달하고 1사단은 청천강을 넘어 운산으로 향했다. 이때 1사단 선봉 15연대가 중공군 첫 포로 한 명을 생포했던 것, 미군 8군은 이를 소규모 침투로 판단, 워커 중장은 평양에 머물던 미군 1기병사단에 운산을 지나 압록강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10월 30일 미1기병사단의 8기병연대가 운산에 이르러 한국군의 공백을 맡았다. 북쪽의 한국군 15연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다. 
    이때 중공군 115-116 두 사단이 운산지역을 둘러싼다. 11월1일 미8기병연대와 한국군 15연대는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밤12시 한국군은 중공군의 기습 협공에 완전 해체지경이 되고 미군은 궁지에 빠졌다, 협곡의 단 하나뿐인 퇴로마저 차단되었다. 
    2일 오전 3대대는 인해전술로 들이닥치는 중공군과 백병전을 벌이며 필사의 탈출을 시도했다. 미5기병대는 하루 종일 격렬한 공방전에서 5백여명의 전사자를 내고도 출구를 만들지 못한다. 
    결국 워커 사령관은 고립된 부대의 구출작전마저 포기하고 철수명령을 내린다. 
    죽음의 감옥에 갇힌 생존자들은 공군지원도 끊기고 탄약도 떨어져 적이 버린 무기를 주워 싸웠지만, 필사적인 탈출에서 거의 죽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전사자가 얼마인지 가늠하기도 힘들 지경, 8기병연대만 600여명을 잃고 많은 무기와 장비를 버린 채 후퇴한다. 피해는 거의 ‘총체적’이었다. (로이 애플만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육군본부 옮김, 1968)
    이렇게 중공군 6개군단은 열흘간의 1차공세에서 대승, 유엔군을 청천강 이남으로 밀어냈다.

    운산전투의 참패를 보고서도 맥아더와 미군 지휘부의 중공군 개입에 대한 아전인수식 인식은 변화가 없었다. 맥아더의 정보참모 찰스 윌로비(Charles A. Willoughby) 소장은  운산 전투에서 만난 중공군 2만여명이 전부인 것으로 추산 보고하였는데, 중공군은 30만 넘게 숨어있었다. 일방적인 공군력만 믿는 맥아더의 낙관적 판단을 아무도 바꿀 수 없었다. 
    ”윌로비는 맥아더의 인의장막 아첨꾼”인지라 밑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그럴 리 없다“며 깔아뭉개고 축소 조작했다 한다. 미국 CIA는 윌로비의 중공군 정보가 처참하게 실패한 뒤에야 한국전쟁에 투입되었다. (핼버스탬, 앞의 책)
    마침내 11월 24일 맥아더는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지내자“며 북한군 ‘잔당’ 소탕을 위한 ‘끝내기 공격’ 명령을 내린다. 잔당 소탕이므로 장병들도 자신감에 넘쳤다. 다시 말하면, 어마어마한 적군이 숨어 기다리는 줄도 모르는 채, 마오쩌둥이 펼쳐놓은 광대한 죽음의 그물망 속을 향하여 유엔군은 의기양양하게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꼴이다. 
  • ▲ 장진호 전투에서 싸운 미국 참전용사가 뒷날 공개한 현장사진ⓒ연합뉴스
    ▲ 장진호 전투에서 싸운 미국 참전용사가 뒷날 공개한 현장사진ⓒ연합뉴스
    얼음 지옥 ‘장진호 전투’=맥아더가 북진명령을 내린 다음날 11월25일 펑더화이의 중공군은 2차공세에 돌입, 30만 대군이 서부와 동부로 나눠 물 밀 둣 밀려 내려온다.
    맥아더는 서부전선에 미8군, 동부전선에 미10군단을 배치, 중공군이 오는 줄도 모르고 북한군 잔당 소탕을 맡겼다. 맥아더가 도쿄에서 직접 지휘하는 10군단의 에드워드 알먼드(Edward Almond) 사령관은 맥아더의 심복이다.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일제히 북진하는 유엔군은 대충 세 갈래로 올라간다.
    청천강을 재돌파하려는 8군, 김일성의 피난수도 강계(江界)와 압록강를 회복하려는 10군단, 더 멀리 동부에선 백두산과 두만강을 향하고 청진(淸津)도 점령하였다. 

    중공군이 들이닥쳤다. 8군은 평양으로 후퇴하고 10군단 미해병1사단과 지원부대들은 험준한 개마고원 장진호(長津湖) 유역에 갇혀버리고 만다. . 
    갈고 닦은 중공의 원시적 게릴라 전술에 속수무책 밀리고 밀리는 군사강국 미국, 황초령(黃草領) 일대 장진호의 미 병력은 해병대 2만5천-미육군 4천5백-영국 해병코만도 300명 등 총 3만명 규모, 이를 포위한 중공군 제9병단은 약 13만명으로 유엔군의 4배가 넘었다. 
    황초령은 통일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방경계 표지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던 곳, 거기서 대한민국 남북통일의 꿈은 결국 산산조각이 나게 된다.

    문제는 당시 미군의 전선이 너무 넓었다. 8군의 서부와 10군단의 동부까지 산만한 전개상황, 중공군에게 포위될 줄은 전혀 예상도 못한 탓이다. 미7사단 선봉대는 압록강변 혜산진(惠山鎭)까지 올라갔고 동북부 두만강가지 동서로 무려 480㎞나 벌어졌다. 잔당소탕작전이었기 때문이다. 통신연락도 불안하고 끊겼고 보급기지 함흥(咸興) 흥남(興南)에서 수송하는 보급품도 제때 받기 힘든 상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중공군은 미군의 허리를 잘라 보급선도 연락망도 완벽하게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무장면에서 보면 중공군은 미해병대의 적수가 못된다. 중공군 사단에는 1개 포병대대 뿐, 전차 같은 중화기도 공군 폭격도 없었다. 오직 소총과 수류탄, 박격포에 의존하는 경무장 보병부대였다. 다만, 미군이 낯선 산악전(山嶽戰)의 귀신들이며 마오의 병력 충원은 무진장이다.
  • ▲ 장진호 전투에서 혹한에 동사한 전사자들, 미군도 중공군도 희생자가 많았다.
    ▲ 장진호 전투에서 혹한에 동사한 전사자들, 미군도 중공군도 희생자가 많았다.
    미군들의 증언
    *그림자 없는 유령들의 인해전술=”그 많던 중공군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구름떼처럼 몰려왔던 괴물들이 한바탕 야만적인 살인공격을 퍼붓고는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계곡엔 여기저기 중공군 시체들이 널려있는데 그 큰 부대병력이 이렇게 꽁꽁 숨을 수 있다니...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감춰버려 종적을 짐작도 할 수 없다. 마치 그림자 없는 유령들이 나타났다가 공중으로 증발한 것만 같다. 언제 또 몰려올 것인가, 인해전술이 이런 것이라니...“

    *적막감의 공포=”너무 고요하다. 낮에도 쥐죽은 듯 사방은 기척이 없고 해가 지면 더욱 음산한 침묵이 엄습한다. 이 무시무시한 적막감이 인간의 공포심을 풍선처럼 극대화시켜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다. 동서남북을 둘러보아도 어디서 악마집단이 덤빌지 모르니 병사들의 전투력이 약해져 걱정이다.“
    *유령들의 음악소리=”달빛만 싸늘하던 적막강산에 갑자기 들리는 저 피리소리...유령들의 울음소리인가 잔치소리인가, 공포에 떨던 병사들의 마음을 흔드는 애절한 곡조가 어느새 향수병을 자극하고 있다. 그때 돌연 나팔소리 징소리 북치는 소리...눈 속에 흰 옷 입은 악령들이 악을 쓰는 괴성을 지르며 쏟아져 나와 덤벼들고 있다.“

    *최대의 적 ‘혹한’=”막상 와보니 한국의 지형은 어느 군대도 함부로 접근하기 힘들만큼 가파르고 험하기 짝이 없다. 산골 탱크전은 어림도 없고 강력한 찬바람에 기온은 날마다 뚝뚝 떨어졌다. 행군하는 동안 주변이 너무 조용하고 너무 춥다. 낮에도 영하20도, 밤에 체감온도는 영하 30도를 넘는 듯 꿈에도 상상 못할 지경이다. 
    수염에도 눈썹에도 고드름이 매달려 앞을 보기 힘들다. 탱크도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고 총구도 뇌관도 막히고, 불 피워 녹여도 금방 얼어 발사해도 불발이 된다. 정찰기 앞 유리창이 혹한을 견디지 못해 갈라져버렸다. 겨울 군복이 도착하지 않아 여름옷이 얼음덩이다. 종교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저도 모르게 기도가 나왔다. 살아남을 생각보다 지옥 같은 고통을 줄여달라는 기도였다“
    데이비드 핼버스탬(미국 작가 역사학자)가 인터뷰한 노병은 ”수십년이 지나도 몸이 녹은 것 같지 않다“며 ”악몽 같은 기억을 살려내지 말아 달라“고 했다. (핼버스탬, 앞의 책)

    ▶처음부터 ‘기울어진 전장’(戰場)이었다. 중무장 미군이 일방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전쟁인데 거꾸로 오히려 경무장의 중공군쪽으로 기울어진 전쟁! 미군의 막강한 공군이 중공군의 보급선을 폭격할 수 없도록 금지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죽여도 죽여도 죽지않는’ 야생동물 강시처럼 끊임없이 몰려오는 중공군의 끈질긴 야습에 미군은 감당불능이다. 크리스마스엔 승리하여 귀국하려던 미군은 크리스마스까지 한달동안 죽음의 얼음지옥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 미해병1사단 병력은 반토막이 나고 전투불능 궤멸사태에 직면한다. 
  • ▲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을 시인, 경고한 맥아더 발언.ⓒ조선DB
    ▲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을 시인, 경고한 맥아더 발언.ⓒ조선DB
    ◆맥아더, ‘완전히 새로운 전쟁’ 선언...만주 폭격 승인촉구

    서쪽에서 평양이 다시 무너지고 동쪽에서 장진호에 미해병1사단이 갇혀버리자 맥아더는 그제서야 중공군 본격참전을 인정한다. 공군력으로 보기좋게 격멸하려던 전술이 완전실패하고 중공군은 폭격해도 폭격해도 귀신처럼 숨었다가 인해전술로 덮쳐온다. 눈빛처럼 하얀 군복을 입어 그 자리에 엎드리면 폭격기가 구별할 수도 없는 변장술도 귀신 같다. 중공군은 소규모의 ‘인민지원군’이 아니라 예상을 넘는 대규모의 정규군임을 어쩌겠는가.
    11월28일 유엔군에 38선까지 철수명령을 내린 맥아더는 본국 합참에 긴급 요구한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전쟁(An Entirely War)이다. 국지전으로 끝내려던 모든 희망은 포기해야 한다. 중국의 선전포고 없는 침략은 세계 대전의 차원이며 이는 사령관의 결정 범위를 넘는 상황에 봉착하였다. 현재의 유엔군 능력으론 불충분해졌다. 결단을 내려달라“
    맥아더는 중공군의 놀라운 전투능력에 놀라 ”병력과 무력의 대폭증강“을 요구하였다. 현재의 무장상태는 6.25발발 당시 대응 규모였기에 이대로는 승리는커녕 방어력도 태부족이다.
  • ▲ 트루먼 대통령의 원자탄 사용 고려와 한국 불포기 선언을 대서특필한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1950.12.2일자)ⓒ조선DB
    ▲ 트루먼 대통령의 원자탄 사용 고려와 한국 불포기 선언을 대서특필한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1950.12.2일자)ⓒ조선DB
    ★트루먼 ”원자탄 사용할 수 있다” 폭탄 선언
    ★맥아더, 만주-중국본토에 원폭 26개 투하계획

    맥아더의 보고를 받은 워싱턴은 새삼 충격에 빠진다. 긴급소집한 국가안보회의에서 애치슨 국무장관은 “중국의 전면전에 말려들면 안된다. 미군은 중공군에 이길 수 없다”면서 증국 배후에는 소련이 있음을 지적하고 맥아더의 참패는 남북전쟁시 북군이 남군을 얕보다가 참패한 불런(Bull Run) 패배 이후 최악이라 비난하기만 했다. (남시욱, 앞의 책)

    트루먼은 그러나 11월30일 중국의 ‘부도덕한 침략’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중국이 북한에서 유엔군을 공격한 것은 유엔에 대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평화를 바라는 인류를 위협한 것“이며 소련의 공산식민지 정책을 돕는 행동을 즉시 중지하라면서 중대 발언을 한다. 기자가 ‘원자탄 사용 여부’를 묻자 “필요하다면 한국에서 원자탄을 쓸 수도 있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사용권은 물론 현지 사령관에게 있다고 했다. 
    놀란 여론이 들끓자 트루먼은 서둘러 해명성명을 발표한다. “미국이 원자탄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개연성을 지적한 것일 뿐, 핵 사용을 결정한 바 없으니 오해하지 말아달라.”

    이때 맥아더는 이미 원자탄 폭격 비밀계획을 짜두고 있었다. 
    당시 맥아더의 지휘를 받는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래트메이어(George Stratemeyer) 장군의 일지가 반세기 지난 뒤 공개되었는데 트루먼의 원폭발언 다음날 12월 1일자 내용은 이러하다. 
    즉, 맥아더는 원자탄 사용계획을 세밀하게 작성하였고 총26개의 원자탄 투하 승인을 합참에 요청하였다는 기록이다. 그 핵사용 계획이 트루먼 대통령의 ‘원폭발언’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맥아더가 지목한 원폭 투하지역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중공의 만주지역 보급선, 군수생산공업지대, 본토의 수도 베이징, 상하이, 난칭 등 대도시들, 동시에 두만강 넘어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중공군의 보급차단은 물론, 중국대륙의 초토화 및 소련의 공군력까지 파괴함으로써 침략군을 몰아내고 남북통일을 달성할 뿐만 아니라, 중국대륙의 공산국을 지구상에서 소멸시키는 목적을 완결하는 ‘맥아더의 반공전쟁‘ 마스터플랜이라 할만하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진작부터 다짐한 반공전쟁의 두 지도자 이승만-맥아더의 비밀맹서문과 직결되는 내용일 것이었다. 
  • ▲ 트루먼 대통령과 애틀리(앞 오른쪽) 영국수상의 백악관 회담. 애치슨 국무장관과 마셜 국방장관(뒤 오른쪽)이 배석하였다.
    ▲ 트루먼 대통령과 애틀리(앞 오른쪽) 영국수상의 백악관 회담. 애치슨 국무장관과 마셜 국방장관(뒤 오른쪽)이 배석하였다.
    ★영국 경악...트루먼에 “원폭 사용땐 사전동의 받아라“ 압박

    트루먼의 ’원폭 발언‘은 세계에 핵폭탄 같은 충격을 주었다. 영국 노동당정부 수상 애틀리( Clement Richard Attlee, 1883~1967)는 당장 미국에 가겠다고 연락하고, 프랑스는 애틀리를 만나 한국전쟁의 확전을 막아달라고 부탁한다. 영연방 인도, 호주, 중동 중남미 국가들까지 동조하였다. 워싱턴으로 날아간 애틀리는 백악관에서 트루먼과 4일부터 7일까지 회담을 거듭한다. 

    애틀리는 대뜸 ”원자탄을 사용 말라“며 ”만약 사용하려거든 영국의 사전 동의를 받으라“고 했다. 트루먼은 ”검토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정된 바 없다“고 설명한다. 애틀리는 문서로 약속하자고 조른다. 트루먼은 문서화에 부정적이다. 결과는 문서화 없이 5개항에 합의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고 다음날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한국 및 전세계 공산주의 침략 붕괴를 위한 5개항 합의▶
    1. 미-영 양국은 한국전투 종식을 위한 협상의 용의가 있다. 그러나 중공에 대한 유화정책은 절대로 부당하다
    2. 서구 방어책의 재편성을 신속히 하며 그 최고사령관으로 아이젠하워 장군을 임명할 것.
    3. 영-미양국은 수출통제를 강화함으로써 소련 및 동구 위성국에 전쟁물자 수송을 봉쇄함.
    4. 유엔 육해공군은 부득이한 철수의 경우에는 한국에 있는 중공군에 대하여 계속 전투할 것이며 다른 지역에 사용할 병력충당책으로서 자의적 철퇴는 절대 안할 것.
    5. 미-영양국은 서구제국에 군수 및 민간생산용원료의 충분한 유통을 확약함. ([조선일보]1950.12.9.)
    ◀트루먼-애틀리 공동성명 요지
    「...우리는 모든 협의에 있어 완전일치를 보았다. 직면한 위협 및 우리가 수행해야할 기본정책에 관해서 완전한 의견일치를 보았다. 미영 양국민은 최근 수주일 동안 명백해진 평화에 대한 위협에 대하여 공동행동을 취할 것을 결의하였다...」 ([조선일보] 1950.12.10.)

    한국 언론들은 트루먼-애틀리의 합의사항을 보자 크게 환영한다는 보도를 대서특필한다. 중공에 대한 유화정책 우려를 일소하며 ‘자의적 철군은 없다’는 조항에 뛸 듯이 기뻐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다음날 나온 공동성명을 읽어보고 환호는 실망으로 급반전된다. 합의사항에 대한 언급이 없을뿐더러 ‘평화에 대한 양국의 의견일치’가 무엇을 말하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 ▲ 중공군 대규모 개입이 확인되자 이승만대통령은 미국에 국군50만 무장을 요구, 우리 힘으로 통일 하겠다고 선언한다.ⓒ조선DB
    ▲ 중공군 대규모 개입이 확인되자 이승만대통령은 미국에 국군50만 무장을 요구, 우리 힘으로 통일 하겠다고 선언한다.ⓒ조선DB
    ◆ 이승만 ”전쟁은 우리 힘으로! 50만 국군 무장시켜라“

    이대로 휴전이라니 말도 꺼내면 절대 안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팔을 걷어붙였다. 마침 새로운 유엔한국위원단을 맞아 환영식을 열고 새로운 결의를 미국과 유엔을 향하여 토해낸다. 

    “...통일대업의 성취 일보 직전에서 소련의 주구 오랑캐 중공군의 뜻하지 아니한 한국 침공의 무모한 행동을 보고 분개하여 3천만 겨레가 한덩어리가 되어 총력을 기울여 이를 철저 분쇄할 것을 맹서하였다...(중략)...우리는 유엔군의 수고 만을 바라고 수수방관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손에 손에 총검을 들고 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무기가 요청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 미국은 우리 한국군 50만명을 무장시킬 군비를 하루 속히 제공해주기 바란다. 우리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의 피로써 해결할 결의를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 
    냉정전쟁(냉전)은 지구를 전율케 하며 유엔의 운명은 한국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유엔은 북대서양동맹보다 일층 광범한 국제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한국정부는 한국 불포기를 선언한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 및 미국과 운명을 같이 할 것을 언명한 영국수상 애틀리씨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러나 중공과의 화평교섭을 제안한 최근의 보도는 우리에게 절망에 가까운 감을 주었으나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은 절대로 자의적으로는 한국으로부터 미군을 철수시키지 않을 것을 명백히 하였다.
    맥아더 장군이 추산한 바 100만 중공군이 현재 한국에 진격 중에 있으며 그에 대항하는 유엔군이 충분히 증강되지 않는 한 무자비한 중공군은 전 한국을 휩쓸 것이며, 극동에서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있는 인민들은 구라파(유럽)를 위하여 희생되어야 할 것인가. 구라파보다 인구가 압도적인 아시아의 민주주의는 망각되어야 할 것인가. 전아시아 인민들은 한국사태를 직시하고 있으며 장차 다른 곳에서 벌어질 전쟁에 대비하여 한국에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전쟁을 포기한다면 그들은 지극히 비관에 빠질 것이다.” ([조선일보] 1950.12.8.)

    ‘외교의 귀신’ 이승만은 트루먼-애틀리의 공동성명을 보자 본능적으로 ‘밀약’이 있음을 직감한다. ‘평화의 위협에 대한 공동행동의 일치’란 무엇인가. 지금 유럽각국과 영연방등 참전국들을 비롯한 세계 여론은 ‘북폭 반대-확전반대’를 요구하고 있는 판국이다. 그렇다면 ‘평화를 위한 공동행동’은 그렇게도 염려했던 ‘휴전’일 가능성이 아주 높지 아니한가.  당시 미군은 이때까지도 한국군엔 중화기와 탱크를 주지않았다.
  • ▲ 울화가 치밀때 경무대 뒤뜰로 나가 나무 등걸에 장작을 패면서 마음을 정리하던 이승만 대통령 모습.
    ▲ 울화가 치밀때 경무대 뒤뜰로 나가 나무 등걸에 장작을 패면서 마음을 정리하던 이승만 대통령 모습.
    ★“통일 미치광이 되겠다“ 이승만, ”압록강 다리 폭파하라“...화풀이 장작패기

    이승만은 프란체스카에게 말했다. “내가 또 미치광이 소리를 들어야겠소”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격했을 때의 일이다. 맥아더가 북한 통치는 유엔군이 맡는다고 말했을 때 이승만은 얼굴을 부들부들 떨며 그러나 미소를 지으며 아내에게 “통일만 된다면 미치광이 소리를 천만번 들어도 좋다”고 했다.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바로 독립운동시절 미국이 이승만을 ’독립미치광이‘라고 비난하던 그 ’미치광이‘였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반대성명을 내고 원산으로  평양으로 함흥으로 직접 찾아가 북한동포들 앞에서 “우리끼리 남북통일하자”고 못 박았으며, 뉴욕타임즈 특파원 리처드 존스턴 기자에게 ’북한 미군정실시 반대‘ 기사를 쓰도록 만들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무초 대사를 불러 미국은 북한에서 대한민국 활동을 간섭하지 않겠다는 문서를 작성하여 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하였다. 침략자를 물리쳐주는 미국에게 ’배은망덕‘이 될 지언정, 나라를 팔아먹는 꼭두각시는 되지 않겠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이승만은 날마다 미국을 다구쳤다.
    그때 미국에서는 ’남한을 반대하는 한국인그룹‘이란 반한단체가 워싱턴 정계에 돈을 뿌리며 대한민국이 북한까지 차지하면 안된다는 로비까지 벌이고 있는 형편이다.
    ’통일 미치광이‘가 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구축함 2척이 부산에 도착하자 ’압록강호‘ ’두만강호‘로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운산전투에서 국군2군단이 참패하고 미군마저 청천강 이남으로 쫓겨 내려오자 이승만은 불같이 소리쳤다.
    “왜 압록강 다리를 폭파하지 않느냐? 미국은 중공군을 끌어들여 미군을 패배시키려는 것이 참전 목적이란 말이냐?” 
    이승만이 펄펄 뛰자 미군 측은 엉뚱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중공군은 압록강 수풍댐을 지키러 온 것 뿐‘이라고. 어처구니가 없는 이승만은 무초를 불렀다. 
    “중공군은 소련의 사주를 받기도 했지만 사실은 마오쩌둥의 한국에 대한 정치적 목적이 더 앞선 것”이라며 “한국을 차지하는 나라가 아시아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침략한 걸 지금도 모르느냐”고 역사 강의를 펼치기도 했다.

    11월 중순엔 서울-평양 열차가 개통되어 어린아이처럼 기뻐한 이승만은 전선의 국군들을 찾아 격려 위문하며 수많은 편지를 썼다. 참전국 수뇌들과 장성들, 미국 언론계에 보내는 편지들을 타이핑하느라 프란체스카는 또 손목이 아플 지경이다. 반드시 한반도를 통일시켜 세계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이승만의 간곡한 이론들이므로 편지들은 길기만 하다. 
    “미국은 언제나 전쟁에서는 이기면서도 평화에는 지고 있다” 
    이승만의 이 말은 미국의 친소정책을 꺾으면서 얻은 결론이다. 루즈벨트가 스탈린에게 한반도를 내줌으로써 2차대전에 이기고도 또 다른 전쟁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미국 언론계의 친지들을 동원하여 ’통일전쟁‘의 의미를 여론화 시키도록 무진 애를 쓰고 있다.
    편지를 쓰다 말고 이승만은 경무대 뒤뜰로 나가 장작을 힘껏 내리친다. 울화가 치밀면 늘 엉뚱한 장작을 패며 생각을 정리하는 대통령이다. 이 장작패기는 기도와 함께 이승만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스포츠이기도 했다. 
  • ▲ 울화가 치밀때 경무대 뒤뜰로 나가 나무 등걸에 장작을 패면서 마음을 정리하던 이승만 대통령 모습.
    ★ 이승만의 전선시찰...맥아더에 한줄기 희망-원자탄!

    마셜이 새로운 국방장관에 임명되자 이승만은 실망한다. 국무장관 때 맥아더의 요청을 받아 유엔의 남북한 총선 결의를 도와준 ’고마운 사람‘이기는 해도, 중국에서 장제스의 공산당 공격을 막고 국공합작을 주도하여 중국을 마오쩌둥에게 넘겨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미국무부에는 아직도 친일파과 친소-친중파들이 한국전쟁을 농단하고 있지 않은가. 
    한줄기 희망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도쿄를 찾아온 미국 [UP통신] 사장의 질문에 맥아더가 이렇게 답하였다는 뉴스를 보았다. “한국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유럽에서도 패배한다.”
    이것이다. 맥아더는 변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는 두 사람만의 ’원자탄 맹약‘은 의리 깊은 맥아더의 심중에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이승만은 사흘이 멀다 하고 전선 시찰에 나섰다. 
    “다시는 다른 나라를 믿지 말고 우리 손으로 꼭 이겨서 남북통일을 이루자”고 격려하며 위로를 베풀곤 했다. (프란체스카, 앞의 책)
    국군을 '우리 아이들'이라며 끔찍히 사랑한 이승만대통령의 전선시찰은 6.25전쟁중에만 279회에 달한다. 북한 수복지역에도 말리는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는 75세 노인은 자신이 국군 전투병이자 지휘관이다. 
    전국 부락마다 무장 공동체를 만들게 하고 국무회의에서 각료들 정신교육을 쉬지 않았다. 영국 애틀리 수상이 유럽제일주의를 떠드는 것 등에 대하여 국제정세를 빠짐없이 해설해주는 정치교수이자 국군퉁수권자 대통령이다.
    “영국도 미국의 원조를 받아 안보를 지키려는 것이며 미국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려 할 것이며 미국이 거기에 끌려가선 안되리라 믿는다. 하지만 우리 전쟁은 우리 손으로 이겨야 한다. 국민들의 사기를 앙양하는 일은 국민회나 청년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주도하는 자연발생적 운동이되도록 지원해야 할 것이다. 혹시라도 공산당과 협력하는 일은 민족에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믿는다. 따라서 남녀노소 모든 국민이 합심 단결하여 무기가 없으면 낫이라도 들고 최후까지 공산당과 싸워야만 국민의 자유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