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탈린(오른쪽)의 7순생일을 맞아 모스크바 잔치에 참석한 중공의 마오쩌둥이 나란히 앉아 박수를 치고있다. (1950.12.21)
    ▲ 스탈린(오른쪽)의 7순생일을 맞아 모스크바 잔치에 참석한 중공의 마오쩌둥이 나란히 앉아 박수를 치고있다. (1950.12.21)
    “중공군 포로가 잡혔다” 
    10월26일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했던 제6사단 7연대의 최선봉 제1중대(연대장 이대용)이 뜻밖의 기습을 받고 놀라 한바탕 전투 끝에 이런 보고를 올렸다. “북한군복을 입었는데 우리말을 못하는 군인, 솜옷을 입은 중국인”이라고...그 중대는 그때 무서운 협공에 쫓겨 병력을 절반쯤 잃은 채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게 된다.

    중공군 참전? 초반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설마 그럴 리가...긴가민가하면서도 믿으려는 사람들이 없었다. 중국 인민공화국이 출범한지 겨우 8개월, 마오쩌둥의 공산군은 그때까지도 중국 남부에서 장제스의 국민군과 싸우고 있는 형편이므로 새로운 전쟁에 파병할 여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관점은 중공군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한국군의 경우이다.

    미국 트루먼 정부는 충격에 빠졌다. 우려했던 중공군 참전의 증거가 하필이면 이런 때 나타났으니 너무나 놀랍고 당황스럽고 믿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불과 열흘 뒤 11월7일 미국의회의 중간 선거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문에 여론이 불리한 와중에 ‘중공 참전’이란 사실이 알려지면 '반전여론'이 일어나 선거에 치명적이다. 가뜩이나 3차대전 위기론의 압박감에 시달리는 트루먼 정부는 일단 국면 회피 ‘시치미’를 떼야만 한다.
    “포로는 중공 정부와 관계없는 게릴라, 아니면 자발적으로 가담한 중국청년일지 모른다”고 했다. 정치위기에 떨던 트루먼 대통령도 애치슨 국무장관도 “포로만으로 중공의 파병 증거가 안 되니 믿고 싶지 않았고 사실이 아니기를 빌어야 했다”고 뒷날 고백할 정도였다. 
    맥아더의 경우는 어떤가. 이것은 뒤에서 살피기로 하고, 우선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중공군 참전 결정과정을 살펴보자. 

    결론부터 보면, 한마디로 소련과 중공은 처음부터 ‘중공 참전’을 준비하였고, 미국은 처음부터 중공참전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가 한반도 통일직전에 미군의 일방 후퇴를 가져왔고, 중공이 북한을 장악한 ‘일방적 휴전’을 미국이 대한민국에 강요하게 된다. 
    이때 “휴전결사반대, 북진통일‘을 부르짖으며 단독 투쟁한 이승만 대통령이 ’한미동맹‘을 거머쥔다. 보면 볼수록 소련과 중공의 참전결정 과정은 대대로 먹잇감이 되었던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을 실감하게 되고, 이승만의 한미동맹체결이 ’신의 한수‘였음에 두고두고 감사할 수 밖에 없는 대한민국이다.  

  • ▲ 청천강을 건너 북진하는 백선엽 장군의 국군1사단.
    ▲ 청천강을 건너 북진하는 백선엽 장군의 국군1사단.
    ◆중공 ‘참전’ 결정과정...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기막힌 역할분담

    해방후 한반도 공산화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부터 스탈린은 미국과 직접 싸우는 전쟁을 극력 피하려 했다. 김일성을 시켜 남한을 무력정복하게 만들면서도 직접 출병은 거부, 군사고문관들과 최신 무기 및 장비들을 최대로 제공하며 공군기만 위장시켜 참전했다. 
    1949년 3월과 1950년 5월 모스크바에 달려온 김일성에게 스탈린이 한 가지 거듭 다짐한 것은 ‘대타 중국의 참전’이다. “소련은 참전 못할 형편이므로 한반도를 잘 아는 중국의 허락을 꼭 받으라”는 명령을 되풀이한다. 김일성의 장담대로 북한군만으로 남한정복에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만약 미국이 참전할 경우에도 중국군을 앞세워 미국과 전쟁시키려는 것이 스탈린의 숨겨둔 전략, 즉 한반도 공산화 및 약화된 중공의 예속화를 동시에 달성하는 1석2조 카드였던 것이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뉴스에 접하자 심복 장군을 평양에 파견하여 김일성에게 중공의 긴급참전을 요청하라고 재촉하기도 했다, 

    “아시아의 티토”=국제공산세계의 우두머리 스탈린에게 중공의 마오쩌둥은 유럽의 ‘티토’처럼 거물로 크도록 내버려두어선 결코 아니 될 존재였다. 동유럽에 ‘공산 제국’을 건설한 스탈린에게 유고의 티토(Josip Broz Tito,1892~1980)는 공산권에서 가장 위험한 ‘내부의 적’이었다. 빨치산 게릴라 투쟁으로 독일 나치를 물리친 공산주의자 티토가 소련 공산당의 말을 안듣고, 발칸반도의 여러 소수민족을 통합하여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을 건설(1948), 반소(反蘇) 독자노선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코민포름(Cominform)에서 티토의 유고공산당을 제명한 스탈린은 티토를 제거하려 암살을 세 차례나 기도했지만 실패하였다. 

    마오는 어떤가. 스탈린은 1930년대부터 마오쩌둥이 눈에 났다. 일본과 싸우는 마오가 중국공산당에서 소련파까지 몰아냈기 때문이다. 1921년 중국공산당을 만들어주고 지원해왔던 스탈린은 원조를 대폭 줄였다. 그러자 이번엔 마오가 스탈린에게 악감정이 생겨났다. 이것은 옛부터 청일전쟁-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중국영토를 탐낸 러시아에 대한 역사적 반감과 겹쳐졌다. 마오가 국공내전이 진행되는 동안 소련의 지원을 끊임없이 요청했는데도 스탈린이 감질날 만큼 주는 둥 마는 둥 시늉만 하는 것도 너무나 야속했다.  
    “역시나 러시아인”이란 말이 마오의 입에서 절로 나왔고, 스탈린의 입은 “중국인의 공산주의란 겉만 붉고 속은 하얀 무와 같다”는 말을 뱉았다. 이처럼 쌓여간 감정의 앙금은 마오쩌둥의 중국공산화가 임박했을 때 표면화된다. 
    국공내전이 성공단계로 접어든 1948년 후반 무렵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로 인정받고 싶은 마오가 여러 차례 모스크바 방문을 청했는데 크렘린에서 번번이 퇴짜를 놓는 것이었다.
    마침내 마오가 1949년 10월 정권을 수립한 두 달 뒤 12월 6일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그것은 스탈린의 고희연(古稀宴:7순잔치)에 참석해야하는 위성국들의 의무방문이다. 
    예상했지만 마오는 놀랐다. 중국 수장이 왔는데 스탈린은 얼굴도 보이지 않고, 당 간부가 나타나 크렘린(Kremlin:스탈린 관저)가 아닌 낡은 호텔에서 환영회랍시고 밥을 먹고는 연락이 끊겨 버렸다. 마오는 진작부터 “소련과 동맹을 맺고 싶고 중국을 동등한 국가로 대우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반응이 이런 것이구나”...중국대륙의 새로운 주인은 스탈린의 ‘손님은커녕 포로’ 신세와 같았다. 날마다 입에 맞지 않는 러시아 음식을 씹으며 마오는 소리쳤다. “내가 먹고 싸려고 여기 온줄 알아? 이주 나빠, 정말 나빠!” 호텔 벽을 향해 분통을 터트렸다. 

    그제야 처음 크렘린에서 불렀다. 스탈린은 그러나 마오의 승리를 축하하기보다 국공내전에서 잘못된 점을 질책하는데 열을 올렸다. ‘기피인물’이 아시아 공산권의 ‘맹주’가 되다니...‘아시아의 티토’가 되면 안 되겠기에 초장에 마오의 기를 꺾어놓아야 한다. 운 좋게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미국과의 대리전쟁’-중공에 한반도 무력정복의 임무를 맡겨 최강국 미국과 전쟁시킴으로써 정치 경제 군사 각 방면으로 약화된 마오를 예속화시키겠다는 전술을 강행하자는 것이었다. 이로써 공산세계의 양 거두는 돌이킬 수 없는 ’대결의식‘에 뒷날 국경충돌까지 일으킨다. 
    (David Halberstam [The Coldest Winter:America and the Korean War] The Amateurs Ltd, 2007. 정윤미-이은진 옮김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 삼림출판사, 2009. 이세기 [6.25전쟁과 중국-스탈린의 마오쩌둥 제압전략] 나남, 2015)
  • ▲ 6.25남침과 중공참전 트리오.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왼쪽부터).
    ▲ 6.25남침과 중공참전 트리오.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왼쪽부터).
    마오 “소련 지원 없어도 OK, 한반도는 우리가 맡겠다” 

    흔히 국내 일부에서는 중공의 한국전쟁 참전이 스탈린의 교활한 전략에 휘말린 마오쩌둥이 굴복한 결과라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즉, 정권수립 초기 마오가 소련의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확보하기 위해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울며 겨자 먹기’로 김일성의 SOS에 응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공개된 소련과 중국의 기밀문서들은 역사의 판도라 상자가 그리 단세포적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중국형 공산주의자 마오쩌둥은 국공내전 때부터 ‘한반도의 필요성’을 잊은 적이 없었다.
    바로 지정학의 인연-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탄생순간 ‘몸체와 다리’처럼 한 몸으로 붙어 버린 중국과 한반도는 유사 이래 흥망과 생사로 뒤엉킨 운명공동체 아니던가.
    특히 국공내전시 만주에서 국민당군에 쫓긴 마오의 팔로군(중공군)은 압록강건너로 피신, 생명을 건지고 의식주를 해결하는 후방기지가 북한지역이었다. 중국이 북한을 일찍부터 ‘혈맹’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종전 후 소련 및 김일성의 요구에 따라, 동시에 마오의 ‘군축’ 필요성에 따라, 중공군 가운데 조선족 병력을 무려 7만명 넘게 북한으로 넘겨주었다. 
    6.25 한 달 전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거쳐 베이징에 찾아와 스탈린도 ‘남침’을 승인했다며 ‘승리’를 장담할 때, 마오는 ‘건국초기의 내정 불안’을 내세워 중공군의 직접참전은 일단 거절하고 군사원조를 약속한다. 그러나 ‘미군 개입’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김일성이 미국은 절대 개입 안한다고 큰 소리 치자 마오가 ‘건방진 김일성’을 쏘아보며 말했다.
    “북한군이 남한군 정도야 문제 없겠지만, 만일 미군이 개입할 경우엔 중국이 나서겠다”
    북한만이 아니라 한반도는 중국의 방호벽, 마오가 파병을 결정할 때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 말했듯이, 입술(한반도)이 없어지면 치아(중국)가 시리기 때문이다. 
    무식한 김일성의 방자한 언행이 괘씸했지만 마오쩌둥은 진작부터 잃어버린 역사적 식민지 ‘한반도 탈환’을 결심하고 있던 터, 시기를 저울질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 마오쩌둥의 ’본색’...처음부터 ‘미국과의 전쟁’ 결심
    아니나 다를까, 김일성이 남침을 시작하자 놀랍게도 미국이 즉시 참전을 선언하고 나왔다. 7월8일 유엔이 유엔군 결성을 결의하자 마오쩌둥은 제1차 국방회의를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소집하고 북동국경방위군(NEBDA)을 창설, 만주의 국경 압록강을 따라 중공군을 배치하였다. 최정예부대를 중심으로 3군을 차출하여 포병사단 등 36개사단 70만명 규모를 갖춘다.

    마오의 병법은 일단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스탈린의 요구에 응하는 방식을 취해야한다. 그러면서 북한군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마오는 북한에 정찰부장 최성농(崔醒農)을 보내 북한의 지형조사 등 실제 작전준비에 들어갔다. 
    급기야 미국이 제7함대로 대만해협을 봉쇄하였다. 예상했던 시나리오였다. 인천상륙작전이 멀지 않았다는 신호, 대만정복의 길이 막혔으니 한반도 진출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마오는 미국과의 전쟁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우선 병력에서 미군보다 4배를 동원할 수 있고, 제아무리 최신기술을 자랑한다지만 산이 많은 남북한에서 맞붙으면 산악전의 정예 중공군에게 승산이 많다고 확신했다. 
    결국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김일성의 SOS편지를 가지고 박헌영이 마오에게 달려왔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먼저 구원을 요청했으나 이번에도 “중공의 지원을 받으라”고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이 말을 박헌영으로부터 듣자 즉시 저우언라이를 소련으로 급파하였다. 스탈린의 진의를 최종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다. (박실 [6.25전쟁과 중공군] 청미디어, 2013)

    ◉스탈린의 ‘본색’=“미국이 북한 먹으면 중국 어쩔래?”
    모스크바에 도착한 저우언라이 일행은 흑해 연안의 휴양지 소치(Sochi)에 머무는 스탈린의 별장을 찾아갔다. 그것은 5년전 스탈린이 2차대전 말기에 중병환자 루즈벨트와 처칠을 흑해 크리마아반도의 얄타(Yalta)까지 끌어들여 면밀한 도청장치를 가동함으로써 강대국 미국과 영국의 속내를 한눈에 들여다보며 영토적 야욕을 충족했던 수법과 매우 닮았다. 스탈린은 이미 마오쩌둥의 속내(참전결정)을 알고 있었기에 중국대사관이 없는 곳에서 저우언라이와 마오의 통신을 도청하여 중국에 결정타를 먹이려는 작전이다.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들이 거의 참석한 회의가 열리고 스탈린이 먼저 기선을 제압한다.
    “전쟁이 순조로울 때 ‘전세 역전’에 대응할 준비가 부족했다. 만일 미군이 압록강까지 북조선을 차지하면 중국에 큰 위협이 될 것인데 중국은 무엇하고 있었느냐” 그동안 몇 차례 출병을 독촉했던 말로 정면을 찔렀다. 
    저우언라이는 역시 마오와 짠 각본대로 참전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신생국의 불안정한 국내사정에 따른 불개입론이다. 장기적 내전으로 인한 민생문제와 경제적 난제들, 피로한 군대의 낡은 무기장비로는 북한 지원이 불가능하며 중국까지 참전하면 공산권 형제국가들까지 피해가 커질 것이므로 파병하지 않기로 했다는 요지였다.
    마오의 저의를 빤히 들여다보는 스탈린은 강공책으로 나왔다.
    “소련은 미국과 직접 전쟁하지 않기로 했다. 3차대전을 막기 위한 불변의 원칙이다. 북조선과 국경을 맞댄 중국은 다르다. 이대로 두면 한반도 북쪽까지 미국 것이 될 터인데 중국의 안보는 어쩔 작정이냐. 중국은 자위를 위한 일정 병력을 출동시킬 수 있고 당장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 덧붙여서 스탈린은 ‘유인 카드’도 흔들었다.
    “이번에 참전하면 기술선진국 미국과의 대결이므로 중국군을 현대화 시킬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며 소련은 중국 육-공군의 무장지원과 해군 건설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중국이 요청하는 ‘공군지원’ 문제도 중공군이 출병만 한다면 만주와 해안지방에선 얼마든지 ‘엄호’하겠다고 약속했다. 단, 북한 내부전투는 엄호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게다가 중국 본토 베이징, 상하이 등 주요도시를 미군 공습으로부터 지켜달라 했지만 스탈린은 “미군과 공중전까지 벌일 태세를 준비를 할 만한 힘이 없다”는 말로 피했다. 
    밤을 새워 이튿날 새벽 5시까지 강렬한 보드카를 비우며 진행한 양국대표 회의에서 중국의 뜻이 받아들여진 것은 사실상 하나도 없었다.
    스탈린은 마지막 결정타를 날리듯 ‘김일성의 망명’ 카드를 던졌다. 그것은 마오가 가장 싫어하는 것, 조선족이 밀집된 만주에 김일성 망명정권이 들어서면 두고두고 골치덩어리이다. 러일전쟁 이전부터 만주 땅을 휘젓는 러시아-소련이 김일성을 시켜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 아픈 곳을 계속 후비는 스탈린은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김일성에게 즉각 중국으로 철수하라는 전보를 보냅시다. 그래야 중공군과 함께 재기할 수 있지 않겠소?” 참으로 엉큼한 북극곰,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은 이미 아들 김정일 등 가족들을 만주로 피신시켰고 임시전쟁사령부를 압록강 건너 통화에 차려놓고 있었다. 
     
  • ▲ 형제 같았던 고향 친구 펑더화이(왼쪽)와 마오쩌둥. 두 사람은 한국전쟁 참전에 의기투합했다.
    ▲ 형제 같았던 고향 친구 펑더화이(왼쪽)와 마오쩌둥. 두 사람은 한국전쟁 참전에 의기투합했다.
    마오의 심복 ‘고향 후배’ 펑더화이를 남침 총지휘자로
    행여나 기대했던 소련의 지원을 받지 못한 마오쩌둥은 이제 ‘단독전쟁’ 태세를 서두른다. 스탈린이 약속한 ‘공군지원’도 압록강 이북에서만 해준다니 사실상 공군 없는 전쟁을 해야 한다. 그것도 당시 최신의 미국 공군과 해군의 무력을 어떻게 당해낼 것인가. 막강한 미군과 비교하여 ‘우세’로 판단되는 것은 딱 한 가지 ‘사람’이었다. 
    “미국의 원자탄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오. 중국 인구가 얼만데, 원자탄으로 없앨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만약 원자탄을 떨어트리겠다면 나도 똑 같이 해주지요. 천만명 2천만명쯤 피해는 눈도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면 미제국주의 야만성만 폭로될 것이니까요. ” 마오의 이 말은 중국을 찾은 인도 수상 네루 앞에서 토한 열변이다. (마오의 주치의 리지수이(李志綏:이지수)지음 [모택동의 사생활]-Li Zhisui [The Private Life of Chairman Mao] 손풍삼 옮김, 고려원 1995) 
    마오는 인명손실 따위에 양심이 동요되는 인간이 아니었다. 특히 평생 혁명동지 리지수이가 폭로한 마오의 여성행각은 놀랍다. 줄여잡아 100명의 여인들은 마오의 유일한 오락도구, 비서를 시켜 은밀한 기교까지 점검시켰다는 내용에는 세계가 경악하고 말았다.

    소련의 공군기가 없어도,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해도, 마오는 ‘인민해방군’ 만으로 얼마든지 이길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고 한다. 내전 말기 남아도는 병력을 처리할 방법을 찾아낸 것, 투항한 장제스 군대까지 감당할 수 없는 청장년들을 무제한 한국전선에 동원할 수 있고 동원해서 ‘소화’해야만 예산이 절약된다. 경제문제 해결과 전쟁 승리를 달성하는 돌파구 작전!

    마오는 10월2일 상임위원회를 열고 ‘참전 논의’를 꺼낸다. 그것은 논의 해서 결정하려는 회의가 아니었다. 간부들의 부질없는 ‘반대론’을 잠재우기 위해 미리 고향 후배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 1898~1974)에게 ‘설득’을 부탁해놓은 터였다. 반대발언도 별로 나오지 않았다.
    마오는 펑더화이를 주저 없이 참전 총지휘관에 임명한다. 
    같은 고향 호남성(湖南省) 출신으로 1928년부터 동고동락한 펑더화이는 마오를 ‘라오 펑(老朋)’ ‘라오 마오(老毛)’라 부르는 형제 같은 사이, 정치 군사는 물론, 모든 혁명과업에 마오의 손발처럼 움직여 온 평생동지였다. 
    10월 4일부터 5일에 걸쳐 정치국의 빈대론도 간단히 누르고 D-Day를 정하는 일만 남았다.
    “한반도 전쟁은 국공내전과 똑 같은 선상에 있음을 알라.
     미 제국주의와 싸워 이겨야 만이 중국혁명도 완성된다는 점을 명심하라. 
     참전 안하면 모든 것을 잃을 것이요, 참전하면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니라” 
    10월8일 마오는 김일성에게 ‘파병’을 공식 통보한다. 미군이 압록강까지 도달하기 전에 ‘출동’한다고 말했다. 이때 전력이 약한 한국군을 먼저 공격하라고 지시한다. 미군보다 무장이 허술할뿐더러 ‘통일’을 외치며 선봉대로 진격하는 한국군을 잡은 뒤에 미군을 상대해야 보다 승산이 있기 때문이다. 잠정적으로 D-Day는 10월15일로 잡았다.
  • ▲ 남태평양 웨이크 섬에서 회담을 가진 트루먼(왼쪽) 미국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
    ▲ 남태평양 웨이크 섬에서 회담을 가진 트루먼(왼쪽) 미국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
    ◆이승만이 보낸 밀서...맥아더 “원폭 사용 통일” 약속

    바로 그 10월15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남태평양 웨이크섬(Wake Island)으로 불러 만난다. 1945년 루즈벨트의 죽음으로 대통령직을 인계받아 1948년 선거로 재선된 트루먼이 한국전쟁을 맡긴 전쟁의 영웅 맥아더를 만나는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 회담의 주제는 특정한 것이 없었다. 중간 선거를 앞둔 트루먼 대통령이 정치권의 한국전쟁 시비를 잠재우고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의 영광을 트루먼의 영광으로 나눠받아 여론에 반영시킴으로써 정치적 효과를 얻어내려는 일종의 선거용 정치회담 성격이 짙었다. 
    압록강변에서 중공군 포로를 잡기 열흘 전에 열린 회담이다. 트루먼이 물었다.
    “중국이나 소련이 개입할 확률은 어느 정도입니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희박합니다. 전쟁 초기에 개입했다면 큰 영향을 주었겠지만 이제 한국전쟁의 승리는 확실합니다. 더 이상 그들을 의식하거나 굽실거릴 이유도 없고요, 현재 만주지역 중공군은 30만 명쯤입니다. 그들은 공군력이 없으므로 우리 공군력과 해군력이면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습니다.”
    회담이 한시간 반 쯤에서 끝나고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훈장을 달아주고 나서 공항으로 향할 때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정치에 진출할 생각은 없습니까?” 사실은 이것이 맥아더의 대권출마를 경계하는 트루먼의 속내를 드러낸 질문이었음이 뒷날 밝혀진다.
    맥아더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면서 “각하에게 도전할 장군이 있다면 그건 아이젠하워”라고 맞받았다. 
    귀국하는 트루먼은 맥아더의 ‘중공참전 가능성 희박’ 발언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중간선거 운동이 막바지인데 ‘라이벌’ 맥아더가 미국내 정치권과 여론을 다독이는 명약같은 발언을 해주었다.  
    그러나 중공의 참전 가능성을 애매하게 흐린 맥아더의 그 말은 맥아더가 ’오판‘을 했다는 부메랑이 된다. 언론이 ’중공군 참전 불가‘ 발언만 집중보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공군 대거참전으로 실패한 책임을 맥아더에게 전가하는 정치권과 언론의 ’공격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과연 그런가?

    “맥아더와 언론 간에 적대감이 생기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맥아더가 특파원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파원들은 오만방자한 맥아더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다며 분개했고, 그 적개심이 본사의  편집진에게 전달되었다. 내가 만나본 본국 편집진들은 맥아더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를 ’극도의 이기주의자, 독재자, 비인간적이고 고리타분한 늙은 군인‘으로 묘사했다”
    (마가리트 히긴스 [한국전쟁과 휴전] 코러스, 2023)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히긴스(Marguerite Higgins Hall, 1920~1966)는 여성기자로는 유일하게 한국전쟁을 종군 취재하고 맥아더를 자주 만나 인터뷰로 특종을 기록했고 한국전쟁 보도로 퓰리처 상을 받았다. 그는 “내가 만나본 인물 중에 맥아더만큼 명석하고 박식하고 솔직하며 매력적인 장군은 없었고, 잘난 체 한다는 기사와는 거리가 먼 인격자”라고 썼다.
  • ▲ 이승만 대통령의 팔짱을 낀 맥아더. 두 지도자의 친밀감을 보여주는 사진중에 하나.
    ▲ 이승만 대통령의 팔짱을 낀 맥아더. 두 지도자의 친밀감을 보여주는 사진중에 하나.
    ★웨이크 회담 전, 이승만과 맥아더가 나눈 비밀편지
    6.25전쟁의 육군총참모장 정일권 대장은 도쿄에서 열다섯 번이나 시찰 나온 맥아더 장군과 만나 여러가지 대화를 나눈 사이였다. 그가 회고록에 중요한 역사적 기록을 남겨놓았다. 
    1950년 10월 말부터 잡히기 시작한 중공군 포로들의 진술을 듣고 이를 경무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던 무렵의 내막이다. 
    「...노대통령은 내 보고를 듣고 나서 “역시 중공이 나왔구먼. 이젠 겁쟁이 트루먼도 배꼽에 힘 좀 넣겠지”하고 지극히 태평이었다. 전쟁국면의 앞날에 대해서도 낙관하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맥아더가 잘 알아서 할 것이오“하고는 ”정 총장, 맥아더와 나는 중공군이 나온다고 보아왔습니다. 장군, 그는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겉으로는 부인했으나 북진 전략에 대한 트루먼의 잔소리를 막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맥아더 그는 훨씬 앞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니 경우에 따라서는 원폭(原爆)사용도 불사할 각오라고 내게 굳게 약속한 바 있습니다. 그의 전략가로서의 심모(深謀)는 참으로 탁월합니다“하고 격찬해 마지않았다...」 (정일권 [정일권 회고록] 고려서적, 1996)
     
    정일권은 그때 이승만 대통령이 두 통의 편지를 보여주었다고 썼다.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대통령의 편지와 맥아더가 보낸 답장 사본이다. .
    웨이크 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트루먼을 만나는 맥아더에게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강조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북진이 순조롭게 진행됨에 따라 워싱턴과 영-불은 소련 및 중공의 군사 개입을 겁내고 있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데 본직(이승만)은 소련은 몰라도 중공의 개입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보는 바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이 가능성을 긍정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귀하가 긍정함으로 해서 북진을 방해하는 작전의 제한이 가중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민은 거족적으로 북진통일만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하의 영매하신 지도가 아니고서는 이 열망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 간절한 심정을 살펴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미국 전문가 이승만 다운 노파심이다. 선거철에 트루먼이 맥아더를 만나는 속내를 뻔히 아는 이승만은 혹시라도 맥아더가 미국내 정치권의 영향으로 ’북진통일‘의 결심이 흔들릴까 염려한 것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역시 기독교정신과 반공으로 맺어진 영혼의 전우임을 확인한다. 이승만이 정일권에게 보여준 맥아더의 답장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본직은 믿을 만한 정보통의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중공군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 이 가능성을 겉으로는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압록강을 건널 것입니다. 조금도 모르는 것으로 할 것입니다. 중공은 그 방대한 군사력을 배경삼아 가까운 장래에 아시아 데모크라시의 최대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소련이 있습니다. 중공의 잠재적인 군사력을 때릴 만한 기회는 지금 아니고서는 없을 것입니다. 전략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워싱턴이 어디까지 본직의 전략을 뒷받침해주느냐가 문제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센 반대에 부딪칠 것입니다. 하지만 불퇴전(不退戰)의 결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필요하다면 원폭(原爆) 사용도 불사할 것입니다…1950년 10월 13일」 
    회담 개최 이틀 전에 한미 전쟁지도자 두 사람이 나눈 편지들이었다.
    이승만과의 약속대로 맥아더는 웨이크 섬에서 본심을 숨기고 트루먼이 ’듣기 원하는‘ 말만 설명하였던 것이다. 맥아더는 뒷날 회고록에서 회담에서의 대화내용과 본심을 진술하고 있다. 
     
    「...웨이크 회담 의제는 내 입장이 이미 다 알려진 것들로서 새로운 것이 없었다. 중공의 개입 가능성이 가볍게 제기되었다. 그 자리 모든 참석자들은 중공이 개입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중략)...외국에 있는 국무성의 외교첩보망이나 현지 사령관이 적국의 전쟁의지를 알려고 할 때 기준으로 삼아야 할 CIA의 정보보고는 북경정부가 개입할 것이란 어떤 징조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의 정보망에 의하면 압록강 주변에 중공군이 대거 집결해 있으나 그들의 의도는 알 수 없다. 
    나의 군사적인 예상은 이렇다: 우리는 상대가 없는 공군력을 보유하고 있고 이것으로써 중공군이 공격해올 경우 압록강의 남북을 불문하고 중공군의 기지와 수송로를 마음대로 파괴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군 사령관이 이미 황폐화된 한반도에 대병력을 투입하는 모험을 범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개입했을 경우 군수물자 수송의 어려움으로 인한 중공군의 전면적 붕괴 위험성은 너무나 엄청나다...(중략)...나의 이런 의견과 주장에도 트루먼측으로부터는 그 어떤 반론이나 경고도 없었다. 그런데 그 회담 후 마치 내가 대통령에게 단정적으로 중공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왜곡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맥아더 회고록] 앞의 책).

    ▶”원폭을 써서라도 중국 공산당을 제거하자“는 이승만과 맥아더의 약속, 그것은 과연 지켜질 수 있을 것인가. 
    6.25초기 대만의 장제스가 파병을 제의했을 때도 “내손으로 중공군을 불러들일 수 없다”며 거절했던 이승만이다. 하지만 언젠가 이럴 줄 았았다. 임진왜란 명나라의 출병, 병자호란 만주군의 침략, 고종이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일으킨 청일전쟁...그뿐이랴, 유사 이래 중국군에 수없이 짓밟힌 한반도의 숙명이기에, 대륙의 공산당 뿌리를 뽑아버려야 북한 공산당의 뿌리도 뽑힐 것은 자명한 일이다.
    ’중공군 참전‘을 확인하자 이승만은 무릎을 쳤다. 남북통일의 기회가 드디어 왔다. 미군이 있고 유엔군이 있고 미국엔 원자탄도 있지 않느냐...남북통일 후에도 괴롭힐게 뻔한 중공의 후환을 지금 없애버릴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전화위복! 이승만은 새로운 통일전략과 전의(戰意)를 불태운다.
    맥아더도 마찬가지, 올테 면 얼마든지 오라, 박살 내줄테니...장제스가 대륙회복전쟁을 일으키면 “내가 직접 달려가 지휘하겠다”는 공언까지 서슴치않았다. 마침내 10월25일 맥아더는 ‘북진 통일’ 총공격명령을 내린다.
  • ▲ 한국전쟁에서 미군을 밀어내고 북한땅을 차지한 펑더화이는 10여년 뒤 1966년 마오쩌둥의 홍위병들에게 '반동분자'로 몰려 고문과 조리돌림을 당하다가 숨을 거둔다.
    ▲ 한국전쟁에서 미군을 밀어내고 북한땅을 차지한 펑더화이는 10여년 뒤 1966년 마오쩌둥의 홍위병들에게 '반동분자'로 몰려 고문과 조리돌림을 당하다가 숨을 거둔다.
    마오, "미군1명에 중공군 4명"...인해전술 구사 명령

    D-Day를 10월19일로 늦춘 중공군 대병력이 캄캄한 밤에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마오쩌둥의 지령에 따른 것이다.
    18일 마오쩌둥이 내린 진군명령은 다음과 같다. 
    ”4개 군단과 3개 포병사단은 재빨리 예정된 계획에 따라 조선의 북부에 들어가 작전을 펴라. 19일밤 안동과 지안에서 압록강을 도강하되 엄밀히 비밀을 지켜라. 부대 도착시간은 매일 황혼 무렵부터 다음날 새벽4시까지, 5시전에 은폐를 완료하여 확실히 검사하라. 첫 날 밤 2~3개 사단이 도하하고 그 경험을 얻은 다음 병력의 증감을 실행하라. 18일 21시 마오쩌둥“
    게릴라전의 베테랑 마오는 국공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중국공산당 특유의 전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엄명을 내린다. 
    *반드시 야간에만 이동. *철저한 매복 작전을 펼 것. *최대의 유인작전으로 근접전 집중. *피리를 불며 공포심을 높이는 심리전 활용. *전투는 속전속결로 초반에 박살. *상대가 설마하고 방심하거나 준비를 게을리 할 때를 놓치지 말 것 등, 삼국시대 손자병법을 현대전에 맞게 극대화한 전술이다. 게다가 일찍이 기획해둔대로 ‘미군1명에 중공군4명’이 대결하는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새롭게 강조한다.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쓴다“(割鷄焉用牛刀)는 공자(孔子)의 풍자를 거꾸로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여기서 마오쩌둥은 ”한국군을 먼저 공격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북진통일’ 열망에 들뜬 한국군이 미군에 앞서 경쟁하듯 진격할뿐더러 미군보다 무장이 약하기 때문이며, 처음부터 미국과 충돌을 피하고, 미군이 먼저 공격할 때를 노리자는 전술적 계산이었다.

  • ▲ 한국전쟁에서 미군을 밀어내고 북한땅을 차지한 펑더화이는 10여년 뒤 1966년 마오쩌둥의 홍위병들에게 '반동분자'로 몰려 고문과 조리돌림을 당하다가 숨을 거둔다.
    ‘이상한 전쟁’...승패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가?
    대규모 중공군이 압록강을 밤새워 잠입하는 현장을 확인한 펑더화이는 10월21일 평안북도 운산(雲山)으로 김일성을 찾아가 만난다. 북한군 복장으로 위장한 펑더화이 일행은 금광지대 운산의 어느 광산에 숨은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비밀공격계획을 지시 확인하였다. 첫 공격은 25일 운산에서 시작하기로 하고, 그동안 수만 명의 병력은 작전에 따라 담당지역에 집결, 매복 기습작전 태세를 갖춘다. 
    평안남북도를 가르는 청천강(淸川江) 상류 운산은 압록강까지 올라간 한국군의 배후지역, 맥아더의 인천상륙처럼 한국군의 뒤를 기습하여 보급선을 끊어놓고 섬멸하자는 포위작전이다. 미군이 달려들면 1석2조의 승리가 될 것이라는 계산까지 해놓았다.

    태풍전야...과연 이 전쟁의 승패는 어찌 될 것인가.
    역사상 최초의 미-중 전쟁! 전쟁목표와 전략전술에서 양자의 차이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첫째, 마오의 확고한 전쟁목표와 달리, 트루먼의 전쟁목표는 처음부터 ‘제한전’(制限戰)이다. 침략자를 물리쳐 ‘38선 원상회복‘을 달성하면 성공인데, 이승만의 38선 돌파작전에 떠밀려 월북하게 되었다. 뒤늦게 통일전쟁으로 바꿨지만 어디까지나 소련과 중공의 참전을 자극하지 말아야 하는 작전이 최대 목표였다.
    둘째, 트루먼은 전쟁보다 중간선거 승리가 다급하다. 11월7일 투표 날이 코 앞인데 만약 지금 ’중공군 참전‘을 발표하면 ’반전여론‘이 일어나 선거에 참패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셋째, 미군은 중공군을 모른다. 역전의 게릴라전투 전문가 마오의 신출귀몰하는 전술을 미국은 알지도 못하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다. 
    넷째, 전쟁사령관 맥아더와 전쟁 대통령 트루먼, 그리고 미군부의 지향점이 정반대였다. 선거라는 정치바람과 3차대전 회피에만 몰두한 백악관과 정면충돌하는 맥아더는 오로지 혼자만의 결단으로 이승만의 결의에 힘입어 반공과 승리의 북진을 밀어붙이고 있다.
    다섯째, 북한의 험준한 산악지대가 끝도 없이 펼쳐진 지리에 어두운 미군이다. 게다가 혹독한 겨울 추위에 대한 대비책도 없었다. 넓은 지역의 보급선과 무기까지 얼어붙는 혹한 대책은 미쳐 생각을 못했다. 중공군쯤 단시일 내 격파할 것 같은 과신이 오산이었다.
    손발이 맞지 않는 미국의 전쟁, 이 약점을 덮친 침략자 중국 공산독재 포화의 만행! 대한민국은 자유통일 문 앞에서 쑥대밭이 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