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헌영이 해방후 두달 만에 1.194개나 조직한 노동조합의 전국조직 '전평'의 로고와 1945년11월5일 결성대회 장면(자료사진)
    ▲ 박헌영이 해방후 두달 만에 1.194개나 조직한 노동조합의 전국조직 '전평'의 로고와 1945년11월5일 결성대회 장면(자료사진)
    조선공산당, '인민공화국과 전국노조' 혁명태세 완성

    해방 석달 째 11월5일, 서울 명동인근 중앙극장에서 ‘전평’ 결성대회가 열렸다.
    공산당이 말하는 ‘전평’이란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全國評議會)의 약칭이다. 해방즉시 지하에서 지상으로 튀어나온 박헌영은 조선공상당을 재건하고 남한전역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면서 동시에 공산혁명의 계급투쟁 전위로서 노동조합을 설립해나갔다. 
    노동자-농민과 무산계급의 해방은 공산주의 운동의 기본, 박헌영은 ‘레닌의 아이’답게 프롤레타리아 혁명(Proletariat revolution)의 기반구축에 한껏 부풀었다.  
    서울 인천 부산 등 대도시부터 시작, 모든 기업과 공장들에 직장단위 노동조합을 만들고 이를 산업별로 정비하였다. 철도, 교통, 통신, 금속, 전기, 섬유, 광업, 어업, 식료품, 목재, 합판, 조선, 화학, 인쇄, 출판 등 대표들 51명을 모아 9월26일 전국대회 준비회의도 마쳤다.
    인민공화국 선포(9.6)후 민족통일전선을 강화하면서 귀국한 이승만과 담판도 해보았으나 역시나였다. 부르주아는 구제불능이다. 공산혁명의 성패는 지상지하 조직력이 좌우한다.

    중앙극장에 모인 노조대표들은 505명, 남북한 40여개지방 노동자를 대표한다고 주장한 조직은 총1.194개나 되었다.
    이들은 명예회장에 박헌영, 김일성, 중국의 모택동을 비롯,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의 노동조합 비서들을 추대하였다. 이어서 ‘조선무산계급의 수령 박헌영 동무‘에게 감사메시지를 보내고, 조선민족통일전선에 대한 박헌영 동무의 노선을 절대지지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어서 박헌영이 보낸 메시지를 낭독하고 줄줄이 축사가 쏟아진다. 인민공화국 노동부, 서울시 인민위원회, 조선문화건설 중앙협의회, 건국부녀동맹, 조선산업노동조사소, 공산청년동맹,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조선인민당 대표 등 벌써 엄청난 조직들이 경쟁적으로 나섰다.
    이들이 채택한 ’행동강령‘은 최저임금제, 8시간 노동제 등 17개항, 정치적 주요항목은 뒤에 나온다. “민족반역자 및 친일파 소유의 일체의 기업은 전평 공장위원회에서 관리한다”는 것과 “조선인민공화국을 절대 지지한다”는 선언이다. ([해방일보] 1945.11.15.)
    한마디로 조선인민공화국과 이를 성공시킬 행동대까지 확보한 박헌영이다. 
    이후 해방정국 3년간 이들이 벌인 수많은 파업, 폭력시위, 폭동 등은 잘 알려진 대로이다.
    미군정이 ’공산당도 합법정당‘이라며 방관하는 동안, ’서북청년회‘등 민족청년단체들이 나서서 전평의 불법폭력을 도맡아 맞서 싸우고, 이듬해 이승만이 주도한 민족진영의 대한노동총연맹이 3월에 결성되어 격돌을 벌이는 좌우투쟁은 글자 그대로 ’건국전쟁‘이 된다.


  • ▲ '여간첩 마타하리'로 사형당한 김수임(왼쪽). 오른쪽은 김수임이 동거하던 미군장교 자동차로 월북시켜준 연인 조선공산당 이강국.
    ▲ '여간첩 마타하리'로 사형당한 김수임(왼쪽). 오른쪽은 김수임이 동거하던 미군장교 자동차로 월북시켜준 연인 조선공산당 이강국.
    ★미군정장관, 축사하며 ’인공 해산‘ 간청...좌익은 ’인공 사수‘ 결의
    조선공산당의 전국인민위원회 대표대회가 11월20일 열렸다. 인민공화국(인공)의 ’국회‘격인 모임이다. 서울 천도교회관 강당에서 사흘간 개최한 대회에는 북한지역을 포함했다는 25개 시, 175개 군대표 610명이 참석했고 인공 서기장 이강국(李康國,1906~1957)이 의장이 되어 진행하였다. 이때 이강국은 5년후 ‘여간첩 마타하리’사건으로 사형당하는 연인 김수임(金壽任, 1911~1950)과 동거 중이었다.  

    이 공산당 대회에 미군정의 아널드(Archibald Vincent Arnold,1889~1973) 장관이 참석하여 축사를 한다. 지난주에도 박헌영을 만나 ‘인민공화국을 인민공화당‘으로 바꾸라며 인공해산을 간청하였고 하지 사령관도 박헌영을 따로 불러 강압했지만 마이동풍이다.
    아널드는 축사에서 “미군정청의 한국 건국 노력에 협력해주면 환영한다”고 간청하며 군정청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임을 다시 한 번 못 박듯이 강조하였다. 
    공산당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미군정청은 이처럼 조선공산당을 키워주는 일만 하고 다녔다.
    두 개의 정부는 안되므로 ‘인민공화국’의 ‘국’을 ‘당’으로 바꿔 정당 되라는 요구에서 보듯이 공산주의 본질과 전략은 무관심한 채 법적 형식논리나 따지는 수준이 군인집단 하지 사령부의 한계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왜냐하면 당시 미국무부의 대한정책이란 친소파 극동국장 빈센트와 그 위에 소련 간첩 알저 히스의 손아귀에서 ‘소련의 이익을 위해 조종되는 상황’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박헌영이 이 대회를 소집한 목적은 국제정세 보고와 국내정세 보고였다. 국제정세 보고에서 강진(姜進,인공 외교부장 대리)은 “소련 이외에는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우리 인민위원회를 무시하는 여하한 정권도 조선에는 수립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미군정의 요구는 관심도 언급도 없었다.
    이강국은 ‘정치보고’에서 이승만을 맹렬히 비난하며 ’독촉‘ 결성과 ’인공 주석취임 거부’등을 ‘반통일적인 민족분열 행태’라며 악선전을 퍼부었다. 결국 대회는 시나리오대로 정세가 급변할수록 조선공산당의 인공을 끝까지 사수하자는 결의로 끝났다.

    이로써 남한 지역의 좌익은 해방 3개월 만에 조선공산당의 인민공화국과 전국 노조 ‘전평’의 조직화까지 완성, 북한의 소련과 함께 한반도 공산화 혁명의 전투태세를 완비한 것이다. 뒷날 6.25침략 때 박헌영이 “수십만명 인민봉기로 전투 없이 승리한다”고 장담한 이유가 이것이다.
  • ▲ 충칭의 임시정부 인사들이 1945년 11월 귀국직전 찍은 기념사진.
    ▲ 충칭의 임시정부 인사들이 1945년 11월 귀국직전 찍은 기념사진.
    ◆ 김구 귀국 “내가 임시정부다”...임정 집권설 파다

    공산당대회 다음날 23일 김구와 임시정부 일진 15명이 김포공항에 내렸다. 해방 후 88일만이다. 왜 이렇게 귀국이 늦었던가. 엄청난 귀국 비용 때문이다.
    해방순간 당황했던 김구는 중국 국민당정부에 매달릴 수 밖에 없다.
    당시 중경(重慶:충칭)에 거주하는 임정 식구들만 550여명, 상하이와 베이징, 만주까지 동포들은 약400만명이다. 당장 귀국해야하는 임정 주요 인사들만 골라보니 29명이다. 돈 나올 곳은 중국정부 뿐이다. 여기저기 들락날락 알아보고 교섭하느라 세월만 흘러간다.
    김구는 9월3일 뒤늦게 ‘국내외동포에게 고함’이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조국의 해방이 수많은 선열과 중국 미국 소련의 전공임을 감사하고, “우리가 처한 현 계단은 ‘건국강령’에 명시한 바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는 과도적 계단”임을 밝히면서 ‘당면정책’ 14개항을 발표, “귀국하여 국내정권이 수립되는 즉시 임시정부의 임무는 완료되며, 일체의 직능 및 소유물을 인계할 것”이라 천명하였다.
  • ▲ 임시정부 환국직전, 장제스가 작별기념으로 자필서명하여 김구에게 준 사진.
    ▲ 임시정부 환국직전, 장제스가 작별기념으로 자필서명하여 김구에게 준 사진.
    ★장제스, 9월28일 김구 면담...10월30일 지원비 20만달러 결재
    김구는 중국정부에 귀국비용 5,000만원(중국돈)과 귀국후 국내활동지원비 50만 달러(약 3억원)를 요청하고, 사흘이 멀다 하고 중국정부 관계자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며 장제스 총통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중국 정부는 9월26일에야 국민당 중앙위원회를 열어 한국문제와 베트남, 타이 등 전후상황을 검토하였고, 중국군사위원회는 “한국에 친중정권이 들어서도록 지원하고 새로 생길 한국의 군대가 광복군이 중심이 되도록 돕는다” 계획을 세웠다. (중국군사위원회가 행정원에 보낸 1945년9월 기록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5 ‘중국의 인식’)
    장제스가 김구를 부른 것은 그 이틀 후, 9월28일이다. 
    관저로 달려간 김구는 7개항의 지원을 요청하는 비망록을 제시하며 간청한다. 
    무엇보다 장제스가 미국과 상의하여 임시정부를 과도정권으로 인정하여 귀국시켜달라고 했다.
    장제스는 임정 승인문제는 “영-미와 협상해봐야 할 일”이라며 말을 돌렸다. 해방 후까지도 중국은 김구의 임정을 정권으로서가 아니라 ‘친중정권 만드는 하나의 정당집단’으로만 지원했던 입장에서 한발도 더 나가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김구는 “중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은 영구히 합작할 필요가 있으니 협약을 체결하고 상호 대표를 파견, 연락하자고 제안하였다. 장제스는 한국독립당을 계속 원조하겠다며 “형식은 필요없다”고 거절하였다. 마지막 가장 급한 문제, 여비와 활동비 지원을 애원하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중국 돈’을 장제스가 결재한 것은 그로부터 한달 뒤 10월30일이다. 여비 5,000만원은 즉시 지급하고 활동비 50만달러중 20만 달러만 주겠다고 통보했다. 감사하는 김구에게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은 중국의 책임으로 간주한다”는 격려의 말을 건넸다.
    몇날 며칠 송별회가 이어졌다. 장제스의 부인 송미령이 연회를 베풀었고, 중국공산당 주은래(周恩來)와 동필무(董必武)도 김구와 김원봉 등 각료전원을 초청, 3년간 ‘좌우합작’했던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귀국 직전 또 하나의 소동이 일어났다. 미군정이 요구한 ‘개인자격 입국 서약서’에 대한 서명때문이다. “이런 모욕이 어디 있나. 안가겠다. 미군이 철수한 뒤에 가도 늦지 않다”는 독립운동가들의 반발이 터졌다. 
    “그런 고집이 통하겠소? 비현실적인 명분 싸움은 이제 그만 접으시오” 질책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조경한 [백강회고록, 국외편] 한국종교협의회, 1979).
    해방후 무려 2개월 반 만에 여비를 마련한 김구 일행은 20만달러를 가지고 장제스가 내준 군용기로 상하이를 거쳐 11월23일 서울로 떠난다. 1진 15명이 먼저 귀국하고 2진은 12월1일 돌아온다.
  • ▲ 경교장의 현재모습. 금광왕 최창학이 지은 별장 '죽첨장'을 임시정부에 재공하였다.(자료사진)
    ▲ 경교장의 현재모습. 금광왕 최창학이 지은 별장 '죽첨장'을 임시정부에 재공하였다.(자료사진)
    ★임정 청사는 ‘죽첨장’...‘친일’ 지목받는 ‘금광왕’이 제공
    김구 일행은 서대문 ‘죽첨장’(竹添莊)에 들었다. 일제 때 국내 최대의 벼락부자 최창학(崔昌學,1891~1959)이 지은 서울의 별장, 평안북도 구성(龜城) 출신 최창학은 ‘광산왕, 금광왕, 황금귀'(黃金鬼)로 불리던 빈농출신, 하루아침에 ’노다지‘로 ’천만장자‘가 되어, 일제 때 잡지 [삼천리]에는 ’민영휘, 김성수와 함께 조선 3대 갑부‘로 기록되어 있다. 총독부와 각종 활약을 벌여 해방후 친일파로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제공한 호화별장에 자리 잡은 김구는 집 이름을 근처의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京橋莊)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김구를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이승만이다. ’독촉‘의 자리를 비워놓고 김구와 임정의 환국을 기다리던 이승만, 그에게 임정은 3.1운동때 서울서 탄생한 ‘한성정부’와 신생 대한민국의 법통을 잇는 '정통성의 다리‘이다.  이승만은 이튿날 김구를 반도호텔로 데려가서 하지 사령관과 처음 인사시킨다.  그리고 김구는 이튿날부터 며칠 동안 돈암장의 이승만을 찾아가 회담하였다.

    경교장으로 줄줄이 김구를 찾는 사람들 중에 안재홍이 김구에게 했다는 말이 전해온다.
    “지금 조선은 공산당이 인민공화국을 만들어 혼란을 격화시키고 있는데, 김구 주석이 ’임시정부 당면정책‘에서 천명한 바와 같이 과도정권을 새로 수립할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가 직접 집권하라“고 건의했다는 말이다. 이에 김구는 ’각료들의 입국을 기다려서 협의해 결정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장준하 [돌베개] 2015).
    이처럼 임정 지지세력은 물론, 일반 사람들도 임정이 돌아왔으니 임정 세상이 될 것으로 믿는 분위기였다. 이것은 김구의 첫 기자회견에서 김구도 그렇게 응수하여 더 굳어졌다.
    기자가 “개인자격으로 오셨는데 임시정부는 언제 오느냐”고 묻자 김구는 주저 없이 “내가 왔으므로 임시정부가 온 것이다”라고 선언하듯 잘라 말했다.([중앙신문] 1945.11.25.)
    김구는 임정과 자신은 한 몸이란 인식이 몸에 배어있었고, 장제스에게 ‘임정집권 지원요청’까지 하였으므로 특히 임정인사들은 임정집권을 당연지사로 여겼을 터였다.
  • ▲ 해방후 귀국한 김구(가운데)와 함께 반도호텔로 하지 미군정사령관을 예방한 이승만(왼쪽).
    ▲ 해방후 귀국한 김구(가운데)와 함께 반도호텔로 하지 미군정사령관을 예방한 이승만(왼쪽).
    ◆김구 “소련과 합작” V 이승만 “소련 거부”

    하지 사령관은 12월12일 기자회견과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장문의 성명을 발표했다.
    “인민공화국은 그 명칭 여하를 불문하고 ’정부‘도 아니고 그런 직능을 집행할 권리가 없다. 어떠한 정당이든지 정부로 행세하려 한다면 불법행동이다.” 하지는 그동안 인공인사들이 약속을 안지키는 것을 참아왔지만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면서 “미군과 군정청에 불법 방지를 위한 만반의 조치를 즉시 취하라 명령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1주일 뒤 19일 오전 미군 방첩대(CIC)는 옥인동의 윤덕영 별장에 소재한 인민공화국 사무실을 급습, 서류를 압수하고 간판을 떼어냈다. 윤덕영은 순종비 윤왕후의 숙부로서 일본의 작위를 받은 대표적 친일파의 한사람이다.

    같은 날 같은 시간, 서울운동장에서는 ’임시정부 개선‘ 환영식이 대대적으로 열렸다.
    마치 임시정부가 일본과 싸워 이기고 개선한 듯, 10여만 인파는 김구와 임시정부가 독립국의 정부가 되리라는 소문이 파다했던지라 김구를 보려고 전국에서 몰려와 술렁거렸다.
    인민공화국의 홍명희(洪命憙)와 한국민주당의 송진우(宋鎭禹)의 환영사에 이어 새로 임명된 미군정장관 러치(Archer L. Lerch) 소장이 축사를 하고, 이날의 주인공 김구와 임정의 초대대통령이자 인기정상의 이승만이 답사를 하였다.
  • ▲ 1945년12월19일 옛 서울운동장(현DDP)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시정부 개선' 환영식. 학생들과 시민들이 대형아치를 통과하고 있다.
    ▲ 1945년12월19일 옛 서울운동장(현DDP)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시정부 개선' 환영식. 학생들과 시민들이 대형아치를 통과하고 있다.
    ★김구, “중국-미국-소련의 친밀한 합작만이 독립의 기초”
    단상에 오른 김구는 감개무량한 인사말에 이어 단결을 강조하는 연설이 열을 띄었다.
    “임시정부는 어떤 한 계급, 어떤 한 당파의 정부가 아니라 전 민족, 각 계급, 각 당파의 공동한 이해 입장에 입각한 민주 단결의 정부였다”고 강조했다. 
    장제스의 요구에 따라 지난 3년간 공산당과 좌우합작을 했던, 그러나 공산당이 귀국직전에 총사퇴를 주장했던 일과, 그리고 좌우합작을 반대했던 이승만과 우익진영을 감안한 말이다.
    “남한 북한의 동포가 단결해야 하고, 좌파 우파가 단결해야 하고, 남녀노소가 다 단결해야한다. 오직 이러한 단결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우리의 독립 주권을 창조할 수 있고, 소위 38도선을 물리쳐 없앨 수 있고, 친일파 민족 반도를 숙청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여기까지는 이승만이 귀국후 줄기차게 외쳤던 주장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내용이다.
    문제는 결론부분이다.
    “우리는 중국, 미국, 소련 3국의 친밀한 합작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이 3국의 친밀한 합작의 기초 위에서만이 우리의 자주독립을 신속히 가져올 수 있다”고 김구는 다짐하는 것이었다.
    군중들의 뜨거운 환호와 박수가 서울 장안을 울릴 듯 길게 이어졌다.
    김구의 좌우파 단결 주장에 대하여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도 그대로 인용, 환영하였다.
  • ▲ 임시정부 환영식에서 연설하는 김구(자료사진).
    ▲ 임시정부 환영식에서 연설하는 김구(자료사진).
    이승만 “우리를 넘보는 나라와 국내 매국분자들애 경고”
    이승만이 단상에 올라 입을 열었다. 그는 김구의 주장과는 판이한 연설을 시작했다.
    “삼천리 강산의 한치 땅도 우리 것 아닌 것이 없다. 3천만 남녀 중에 한사람도 이 땅의 주인이 아닌 사람이 없다. 지금 밖에서는 우리를 넘겨다 보는 나라들도 있고, 안에는 이 나라를 팔아 먹으려는 분자들이 있어서 우리 민족의 운명은 조석에 달렸다. 
    그러나 우리 민중이 한몸 한뜻으로 뭉치를 이루어 죽으나 사나 동전동퇴(同進同退)만 하면 타국정부들이 무슨 작정을 하든지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다. (중략)
    이번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연합국이 새삼 선언하기를 모든 해방국에서 어떤 정부를 세우며 무슨 제도를 취하든지 다 그 나라 인민의 원에 따라서 시행한다 하였으니, 우리 민중은 우리의 원하는 것이 완전독립이라는 것과 완전독립이 아니면 우리는 결코 받지 않겠다는 결심을 표할 뿐이니, 일반 동포들은 내말을 믿고 나의 인도하는 대로 따라주어야 될 줄로 믿는다.”[동아일보] 1945.12.20.)

    이승만이 말하는 ’우리를 넘보는 나라들‘은 김구가 ’합작해야한다‘고 말한 중국-소련이다. 또한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분자들‘이란 말할 것도 없이 조선공산당을 지칭한 정면 공격이었다. 
    결정적인 것은 ’완전독립이 아니면 결코 받지않겠다‘는 결심, 그것은 미-소의 신탁통치가 결정되기도 전에 ’신탁통치 반대‘를 공개선언한 말이었다. 
    끝으로 ’동포들은 나의 인도를 따르라‘는 요구는 사실 김구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강대국을 의자하며 ’뜬구름 잡는 소리‘ 그만 하고 내 말대로 하라는 공개요구 아닌가.
  • ▲ 김구와 이승만.ⓒ뉴데일리DB
    ▲ 김구와 이승만.ⓒ뉴데일리DB
    ▶이승만과 김구의 시각차이, 세계정세에 대한 인식능력의 높낮이가 한눈에 드러난 연설이었다. 김구는 남북한 동포의 단결을 주장한다. 소련 공산당의 지배에 약탈당하는 북한동포를 어떻게 남한동포와 단결시킬 것인가.
    그는 또 ’중국-미국-소련의 친밀한 합작‘을 위해 우리가 노력하자고 당부하였다. 강대국 미국-소련은 고사하고 한반도를 넘보는 중국을 우리 힘으로 미국-소련과 ’친밀한 합작’관계가 되도록 어떤 노력을 하란 말인지. 나름 방법론이 있는지, 막연한 수사인지 알 길이 없다.

    김구의 중국 장제스에 대한 의존성은 유난히 컸다고 전해진다.
    윤봉길 의거 이후 장제스의 도움을 받아왔고 수백명 광복군도 중국군에 편입시켜 그 지휘에 맡겼으며, 중국 돈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었기에 깊어진 의타심인가. 심지어 장제스의 강압에 가까운 요구로 공산당과 좌우합작까지 했다. 그리고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의 김원봉을 데리고 왔다. 귀국 시에는 중국군사위원회의 임정책임자 소육린(邵毓麟)을 한국까지 동반하게 해달라고 장제스에게 급전까지 쳤다. (김구가 장제스에게 보낸 1945년11월8일자 전보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22]) 그래서인가. 3국을 말할 때 김구 입에선 중국이름이 먼저 나온다. 김구는 장제스가 ‘3국 합작’의 중심역할이라도 하리라 여겼는지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 ‘중-미-소 3국의 친밀한 합작위에서만 독립이 가능하다’는 김구의 발상은 이해 불가능이다. 임정초기부터 공산주의를 반대하였다는 김구라면, 게다가 좌우합작에 시달린 체험도 있을진대,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이 그 정도에 머물러있었던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얄타회담 때부터 소련과 미국의 새로운 냉전질서 이념전쟁이 시작되었음을 간파했던 이승만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일본이 물러가면 소련이 한반도에 내려와 공산정권 세운다”며 미국정부에게 임정 승인을 그토록 촉구했던 이승만의 역사인식,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판별력을 임정 주석이라는 김구에겐 기대할 수 없단 말인가. 

    ★이날 성대한 환영식에 이어 오후3시부터 덕수궁에서 화려한 환영잔치가 베풀어졌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저녁 7시 30분,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에서 결정타를 날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