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김일성과 첫 만남에 북조선공산당 주도권 빼앗겨소련군정, 조만식 설득 10여차례...김일성은 "죽여버리자"스탈린 재촉...김일성을 책임비서로...반탁-친일파 숙청'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임시' 수식어 붙여 위장
  • ▲ 박헌영(오른쪽)이 거의 매일 만났던 소련영사관 정보담당 부영사 샤브신(왼쪽사진 오른쪽)과 소련 영사 폴리안스키. 박헌영 사진은 평양서 숙청 1년전 1952년   찍은 것.
    ▲ 박헌영(오른쪽)이 거의 매일 만났던 소련영사관 정보담당 부영사 샤브신(왼쪽사진 오른쪽)과 소련 영사 폴리안스키. 박헌영 사진은 평양서 숙청 1년전 1952년 찍은 것.
    ★박헌영, 평양 다녀와 ‘찬탁’ 돌변...”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 무렵 서울 정동거리 소련영사관은 ‘박헌영의 모스크바’였다. 일제경찰을 피한 지하암약 때부터 뻔질나게 드나들던  박헌영은 해방 후 정동에 아지트를 만들어 놓고 ‘크렘린(Kremlin)의 지령’을 받아 본격적인 ‘혁명전’을 펼친다. 조선공산당 재건, 인민공화국 선포, 미군정과 ‘합법투쟁’ 등은 물론 모든 활동에 대하여 모스크바에 건의하고 결재를 받아가며 벌인 결과와 무수한 정보를 소련에 그날그날 ‘일일보고’ 하였다. 
    그 박헌영도 모스크바3상회의 공동성명을 놓고 허둥지둥한다. 왜냐하면 사전에 크렘린의 지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 부영사 샤브신(Anatoli I. Shabshin,1910~1967)도 ”본국의 훈령이 없다“며 박헌영에게 평양의 소련군정사령부를 찾아가보라고 한다. 1940년 서울에 부영사 이름으로 부임한 샤브신은 조선 공산세력의 관리자, 박헌영에게는 ‘스탈린과 직결된 다리’였다. 소련 영사 폴리안스키(Aleksandre Polanskii)도 모스크바 3상회의에 참석 중이었으므로 답답하고 조급한 박헌영은 발표당일 12월28일 밤 38선을 넘어 29일 평양에 도착한다.
    김일성을 만나자 그에게도 ‘훈경’은 없었다. 다음날 30일 모스크바에 갔던 소련군정 로마넨코와 서울총영사가 평양에 돌아왔다. 31일 북조선 공산당 집행위원회 소집, 3국외상회의 결정사항의 설명과 그 실행전략전술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요지는 이러하다.
    ▶소련이 관철한 이번 합의의 초점은 신탁통치보다 미-소공동위원회에 있다.
    ▶핵심은 미-소공동위가 만들어야하는 남북한 합작 ‘민주적 임시정부’ 구성이다.
    ▶임시정부의 세력관계는 2대1이어야한다. 북한+남한 공산당 V 남한 들러리 세력.
    ▶따라서 신탁통치 여부보다 ‘2대1 공산정부’ 구성이 소비에트 혁명의 지름길이므로 이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신탁통치를 적극지지 관철해야 한다.

    ”과연!!“ 박헌영은 한숨이 터졌다. 이런 줄도 모르고 ‘반탁’시위를 허락했다니...난감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박헌영 [자술서] 1953, 박병엽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출판사,2010)
    박헌영은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 새로운 투쟁전술을 논의한다.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소련군정이 작성한 매뉴얼을 김일성이 앵무새처럼 전달하였다. 그리고 남한에서 ‘엎질러진 물’을 주어담는 대대적 국민운동 ‘찬탁 투쟁’ 방식을 잡았다. 이 ‘찬탁투쟁’이 곧 ‘2대1 정권’ 만드는 고도의 정치심리전, 즉 민족통일전선 내지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강화하는 혁명과업이다. 모든 것은 소련군정의 자금지원과 각본-연출에 따른다. 

    1월2일 서울로 돌아온 박헌영은 성명서를 발표, 기관지 [해방일보]가 호외로 뿌렸다.
    다음날 3일 서울운동장에서 예정되었던 ‘반탁’ 대회는 이름조차 ‘민족통일 자주독립촉성 시민대회’로 바꿔, 애국가 대신 ‘직기가’(赤旗歌)를 부르며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행사를 펼쳤다. 대회 후 군중은 ’외상회의 절대지지‘ ’인민공화국 사수‘ ’김구 이승만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를 행진하였다. ’반탁‘인줄 알고 참가했던 사람들은 욕설을 하며 흩어졌다.([조선일보]1946.1.4.)
  • ▲ 1945년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시절 조만식ⓒ고당기념사업회
    ▲ 1945년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시절 조만식ⓒ고당기념사업회
    ◆아, 조만식..."내가 떠나면 북한은 소련 것"

    박헌영이 평양을 떠난 사흘 뒤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1883~1950)이 운명의 날을 맞는다. 1월5일 오전 11시 평양시내 산수국민학교의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회의실에서 소련군정이 소집한 긴급회의가 열렸다. 당시 평남 인민위가 표면상 북한의 정부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소련군정 측에선 치스차코프 대장, 레베데프 소장, 로마넹코 소장, 메클레르 중좌 등 수뇌부를 비롯, 조선 공산당 측 위원 16명 전원이 참석하였는데 민족세력 쪽에선 인민정치위원장 겸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 부당수 이윤영 목사 등 몇 명 없었다. 나머지 위원들은 38선을 넘어 남하하였기 때문이다.
    이날 회의 목적은 일주일전 발표된 ’신탁통치‘에 대하여 평남인민정치위가 찬성 결의를 하라는 것이었다. 정치담당 실력자 레베데프가 먼저 모스크바 발표문의 내용 설명을 마치자 공산당 위원들이 일제히 찬성하며 조만식 의장에게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다그쳤다.
    의장 조만식이 입을 열었다. ”나는 조선민주당이므로 반대한다. 민족적 양심이 이 문제를 경솔하게 다루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충분히 토의하기 전에는 표결에 부칠 수 없다“
    말이 끝나자마자 소련 장성 하나가 고함친다. ”그러면 의장직을 사임하라“
    상기된 조만식이 벌떡 일어섰다. 
    ”지금 사임하겠다. 모든 의사표시는 우리 조선인의 자유여야 한다. 아무리 군정이라 해도 언론 제한은 민주주의 원칙이 아니다. 무슨 구실을 달더라도 신탁통치란 것은 남의 나라 정치에 간섭하는 것 아니냐. 우리가 우리의 주권과 이익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5척단구(五尺短軀) 조만식의 두 눈이 뿜는 불꽃이 혹한에 얼어붙은 유리창을 흔들었다. 조만식이 휭하니 나가자 지지자들이 따랐다. 소련군정은 기다렸다는 듯 ’사표 수리‘를 발표하고 ’신탁통치 만장일치 찬성‘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레베데프 인터뷰,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인용. 2008)
    조만식은 묵고 있던 고려호텔로 직행, 지지자들과 투쟁대책을 논의하였지만 허사였다. 그날부터 호텔 밖으로 한발작도 내밀 수 없었다. 소련군 5명이 24시간 경비, 조만식은 6.25전쟁까지 그렇게 연금되었다. 그리고 국군에 쫓기는 북한군 총탄에 1950년 10월 세상을 떠난다.
  • ▲ 1945년9월 평양의 소련군정 행사장에 참석한 조만식(오른쪽)과 치스차코프, 로마넹코, 레베데프등 소련 장성들.
    ▲ 1945년9월 평양의 소련군정 행사장에 참석한 조만식(오른쪽)과 치스차코프, 로마넹코, 레베데프등 소련 장성들.
    ★소련군정, 10차례 조만식 설득...김일성은 ”죽여 버리자“

    스탈린의 ’9.20지령‘이 말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은 부르주아 계급을 내세워 공산혁명을 하라는 명령이다. 스탈린의 충복 슈티코프는 ’인민의 추앙을 받는 지도자‘ 조만식을 지목했다. 스탈린의 결재를 받은 그는 조만식 포섭에 나선다. 로마넹코, 레베데프 등은 열 번도 더 조만식을 만난다. ”소련의 후견제(신탁통치)를 찬성한다는 성명만 발표해 달라. 우리는 김일성을 군부 책임자로 하고 선생을 초대 대통령으로 모시겠다“ 
    소련군정은 이미 모스크바 3상회의 발표 이전부터 ’소련의 북한 후견제‘를 전파하였다. 조만식이 들을 리가 없다. ”소련군은 노린내가 나니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며 거부한다. 소련군정은 어쩔 수 없이 김일성, 최용건을 앞세웠다. 김일성 담당 ’가정교사‘ 메클레르는 김일성을 데리고 조만식을 요정으로 초청하여 술자리를 베푼다. 청년시정 기독교에 입문하면서 술을 끊은 기독교 지도자 조만식은 술을 입에 대지도 않는다.

    김일성은 ’선생님‘이라며 굽실거리다가도 돌아서면 ”저런 늙은이 초장에 내가 죽여버리겠다“며 투덜거렸다.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죽였을 것’이라고 메클레르는 회고한다. (김국후, 앞의 책). 

    해방 직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던 조만식은 드디어 조선민주당을 창당한다. 김일성이 스티코프 지시대로 설득하였기 때문이다. 스티코프는 “당 중앙(스탈린)의 명령이므로 조만식을 포기 말라”고 했다. ‘조만식이 창당하면 김일성도 입당하여 소련군과 가교역할을 하며 독립정부 수립을 돕겠다’는 거짓 각본을  주었다. 공산화에 필요한 복수정당, 부르주아 계급을 흡수 정리하는 정당이 필수품이다.

    마음을 정리한 조만식은 결국 기독교인사들 중심으로 11월3일 광주학생의 독립운동 기념일을 정하여 조선민주당을 설립한다. “평양은 내가 지킨다. 북한 공산화를 누군가 막아야한다. 내가 남쪽으로 내려가면 북한을 통째로 소련에 진상하는 꼴이 되지 않느냐”고 창당이유를 밝혔다. (박재창 증언 [비록-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일보사, [고당 조만식 회상록] 고당기념사업회, 1995)
    11월23일 신의주학생 반공의거가 터졌을 때 수만 명의 학생 청년들과 민족세력이 대거 월남할 때에도 측근들이 “제발 피하시라” 했지만 조만식은 끝까지 남았다. 
    1950년 10월18일, 인천상륙잔적 이후 유엔군에 쫓겨 국경선 강계(江界)로 도망치는 김일성은 그때까지 ‘이용물’로 남겨두었던 우익인사들을 모조리 처형하였다. 이때에도 조만식은 “죽일테면 여기서 죽여라. 평양을 떠날 수 없다”며 몸부림쳤다고 전해진다.
  • ▲ 해방직후 북한의 각급학교에선 소련어 교육이 필수, 여학생이 흑판에 스딸린, 레닌 이름을 쓰고 있다. 소련군정은 공산주의 교육에 수많은 책을 번역 공급한다.
    ▲ 해방직후 북한의 각급학교에선 소련어 교육이 필수, 여학생이 흑판에 스딸린, 레닌 이름을 쓰고 있다. 소련군정은 공산주의 교육에 수많은 책을 번역 공급한다.
    ◆스탈린의 음모! 미국과 협상 ‘위성국’ 세우기

    ★미국 대사 케넌의 증언 ”번스 장관의 일방적 양보“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 결정은 한마디로 미국무장관 번스(James F. Byrnes)가 스탈린에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고 한다. 아니, 소련이 내놓은 제안에 번스가 ’사소한 수정‘만 가하고 그냥 통과시켜준 ’스탈린의 구상‘ 그대로였다. 왜 그랬을까. 그 회의에 참석했던 실무자 소련주재 미국 대리대사 케넌(George F. Kennan)의 기록을 보자. 
    ”그 결정은 번스가 ‘해방된 유럽’에 대한 얄타선언의 파탄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하여, ’동유럽에 대한 스탈린의 노골적인 독재를 숨기려고 민주적절차를 가장하는 무화과 나뭇잎‘에 지나지 않았다“ ([George F. Kennan, Memoirs 1925~50] 1967)
    루즈벨트의 유산 얄타회담을 금방 파괴한 스탈린의 행태에 분노하기보다 미국 자신의 치욕을 감추려고 했다는 것, 게다가 트루먼 대통령이 ”무슨 의제든지 합의하기 전에 나에게 보고해야한다“고 다짐한 지시를 번스가 어겼다”고 밝혔다. 국무장관으로서 번스는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문제에 소련이 양보할 것을 기대하면서 멋대로 결정하였으며 “이 결정에 운명이 걸린 한국인, 루마니아인, 이란인에 대하여는 아는 것도 관심도 없었던 번스가 무슨 조건이든 오로지 ’합의‘한다는 것만 중요시했다“고 외교관 케넌은 회고록에 썼다. 그저 장관의 ‘실적‘만을 위한 결정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스탈린 따라 ’신탁통치‘ 밀려나고 ’남북한 임시정부‘ 수립이 초점
    처음 미국은 루즈벨트의 원안대로 4국 신탁통치를 하면서 남북한을 아우르는 과도정부를 세우자는 안을 내놓았지만 스탈린은 달랐다. 남북한 좌우를 엮은 임시정부를 먼저 세우고 이 정부를 돕는 역할이 미국과 소련이어야 한다면서, 점령국 미-소 이외의 국가들 영국과 중국도 배제시켰다. 
    그것은 한반도정책에 어정쩡한 미국을 구슬러서 ’소련 후견체제‘를 관천하려는 술수, 앞에서 말한 ’2대1‘ 정권, 공산당이 2가 되어야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처음부터 만들겠다는 음모였다. 
    요약하면, 미국은 ’선(先) 신탁통치, 후(後) 정부수립‘을 주장하였고, 소련은 ’선(先) 정부수립, 후(後)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관철시킨 것, 신탁통치가 아닌 사실상 소련 단독 ’섭정‘의 노림수이다. 이미 동유럽에서 진행중인 방식과 같은 수법이다. 
    그때 폴란드, 헝가리, 동독에서 진행중인 ’합당공작, 공산당주도로 좌익정당들을 통합하여 거대한 대중정당을 만들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진하는 시나리오였다. 그게 바로 스탈린의 ’9.20지령‘--’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란 괴물이다. 
  • ▲ 평양의 소련군정 로마넹코 민정사랑관과 김일성.
    ▲ 평양의 소련군정 로마넹코 민정사랑관과 김일성.
    ★스탈린, 신탁통치때 ”부산-진해-인천-제주도를 달라“
    소련군이 북한지역을 완전점령하며 38선을 봉쇄한 이후, 스탈린의 ’한반도 야욕‘을 보여주는 소련 문서가 있다. 
    2차대전후 처음 런던에서 9월 열리는 5대강국(미국, 소련, 영국, 중국, 프랑스) 외상이사회(the Council of Foreign Ministers)에 대비하여 만든 ’일본의 과거식민지에 대한 노트‘와 ’한국문제에 대한 소련정부의 제안‘ 등이다.

     「한반도는 2년쯤의 미-소 양군에 의한 군사점령을 거쳐, 미-영-소-중 4개국 공동신탄통치를 실시하고, 신탁통치 협정에는 부산과 진해, 제주도, 제물포의 3개 전략지역은 소련에 분할하여 소련군사령부의 통제아래 둔다는 규정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는 중-소 공동해군기지 요동반도 여순(旅順)까지 소련의 자유항해 보장, 미국의 전략지위를 견제하기 위함이라며 ”제주도를 중국 점령지역으로, 또는 대마도를 한국에 제공하는 제안도 필요하다“고 했다. (김성보 [소련의 대한정책과 북한에서의 분단질서 형성], 전현수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대북한정책] 한국독립운동사연구 9집. 손세일 앞의 책)

    소련은 미국의 일본열도 독점에 불만이 컸다. 따라서 남한을 점령하는 미국에게 남한 항구들을 요구한 것이다. 10월2일까지 열린 런던외상회의에서 소련 외상 몰로토프(Vtacgeslav M. Molotov)는 미국무장관 번스에게 일본 점령관리 문제를 토의하자고 몇 번 요구했지만 미국은 불응하였다. 태평양의 방파제 일본 열도를 소련과 나눌 생각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 ▲ 줄담배 피우는 김일성과 '김일성만들기' 담당 정치교사 메클레르.
    ▲ 줄담배 피우는 김일성과 '김일성만들기' 담당 정치교사 메클레르.
    ◆스탈린 재촉...’반탁‘ 청소...김일성을 실권자로

    소련의 평양군정 사령부는 북한의 ’부르주아민주정권‘을 만들어내는 소련공산당 군사독재 정부다. 9월20일 스탈린의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받은 다음달 10월17일, 모스크바의 외무인민위원부(외교부)로부터 구체적 훈령이 또 내려왔다. 스탈린은 재촉이 심하다. 그에 따라 실행된 사항은 이렇다.
    ▶북조선5도행정국 설치=“북한을 임시민정자치위원회를 창설, 중앙집권화하라‘는 지령에 따른 대대적 조직개편, 이것은 북한5개도를 통치하는 중앙집권기구, 바로 북한 정부의 모태(태아적 정부:embryonic government)이다. 산업국, 재정국, 농림국, 교통국, 체신국, 상업국, 교육국, 보건국, 사법국, 보안국 등 10국을 11월 19일까지 설치 완료. 국장들은 레베데프가 선정하여 슈티코프가 결재 임명했다. 그중에 ’보안국‘의 규모는 가장 방대하다. 본국 지령대로 모든 조직은 소련군사령부의 직접통제를 받는 구조이다.

    김일성을 북한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로 선출=말이 선출이지 소련군정의 일방통행 명령이다. 1945년 12월17일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 회의실에서 비밀리에 열린 제3차집행위원회는 소련군정이 그동안 진행해온 북조선 공산당 창립대회나 마찬가지다. 
    해방후 평양에 조직된 조선공산당은 서울 중앙의 박헌영에 충성함으로써 신출내기 김일성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에 소련군정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박헌영과 만나 담판하게 만들었다.

    지난 10월8일 개성 북쪽 소련군 38선경비기지에 만난 김일성과 박헌영의 첫 만남, 30대 아마추어 공산주의자 김일성과 40대 중반 공산주의 전문 레닌주의자 박헌영의 ’주도권 대결‘은 그러나 김일성의 일방 승리로 끝났다. 동석한 로마넹코의 위세 앞에 박헌영인들 어쩌랴. 
    박헌영에게 북한으로 오든지 북한에 조선공산당 본부를 옮기든지 택일하라 욱박지르니 굴복하고 말았다. 타협안은 임시로 북부조선분국(分局) 설치로 합의, 사실상 평양이 조선공상단 ’중앙‘으로 되어버렸다. 
    박헌영도 중요한 정책마다 소련 군정의 결재를 받으러 평양에 갔고 그때마다  김일성이 나서서 ’스탈린의 결정을 전달‘해주니 저절로 상하가 역전되어갔던 것이다. 박헌영은 다음해 6월에 완전 월북할 때까지 다섯 차례나 월북하여 김일성을 만나야 했다. 

    그리하여 12월 17일 대회에서 국내파 공산당의 결점과 실패를 맹렬히 공격한 연설을 마친 김일성은 다음날 18일 드디어 ’책임비서‘로 선출된다. 박헌영을 집중 비판한 그 연설은 유독 ’레닌과 스탈린의 어록‘을 많이 인용했는데, 이는 소련 군정이 작성해준 것으로 ’김일성 만들기‘ 전담 정치교사 메클레르가 교육하고 연습시킨 대로 ’명연기‘를 펼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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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이 초장부터 조직국 제1비서를 맡겠다고 나섰지만 나는 아직 정치훈련이 안되어 불안해서...“ 메클레르는 여러 번 만류하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정보기관 고위 참모들과 서울 소련영사관 부영사 샤브신도 ”박헌영이 북한지도자 깜“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스탈린의 김일성 낙점‘ 때문에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메클레르 인터뷰, 김국후 앞의 책). 이 날로 북부조선분국은 ’북조선 공산당‘으로 승격했고 이 사실은 당분간 극비였다.
    반공-반탁 세력 대청소=북한 점령과 함께 소련군정이 진행한 반소-반공세력에 대한 ’친일파 청소‘는 조만식의 연금을 전후하여 ’반탁‘이란 죄목이 추가되어 대대적 피바람이 불었다. 이때 또 죽음의 38선을 넘는 엑소더스 행렬이 이어진다. 미처 월남 못한 사람들은 무작정 시베리아로 끌어가 학살과 강제노역에 던져졌다.  
    ▶’신문과 방송은 혁명의 총알‘=소련군정은 북조선 공산당 기관지 [정로(正路)]를 창간한다. 레닌시절부터 ’신문과 방송은 혁명의 총알‘이라는 소련 공산당의 선전선동 지침에 따라 신문사와 방송국을 세워 북한공산화의 총알을 대량 생산한다. 소련군정은 해방 다음 달부터 북한 각급학교에서 소련어 교육을 실시하였고. 마르크스-레닌 저작물과 공산주의 교육을 위해 조선역사책을 직접 만들고 번역작업도 서둘렀다. [정로]는 뒷날 [로동신문]이 된다.

    ▶김일성정권 창출에 ’소련파‘ 독무대=김일성정권 창출의 1등공신은 소위 ’소련파‘였다. 소련에서 모두 5회에 걸쳐 북한에 데려온 ’인재 그룹‘은 428명, 고등교육을 받은 정치-경제-교육 등 전문가들로 각분야 ’소비에트혁명의 실무코치‘들이다. 
    그 중심인물 허가이(許哥而,1908~!1953)는 소련에서 갈고 닦은 노하우로 조선공산당 및 행정제도와 기관들을 만들고 훈련하고 운영을 정착시킨다. 모든 조직의 부(副)자리에 소련파를 앉혀 ”2인자는 고려인“이란 실권을 잡아 소련군정의 손발이 되었다. 
    김일성은 책임비서가 되자 중국 빨치산 동지들을 조직에 심고, 뒤늦게 들어온 연안파도 활용한다. 이 소련파와 연안파는 서로 ’무식쟁이‘ ’협잡꾼‘등 시기질투 경쟁하다가 스탈린이 죽고 6.25전쟁서 패전 후 김일성에게 모조리 숙청당한다. (김용삼 [김일성-신화의 전설] 북앤피플, 2016)
  • ▲ 1946년2월8~9일 열린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축하행사장 밖에 걸린 현수막들.
    ▲ 1946년2월8~9일 열린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축하행사장 밖에 걸린 현수막들.
    공산화 <2대1 음모>...’임시‘ 위장한 ’단독정권‘ 

    1월16일부터 2월6일까지 서울에선 미-소 공동위윈회 구성과 개최를 위한 준비회담이 열렸다. 
    스탈린의 전권을 위임받은 ’북한 총독‘ 슈티코프와 레베데프 대장등 대표단 5명은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군정대표단과 미-소공위의 일정과 의제를 조정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처음부터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그리고 슈티코프 일행이 평양에 돌아온 다음날 2월8일, 그동안 준비를 끝낸 역사적 행사가 벌어진다. 
    바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발족시키는 경축식이다. 
    박헌영을 압박하여 김일성을 조선공산당의 명실상부한 실권자 책임비서로 만든 소련군정이 ’반탁‘의 조만식을 연금한지 한 달 만에 북한 단독 정권을 출범시킨다.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뒤 꼭 6개월, 스탈린의 ’9.20지령‘후 5개월 만에 지령대로 소위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런데도 회의 명칭은 ’북부조선 각 정당, 대중단체, 행정국 및 각 도, 시, 군 인민위원회 대표 확대협의회‘라는 긴 이름을 내세웠다. 

    김일성은 소련군정의 각본대로 회의 소집 취지를 밝힌다. 
    ”북조선의 중앙기관, 즉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자는 의견은 전국의 각 단체 대표들이 먼저 제안하였고 발기부(勃起部)를 조직했다. 이 발기부의 의견을 소련군 사령부가 전혀 반대하지 않고 대환영하였다“
    이것은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소련 군정의 작품이 아니라 북조선 인민들의 자발적인 의사에 따른 결정임을 주장하는 말이다. 스탈린이 지령하고 재촉했던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소련은 어디까지나 아래로부터의 인민혁명의 작품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날 행사에는 소련군정 측은 참석하지 않았고 완전히 김일성의 단독행사로 꾸몄다. 
    김일성은 ”북조선의 행정과 입법권을 가지는 독재적  관으로서 임시 인민위원회는 우리의 정부“라고 선언하였다. 행사장 밖에도 ”인민위원회는 우리에 정부이다’라는 현수막을 걸었다.
    ‘임시인민위원회’ 성립 경축대회를 마친 다음날에야 명단이 발표된다. 
    위원장 김일성, 부위원장 김두봉, 서기장 강양욱, 보안국장 최용건 등 17명이다. 

    ★미-소 공동위의 핵심이 된 '남북한 임시정부' 구성
    소련 군정이 해방 6개월만에 급조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미-소 공동위원회에 대비한 한반도공산화 사니리오의 핵심부분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스탈린의 각본은 신탁통치 논의보다 신탁통치를 위한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이 먼저였다. 미-소 공동위는 그 남북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협상’이 주목적이며, 이는 막연한 신탁통치에 매몰된 미국의 무정책을 활용하는 공산당 특유의 전략전술이댜.
    즉, 소련의 지령에서 보았듯이 ‘2대1’ 음모, 북한공산당+남한공산당 V 남한의 들러리를 합친 남북한 임시정부 구성, 누가 봐도 소련이 장악하는 ‘공산 정권’의 구성 방법론이다.
    따라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남조선 ‘인공’으로 대표되는 공산세력, 여기에 민족통일전선을 통한 중도파와 ‘쓸모있는 바보’들을 합친 정부형태가 스탈린의 계산법이 된다..
    이 계산법이 말해주는 몇가지를 보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한 주민의 ‘자발적인 독립의지’로 만든 북한유일의 대표이다.
    ▶‘임시’라는 접두어는 ‘과도정부‘임을 보여주는 위장술, 미-소공동위가 임시정부를 만들어내면 “즉시 해산한다”는 단서까지 달았다. 스탈린의 지령이다. 당초에 소련군정이 ’임시‘를 반대하였으나 북한간부들이 남한에서 ’단독정부‘로 비난할 까봐 ’임시‘를 붙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게 그거다. 만약 미-소 공동위 협상에서 임시정부 구성이 실패할 경우, 소련은 그대로 ’단독정권‘을 이어가기로 처음부터 계산된 것이었다. ’임시‘ 수식어는 다음해 2월21일 사라진다.

    ▶소련은 이미 ’임시정부 내각 명단‘까지 마련하였다. 3월16일 몰로토프 외무상이 보낸 지령이 말하는 내용은 ’경악‘ 그 자체이다. 
    "미-소공동위 개막날짜는 3월18일로 하라, 임시정부 구성원에 관한 합의서를 작성라라, ’후견‘ 조치를 강구하라, 민주주의적(공산주의적) 자주권 확보를 위해 2단계로 투쟁 진행하라..."등등, 치밀한 협상전략까지 일일이 제시하고 있다.(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외)
    내각 명단을 보면, 수상 부수상 등 요직은 북한 측에 배정하고 농림상 교통상 등 주요성이 떨어지는 부서는 미국측이 추천하도록 정해 놓았다. 실권부서 내무상은 김일성이다.

    ★제1차 미-소공동위는 3월18일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다. 그것은 스탈린의 도박판, ’밑져야 본전‘이다. 미국이 속아주면 한반도를 다 먹고 깨어져도 북한은 소련 위성국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