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환국한 임정요인들이 경교장 앞에서 기념촬영. 앞줄 오른쪽부터 신익희, 조소앙, 이시영. 김구. 신익희 뒤쪽 김원봉.(자료사진)
    ▲ 환국한 임정요인들이 경교장 앞에서 기념촬영. 앞줄 오른쪽부터 신익희, 조소앙, 이시영. 김구. 신익희 뒤쪽 김원봉.(자료사진)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등 한국민주당(한민당) 지도부는 중경의 임시정부 인사들의 조속한 귀국을 미군정 측에 요청하면서 김구의 거처와 임정 사무실 건물을 마련하였다. 친분이 있는 광산왕 최창학과 협의하여 그의 별장 ‘죽첨장’(경교장)을 임정에 재공하기로 결정하고, 임정인사들의 귀국후 생활대책을 위해 자금도 모았다. 모두 송진우가 앞장선 일이다.

    ‘국일관’ 환영 만찬회서 ‘친일파’ 격돌

    임정인사 1-2진이 다 귀국한 뒤 1945년 12월 중순쯤, 종로 관수동의 국일관(國一館)에 김구, 김규식, 이시영, 조소항, 신익희, 엄항섭 등 주요 인사들이 모였다. 김성수와 송진우의 한민당이 베푸는 ‘임정 환영’ 만찬회, 다음주 대대적으로 개최할 ‘봉영회’(奉迎會, 임정을 받들어 환영하는 대회)에 관한 간담회도 겸한 자리였다. 국일관은 일제 때 명월관(明月館), 장춘관(長春館), 식도원(食道園) 등과 함께 한국요리 기생집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술잔이 돌면서 임정 내무부장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가 문득 독설을 터트린다.
    “국내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총독부에 크든 작든 협력한 친일파들이다”
    안 그래도 서먹하던 환영 분위기는 금방 싸늘하게 변했다. 
    한민당 설산 장덕수가(雪山 張德秀)가 벌떡 일어났다.
    “해공,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요? 임시정부가 그런 색안경을 끼고 우리 국민들을 보고 있었다니...기가 막혀서...그럼 나도 숙청감이로군 그래...”
    그러자 신익희가 한마디 더 했다. “어디 설산 뿐인가” 
    불씨에 기름 붓는 이 말은 만찬장을 뒤집어 놓았다. 참다못한 송진우가 나선다.
    “해공, 어찌 그럴 수 있소?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게 된 임시정부를 누가 모셔왔는지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소위 인민공화국 작자들이 그랬을 것 같애? 천만에. 우리가 임정을 모셔다가 국민들이 떠받들게 하려는 것은 3.1운동 법통 때문이오, 노형들 개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란 걸 아시오. 당신들이 중국에서 무슨 짓을 해먹고 살았는지 우리가 모르는 줄 알아?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 고생은 우리보다 적었을 거요. 하여간 환국했으면 힘을 합해 건국에 힘쓸 생각부터 해야지, 그런 말은 앞으로 삼가시오. 해외에서 헛고생들을 했군. 쯧쯧.” 
    그러자 장내는 조용해졌다. 그후 임정 측의 친일파 숙청론은 한동안 고개를 숙였다.
    (이경남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1981. [고하 송진우 평전] 동아일보사,1990)

    이 뿐이 아니었다. 열흘 전 임정 2진이 도착한 다음 날 12월2일, ‘더러운 친일파의 돈은 안받겠다’는 소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송진우가 임정요인들의 귀국을 앞두고 ‘환국지사후원회’를 조직하여 금융계와 실업계로부터 900만원을 모아 경교장에 전하였을 때의 일이다. 
    임정 재정부장 조완구는 ‘친일파의 부정한 돈“이라며 거절하였다. 국무회의까지 열어 민족반역자의 돈을 받느냐 마느냐 주먹다짐 직전까지 침을 튀긴다. 침통한 얼굴로 한숨을 쉬던 송진우가 일어나 또 진정시켜야 했다.
    “정부 세금에는 양민의 돈도 있고 죄인의 돈도 있는 법이오. 지금 민족의 큰 일을 앞두고 이런 왈가왈부는 불필요하지 않겠소?” 그제야 ‘자금반환 결의’를 하던 임정 요인들이 수그러들었다고 한다. ([고하 송진우선생전] 고하전기편찬위원회, 1965) 

    아무튼 이날 국일관의 술자리 ‘친일파 언쟁’이 18일후 12월30일 새벽 송진우가 살해되는 원인의 일단이 될 줄을 거기 누가 알았으랴.
  • ▲ 송진우 한민당 대표와 한독당 김구.ⓒ뉴데일리DB
    ▲ 송진우 한민당 대표와 한독당 김구.ⓒ뉴데일리DB
    김구의 야망...‘반탁’ 투쟁으로 집권까지...국민 총동원령

    모스크바에서 27일 발표된 3상회의 내용이 보도된 28일 오후4시, 김구는 경교장에서 긴급 국무회의를 열었다.
    “우리가 기대치 않았던 탁치라는 문제가 3천만의 머리 위에 덮어씌워졌다. 우리가 이 보자기를 벗어날 운동을 전개해야겠다. 우선 이만하면 우리정부의 결정적 의사를 발표해도 좋겠다하여 발표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5.12.30.)
    이 김구가 말하는 ‘우리 정부의 결정적 의사’라 함은 귀국 전 중국에서 채택 결의한 바 ‘임시정부의 당면 정책’ 제6항, 즉 ‘국내정부 수립’이며, 그것은 바로 임시정부의 집권이다. 
    “우리는 피로써 건립한 독립국과 정부가 이미 존재하였음을 다시 선언한다”는 선언서를 채택한 회의는 밤새워 ‘새로운 독립운동’의 행동전략을 논의하였다. 
    당장 투쟁에 돌입할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 임시정부의 장정위원(章程委員)으로 각파를 대표하여 김구, 조소앙, 김원봉, 조경한, 유림, 신익희, 엄항섭, 김붕준, 최동오 등 9명을 선정하였다. ([조선일보]1945.12.30. ‘임시정부 국무회의 결과’)
    이튿날 12월29일에도 150여명이 경교장에서 “이번 기회에 일치단결하여 나라를 찾자”는 김구의 지침에 따라 방대한 조직을 만들었다. 임시정부가 신탁통치를 물리치는 ‘새로운 정부’임을 과시하자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새로운 결의안을 채택한다. 
    “우리 임시정부에 즉각적인 주권행사를 간망(懇望)할 것”이란 도전장이다. ([동아일보]1945.12.31.)  ‘임정의 주권행사’라는 결의는 ‘미군정의 권력을 임정이 접수하겠다’는 말이다. 이에 송진우가 ‘반기’를 들었다.

    ★송진우, 김구의 ‘과속’에 '신중한 반탁' 요청
    한민당도 임정과 마찬가지로 이미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3천만이 1인도 빠짐없이 국민운동을 전개하여 신탁통치를 반대해야 한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28일 저녁부터 서울 거리는 ‘반탁’ 시위와 전단이 뿌려지고 갖가지 벽보도 요란하게 붙었다. 

    미군정 하지 사령관을 만나고 온 송진우는 경교장 김구를 만나 임정 측의 급진적인 ‘과속’에 브레이크를 걸며 ‘신중한 반탁 투쟁’을 호소하였다. 하지는 29일 각당 영수들을 초청하여 모스크바의 공동성명 내용을 설명하고 “신탁통치는 앞으로 미국과 소련의 공동위원회가 구성되어 논의해야 할 사항이라 발표되었으므로, 지금 한국인은 흥분하지 말고 신중하게 그 결과를 기다려 달라”고 설득했다 한다. ([동아일보]12945.12.30)
    송진우는 임정인사들에게 간곡히 설명하였다. 
    “미국은 여론국가이므로 우리가 국민운동으로 의사 표시를 하면 신탁통치안이 재고될 수도 있을 것, 미군정과 충돌하면 미국을 비롯한 민주진영 국가들과도 충돌하는 결과를 빚게 된다는 것, 이런 혼란이 일어나면 공산당만 어부지리를 취하게 될 것”이라는 논지를 폈다. 
    이때 김구는 “우리가 왜 서양 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버리자”면서 흥분했다. 김구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멘 소리로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으며 피를 흘려서라도 자주 독립정부를 우리 손으로 세워야 한다" 고 호통치면서 “찬탁자 매국노”라 단정하였다.(강원룡의 증언 ‘나의 체험 현대 한국사').
    이에 호응한 임정 인사들이 들고 일어났다. “고하(古下)는 찬탁하자는 말이요?”
    송진우는 남감하다. “찬탁이 아니라 방법을 신중히 하자는 것이오. 미군정과 싸우면 그 뒷수습은 어쩌자는 것이오. 미국이 손을 떼면 소련 세상이 와도 좋다는 말이오? 미군이 최소한 2년쯤 더 소련을 막아줘야지요, 냉정하게 생각합시다.” ([고하 송진우선생전] 앞의 책). 
    갑론을박은 결론도 없이 흥분상태로 새벽녘에야 흩어졌다.
  • ▲ 1926년 3.1운동 7주년 기념사  필화사전으로 투옥된 송진우(자료사진)
    ▲ 1926년 3.1운동 7주년 기념사 필화사전으로 투옥된 송진우(자료사진)
    ★탕 탕 탕...‘정치암살 제1호’ 송진우 쓰러지다
    새벽 4시쯤 귀가한 송진우는 원서동 자택 사랑방에서 잠들었다.
    이른 아침 식사준비를 하던 부인은 느닷없는 총소리에 뛰쳐나가는데 양아들이 달려와 소리쳤다. “엄마, 큰일 났어. 아버지가...” 사랑방에 뛰어들자 송진우는 이미 숨을 거두었다.
    해방정국 최초의 정치적 암살사건, 자객들은 13발을 쏘았고 송진우는 7발을 맞고 즉사했다.
    경교장의 격론 2시간 만에 ‘미국의 필요성’을 주장한 신중론자는 제거되었다.

    “새벽 4시쯤 잠이 깨어 두 어대 담배를 피우며 형님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5시쯤 다시 잠이 들었다. 6시가 될까 말까 돌연 인기척이 뒤꼍에서 났다. 이 때 형님은 ‘누구요?’하고 평상 말투로 소리쳤으나 아무 대꾸도 없었다. 뒤이어 마루의 덧유리 창문이 열리더니 난데없는 육혈포 소리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형님은 말없이 그대로 쓰러졌다. 그 뒤는 아무 것도 모른다.” 이것은 유일한 목격자 외사촌 양신묵의 증언이다. 그도 범인을 잡으려다 칼을 맞았다고 한다. 테러범들은 한현우(34세) 유근배(21세)등 청년 5명이었다.
  • ▲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시위(자료사진).
    ▲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시위(자료사진).
    ◆"외국 군정 철폐, 전국 경찰을 임정에 예속"

    1945년 12월31일, 송진우의 암살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국민총동원위원회는 중앙위원 76명을 발표한다. 그야말로 거족적인 총동원체제, 한민당의 김성수, 공산당의 박헌영, 북한의 조만식과 김두봉, 김무정, 그리고 일본의 무정부주의자 박열까지 남북한의 좌우익을 총망라한 전열을 짰다. 여기에 여운형만 빠져 눈길을 끌었다. 임정은 유독 여운형에 대하여 배신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서울신문] 1945.12.31.)
    국민총동원위원회는 ‘행동강령’ 9개항을 발표하였는데 ▶탁치 순응자는 반역자로 처단 ▶임시정부를 절대 수호 ▶외국 군정 철폐 ▶탁치정권은 격퇴 등이다.
    영하20도의 강추위를 뚫고 종로네거리에서 시작된 시위는 눈 덮인 거리를 지나 서울운동장에 집결한다. “3천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진정한 우리 정부로서 절대지지,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는 선언문과 “미-소 양군의 즉시 철수를 통고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때 ‘국자(國字) 제1호 및 제2호 포고문’이 살포되었다. ▶전국 행정청 소속 경찰기구 및 한인직원은 전원 임시정부에 예속케 함 ▶이 운동은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계속하며 국민은 앞으로 우리 정부 하에 제반 산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함 등이다.
    한마디로 미군정의 모든 행정권을 임시정부가 접수한다는 포고문이다. 
    플래카드를 휘두르는 군중은 포고문을 흔들며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였다.
    미군정청 직원 3천여명도 시위에 가담하고, 전국 검찰 법원 등도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의하였으며, 특히 서울시내 모든 경찰서와 서울시청 직원들도 총사직을 결의했다. 
    신익희는 경찰서장들을 인솔하여 경교장 김구에게 데려갔고, 그들은 “앞으로 임시정부의 지시아래서만 치안유지와 질서유지를 행하겠다”고 서약하였다.
    순식간에 서울을 석권한 반탁운동의 태픙, 상가는 철시하고 음식점 등은 일제히 휴업이다.
    심지어 반도호텔의 종업원들도 모두 사라져 하지 사령관은 식사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 ▲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시위(자료사진).
    ★하지 격분 ”또 기만하면 죽이겠다“...김구, 자살하겠다...굴복
    미군정 입장에서 보면 김구의 선언서와 시위 및 포고문 등은 ‘배신’이었다. 중국서 귀국할 때 미군정의 법과 통치에 협력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한 임시정부가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나온 것은 군중 반란으로 정권을 빼앗겠다는 쿠데타나 다름없었다.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의 회고에 따르면, 그때 하지는 김구 등 임정요인들을 체포하여 인천 소재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감금하였다가 중국으로 추방하기로 결정하고 31일밤 방송으로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놀란 조병옥이 군대식 해결은 해결이 아니오 민심은 ‘반미’로 변하리라 만류하였다. 대신 이튿날 하지가 김구를 직접 설득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한다.
    새해 첫날 1946년 1월1일 오후, 하지 사령관은 김구를 반도호텔 사무실로 불렀다.
    ”미국에 도전하는 과격행동“을 즉시 중지하라하고 요구한 하지는 ”서약하시오. 당신이 또 다시 나를 속이면 적으로 간주하여 죽이겠다“고 미군사령관으로서 통고한다고 했다. 이때 금방 굴복한 김구는 ”자살 하겠다“ 말했다는데 그에 관한 행동은 밝혀진 게 없다.

    ★김구의 ‘1일 천하’--그날 밤으로 그는 라디오를 통하여 투쟁 철회를 방송한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그 목적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것이오, 결단코 연합국의 군정을 반대하거나 동포들의 일상생활을 곤란케 하자는 게 아니다. 지금부터는 평화적 수단으로 신탁통치를 배격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믿는다. 모든 동포는 곧 직장으로 돌아가 작업을 계속할 것이며 특별히 군정청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일제히 복업(復業)하고, 지방에서도 파업을 중지하고 복업하기 바란다.“ 
    임정이 미군정을 접수하려던 ‘쿠데타’ 시도는 이렇게 끝났다. 그것은 김구의 정치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에 국내외적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자초한 단막극이었다.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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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을 대한민국 건국에 활용해야 한다"는 이승만 박사.(자료사진)
    ◆이승만 ”스탈린과의 싸움에서 미국을 이용하라“

    모스크바 3상회의 공동성명을 보는 이승만의 시각은 김구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미 ‘카이로 선언’의 한국독립조항에 ‘IN DUE COURSE’(적당한 절차)란 문구가 나타났을 때부터 이승만은 루즈벨트와 스탈린 간에 ‘숨은 흥정’이 있다며 의혹을 제기해 왔다. 다음 얄타회담에서 미국이 소련에게 한반도의 기득권을 보장했다는 소련 간첩의 제보를 받자 이를 폭로하며 몸부림을 쳤다.(연재 29-30 참조). 그래서 해방후 모스크바 외상회의를 앞두고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날마다 부르짖었던 것이었다. 
    12월28일 ‘한국 신탁통치를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 구성’을 규정한 발표를 접한 이승만도 망연자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돈암장에서 울고 있는 임영신을 달래며 이승만은 간단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미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씨가 누차 편지와  공식선언으로 표시한바 있으므로 이런 결과가 나올 줄 예측하고 나로서는 이미 준비한 방책이 있어 그 방침대로 집행할 결심이니 모든 동포는 일시에 일어나 예정한 대로 준행하기를 바라며, 따라서 우리 전국이 결심을 표명할 시에는 영, 미, 중 각 연합국은 절대 동정할 줄 믿는다.“ ([동아일보] 1945.12.29.)

    ‘이미 준비한 방책’이란 무엇인가. 연합국 중에 소련을 제외한 이유는 또 무엇인가.
    12월31일 대대적 시위가 예고된 아침, 정례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말한다. 
    ”반탁 시위는 마땅하나 우려 되는 것은 격렬분자와 파괴분자들이 난국을 만들어서 독립운동 전부를 실패케 함이라. 모든 단체가 개인은 자유행동을 말고 규칙 범위에서 안녕질서를 지키라.“ 강조한 이승만은 특별히 미국정부에 오해가 없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미국 정부가 우리를 해방한 은인이요. 군정당국은 우리의 절대 독립을 찬성하는 고로, 신탁문제에 대하여 본국정부에 반대 공문을 보낸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독립의 친우를 원수로 대하면 이는 도리어 우리 독립을 저해하는 짓이다.“([동아일보]1946.1.2.)
    김구와 임정세력의 무모한 ‘임정 집권’ 시도 행태를 점잖게 나무라는 말이었다. 
    이승만의 ‘준비된 방책’이 여태까지 주장하고 고수해온 ‘용미’(用美) 전략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반도를 40년간 점령했던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쳐준 미국이다. 진작 미국이 그렇게 해달라고 간절히 바랐던 것은 이승만뿐이 아니다. 독립운동가들이 다 그랬다.
    이제 북한을 점령한 소련을 물리쳐줄 힘도 미국 밖에 없다. 그 미국을 배척하고 밀어내면 소련이 남한까지 집어삼킨다. 이처럼 뻔한 상황을 김구는 왜 보지 못하는가. 오로지 권력쟁취에 눈먼 구태의 임정세력과 이를 악용하는 남북한 공산당의 장난, 이를 물리쳐야 하는 힘도 미국 뿐이다. 그 미국의 힘을 동원해야 하는 능력은 이승만 밖에 없음을 또 한 번 증명해준 김구의 무모한 해프닝이었다.
  • ▲ 조병옥 경무부장,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브루스 커밍스.(왼쪽부터).ⓒ뉴데일리DB
    ▲ 조병옥 경무부장,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브루스 커밍스.(왼쪽부터).ⓒ뉴데일리DB
    ◆배후는? 하지, 조병옥, 장택상, 부르스 커밍스 등 ‘김구 지목’

    이승만은 송진우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볼 줄 아는 동지가 한민당에서 송진우 정도였는데 무지한 수구집단이 동원한 테러리스트들의 총탄에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아까운 56세 송진우를 애도하는 만시(輓詩)를 짓는다.
    義人自古席終稀 의인은 예부터 명대로 죽기 드물고
    一死尋常視若歸 한번 죽음을 심상히 여겨 제집 돌아가듯,
    擧國悲傷妻子哭 온 나라가 슬퍼하고 처자가 곡하는데
    臘天憂里雪霏霏 섣달그믐 하늘 망우리에 눈만 부슬부슬...

    ★현장 주범 한현우를 4개월 뒤 체포하고 일당이 다 잡히자 송진우 암살사건 수사는 빨라졌다.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과 수도경찰총장 장택상이 배후 규명에 나섰다. 장택상은 송진우 피살 당시 ”형님의 원수를 꼭 갚겠다“며 통곡했다고 한다.

    미군정 당국도 국내 정치권도 시선은 김구에게 집중되었다. 
    왜냐하면, 김구가 중국에서 친일파등 30여명을 살해할 때 동원했던 비밀테러조직이 귀국하여 지하활동을 재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구는 귀국 후 새로운 이름의 청년조직도 만들었다. 윤봉길 의거와 이봉창 의거 때 만든 ‘한인애국단’과 비슷한 조직이었다고 알려졌다.
    사령관 하지는 직감적으로 암살의 배후로 김구와 임정을 지목하였다. 
    조병옥도 장택상도 범인들의 자백 등을 수사하면서 그런 심증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조병옥은 미국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송진우가 우파 내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며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꺼려한 김구가 암살자를 고용하여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 미군정과 남조선]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8) 
    심지어 미국의 좌파 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omings)도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김구가 배후라는 듯 묘사하였다. 
    『송진우를 죽인 한현우는 송진우가 미국의 신탁통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살해동기였다고 말했다. 다른 증거는 한현우를 김구와 연결시켰다. 김구는 귀국했을 때 중국에서의 전력 때문에 여기저기서 ‘Killer'(자객)이라 불렸다. 하지는 김구에게서 별 감명을 받지 못했다. 김구의 첫 번째 행동이 한민당수 송진우의 암살을 공작함으로써 ‘Killer'라는 호칭이 사실무근이 아님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1986)
    강대국 미국과 약소국 임정의 대결...'배후 지목'은 '지목'만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뒷날 '전향했다'는 남로당 총책 박갑동(朴甲東)은 송진우 암살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적었다. 
    『고하(송진우)는 스탈린의 야심을 잘 알고 있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금 받아들이지 않으면 북한은 소련 것이 되고 말며, 우리의 힘으로는 반영구적으로 북한을 회복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에 불명예스러운 탁치라도 몇 년간만 눈 딱 감고 받자고 했던 것이다. 여운형도 같은 입장이었다...』  (박갑동 [통곡의 언덕에서] 1991)

    과연 북한에선 스탈린의 시나리오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이 사건  39일 뒤 1946년 2월 ‘북한 인민위원회’가 출범한다. 그 행사장 밖에 걸린 대형 현수막엔 ”인민위원회는 우리의 정부다“라고 씌어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