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탈린의 '한반도 공산화' 지령 실행팀. 왼쪽부터 총지휘자 슈티코프, 정치담당 레베데프, 민정사령관 로마넹코. 군사령관 치스차코프.@뉴데일리DB
    ▲ 스탈린의 '한반도 공산화' 지령 실행팀. 왼쪽부터 총지휘자 슈티코프, 정치담당 레베데프, 민정사령관 로마넹코. 군사령관 치스차코프.@뉴데일리DB
    스탈린은 러일전쟁 때 잃었던 한반도 탈환의 꿈을 접어야 했다. 38선 때문이다.
    미국이 제안한 ‘38선 분할 일본군 항복받기’를 거부할 수도 없다. 원자탄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생각하면 아찔한 순간, 38선이 아니었으면 남한도 공산지옥이 될뻔 했다. 
    1945년 8월16일, 38선에 동의한 스탈린은 오래된 시나리오를 반토막으로 줄여나갔다. 서울로 진격하던 소련군은 U턴, 개성 남쪽을 내주고 38선 이북으로 물러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여 한반도 동해안으로 남진하던 소련 태평양 함대는 원산항에서 발이 묶였다.
    스탈린이 ‘일단 포기‘한 남한은 그러나 ’레닌의 제자‘ 박헌영이 이미 완전 장악하였으니 남북한 모두 공산당이 차지, 레닌과 스탈린의 국제공산주의는 사실상 한반도를 다 가진 셈이다.

    스탈린은 한반도 전체 대신 북한에 단독정권 수립 계획을 일사천리로 밀어붙인다.
    38선을 전면 봉쇄하여 ’국경‘으로 만든 스탈린은 동유럽에서 그랬듯이 북한 정권의 간판인물로 김일성을 점찍어 북한으로 들여보낸다. 동시에 ’북조선 소비에트공화국‘ 설립 총책 슈티코프에게 유명한 ’9.20 지령문‘을 하달한다. 북한단독정권 구성방법을 수정 보완하라는 재촉명령이었다. 이것은 뒷날 ’이승만이 분단원흉” 운운 책임전가 선전하던 스탈린이 사실은 해방과 동시에 자신이 먼저 단독정권을 세우고 분단을 고착화 시켰음을 웅변하는 역사의 ‘증거물’이다. 그것도 이승만이 귀국하기 한 달 전, 김구의 임시정부가 들어오기 두 달 전에! 
  • ▲ 훈련중인 러시아 태평양 함대.(러시아군 홈피 캡처)
    ▲ 훈련중인 러시아 태평양 함대.(러시아군 홈피 캡처)
    ◆스탈린 “부산까지 점령하라” 태평양 함대에 비밀명령...‘38선’ 나오자 U턴

    소련군이 평양을 점령한 것은 8월2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지 열흘만이다. 
    스탈린은 루즈벨트가 죽고(4.12), 히틀러가 자살(4.30)하자 독일이 항복(5.9)하기 전부터 시베리아 열차로 극동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수송하기 시작했다.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가 선선이 내준 선물, 요동반도-블라디보스톡 만주철도와 사할린 남부, 쿠릴열도부터 먹기 위해서다. 
    어찌 그것으로 성에 차랴. 러일 전쟁 때 일본에게 빼앗긴 한반도를 다시 찾아야한다.

    진작부터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의 태평양함대에는 “부산을 점령하라”는 비밀명령이 주어졌다. 소련 해병대 상륙부대는 동해안 속초부터 삼척, 포항을 거쳐 부산까지 상륙작전을 짜고 원산항에 입항, 명령을 기다리던 8월20일 돌연 ‘중지’명령이 내려왔다. 소련이 미국의 38선분할관리 제안에 동의함으로써 38선 이남 점령 작전이 모두 취소되었다고 했다.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도서출판 한울, 2008)

    ★해방 열흘만에 38선 전면 봉쇄...“소련군이 해방군‘ 포고문
    소련군은 평양 점령과 동시에 38선의 남과 북을 단절시킨다. 8월24일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京元線) 철도 운행을 중단, 25일엔 경의선(京義線:서울-신의주)을 끊어버린다. 한반도를 잘라 동과 서를 잇는 38도선 봉쇄명령을 내리고 전역에 경비부대를 배치, 북한과 남한의 통행과 교류를 일제히 차단하였다. 남북한의 통신을 끊고 각종 물자와 인적 통행을 일일이 검문 통제하였다. 해방 열흘 만에 소련은 38선을 ‘국경선’으로 만들어놓고 ‘분단 정권’ 출범을 향하여 대대적인 ‘북한 개조’, 이른바 ‘인민민주주의 혁명’에 돌입한다. 

    평양의 평안남도 도청이 소련군사령부가 되었다. 26일 평양에 들어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Ivan Chistyakov,1900~1979)가 북한 군정사령관이 되어 포고문을 뿌렸다. 그 포고문엔 날짜도 없었다. 동유럽에서 쓰던 것에 국명만 바꾼 것이리라. 
    포고 내용은 일본을 패망시켜 한반도를 해방시킨 미군의 ‘해방’을 가로챈 것, 일주일도 안되는 소규모 전쟁으로 그친 소련군이 ”조선을 해방시켰다“고 허위 선전한 심리전술이다.
    ”조선인들이여! 소련군대와 동맹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약탈자를 구축하여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시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당신에게 달렸다. 소련 군대는 조선인민이 자유롭게 창조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주었다....“(조선중앙통신사, 1949)

    이 포고문은 다음달 9월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맥아더 포고문’이 ‘점령군 명령’이라 대비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한국인들을 현혹하는데 두고두고 사용한 선전물이다. 미군 포고문은 소련군이 말한 ‘조선인의 자유도 행복도 지원 다짐’도 언급함이 없이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처벌’한다는 군사작전용이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를 모르는 미군정은 처음부터 그랬다.


  • ▲ 북한을 점령하는 소련군.ⓒ월드피스
    ▲ 북한을 점령하는 소련군.ⓒ월드피스
    소련군의 무차별 약탈-성범죄 만연=‘자유 독립을 지원하겠다’는 포고문과 달리 소련군의 무차별 만행은 북한을 하루아침에 무서운 공포의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패전국 일본의 재산은 ‘배상금’으로 가져간다며 북한의 주요산업시설을 뜯어내 소련으로 반출하기 시작하였다. 동양최대의 수력발전소 수풍댐을 비롯하여, 흥남 비료공장, 무수한 광산의 지하자원을 무차별로 실어나르고, 지주들의 쌀 창고들을 몽땅 털어내며, 이에 더하여 부녀자들을 마구잡이로 유린하는 성폭행이 북한전역에서 일어났다. 마을마다 청년들이 밤낮 경비를 서고 매춘업소와 술집을 서둘러 설치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다. 소련 병사들은 강탈한 시계와 보석들을 손목에 줄줄이 꿰 차고 닥치는 대로 민가 약탈에 광분하였다. 
    ‘해방군’이 아니라 패전국을 짓밟는 정복자들, 그 군대 30%가 형무소에서 징발한 강력범 출신이었다고 한다. 

    치스차코프 사령관이 평남 건국준비위원장 조만식(曺晩植,1883~1950)을 호텔로 불러 만났을 때, 조만식이 대뜸 ”소련군은 점령군이냐? 해방군이냐?“ 따진 것이 그 참상을 말해준다. 치스차코프는 판에 박은 듯 ‘소련군이 진주한 목적은 조선 해방’이라며 ”나는 모르니 민정담당자에게 물어보라“고 딴청이었다.
  • ▲ 김일성(왼쪽)을 에워싸고 조련시키는 슈티코프(중앙)와 로마넹코(오른쪽).
    ▲ 김일성(왼쪽)을 에워싸고 조련시키는 슈티코프(중앙)와 로마넹코(오른쪽).
    ◆스탈린, 김일성 첫 면접...”이승만보다 먼저 북한에 보내라“

    스탈린이 북한 공산화 지휘감독을 맡긴 사람은 연해주 제1극동방면군 군사회의 위원장 슈티코프(Terentii F. Shtykov, 1907~1964)였다. 벨라루스 태생인 그는 이미 핀란드 등의 공산화 작업을 성공시켰던 ‘위성국 만들기’의 달인이다. 그는 평양에 오지도 않고 치스차코프 북한 군정사령관과 부사령관격인 정치공작담당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1901~1992)를 분신처럼 부리는 ‘북한 총독’이었다. 스탈린의 북한용 하수인 3총사라 할까. 
    레베데프는 기록과 증언으로 이런 중대 사실을 가르쳐준다. 
    ”해방 후 남북한에서 공산당이 벌인 일 중에 슈티코프의 결재 없이 진행된 일은 단 한 가지도 없다.“ (레베데프 비망록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일보사, 김국후, 1993)  
    이 말은 바로 해방 3년간 남한서 벌인 공산당 폭력사태를 스탈린이 결재했다는 말이다. 슈티코프는 남북한 공산당의 수많은 ‘작전’들을 빠짐없이 ‘당중앙’(스탈린)의 결재를 받아 시행-감독하였기 때문이다. (전현수 옮김 [쉬띄꼬프일기 1946〜1948], 국사편찬위원회, 2004) 
  • ▲ 중국 빨치산 김성주(가운데)가 소련으로 도망친후 1942년 여자빨치산 김정숙(오른쪽)과 아들 김정일(왼쪽)을 낳았다.
    ▲ 중국 빨치산 김성주(가운데)가 소련으로 도망친후 1942년 여자빨치산 김정숙(오른쪽)과 아들 김정일(왼쪽)을 낳았다.
    ★김일성, 원산항에 입항...”김성주입니다“ 첫 인사

    레베데프가 평양에 도착한지 며칠 후 슈티코프의 긴급전화를 받았다. 내용은 ”다음 달에 제88특별여단의 김일성 대위를 평양에 보낼 테니 주택과 자동차, 생필품을 지급하라“는 지시였다. 그때 레베데프는 ”일개 대위한데 무슨 특혜인지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앞의 책), 9월이 되자 또 슈티코프가 전화했다. 김일성이 도착하면 공산당에 입당시키고 소련군이 경호할 것이며 비밀리에 지방시찰을 시키라는 말이었다.

    드디어 추석 전날 9월19일 오전, 원산항에는 소련 선박 푸카조프(Pukajov)호가 들어왔다. 마중나간 소련군 장교들과 원산 인민위원회 사람들은 누가 김일성인지 몰라 먼저 내린 소련군 조선인 장교에게 물었다. 아니었다. 그 뒤에 새파랗게 젊은 청년 장교가 내렸다.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악수하는 젊은이가 ”김성주입니다“ 인사하는 것이었다. 대위계급장 김성주가 김일성이라니, 김성주가 왜 김일성이란 말인가?

    김일성은 누구?=평양 대동군에서 1912년 태어난 김성주(金成柱)는 묘지기였던 김형직(金亨稷)과 교회장로의 딸 강반석(康盤石)의 3형제중 장남이다. 14살에 만주로 가서 중학교를 중퇴한 것이 학력의 전부, 19살에 중국 공산당원이 되고 33년 중국공산군 유격대, 빨치산이 된다. 대장이 마적출신이었다. 
    한국말보다 중국어가 익숙해진 그는 이리저리 전전하며 ‘마적질’을 거듭한다. 중국 이름은 ‘진지첸’이다. 1937년 일어난 ‘보천보 사건’에서 김성주의 활약은 미상이다. 당시 국내 신문들을 보면 전투중 ‘김일성(金日成)이 붙잡혀 참수 당했다’고 보도하였다. 또 다른 김일성이 있었다는 말이다.
    북한이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신화로 만든 보천보전투는 마을 우체국을 습격한 무장강도단 비슷한 사건인데 그 상황도 공적도 피해도 한껏 부풀려져 있다. 거기서 죽었다는 김일성의 이름을 김성주가 썼는지도 모른다. 
    김일성은 죽었다는데 여기저기 김일성들이 튀어나온다. 언제부턴가 항일전의 영웅처럼 만들어진 ‘김일성 설화’를 유격대나 마적까지도 자기라고 내세운다. 한자표기도 가지가지--金日星, 金日成, 金一星, 金一成 등이다. 김성주도 한자로 金成柱, 金聖柱, 金誠柱로도 썼다. 

    보천보사건 한달 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공산 빨치산은 항일전에 나섰다. 그때 ‘동북항일연군’ 유격대원이던 김성주도 참여한다. 일본군은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도주하던 빨치산부대는 충치허(紅旗河) 전투를 끝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그때 김성주는 여자빨치산 김정숙과 결혼, 1940년 소련 국경을 넘어 하바롭스크 부근에 머물던 중에 2년후 김정일을 출산한다.  
  • ▲ 1937년 11월17일자 조선일보가 보도한 '보천보전투' 기사 
 제목은 '김일성을 붙잡아 참수'했다는 것.ⓒ조선DB
    ▲ 1937년 11월17일자 조선일보가 보도한 '보천보전투' 기사 제목은 '김일성을 붙잡아 참수'했다는 것.ⓒ조선DB
    ▶스탈린과 김일성=1942년 6월 미국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에 대승을 거두자 스탈린은 대일참전을 염두에 두고 제88특별여단을 만든다. 서쪽에서 독일과 싸우면서 동쪽에선 일본과 싸울 때 전선 후방의 첩보와 파괴활동을 맡길 특수임무부대, 도망쳐온 중국 군인들을 모을 때 김성주도 들어가 빨치산 공로를 내세워 대위계급장을 딴다. 이젠 중국을 버리고 소련국적을 얻고 소련공산당원이 되었다. 
    모스크바의 스탈린은 어떻게 시베리아의 말단 장교 김일성을 알았을까. 스탈린의 충복 베리야가 추천했다는 증언이 있다. (김창순 증언 [비록: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88연대는 스탈린이 내무인민위원회(NKVD->KGB) 위원장 베리야의 직속으로 맡겼기 때문이다. 북한공산화 얼굴을 찾는 스탈린에게 평소 김일성 이야기를 들었던 베리야가 천거했다고 한다. 이는 88여단장과 소련군 지휘관들이 보고를 받는 극동군사령부가 김일성을 지켜보고 베리야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다. 
    레베데프의 증언은 ”소련극동군사령부가 김일성을 장차 북한의 군부 지도자로 내정하고 입북시켰다고 했다.
    「소련군정은 그의 본명이 김성주였고, 만주 지방에서 항일 빨치산 운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짜 항일 빨치산 운동에 공을 세운 또 다른 '김일성 장군이 있다'는 풍문이 조선 인민들에게 널리 퍼진 가운데 조선 인민들이 해방된 조국에 그 장군이 개선하기를 고대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김용삼[김일성-신화의 진실] 북앤피플,2016)
    그리하여 떠돌이 빨치산 김성주는 소련군정에 의해 ”조선인민의 '전설적 항일 투쟁의 영웅'으로 불리던 김일성으로 둔갑“했다는 이야기이다. 

    스탈린은 9월초 김일성을 불렀다. 전용별장서 4시간 면접후 ”쓸 만하니 소련군이 적극 지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메클레르 증언, 김국후 앞의 책)
    이는 그동안 동유럽에서 모스크바로 망명했던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각국 지도자로 선발하던 방식 그대로였다. 즉, 공산주의 여부는 불문, 스탈린과 소련 공산당에 ‘충성’할 수 있는 자만 합격이다.
    김일성의 북한 귀환 날짜가 예상보다 앞당겨졌다.
    ”그것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이 곧 귀국할 예정이라는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고 레베데프가 적어 놓았다. (레베데프 증언, 김국후 앞의 책)
    당시 김성주 주변 인물들은 ”김성주는 중국에 살고 싶다“고 자주 말했다면서 북한 우두머리가 되기엔 ‘거짓과 추악한 역사가 많아 걱정’이라며 고개를 흔들었다고 한다.
  • ▲ 조만식(왼쪽)과 김일성(오른족)을 첫 대면 시킨 소련군 메클레르(중앙). 1945년 9월30일 평양 일본식당 '하나부사'(花房)에서.
    ▲ 조만식(왼쪽)과 김일성(오른족)을 첫 대면 시킨 소련군 메클레르(중앙). 1945년 9월30일 평양 일본식당 '하나부사'(花房)에서.
    ◆스탈린의 ‘9.20 지령’...”북한에 단독정권 세우라“

    김일성의 입북 다음 날 9월20일자로 된 스탈린의 암호지령문이 극동전선 총사령관과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 및 제25군 군사회의에 날아왔다. 북한점령정책 7개항이다.
    한마디로 북한지역에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문이다. 이 암호문은 소련이 망할 때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반도 분단의 원흉이 스탈린’임이 밝혀지면 소련이 분단 책임을 져야 하는 국제적 궁지에 몰린다. 미국의 38선 제안은 ‘분단’이 아닌 것을 스탈린이 처음부터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공산국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 문서는 공산체제가 무너진 뒤 1993년에야 비밀이 해제되었다. 

    ★스탈린의 지령
    1. 북한 영토안에 소비에트 정권의 기관을 수립하지 않으며 소비에트 질서를 도입하지 말 것.
    2. 북한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및 조직의 광범한 블록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확립할 것.
    3. 붉은 군대는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및 조직의 결성을 원조할 것.
    4. 북한 주민에게 붉은 군대가 진주한 목적은  일본침략자 분쇄이지 한국 영토 획득 목적이 아님을 설명할 것.
    5. 북한의 사유재산 및 공공재산은 소련군당국의 보호아래 둔다는 점을 설명할 것.
    6. 소련군은 기율을 지키고 주민의 감정을 해치지 말 것.
    7. 북한 행정은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가 수행할 것.
    가장 초점이 되는 것은 1-2항과 7항이다. 소련 위성국이란 인상을 피하면서 북한 독자적 공산 정권을 세우는 전술을 강조한 것으로서, 그 지휘는 연해주 슈티코프가 하라는 명령이다.
    ‘반일적인 정당과 조직’ 연합을 기초로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을 만들라는 것은 박헌영의 ‘8월테제’와 같은 것으로 코민테른의 단계적 혁명전술의 기본이다. 한국은 ‘자본 혁명’인 부르주아혁명단계, 자본가 지주등 민족세력 부르주아 계급을 끌어들여 반항자는 ‘친일파’로 제거하고 순응자는 ‘쓸모있는 바보’(useful idiot)로 써먹고 숙청해버리는 전형적 공산화 ‘민족통일전선’ 전술, 슈티코프의 전공이다. 소련군의 만행까지 보고 받은 스탈린이 민심을 달래면서 목적 달성하라는 경고까지 담았다.

    이미 김일성 담당 교육자 메클레르는 ‘조만식을 앞세우고 김일성은 뒤로’ 하는 작업에 나서 두 사람을 호텔 만찬에 불렀다. 김일성은 조만식에게 ”선생님, 김일성입니다“ 큰절로 인사했는데 스물아홉살 연장자 조만식은 ‘너무 젊은 김일성’에 놀라 3시간동안 말도 안했다고 한다. (오영진 [하나의 증언] 중앙문화사, 1952)
  • ▲ 김성주(가운데)를 '김일성'으로 교육시킨 소련군 메클레르(오른쪽)와 강 미하일(왼쪽). 귀국전 소련 88연대에서 받은 훈장을 찬 김일성. 메클레르는 훈장도 떼고 양복을 입혀 공산주의를 가르치고 연설법까지 훈련시켰다고 한다.
    ▲ 김성주(가운데)를 '김일성'으로 교육시킨 소련군 메클레르(오른쪽)와 강 미하일(왼쪽). 귀국전 소련 88연대에서 받은 훈장을 찬 김일성. 메클레르는 훈장도 떼고 양복을 입혀 공산주의를 가르치고 연설법까지 훈련시켰다고 한다.
    스탈린의 지령에 맞춰 평양엔 별칭 ‘로마넹코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북한 민정을 담당할 부사령관으로 임명된 로마넹코(Andrei A. Romanenko,1906~1979)는 극동에서 태어나 소련공산당 엘리트가 된 ‘조직 활동가이며 정치일꾼’이었다. 그는 슈티코프가 선발해준 분야별 전문 장교들을 데려와 ‘행정, 사법, 보안, 재정, 산업, 통신, 교통 등 민정기구를 평양세무서 건물에 간판도 없이 설치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북한 개조 개시. 

    지령 하달 사흘 만에 조선공산당 평남지구 명의로 <정치노선에 대하여>란 문서가 나왔다. 그것은 ”각 계급을 총망라한 대동단결로 단하나의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일본 제국주의 잔재를 철저히 숙청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함께 발표한 23개 ’강령‘의 제1항은 ”인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였다. 북한 전역에 ’인민위원회‘ 설립을 위한 선거 태풍이 몰아쳤다. 그것은 바로 ’흑백 투표‘의 도입이다. 공산당이 지켜보는 지역 투표에서 누가 반대투표를 하겠는가.  

    로마넹코 사령부는 지방마다 경무사령부를 설치하고 인민위를 감시 감독한다. 
    김성주는 평남 경무사령부 부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을 달고 지방을 누비며 소련의 코치에 따라 ’김일성 공산당‘을 조직하느라 바쁘다. 조선공산당의 중심은 북한이어야지 남한의 박헌영이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앞의 책)
    한편 메클레르는 ’공산당 지도자 김일성‘ 만들기 교육에 진땀을 흘린다. 김성주가 공산주의 이론은 고사하고 한글로 연설문도 쓸 줄 모르기 때문이다. 
  • ▲ 교육을 마친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공식 데뷔하는 행사, 1945년 10월14일 평양 공설운동장 '붉은 군대' 환영식. 뒷줄 오른쪽부터 레베데프, 로마넹코와 치스차코프. 이들이 만들어낸 '스탈린의 인형' 김일성이 앞에 서있다.
    ▲ 교육을 마친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공식 데뷔하는 행사, 1945년 10월14일 평양 공설운동장 '붉은 군대' 환영식. 뒷줄 오른쪽부터 레베데프, 로마넹코와 치스차코프. 이들이 만들어낸 '스탈린의 인형' 김일성이 앞에 서있다.
    ◆김성주, ’김일성‘으로 공식데뷔...”가짜다“ 술렁대자 발포

    10월8일 김성주와 박헌영이 처음 만났다. 장소는 개성 북쪽의 소련군 38선 경비사령부, 로마넹코 민정사령관이 서울서 온 박헌영과 평양서 데려온 김성주를 앞에 앉혀 놓고 ’담판‘을 벌이는 자리였다. ’담판‘이란 지난 며칠사이 서북5도 인민위원회, 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예비회의에서 토의 결정된 사항들에 대하여, 박헌영의 반발을 막고 결론을 내자는 강압 회동이다. 박헌영이 ’예스‘만 하면 된다. 

    ★소련군정, 김성주 시켜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 부정
    박헌영과 김성주의 주요 합의는 다음과 같다.
    조선공산당의 중심은 서울 아닌 북한이어야 한다는 것. 따라서 ”박헌영이 서울에 있지 말고 평양으로 오라“는 것. 이것은 달래기일뿐 사실은 ’김일성이 주도하는 조선공산당‘ 조직은 이미 끝나 있었다. 논란 끝에 평양에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分局)‘을 설치하는 것으로 결론 났다. 합의가 아니라 박헌영이 어쩌지 못하고 ’양보‘한 것이다. ’장안파 공산당‘의 해체는 쉽게 수긍했다. 로마넹코가 주도하는 회동에서 스탈린 지령문 실행이 착착 이루어진다.

    10월13일 ’열성자 연합대회‘가 비밀회의로 열렸다. 김성주는 ”스탈린 대원수께 감사“를 드리고 박헌영 동지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초점은 공산당 조직문제, 김성주는 남조선 공산당을 ’인텔리 놀음‘이라 정면 비판하고 북부조선분국을 당중앙 직속으로 설치한다고 선언하였다. 박헌영의 공산당이 문제가 많으니 북한에서 노동자 중심으로 북부조선당을 만들겠다고 못을 박았다. 결정적인 것은 박헌영이 9월6일 선포했던 ’조선인민공화국‘을 이 연합대회가 공식 부정한 것이었다. 
    이로써 김성주가 수령되는 ’김일성 조선공산당‘이 태어났다. 그래서 북한은 10월10일을 당창건 기념일로 만들었다. 슈티코프-레베데프의 정치공작은 빈틈없이 실현되고 있었다.
  • ▲ 김일성과 박헌영(오른쪽)은 1945년 10월8일 개성 부근 소련군 38선경비사령부에서 로마넹코가 처음 만나게 해줬다. 박헌영을 굴복시키기 위해서.(사진은 1948년 4월 김구가 참석했던 평양의 남북정당연석회의때)
    ▲ 김일성과 박헌영(오른쪽)은 1945년 10월8일 개성 부근 소련군 38선경비사령부에서 로마넹코가 처음 만나게 해줬다. 박헌영을 굴복시키기 위해서.(사진은 1948년 4월 김구가 참석했던 평양의 남북정당연석회의때)
    ★붉은 군대 환영대회...33세 김성주, ’김일성‘ 첫 신고
    추석도 지난 가을 하늘 드높은 일요일, 평양 공설운동장엔 5만이 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10월14일 오후1시 붉은 군대 환영대회, 소련 군정은 이 단상에 김성주를 처음 공개한다. 
    스탈린이 점찍어 보낸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교육시켜 연설문마다 써주고 읽는 법도 훈련시킨 소련 군정, 특히 ’가정교사‘ 메클레르는 한껏 긴장하였다. 
    단상엔 레닌과 스탈린의 대형초상화를 걸고, 태극기와 소련기를 중심으로 연합국 깃발을 세운 앞에 치스차코프, 레베대프, 로마넨코 등 소련군사령부 간부들이 앉고, 조만식과 김성주도 앉았다. 소련국가를 먼저 연주하고  올드랭자인 곡에 맞춘 한국 애국가가 울려펴졌다
    레베대프 인사말에 이어 조만식이 30분이나 연설을 한다. 이어서 김성주가 마이크 앞에 섰다.
    로마넨코가 나와서 ”김일성“을 소개하며 박수를 유도하였다. 
    김일성을 보기 위해 몰려왔던 군중들은 박수를 치면서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오래전부터 명성을 들었던지라 노숙한 장군일줄 알았는데 새파란 젊은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린 시절의 김성주를 아는 사람들은 '속았다'며 분노하였다.

    김일성이 된 김성주는 소련장교가 써주어 연습한 연설문을 읽기 시작하였다. (레베데프 증언, 앞의 책). 연설 내용은 그가 그동안 귀가 아프게 듣고 뒤풀이 연설했던 ’민족통일전선‘의 필요성을 주입하는 판박이였다.
     
    술렁거림은 쉽게 갈아 앉지 않았다. ”가짜다“ 여기저기 수근거림이 들리자 소련군이 총을 뽑았다. 빵 빵...소란은 금방 조용해졌다.(오영진, 앞의 책).         <계속>