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연설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파괴자' 공산주의자는 '건설자'와 융합 불가능""지금 해결못하면 동족상잔 불가피" 경고김구는 갑자기 "소련 국부 레닌 선생이 자금 지원"' 밝혀
  • ▲ 이승만 박사와 하지 사령관.ⓒ뉴데일리DB
    ▲ 이승만 박사와 하지 사령관.ⓒ뉴데일리DB
    하지, 이승만의 '수요방송' 검열...이승만, 기습 폭탄 연설

    귀국 이후 부정기적으로 시작한 이승만의 라디오 연설은 해방후 방황하는 국민들에게 ‘구원의 소리’처럼 설득력이 컸다. 이승만 특유의 유머 섞인 비유법과 역사해설을 곁들인 방송은 자상한 국제정세 해설과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국민 정신교육에 좋은 강의가 되었다. 
    그러자 ‘원군’을 얻은 듯 미군정 하지 사령관은 이승만의 방송을 매주 수요일로 정례화 시켰고, 그 ‘수요방송’을 통하여 이승만은 국내외 정치적 리더십을 쌓아갔다. 
    12월19일 김구의 임정귀국 환영식이 열린 날도 수요일, 그날 저녁 7시30분 방송 제목이 바로 유명한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다. 서울운동장서 10여만 군중들에게 소련과 국내공산당에 대한 경고를 날리며 “나를 따르라”고 외쳤던 이승만이 저녁 방송에서 국내외에 ‘공산당과의 결별’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동안 하지 사령관은 이승만의 ‘수요방송’ 원고를 사전에 검열해왔는데, 공산당에 대한 자극적인 공격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이날 이승만은 연설 앞부분만 제출하였고 정작 중요한 본론 부분은 방송 중에 비서 윤석오가 몰래 전해주었다고 한다. (윤석오의 증언,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일조각,1970). 그 만큼 이날 방송 내용은 미군정의 대한정책은 물론, 이승만의 건국투쟁에 획기적인 것이었다. 내용 전문을 살펴보자.
  • ▲ 귀국후 환영대회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박사.
    ▲ 귀국후 환영대회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박사.
    ◆“한국은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세계에 선언합니다“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 이승만 연설문
    1945년 12월 19일 오후 7시 30분 방송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세계 각국에 대하여 선언합니다. 
    기왕에도 재삼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요, 공산당 극열 파들의 파괴주의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천년의 역사를 가졌으나 우리의 잘못으로 거의 죽게 되었다가 지금 간신히 살아나서 발을 땅에 다시 디디고 일어서려는 중이니 까딱 잘못하면 밖에서 들어오는 병과 안에서 생기는 병세로 생명이 다시 위태할 터이니 먹는 음식과 행하는 동작을 다 극히 초심해서 어린 애기처럼 간호해야 할 것이고 건강한 사람과 같은 대우를 하여서는 안 됩니다. 

    ◉폴란드 등 동유럽의 공산화 과정, 중국의 내전 실상을 보라

    공산당 극열분자들의 행동을 보시오. 
    동서 각국에서 수용되는 것만 볼지라도 폴란드 극열분자는 폴란드 독립을 위하여 나라를 건설하자는 사람이 아니오, 폴란드 독립을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이번 전쟁에 독일이 그 나라를 점령한 후에 애국자들이 임시정부를 세워서 영국의 수도인 런던에 의탁하고 있어 백방으로 지하공작을 하며 영-미의 승인까지 받고 있다가 급기야 노국(露國:러시아)이 독일군을 몰아내고 그 땅을 점령한 후에 폴란드 공산분자가 외국의 세력을 차탁(藉托)하고 공산정부를 세워서 각국의 승인을 얻고, 또 타국의 군기를 빌려다가 국민을 위협해서 민주주의자가 머리를 들지 못하게 만들어 놓아 지금도 정돈이 못되고 충돌이 쉬지 않는 중이며, 이외에도 구라파의 해방된 모든 나라들을 보면 각각 그 나라 공산분자들이 들어가서 제나라를 파괴시키고 타국의 권리범위 내에 두어서 독립권을 영영 말살시키기로 위주하는 고로, 전국 백성이 처음으로 그자들의 선동에 끌려서 뭔지 모르고 따라가다가 차차 각오가 생겨서 죽기로서 저항하는 고로 구라파의 각 해방국은 하나도 공산분자의 파괴운동으로 인연하여 분열분쟁이 아니 된 나라가 없는 터입니다. 

    동양의 중국으로 보아도 장개석총통의 애국심과 용감한 군략으로 전국민중을 합동해서 왜적에 항전하여 실낱같이 위태한 중국운명을 보호하여 놓았더니 연맹 각국은 다 그 공적을 찬양하며 극력 후원하는 바이거늘, 중국의 공산분자는 백방으로 파괴운동을 쉬지 아니하고 공산정부를 따로 세워 중국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놓고 무장한 군병을 양성하여 중앙정부와 장총통을 악선전하여 그 세력을 뺏기로 극력하다가 필경은 내란을 일으켜 관병과 접전하여 동족상쟁으로 피를 흘리게 쉬지 아니하는 고로, 타국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이권을 도모하기에 기탄치 않기에 이르나니, 만일 중국의 공산분자가 만분지일이라도 중국을 위하여 독립을 보존하려는 생각이 있으면 어찌 차마 이 같은 파괴적 행동을 취하리오. 

    ◉‘공화국’ ‘민주주의’로 거짓말...조국이라는 소련에 가서 충성하라 

    우리 대한으로 말하면 원래에 공산주의를 아는 동포가 내지에는 불과 몇 명이 못 되었나니 공산문제는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그 중에 공산당으로 지목받는 동포들은 독립을 위하는 애국자들이요, 공산주의를 위하여 나라를 파괴하자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따라서 시베리아에 있는 우리 동포들도 대다수가 우리와 같은 목적으로 생명까지 희생하려는 애국자들인 줄 우리는 의심 없이 믿는 바입니다. 
    불행히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여서 공산명목을 빙자하고 국경을 없이 하여 나라와 동족을 팔아다가 사익과 영광을 위하여 부언위설(浮言僞說)로 인민을 속이며 도당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여 군기를 사용하여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국이라는 명사를 조작하여 국민전체에 분열 상태를 세인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다가 지금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이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여 민심을 현혹시키니, 이 극열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해서 남의 노예로 만들고 저의 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분자들이 노국(러시아)을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의 조국에 들어가서 저의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서 완전히 우리의 것을 빼앗아다가 저의 조국에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지 않을 것이니 우리 삼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 놓고 싸울 결심입니다. 우리의 친애하는 남녀들은 어디서든지 각기 소재지에서 합동해서 무슨 명사로든지 애국주의를 조직하고 분열을 일삼는 자들과 싸워야 됩니다.

    ◉가족과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자는 부모형제라도 거부해야

    우리가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과 우리 가족을 팔아먹으려는 자들을 방임하여 두고 우리나라와 우리 국족과 우리 가족을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분자들과 싸우는 방법은 먼저는 그 사람들을 회유해서 사실을 알려 주시오. 내용을 모르고 풍성학루(風聲鶴涙)로 따라 다니는 무리를 권유하여 돌아서게만 되면 우리는 과거를 탕척(蕩滌)하고 함께 나아갈 것이오, 종시 고치지 않고 파괴를 주장하는 자는 비록 친부형(親父兄)이나 친자질(親子姪)이라도 거절시켜서 즉 원수로 대우해야 할 것입니다. 대의를 위해서는 애증과 친소(親疎)를 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미국인들이 독립을 위해 싸울 적에 그 부형은 영국에 충성하여 독립을 반대하는 고로 자식들은 독립을 위하여 부자형제간에 싸워가지고 오늘날 누리는 자유 복락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건설자와 파괴자는 합동 불가능...지금 해결 못하면 동족상잔 불가피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건설자와 파괴자와는 합동이 못되는 법입니다.
    건설자가 변경되든지 파괴자가 회심하든지 해서 같은 목적을 갖기 전에는 완전한 합동은 못됩니다. 우리가 이 사람들을 회유시켜서 이 위급한 시기에 합동공작을 형성시키자는 주의로 많은 시일을 허비하고 많은 노력을 써서 시험하여 보았으나 종시 각성이 못되는 모양이니 지금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조직을 더 지체할 수 없이 협동하는 단체와 합하여 착착 진행 중이니 지금이라도 그 중 극열분자도 각성만 생긴다면 구태여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파괴운동을 정지하는 자로만 협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에 이 문제를 우리 손으로 해결치 못하면 종시는 우리나라도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나라가 두 절분으로 나누어져서 동족상쟁의 화를 면치 못하고 따라서 결국은 다시 남의 노예노릇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경향 각처에서 모든 애국 애족하는 동포의 합심합력으로 단순한 민주정체 하에서 국가를 건설하여 만년 무궁한 자유 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합시다. ([서울신문] 1945. 12. 21)
  • ▲ 스탈린, 이승만, 트루먼.ⓒ뉴데일리DB
    ▲ 스탈린, 이승만, 트루먼.ⓒ뉴데일리DB
    ◆미국과 소련에 ‘선전포고’...건설자와 파괴자의 건국전쟁 

    이승만은 해방4개월의 탐색기간을 끝내고 ‘건국전쟁’의 깃발을 들었다.
    한반도는 미국이 아니다. 공산당도 합법적인 미국식 민주주의로는 이 땅을 소련에 갖다 바치는 결과가 뻔하다. 친소적인 미국무부의 좌우협력 방침에 따를 수밖에 없는 미군정사령부를 계몽하고 설득해서 이용해야 하는 이승만은 우선 미국무부에 ‘선전포고’를 날린 것이다.
    동시에 북한을 공산화하는 소련의 스탈린에 공식 도전장을 던졌다. "소련은 물러가고 북한 땅을 해방시켜라. 이대로 소련을 놔두면 한민족끼리 좌우 동족상잔이 피할 수 없게 된다. 거기에 소련이 나서면 삼천리 강토는 소련 식민지가 될 것이며 한민족은 공산독재의 노예가 된다."

    특히 이 연설은 어제에 이어 김구와 임정세력을 직접 겨눈 경고와 설득과 포용의 카드다.
    임시정부 1925년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한 자칭 ‘탄핵안’을 받아들였던 국무령 김구, 2년후 소비에트체제로 혁명을 일으킨 공산당의 개헌안을 결재한 김구, ‘공산당과 혼잡 말라’며 그토록 말렸건만 나중엔 ‘좌우합작’까지 수용한 ‘주석 김구’와 그 세력은 지금 귀국해서도 이승만의 ‘독촉’을 경원시 하고 있다. 
    이승만은 12월15일 돈암장에서 개최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첫 회의에 39명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15명만 참석한 것을 보고 결심을 굳혔다. 박헌영의 공산당과 임시정부 측의 참여를 논의한 끝에 ”불여의하면 독자적으로 진행하겠다“고 공언하였던 것이다.
    ”좌우협력의 일이 늦어서 하지 장군이 골이 나있다”고 말한 이승만은 “만약 독립을 반대한다 하면 그 반대자와는 분수(分手:손을 뗌)하는 수 밖에 없다. 나라를  파괴하려는 자와 나라를 건설하려는 자가 어찌 같이 일알 수 있나”라며 공산당 영입을 포기하였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록] 1945.12.16.)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해체 불가피론’을 피력하였다. 첫째, 미국과 소련이 승인하지 않는다. 둘째 임정 내부에 좌우가 갈라져 싸우니 스스로 해산될 길을 걷고 있다. 셋째, 김구 개인은 ‘독촉’과의 통합을 양해하는데 “임정 제공(諸公)의 속박을 많이 받고 있는 모양이다. 
    결국 이승만은 결단을 내려 우익인사들 만으로 ‘독촉’ 결성작업을 일단 마무리하고 지방조직 확대를 위해 남한 전역에 선전대를 파견했다. ([자유신문] 1945.12.15.)
  • ▲ 박헌영과 여운형.ⓒ뉴데일리DB
    ▲ 박헌영과 여운형.ⓒ뉴데일리DB
    ★박헌영과 여운형 ”이승만은 파쇼, 반통일의 원흉“
    프롤레타리아의 조국 소련만이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주장하는 조선공산당 총비서 박헌영은 12월23일 ‘세계민주주의 전선의 분열을 책동하는 파시스트 이승만의 성명을 반박함’이란 긴 제목의 성명을 내놨다. 코민테른의 세게 공산화 전열에 폭탄을 맞은 충격에 분노하는 장문의 이승만 규탄이었다. ”....세계를 파괴하는 자가 파쇼가 아니요, 공산주의자라는 것이며, 폴란드에서 유럽에서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가 건설되며 중국 공산당의 지도하에 해방구의 민중생활이 비할 수 없이 행복해짐을 무시하고 장제스 주석의 중국 건설은 오직 국공합작에 있음을 인식하여 불원한 장래에 국공엽립정부가 수립 될 것에 눈을 감은 이승만이 덮어놓고 공산주의로 인한 파괴 운운함은 너무나 세계사정에 무지몰각함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독촉 중앙협의회와는 완전 절연을 선언하였다. ([해방일보] 1945.12.25.)
    그날 인민당의 여운형도 ”독촉중협은 드디어 반통일의 노선을 걷고 말았다. 내것 만으로서의 통일을 강행하려 한다면 파쇼적 독단이요. 반통일 행동“이라 비난하는 담화를 냈다.
    요컨대, 남한의 통일전선이 무너진데 좌절과 분노를 토하며 이 기회를 역이용하려는 공세였다.

    ★임시정부 측도 이승만에 거부감...민혁당은 ‘남북한 통일공작’ 시사
    임시정부 인사들도 이승만의 연설에 부정적인 반응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들은 이미 중경에서 결의한 ‘임시정부 당면정책’에서 귀국후 각계를 망라한 과도정부를 세우기로 했는데 이승만이 먼저 ‘독촉’을 결성한 것을 보고 불평불만이 가득했던 판이었다.
    임정 비서장 조경한은 ”우리 입국전에 하등의 연락도 없이 성립되었으므로 하나의 사회단체로만 보겠다“고 간단한 논평만 발표하였다. 그리고 ‘독촉’과는 별개로 ”좌우익을 망라한 민족통일의 최고기관“을 목표삼아 ‘특별정치위원회’를 결성할 것이라 했다.([자유신문]1945.12.25.)
    임정내의 공산세력 조선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는 앞으로 남북한을 한데 뭉쳐 전국적 통일공작을 계획하고 있다“면서 북한과의 물밑작업이 진행중임을 은근히 내비쳤다.
  • ▲ 돈암장으로 이승만(두루마기)을 방문한 김구(왼쪽).
    ▲ 돈암장으로 이승만(두루마기)을 방문한 김구(왼쪽).
    ◆이승만, ”신탁통치 단호히 배격“ 방송...‘독촉’ 강화 호소

    이때 소련 모스크바에서는 이른바 ‘3상회희’가 열리고 있었다. 12월16일부터 미국대표 번스(James F. Byrnes) 국무장관, 소련대표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 외무장관, 영국대표 베빈(Ernest Bevin) 외무장관이 모여 전후처리 7개 의제에 대해 토의하였는데, 한국의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추측들이 국내에도 외신을 인용 보도되어 어수선하다. 

    이승만은 26일 ‘수요 방송’에선 ”신탁통치를 단호히 배격한다면서 남한 전역에 ‘독촉’ 지부 조직을 독려하였다. “만일 우리의 결심을 무시하고 신탁관리를 강요하는 정부가 있다면, 우리 3천만 민족은 차라리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죽을지언정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결의를 다졌다. 모스크바의 ‘신탁 결정’ 전야에 이승만은 ‘신탁 결사반대’를 다시 한번 국내외에 확인시킨 것이었다. 
    또한 “독촉의 통합이 성숙할 때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소수의 극단적 공산주의자만 없었다면 민족통합은 벌써 성공하였을 것“이라며 ”우리가 지금 방해자들의 파괴행위를 방관한다면 나중에는 아무리 싸워도 효과가 없다“고 경고한다. 신탁관리를 거부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주저하지 말고 ‘독촉’ 지부결성을 서둘자고 말했다. 독촉의 조직투쟁으로 신탁통치를 막자는 전략이다. 이승만은 독립촉성회를 새로운 정부 수립의 추진체로 활용하기로 하지 사령관과도 합의하였음을 시사하면서 ”과도정부 수립까지 한민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이 필요한데 그것이 독촉중앙협의회“라며 승인받지 못한 임시정부를 엄호하고 그 기능을 대행한다고 설득했다.
  • ▲ 소련의 레닌,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 경무국장 김구(1920년).ⓒ뉴데일리DB
    ▲ 소련의 레닌,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 경무국장 김구(1920년).ⓒ뉴데일리DB
    ◆김구 연설 ”소련 ‘국부’ 레닌 선생이 임정을 가장 먼저 도와주었다“

    ★모스크바 발 ‘신탁통치’ 보도...공산당도 ‘절대 반대’ 발표
    이튿날 27일 아침부터 외신들이 ‘신탁통치’에 관한 급전(急電) 보도를 쏟아냈다. 
    한민당, 국민당 등 우파정당들은 긴급간부회의를 소집하였는데 특히 한민당은 ‘신탁통치 반대’ 결의문을 채택하고 ”국제신의를 무시하며 조선의 생명적 발전을 저해하며, 동아시아인의 평화를 파괴하는 것“으로서 3천만이 최후까지 싸울 국민운동을 주창하였다.([조선일보]1945.12.28.)
    조선공산당 대변인 정태식도 ”우리는 절대 반대한다. 5년은커녕 5개월 신탁통치라도 반대“라고 말했다.([조선인민보]1945.12.29.)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총무 이여성은 ”신탁통치안은 그 어느 나라가 하든 원치 않는다. 소련은 가장 진보적인 민주주의 나라로서 조선에 들어 올 때 모든 것은 조선인의 것이라 하여 감사했는데 이제 와서 신탁통치를 하겠다하니 못 믿겠다. 오보가 아니냐?“고 반문하였다. ([신조선보]1945.12.27.)

    ★김구, 귀국후 처음 ‘레닌 선생’과 ‘진보적 민주주의’ 내놓다
    이와 같이 좌우 정파들이 ‘반탁’을 들고 나온 판에 김구가 이상한 연설을 하였다.
    같은 날 27일 서울중앙방송국 라디오 방송으로 ‘3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란 연설이 그것이다.
    그 내용은 귀국후 이승만을 만나면서 기자회견 때도 발언에 신중하던 태도와는 전혀 다른 적극적이며 좌파적인 주장이었다.
    김구는 ”그동안 임시정부가 중국, 소련, 미국 등으로부터 사실상 ‘승인’과 같은 지원을 받았다“면서 종래와 다른 말을 꺼냈다. 그 지원의 예로써 임정 초기에 소련 레닌이 제공한 자금 이야기를 인용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국부(國父) 레닌 선생은 제일 먼저 임시정부와 손을 잡고 거액의 차관을 주었다.“ 김구가 토해낸 ‘소련 국부 레닌 선생’이란 호칭은 반공의 우파 진영에선 못 듣던 말이었다. 
    이어서 김구는 공산당의 슬로건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세워 연설을 이어간다. 즉 ”우리는 가장 진보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주장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모 일계급의 독재는 반대한다“고 공산당독재를 견제하는 말을 덧붙였다. 
    경제 균등의 실현을 위한 토지와 생산기관의 국유화, 교육균등을 위한 의무교육 실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숙청을 다시금 표명하였다. ([동아일보]1945.12.30.)
    이와 같은 김구의 연설은 지난 주 이승만의 ‘강렬한 반공’ 연설의 여파에 올라타는 ‘임정 선전‘의 다목적 포석이란 해석들이 나왔다고 한다. 이날 연설문은 한독당 선전부장이자 김구의 연설과 편지 전담자 엄항섭(嚴恒燮, 1898~1962)이 작성한 것이었고, 방송도 엄항섭이 김구 대신 읽었다고 한다.

    서울 장안이 ’반탁‘으로 술렁이는 날, 신탁통치에 대한 언급 대신에 ’소비에트 국부 레닌과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세운 연설에서 김구가 ’레닌의 임시정부 지원 차관‘이라 지칭한 자금의 정체는 무엇인가. 
    앞서 연재 (18)에서 살펴 본대로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이라며 이동휘에게 제공한 200만 루블은 코민테른 국제공산주의 확산을 위한 공작금이었다. 즉,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에게 ’고려공산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벌이라‘는 돈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임시정부의 공산화와 직결된 지령이었다. 그 자금으로 이동휘는 김구를 비롯한 임정 인사들과 상하이 청년들을 공산당원으로 포섭하였기 때문이다. 김구는 그때 거절하였다고 한다.([백범일지]) 
    레닌의 자금제공을 알게 된 임정은 ”독립운동 자금이니 내 놓으라“고 다그치지만, 이동휘는 ”임시정부와 무관한 자금“이라며 거부하고 상하이를 떠나버린다. 
    경무국장 김구는 부하들을 시켜 이동휘의 측근 자금책 김립을 ’독립자금 횡령‘ 범인이라며 1922년 2월 대낮에 노상에서 살해하였다.
    김구 자신이 내막을 잘 아는 이 사건을 왜 해방 후 귀국하여 새삼 소환한 것일까. 그 자금이 과연 ”소비에트 국부 레닌 선생이 임시정부를 지원해준 차관“이란 표현은 합당한 것인가?

    김구의 방송 다음날 28일,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과 발표에서 ’한국신탁통치‘ 부분이 밝혀졌다. ’반탁‘ 불길이 솟는 이날, 김구와 한독당 중심의 임정 인사들도 즉각 비상대책을 강구하고자 이틀 연속 철야회의를 진행하는데 놀랍게도 뜻밖의 살인사건이 터진다. 바로 송진우 암살사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